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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부부 최인호 연작 소설 가족 2
최인호 지음 / 샘터사 / 198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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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은 '가족' 시리즈의 둘째 권인 이 책은 제목 때문에 난감했던 일도 많이 있었지만, 지난 날의 추억을 돌아보는 감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동안 가족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기에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된 듯한 환상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 환상 속에서 두 사람의 출발로 하여 잉태된 작가 부부의 딸은 어느덧 사회의 일부로써, 그 최초의 무대인 학교에 들어섰다.  

 워낙 여린 딸인지라 걱정도 많았지만 머지 않아 잘 적응하는 모습에 안심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돌아보면 엊그제인듯한 내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마음을 얕으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워낙에 미덥잖은 아이인 탓에, 6년의 초등학교 생활 동안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학교에 무던히도 자주 오셨다. 그런 열성으로 작가 역시 딸의 운동회를 찾았다. 작가는 이 운동회에서 정작 운동회에 참가하는 딸보다도 이 잔치에 더욱 몰입해서 잊고 있던 자신의 지난날을 더듬으며 울고 또 웃었다. 언젠가는 작가의 어린 딸에게도 그와 같은 날이 찾아올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과거도 되고 미래되는 타임머신 같은 관계 역시 가족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서로를 바라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여유'였다. 나에게 역시 가장 절실한 것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빨리빨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자인하는 작가는 이 여유를 돌아가신 장리욱 박사님에게서 배웠다. 심지어, '살기 위해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끔씩은 마지 못해 먹을 때도 있었던 식사 시간은 박사님께는 살아있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런 박사님의 일생은 여유 있는 순간순간의 연속이었다. 여기서의 여유가 단순히 넉넉한 시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는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야만 나날이 스치는 순간이 추억으로 남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러한 추억 중에서도 여행을 제일로 여긴다. 특히 가족 사이의 추억으로는 서로의 협력과 애정이 필요한 여행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지 않을까. 처음 가보는 여행지에서 가족은 처음 만나던 때로 돌아가기도 한다. 나는 이 순간의 여유로움을 즐기게 해주는 내 가족을 사랑한다. 작가 역시 그 때문에 주말마다 산천을 주유했으리라. 나도 떠나고 싶다. 우리 가족, 모두의 마음을 채워 줄 여유를 찾아서......(1997. 12. 4.~9, 1997. 12. 9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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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일기 최인호 연작 소설 가족 1
최인호 지음 / 샘터사 / 198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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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족. 언제나 서로의 곁에 머무는 것으로써 그 존재의 이유를 삼는, 없으면 허전하고 급기야는 슬퍼지기도 하는, 야릇한 관계의 집합이다. 바로 그 가족이 제목이자 주인공인 이 책은 다름아닌 지은이 자신의 가족 이야기라는 구성이 꽤나 독특하여 읽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한 세대 남짓 앞선, 어느덧 쉰줄에 접어든 작가의 가족사는 지금의 여느 가족들과는 다른 정감이 묻어 나와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따.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작가의 신혼 시절인 70년대부터 잡지 '샘터'에 연재된 소설의 모음이기에 이런 현장감(?)을 살리는 데는 제격인 것이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안경을 쓴 경우가 많다. 아마도 70년대, 그 시절에는 지금만큼 많지는 않았으리라. 그런 탓인지 남들이 보기에는 단지 귀여울 수만도 있는 이 모습이 정작 그 부모들에게는 무척이나 안쓰럽고 죄스러웠나보다. 유독 자신의 아이에게만 덧씌워진 싸늘한 유리알이 부모의 마음에는 자신들의 무책임을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그것 역시도 부모이고,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어싿. 하지만 이왕 쓴 안경이라면 언제까지나 안타까워하기보다는 그 새로운 눈으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아 주기 비는 것 또한 가족 사이의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렇듯 때로는 숨기고 싶은 세세한 가족사까지도 속시원하게 풀어놓는 작가의 배짱은 가히 수준급(?)이었다, 이 글들은 어느덧 자신들의 지난 날을 비추고 계실 지은이 연배이신 우리 부모님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녕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 지난 날을 느낄 수 있어야 하기에 너무도 소중한 글들이었다. 그 옛날의 문학상 수상 기념 시계. '수상 기념'의 신성 불가침 영역을 무너뜨리고 그 영원한 동반자를 데려간 것은 그 시절을 살아갔던 오늘날의 수많은 부모님들의 젊음을 지배했던, 그리고 오늘의 이 풍요로움을 이루어 낸 '돈'이었다. 이 사실이 무엇보다도 나를 서글프게 했다. 이런 끊임없는 희생이 지금 내가 서있는 현실의 바탕이라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했다. 이제 작가 부부에게는 아이들이 자란다. 가족의 일원으로써 자라날 그들에게 부모는,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 (1997. 11. 29~12. 3, 1997 12. 4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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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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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처음 숙독(熟讀)했던 때는 2002년 겨울, 송광사(松廣寺)의 오도암(悟道庵)에서였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그때로서는 뭔가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이 책이 나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남들에게 버림받았다는 비참함을 느끼기 전에 내가 나 자신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참담함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아무데로나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이유야 어찌되었든 당시 내가 머물던 암자와 적이 비슷한 ‘유럽의’ 수도원으로 떠난 저자의 기록은 어딘지 모르게 내 맘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구석이 있었다. 그때로부터 햇수로 2년이 지났다. 이제 또다시 낯선 곳에 서있다. 물론 이 곳은 새로이 정착할 곳이기에 머잖아 더 이상은 이곳에서 떠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떠돌고 있다는 느낌이 훨씬 더 강하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낯선 길 위에 있는 나에게는 누가 되었든, 어디로 갔든, 나보다 먼저 떠돌아다닌 자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외롭기 때문이다. 떠도는 경험도, 외톨이 생활도 처음은 아니지만, 떠도는 외톨이가 되기는 처음이니까. 그것도 저마다 새로운 시간 위에 서 있다는 동질감으로 함께하고 있는 이 시절에.

 그녀의 여행길은 역시 처음 기대했던 경건함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꿈꾸었던, 때때로 엿보이는 돌발성과 항상 그 밑에 흐르는 잔잔한 호사스러움, 낭만, 무엇보다 정갈함이 감돌았다. 사실 이 여행은 그녀에게는 포상휴가와 같았다. 18년 동안의 번민과 방황을 끝내고 다시금 신에게 돌아온 그녀로써는 수도원만을 찾아다니는 여정 자체가 그러했으려니와 다른 조건들 역시 그녀의 바람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여행의 톤은 시종 밝거나 혹은 진지하다. 때로 슬플 때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향할 때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 여유로움에 취해서 마냥 흘러넘치는 행복의 감탄사나 어설픈 설교를 펼쳐놓지는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자신의 사건, 생각, 감상을 털어놓는다. 그 목소리 안에는 오랫동안 신의 낙원을 믿지 않고 이 지상에 완벽한 낙원을 이뤄내기 위해서 자신을 전부 바쳐보았던 자의 신산함이 담겨 있다. 솔직히 정작 이제 그녀는 수도원을 찾아다녀야 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신을 찾기 위해서’만이 목적이라면, 더 이상 그녀는 수도원을 찾을 정도로 절박한 처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이제 찾아낸 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써야할 일거리가 없고, 때로는 의무적으로라도 돌보아야 할 아이가 있는 ‘일상’에서 벗어난 경건함이 감도는 그 곳이.

 그런 까닭에 그녀가 찾아가는 수도원은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는 약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가 오직 ‘신을 찾기 위해서’ 이 여행을 나섰다 해도 나와 꼭 같았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그녀는 다양한 수도원을 찾아 돌아다닌다. 웅장한 중세의 성 같은 수도원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수사들의 그레고리안 성가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산 위의 커다란 천막 성당에서 온갖 나라로부터 모여든 젊은이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으며, 더없이 아름다운 호반의 수도원에서는 변변한 이유조차 듣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화려함과 조야함, 온화함과 냉담함의 간극이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또는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설령 신의 세계에 닿아있을지라도, 그 속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에는.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가야할 정해진 길이라고 느꼈던 이 여정동안, 그녀가 다닌 수도원만큼이나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오랜 이야기를 들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인간은 그 무엇과도 다를 수 없었으며, 그 무엇이나 역시 인간과 다를 수 없었다.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런 까닭에 우리가 너무 쉽게 아니면 반대로 너무 어렵게 생각한 나머지, 이래저래 아무 생각조차 없이 무작정 시간에 그 해결을 떠넘겨버리거나, 아니면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상투적이고 심지어는 비인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공허한 말 몇 마디로 넘기고 마는 수많은 일상들이, 그 먼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작가는 그 말을 하는 이에게 어느 누구보다도 따뜻한 수도원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들의 고민에 해결책을 주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그들의 문제가 틀렸다고 지적하지도 않았다. 마치 수도원 안에 계시는 예수님처럼, 단지 그들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같음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너는 나와 같아야 한다.’고 하는 건 폭력이지만, ‘나도 너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해다. 값싼 동정도 얄팍한 계산도 아닌 말 그대로 네 마음에 대한 나의 이해. 그 이해 속에서는 사실, 어설픈 행동이 무의미하다. ‘이해’란 그의 마음을 안다는 것, 그 마음을 안다면 그 마음을 안다면 그 번민의 어려움이 어디에 있는 지도 알 것이고, 그렇다면 지켜보고 들어줄 뿐이다. 기다림이다. 나의 ‘이해’는 그 번민하는 마음에 대한 것이지, 모든 것이 해결된 그 마음을 향한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내 마음도 그와 같은 번민이 있기에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기에, 그의 번민이 해결되거나 혹은 그럴 경우에 대한 가정은 불가지의 영역일 뿐이다.

 결국 그와 같은 해결은 어떤 조건도 필요하지 않은 더없이 온전한 신의 영역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만약에라도 그러한 전능함이 부여된다면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번뇌를 모두 흩어버리고 비로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아도취에 빠질 것이다. 결국 인간은 번뇌가 있기에 서로를 보다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나약함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그녀에 대한 신의 사랑은 그녀의 말대로 돌아온 탕자에 대한 그것을 방불케 한다. 18년의 기다린 기다림도 부족하셨는지 이런 여행에서의 추억까지 베푸시는 광대한 섭리에는 자신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손길’을 결국은 자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아닌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받아들일 만 했다. 그런 사랑을 받은 그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나그네 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이방인으로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그들의 고뇌와 눈물, 평범한 일상을 나누는 모습은 설령 그녀가 신께서 따로이 택하실 만한 자질이 있듯 없든 기꺼이 기다리셨으리라 믿게 했다. 이제는 언젠가 내게 찾아올 유럽의 밤기차를 타고 이국의 산, 들, 강 그리고 도시와 시골을 지나게 될 그날을 새삼 시대하게 된다. 부족하나마 조금씩 더해가려고 애쓰는 나의 따뜻함이 그들을 부르고, 그들과 나는 따뜻한 기억으로 내가 더 따뜻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그 날을 말이다. (2004. 3. 4∼12, 2004. 3. 13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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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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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들어 기숙사 쉬는 시간에 자스민 차를 마시곤 한다. 30여분의 짧은 시간 동안 입안을 감도는 차의 맛도 맛이지만 그 달콤한 긴 여운의 향기가 내 코를 간지럽힐 때 하루 종일 쌓여있던 우울함은 그 향기와 함께 사라지곤 한다. 언제부터였을까? 나에게 다가오던 오감의 흔적 중에서 가장 무심하게 느껴왔고 허무하다고 생각해왔던 향기가 내 기분까지 좌우한 것이…… 그런데 나의 자스민 향기보다도 허무하게 사라진 '존재'를 알았을 때의 내 기분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모든 체취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나이와 나는 수백년의 시차를 두고 삼백예순 많은 날 중에서 같은 날을 택하면서 질긴 끈으로 엮이고 말았다. 그 속에서 난 모든 사람이 느끼던 섬뜩함과 맞닥뜨렸다. 그 원인이 됐던 그르누이의 체취는 분명 있었으리라. 단지 그는 세상의 모든 '냄새'까지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던 자신의 그 신의 코로 자신의 체취를 거부한 것이었다. 지나온 발자국마다에서 묻어나던 진한 피비린내를 말이다.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예민하다는 후각이고보니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그 뛰어난 능력을 알기까지 몸에 찌든 냄새를 아무리 그라도 찾았을 리는 없다. 이런 '존재'를 난 절대로 사랑할 수 없었다. 그나마 그를 향했던 웃음이라곤 얄미움과 기막힘이 혼합된 그야말로 '썩은 미소'였다. 단지 난 그가 발디니와 그 밖의 인물 아래서 만들어낸 향기를 감탄 어린 질투와 함께 들이마셨을 뿐이다. 하지만 그를 한 때나마 거두었던 이들은 그 향기의 대가로 너무나 큰 값을 치러야했다.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신의 향기' 속에는 이미 25명의 순결한 영혼 외에도 불순한 그들의 영혼도 잠들어있었다.

 오, 증오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악마의 향수 제조인이여! 갈 때는  가더라도 네가 만든 향기는 두고 가라. 우리 역시 그 것을 끌어안고 있다가 발디니같은 일을 당할지라도, 그 향기에 악마의 손길이 닿았더라도 말이다. 신이 너에게 부여한 천재의 능력을 난 증오한다. 그 천재성이 자그마치 25명의 천사를 악마의 노예로 삼았기에 말이다. 그것도 이슬을 머금고 갓 피어나는 장미의 아름다움과 자스민의 고귀함을 뽐내기 직전의 그들을…… 난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살리에리가 아니다. 난 너에게 재능을 주신 분이 아니라 그 재능을 멋대로 펼친 어둠의 향기에 미쳐 날 뛴 모든 인간의 어리석음을 증오한다. 난 살리에리같이 인간의 사랑을 갈구할 만큼의 애정결핍증 환자가 아니기에. 마지막을 장식할 하늘의 다이아, 로르 비쉬를 수년 간 기다린 것은 네 생각처럼 작품을 위한 인내가 아니라, 내가 본 너의 마지막 음흉함이었다. 그 아름다운 소녀를 단지 너만의 것으로 가둬버리다니, 살았다면 결혼한 몸이나마 만인의 숭배를 받았으련만. 언젠가 시들 꽃은 정원에 있는 모든 이들의 것이겠지만 영원한 향기는 아무 체취도 없이 모든 사람이 꺼리는 피비린내만을 풍기는 너와, 구원자요 주인인 악마의 것이다. 이제 후회하라. 모든 향기를 탐욕스럽게 긁어모앗으면서도 단지 체취의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너만의 동굴이 마련된 플롱 뒤 캉탈을 떠난 그 날을. 네가 그날을 후회한다면 난 내가 신의 불행을 안고 내려온 7월의 그 날에 악마의 행운을 안고 내려온 한 '존재'를 기억하리라. (2000. 3. 27∼4. 2, 2000. 4. 2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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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8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년 H -하
세노오 갓파 / 동방미디어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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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날이 맹위를 떨치던 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일방적인 국민의 희생과 무의미한 전쟁을 강요하는 군국주의자들의 외침은 기세를 더해갔다. 끝이 보이지 않아서 더욱 답답한 터널을 걷는 기분이었다. 만약 나라면 단 하루도 견뎌내지 못했을 시간이었음에도 나름대로 버텨낸 H는 과연 '만만찮은 그러나 순수한' 소년이었다. 만만찮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신문을 통한 군부의 간사한 발표를 보며 그에 순종하는 언론을 가차없이 비판하지만 자신의 가슴속에만 담아두는 기개와 인내였다. 순수하기도 했다. 그렇게도 미워하고 혐오하는 다모리 교관의 인간적인(?) 허물을 듣는 순간 그 난폭함의 허상을 정확히 깨치고 연민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그런 면은 H가 지나치다고 혀를 내밀 정도로 '절대' 박애주의자인 어머니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큰 증거였다.

 하지만 기총소사 대공습으로 생사를 넘나들던 그의 모습은 잔잔한 호수 같이 늘 깊게 생각하고 호기심 많던 H라고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하며 현실적으로 변모했다. 그 이유가 열도 구석구석에 불어오던 전운 때문인가 싶어 한편으로는 착잡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티 없던 소년을 야누스로 조각한 전쟁의 광풍은 그들이 전쟁을 통해 지키려고 했던 '국체(國體)' 천황의 항복선언으로 끝났다. 결국 남은 것은 황량한 벌판뿐이다. H에게는 다시금 시류에 저항하는 아웃사이더의 의지를 굳혀준 동시에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던 어른들에게는 체질 개선(?)의 계기가 되었다. 민주주의로 바뀌기는 했지만 새로운 역겨움의 시작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전쟁 전이나 후나 선량하고 소신있는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현실에 대한 욕구불만, 자신을 돌보지 않는, 꽉막힌 듯한 '사랑'의 어머니에 대한 답답함이 뭉쳐져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몰리는 상황에서는 지난날의 '남자 언니'를 떠오르게도 했으나 그와는 달리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그는 '만만찮은' 소년이었다. 결국은 떠나고 말아서 너무 슬펐지만 그를 소중히 보살펴준 하다노 아저씨를 영화 주인공인 무호마쓰와 비교하는 순수함도 남아있었고 말이다. 처음에는 기다리던 종전 후에 정작 너무나도 변한 H의 모습에 당혹스러웠지만 역시 겉껍질만 변한 책 속의 현실에 실망한 나를 돌아보며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한 밤에 교련 사격부로서의 H의 추억이 담긴 총을 묻어버리는 상황까지 몰고 간 '백호대'는 아예 그 변화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이었다. 이 변화를 조롱하면서 그 안에서 저항한 H는 그가 꿈꾸고 힘쓰던 그림에의 재능으로 포기했던 졸업장까지 손에 넣고 그만의 승리를 품에 안았다. 비록 구석진 아틀리에의 길은 힘들겠지만 그의 꿈은 언제까지도 꺼지지 않으리라. 아름답게 타오르는 피닉스같이……(1998. 8. 9∼11, 1998. 8. 11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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