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와 나무 -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와 나무 인문학자의 아주 특별한 나무 체험
고규홍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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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피아니스트 김예지)는 (시각장애인) 안내견 찬미가 이끄는 대로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무대 가운데에 나와 객석을 향해 고개 숙여 큰 인사를 올리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먼저 찬미와 그녀를 이어주는 끈을 의자 가장자리의 높낮이 조절 레버에 걸었다. 피아니스트의 손길을 응시하던 찬미는 제 가죽 끈이 레버에 잘 걸렸는지를 확인하고는 객석 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바닥에 엎드렸다. -15쪽

블루 스크린!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의 무대 벽면 가득히 블루 스크린이 떴다. 죽음의 이미지를 닮은 나무 이미지가 떠올라야 할 벽면 전체에 ˝A problem has been detected and windows has been shut down to prevent damage to your computer˝로 시작해서 ˝*** STOP: 0x0000007F(0x0000000, OxF704E052, 0x00000008, 0xC0000000)˝로 이루어진, 새파란 배경에 알아듣기 어려운 하안 글씨! 날벼락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블루 스크린이다.
이제 더는 방법이 없다. (김예지의 슈베르트 ‘4개의 즉흥곡‘ D.899 중 제1번 연주와 함께 보여 주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영상은 둘째 치고, 일단 세상에서 가장 큰 저 블루 스크린부터 없애야 한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시설 팀에서 준비해준 빔 프로젝터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당황한 탓이었겠지. 리허설 때에 아주 쉽게 조정되던 리모컨조차 단박에 작동하지 않는다. 몇 차례 거듭해 ‘스크린아웃‘ 스위치를 누른 끝에 겨우 빔 프로젝터를 껐다. -21쪽

˝나무는 워낙 큰 생명체거든요. 그러다 보니 내가 오랫동안 나무를 바라보고 다녔지만, 나무 관찰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시각에 크게 의존하게 되지요. 물론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무를 느껴보려고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에 오래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줄기 껍질이라든가 꽃과 잎사귀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려고도 해요. 때로는 나뭇가지나 잎을 따서 짓씹으면서 맛을 느껴보기도 하고요. 그런데 말이죠. 시각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때가 많이 있어요. 시각은 마치 다른 감각 위에 군림하는 권력처럼 느껴진단 말입니다. 아무리 향기를 맡고 소리를 듣고 맛을 음미해도 처음 나무를 바라보며 시각으로 느낀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큰 영향이 없다니까요.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은 그래봐야 약간의 보탬이 되는 정도죠.˝ -29쪽

이른 봄에 청진기를 나무줄기에 대어보면 물오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치 사람의 심장에서 온몸에 맑은 피를 밀어내는 쿵쾅거림과 같은 소리다. 특히 다른 나무보다 줄기 안에 물을 많이 품는 단풍나무 종류가 들려주는 생명의 고동 소리는 가히 우렁차다 할 만하다. -52~53쪽

중국에서 들어온 백송은 문화가 담긴 나무라 할 수 있다. 씨앗으로 번식하기도 쉽지 않고, 옮겨심기도 잘 안 되는 나무여서, 우리나라의 오래된 백송은 거의 중국에서 들여와 심은 나무다. 달리 이야기하면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 중국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지체 높은 가문의 선비들이 중국에 다녀오면서 구해오든가, 아니면 중국의 벗으로부터 선물 받은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략 사백 년 정도 된 늙은 백송은 대부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상황이다. -64쪽

(목련) 꽃봉오리의 솜털을 손가락 끝으로 느끼던 김예지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 생애를 마친 열매는 아주 단단해요. 그리고 새로 다음 생애를 시작하려는 꽃봉오리는 말랑말랑하네요. 꽃봉오리 안쪽에는 틈이 많은가 봐요. 새 생명을 탄생시키려면 그런 틈,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118쪽

(목련은) 꽃과 잎은 물론이고 줄기가 은은한 향기를 품고 있다. 옛날에는 장마철에 목련 장작을 때어 집 안의 퀴퀴한 냄새를 없애는 데에 쓰기도 했다. -119쪽

그녀가 손끝으로 ‘시과(翅果)‘라 불리는 단풍나무 열매를 탐색하는 곁에서 열매의 모양이 나비를 닮았다고 이야기했다. 이유를 내가 설명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멀리 날아가려는 거군요.˝라고 했다. 생존 영역을 확장할 뿐 아니라, 어미 나무 곁에서라면 경쟁력이 떨어져 살아남기 어렵다는 이유를 부연했다.
˝어미를 편하게 해주려는 거라면, 예의가 바른 거네요.˝
김예지가 깔깔거렸다. -122~123쪽

우선 분갈이할 나무를 소개했다. 정원사들과 함께 골라낸 나무는 완도호랑가시였다. 천리포수목원의 상징이랄 수 있는 나무라는 점에서 김예지에게 기념할 만한 나무이기도 했다. 완도호랑가시는 설립자 민병갈이 완도를 여행하는 중에 발견한 특이종으로, 세계 식물학계에 완도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의미 있는 식물이다. -156쪽

(겨울이 다가오면) 물은 이제 (나무뿌리에서) 올라오지 않는다. 사람의 핏줄 못지않게 촘촘히 뻗어 있는 줄기와 가지의 물관에 남아 있던 물기는 목적지를 잃고 허공으로 빠져나간다. 물은 나무의 몸통 바깥의 기온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줄기 껍질 부분의 물관을 타고 오르내리는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전에 이 물관에 남아 있던 물을 모두 덜어내려는 전략이다. 물관 속의 물이 얼면 물관이 터져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79~180쪽

여러 빛깔의 단풍 가운데에 안토시아닌이 지어낸 붉은 빛깔로 단풍물을 올린 잎들의 전략을 더더욱 놀랍다. 땅에 떨어져 뿌리 부분의 흙을 살며시 덮었던 붉은 낙엽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붉었던가 싶을 정도의 회갈색으로 바뀐다. 잎 위에 올라왔던 붉은 빛깔의 안토시아닌은 나무뿌리 근처의 흙에 스며들었다.
안토시아닌은 강력은 항산화 효과를 내는 물질인데, 진딧물을 비롯한 해충의 침입을 막아주는 데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 결국 나무는 생명 활동을 중지하고 동물처럼 겨울잠에 드는 무방비 상태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제 몸에 가지고 있던 해충 방제 요소를 한껏 끌어올려 뿌리 부근에 내려놓은 것이다. -181쪽

˝가을 되면 바람 소리가 여름과 확실히 달라져요. 잎이 마르기 시작하니까 바람 소리가 더 크게 들려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나무의 전체적인 생김새를 짐작할 수도 있어요. (후략)˝ (김예지)-188쪽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이야기하셨는데, 나(김예지)는 그 곡에서 가을 분위기를 전혀 못 느끼거든요. 물론 브람스의 음악이 전반적으로 쓸쓸하고 우울하고 엄숙하고 심각하고 어두우니까 가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겠지만, 그건 철저히 듣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에요.˝ -192쪽

음악의 말 혹은 음악의 텍스트가 나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도 음악처럼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무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3쪽

˝(전략) 피아노 연주가 한두 마디로 답이 딱 떨어지지 않아요. 내가 아무리 이야기하고 싶어도 듣는 사람이 꼭 그렇게 들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삶의 다양성이 있다는 거죠. 그걸 보여주고 싶어요. 나도 다른 사람들, 심지어 피아니스트들과도 다르잖아요. 지금 우리의 삶이 늘 정답은 아니다, 삶에는 다양함이 반드시 널려 있다. 세상에 그런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피아노로 이야기하고 싶어요.˝ (김예지)-196~197쪽

˝(전략) 나무를 찾아보는 동안 특히 자귀나무 꽃이 인상적이었어요. 가녀린 꽃술들이 솜털처럼 부드러웠어요. 그런 부드러움을 피아노의 터치를 통해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건반의 음이 솜털처럼 부드럽게 펼쳐져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거기에서는 ‘아, 이게 16분 음표 몇 개가 이러저러하게 이어지는 거야‘라고 이론적으로 생각해서 연주하는 게 아니라, ‘아, 이 부분은 자귀나무 꽃의 솜털 같은 느낌이야‘라는 생각으로 촉각 이미지를 동원해서 건반을 두드리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후략)˝ (김예지) -262쪽

˝(전략) 피아노 건반을 터치할 때마다 내가 상상하는 느낌에 따라 소리의 이미지는 달라져요. 무엇을 상상하느냐에 따라서 곡의 분위기가 바뀐다는 말이예요. 연주회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피아노의 터치감과 나무를 만져보던 때의 촉감을 연관시켰어요. 촉감뿐 아니라 이 커다란 (괴산 오가리의) 느티나무에서 압도되는 느낌과 같은 설명하기 어려운 기운까지 생각하게 됐다는 거죠.
이 느티나무처럼 크고 오래된 나무는 하나의 이미지만 가지지는 않을 거예요. 예를 들면 이끼향이 가장 강렬하게 퍼질 때가 있는가 하면, 웅장한 생김새가 더 강할 때도 있을 것이고, 살아 있는 생명의 기운이 더 치열하게 느껴질 때도 있겠지요. 꽃이라면 피었다 질 테고, 잎은 앙증맞게 돋았다가 도톰하게 자란 뒤에 얇게 마르면서 단풍 들고 시들어 떨어지잖아요. 음악도 똑같아요. 음악은 수학 문제처럼 딱 하나의 느낌을 정답이라 할 수 없거든요. 나무가 끊임없이 변화하듯이 음악도 변해야 해요.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로 바뀌는 셈여림의 변화를 비롯해서 빠르기까지 계속 달라지거든요. (다음)

(이어서) 작게 시작해서 그 작은 것들이 큰 부분을 만들고 결국에는 결말을 짓는 것도 나무가 보여주는 변화를 꼭 닮았어요. (후략)˝ (김예지) -262~263쪽

언제나 컴퓨터는 결정적인 순간에 망가진다. -268쪽

제아무리 향기가 특징인 꽃이라 해도 향기의 셈여림에는 여러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은 향기가 약하다. 나무가 향을 내는 건 자신의 수술머리에 돋운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옮겨줄 매개 곤충을 불러들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비나 눈이 내리는 날에는 벌, 등에, 나비 같은 매개 곤충이 적다는 걸 나무도 안다. 행기를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공연히 소비하지 않으려는 나무만의 경제 전략에 따라 향기를 적게 낸다. 오늘의 납매가 그렇다. 그토록 향기로 사람을 매혹시키는 꽃이건만, 눈보라 몰아치는 지금 이 순간의 향기는 강렬하지 않다. 가까이에 섰건만 향기를 체감할 수 없다. -304~305쪽

시각을 활용하는 데에 서투른 건 이 시대의 흠이 되지만, 다른 감각이 무딘 것은 그리 큰 흠이 아니다. 미각이 둔감하거나 후각이 예민하지 못한 건 그냥 내놓고 자신의 단점이라고 이야기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시각은 그렇지 않다.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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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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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 갈수록 점점 더 흥미로워진 작품이었다. 그와 함께 내가 이 이야기 자체에는 별반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처음 이 책에 관심를 가졌던 이유는, 일본어 원서의 표지였다. 흰 분필로 그린 유럽 어딘가의 성당이 교실의 칠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주인공이 이 교실에 앉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리라 추측할 수 있었고, 그림의 작가가 칠판에 분필로 섬세하면서도 박력 있게 겨울 왕국의 일러스트를 그린 고등학생으로 화제를 모았던 나카지마 레나라는 사실을 듣고서 작품을 기억하게 됐다. 그저 유행을 따른 표지 컨셉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서로 잘 어울리는 표지와 작품을 적시에 결합시킨 출판사와 편집자의 기민한 감각이 발휘된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 표지는 단순히 학생이 그린 일러스트가 중학교 졸업을 앞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실렸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나이의 소설 속 인물이 그림에 매혹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우연히 만난 그림 속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흔한 이야기에, 구체적인 형상과 설득력을 부여해 냈다. 모든 것이 웅장하고 세밀한데도, 어디선가 이 모든 것이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듯한 허망함이 감도는 그림이다. 고등학교 입시를 일찌감치 추천으로 통과하고, 다른 학생들이 명운을 건 것처럼 공부하는 교실에 혼자 무심하게 오가는 오가키 신이라면, 이 그림을 바라볼 여유와 빠져들 이유가 충분했을 것이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강한 때일수록 그림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돼. 기량이 부족한 부분을 마음으로 메우는 거라고 할까.” -p.306

 

 하나다 시립 제3중학교의 3학년인 오가타 신과 시로타 다마미, 그리고 이 수수께끼의 그림 속에서 만난 사사노 이치로(파쿠 씨)가 펼치는 모험이 새롭거나 놀랍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들이 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배경과 과정이었다. 자신의 평면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나름대로 인식하고 수긍하는 신과 학교와 집 모두에서 배척당하거나 외면당하지만 어느 쪽에서도 약해지지 않는 시로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유능한 어시스턴트로서의 삶에 의문을 갖게 된 파쿠 씨가 같은 그림 속에서 만나서 그 속에 갇힌 소녀의 정체를 밝혀 나가고, 과연 그를 구해야 하는지 대립하는 과정은, 그들이 매혹된 그림만큼이나 구체적이다. 현실적인 인물들이 세밀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이 이야기는 약점만큼이나,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도 명확했다.

 

 그림 속에서 만난 소녀, 아키요시 이온을 둘러싼 사정을 평범하거나 익숙하다고 단정하기는 다소 곤란하다. 하지만 그가 처했던 문제의 무게에 비해서 다소 안이하게 해결했다는 인상이 남는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가 이온에게 부여한 결말에는 큰 불만이 없다. 오히려 안도했다. 이 그림이 없었다면 서로 무관했을 신, 시로타, 파쿠 씨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던 모험과 어울리는 매듭이기도 하다. 그림 안과 밖에서 그들이 서로를 도왔다면, 그림 속에 갇힌 이온을 돕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림이라는 기묘한 세계에서 비롯된 기이한 선의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결국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을 만나도록 해 준 그 그림에게 답례를 한 셈이다.

 

 특히 붙임성이 좋은데다가 꿍꿍이속도 없는, 파쿠 씨는 모처럼 만난 어른스러운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보다 어린 신과 시로타의 의견에 착실히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이 기이한 그림 속에서의 모험은 더욱 헐거워졌을 것이다. 그는 신과 시로타 두 사람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그림 속 사건의 규모를 유지하면서도, 이 두 사람이 스스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지키는 훌륭한 조력자였다. 물론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이런 성인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비약이라는 지적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림 실력이 뛰어난 시로타는 파쿠 씨와 교감을 이루는 데 반해서, 항상 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신의 심리 묘사가 읽을수록 인상적이었다. 분명 이렇게 희귀한 성인을 접한다면 의존하면서도, 경계하게 될 것이다. 시로타의 경우에는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그림에 대한 애정을 이해해 준 파쿠 씨에게 보다 친근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면에서 신과 시로타를 존중하는 파쿠 씨는 이 두 사람에게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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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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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맛은 카레 요리의 비장의 요소로서 중요하지만, (오가키 신의 아버지인) 도미오는 초콜릿도 과일도 싫어해서 쓰지 않는다. 흑설탕을 넣는다. -12쪽

˝이거, 오늘이 납입 기한이었어! 신, 은행에 좀 다녀와. 입금증 사본이 필요하니까 ATM이 아니라 창구에 내고.˝
청구서 두세 장을 신의 눈앞에 들이댄다. 엄마가 직접 가라고 대꾸하려 했는데 문이 열리고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젊은 여성 두 명이다. 단골손님이고, 늘 유니폼 차림인 걸 보면 근처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이 신의 타입으로-라고 중학생이 말하는 것도 건방지지만, 어쨌든 웃는 얼굴이 귀엽고 성격이 좋아 보이는 누나라 이 사람 앞에서 입을 삐죽거리며 어머니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 결과 신은 은행에 있다. -13쪽

˝머릿속에서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시로타 다마미는) 중얼거리듯이 그렇게 말했다.
˝밖에 나가지 않고, 계속 머릿속에만 있을 수 있다면 편할 텐데.˝ -125쪽

신의 판단력은 통찰력보다도 더 걸음이 느려서, 아직 어깨 아랫부분에서 우물쭈물하고 있고 머리까지 오지 않았다. -133~134쪽

˝아아, 이제 싫어.˝
갑자기 시로타가 큰 소리를 지르며 니트 모자를 벗더니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다.
˝싫어, 싫어! 이래서 싫은 거야. 하나를 이야기하면 결국은 전부 이야기해야 되니까. 나 그런 거 싫어해.˝ -134쪽

이끼인데 조금도 축축하지 않고 신선한 채소같이 좋은 냄새가 난다. -217쪽

˝이 케이크, 요즘 스타일이 아니네요.˝
레트로한 느낌. 에클레어를 입 안 가득 넣으면서 시로타가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제과점이야. 옛날에 본가 근처에 있었던 가게의 케이크랑 비슷해서.˝
몽블랑은 이래야지. 컵케이크 위에 밤맛 크림이 면처럼 둘둘 말려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야 한다. 쇼트케이크에 복숭아나 멜론을 넣으면 사도邪道다. 오직 딸기여야 한다. 롤케이크는 롤이니까 스펀지로 크림을 돌돌 말지 않으면 실격. 한가운데가 몽땅 크림인 롤케이크라니 말도 안 된다. 파쿠 씨는 먹으면서 열심히 말했다. -237쪽

어젯밤, 오후 9시 15분이 지나서 귀가했을 때도 어머니는 신을 야단치지 않았다. ˝친구 시로타네 집에서 같이 공부했어˝라는 변명에, 의심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따. 친구네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니? 저녁을 얻어먹었어? 고맙다는 인사는 제대로 하고 왔니? 가까운 시일 내에 이번에는 ‘시로타 군’을 우리 집에 부르렴. 그뿐이다. -247~248쪽

신은 부모님에게 신용받고 있다. 그러니까 정말로 필요해질 때까지 너무 복잡한 거짓말은 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먹은 다음 스스로의 생각에 움찔했다. 앞으로 부모님에게 ‘복잡한 거짓말’을 늘어놓아야 할 만한 사태가 발생할 거라고, 너는 생각하는거냐? -248쪽

˝십 년 전 여름에˝ 하고 신은 말을 꺼냈다. ˝옆 동네 미도리 초등학교에서 3학년 여자애가 행방불명된 사건이 있었대. 기억나?˝
도미오는 카레 루에 집중하고 있다. 마사코는 눈을 깜박거렸다.
˝글쎄다.˝
˝매스컴이 꽤 시끄러웠어. TV도 취재하러 왔던 모양이고. 기억 안 나?˝
˝너는?˝
˝난 다섯 살이었는걸.˝
˝그렇지? 엄마도 다섯 살짜라 애를 키우면서 가게를 꾸려나가느라 바빠서 TV는 보지도 못했어.˝ -258쪽

건물은 인간과 달리 성실하게 시간의 경과를 반영한다. -267쪽

사람이 스스로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뒤돌아서 그 길을 목격하는 순간은 부모를 여의었을 때일 것이다, 아마. -281쪽

˝아홉 살 때는 칭찬을 받기보다 어린애 주제에 건방지다고 눈총을 받는 타입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하고 말하며 파쿠 씨는 쓴웃음을 짓는다. ˝내 동급생 중에도 있었어, 그런 여자애. 학급위원이었지.˝ -301쪽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강한 때일수록 그림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돼. 기량이 부족한 부분을 마음으로 메우는 거라고 할까.˝ -306쪽

이제부터 그리려고 하는 세계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깊이 집중하면 주위의 현실이 사라지고 자신의 머릿속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또는 의도하지 않아도 들어가 버린다. -307쪽

불행하니까, 라고 (시로타는) 말했다. 몹시 비일상적인 울림이 있는 말. -308쪽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신의 이마를, 파쿠 씨는 주먹으로 콩콩 두드렸다.
˝똑똑. 아직 볼일이 있으니까 나와 주세요.˝ -370~371쪽

˝(전략) 나(시로타)는 인생은 길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반나절도 지낼 수 없으니까.˝ -3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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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이야기
러셀 셔먼 지음, 김용주 옮김, 변화경 감수 / 이레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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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피아노를 지금도 배우고 있었다면, 이 책을 좀 더 깊이 받아들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피아노를 지금도 배우고 있었다면, 이 책이 이렇게 경이로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 책이 지금 내게 이토록 흥미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내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생을 피아노와 함께 할 사람이었다면,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내 연주를 들려주며 나와 그들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만들어야 했다면, 이 책의 명징하며 예리한 가르침이 때로는 두렵기조차 했을 것이다. 계속해서 더 나아져야 하고, 그것은 항상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자주 되새겼을 테니까. 그래서 이 책의 가르침 덕에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내 연주가 나아졌을 테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향상됐을지는 역시 알 수 없다.

 

 무대 아래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에 도취되며 감탄하는 관객의 삶을 기꺼이 수용하고 감사해 하는 까닭에, 이 책의 이야기에도 마찬가지로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이것은 나를 매혹시켰던 소리들이 들려오기까지 연주자 내면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아니라면 무대 위에서 연주를 들으면서도, 그 연주가 형성되는 과정과 지향하는 방향은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주자의 내면을 지니고 살 자신은 없지만, 이렇게 엿보며 조금이라도 따라가 보는 것은 관객으로서 당연하고, 또 나쁘지 않다. 그만큼 이 책은 비단 피아노와 그 연주 자체부터 예술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의 의미까지 폭넓은 사유를 담고 있다. 결국 무대와 객석은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단순한 진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상호모순적인 진리의 한가운데 있는 공허일 뿐이다. -p.225

진정한 연주는 아무리 상충적인 변수들이라도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균형을 이루게 한다. 그 결과는 통일성과 다양성의 5050 타협이 아니라 서로의 모든 가치를 흡수하는 것이다. 상반된 요소들의 화해와 조화에 의한 통일성은 편중된 추진력에서 비롯되는 통일성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이다. -p.364

 

 피아니스트이자 교수이기도 한 러셀 셔먼은 우리에게 음악과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요소들의 조화와 결합을 강조한다. 그는 분명 간명함을 중시하지만, 동시에 그 간명함이 얼마나 난해한지도 절대로 외면하지 않고 있다. 그저 단순한 진리는 존재하더라도, 의미도 가치도 없다. 어디까지나 모순, 상충되는 변수들이 서로 결합한 결과여야만, 비로소 명쾌하며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단순함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과 미묘한 맥락을 암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경박할 뿐만 아니라, 허황하기까지 한 요언(妖言)일 뿐이다. 충돌하고 모순되는 것들은 결국 절충되고 조화를 이루겠지만, 처음부터 단일하게 구성될 수는 없다. 마치 본래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로 존재했던 것처럼 믿고 싶다는 유혹에 굴복한 신도와 같은 청중이 있고, 자신만은 언제나 처음부터 주어진 간단하고 명쾌한 음향을 연주해 낸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연주자와 같은 교주가 있다. 셔먼은 그런 허언을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그 밑의 욕망 역시 차분하고 집요하게 지적하고 분해해 낸다. 선생은 학생과 똑같이 굴지 않는 법이다.

 

음악은 거친 현실을 장식하고 기만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환영이다. 그러나 음악이 없으면 메마른 현실은 점점 흐릿해지는, 알맹이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환영적인 순간이 된다. 다행히도 목소리가 잠잠해지면 바람과 물이 소리를 낸다. 그러므로 음악은 어디에나 있으며, 그에 따라 현실이 존속한다(근근히). -p.344

(중략) 하늘에 대고 주먹질을 하면서 화려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주는 승자는 오히려 형식적으로 다뤄진다. 카메라는 짐짓 냉정을 가장하거나 고뇌에 찬 패자의 쓸쓸한 표정을 더 좋아한다. 불행을 즐기는 우리의 취미, 우리가 모욕을 하면서도 우리 자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우리의 취미는 모든 균형의 기준을 무너뜨렸다. -p.173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음악 교사의 글답게, 다소 구태의연한 구석도 존재한다. 특히 로큰롤과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과 반감이 그러하다. 물론 타인의 불행에 탐닉하는 관음증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스포츠 중계의 속성을 지적한 부분처럼 적절한 경우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현재의 관점에서는 이미 오래 전 지나가 버린 훈계처럼 들린다. 로큰롤은 오늘날의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장르가 아니고, 텔레비전 역시 유일하거나 독자적으로 막강한 대중매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셔먼이 지적했던 파괴적인 음악, 선정적인 매체의 타이틀은 다른 곳에 붙어 있다.

 

 물론 그가 그 당시에 이런 대상을 우려했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문화와 역사의 흐름을 생각해 본다면, 로큰롤이나 텔레비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이런 대상들을 비판하더라도 그 변화의 방향을 이른바 클래식이라고 하는 서양 고전 음악으로 되돌릴 수는 없을뿐더러, 그것이 옳지도 않다. 오히려 새로운 음악과 매체를 원하는 시대적 환경을 클래식이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 분석해야 했다. 음악이 현실을 속이는 환영이고, 상충적인 변수들을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 연주라면, 시대적 변화의 반영이야말로 음악과 연주의 맥락에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음악가는 비굴하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감상적인 생각에 빠지거나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당당해야 한다. 온갖 슬픔과 고통을 민감하게받아들이지만 여러 가지 기쁨을 나타내는 고상한 표현으로 그것들을 승화시켜야 한다. 음악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에 찬 기쁨, 인간의 고통과 희망을 표현하는 일을 맡은 것에 대한 침울한 기쁨, 무한한 색깔과 디자인으로 정원을 묘사하는 것에 대한 유쾌한 기쁨. -p.48~49

 

 관객은 작곡가들의 작품과 연주자들의 연주를 원하는 까닭에 객석에 모이지만, 연주자는 무엇 때문에 무대에 서는지 궁금할 때가 종종 있었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을 이끄는 예술적이며 내적인 동기가 궁금했다. 이 책은 음악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와 고통, 그리고 가치를 마치 무대에서 연주하듯 다채로운 색채로 들려주었다. 무대 위의 연주자들을 사로잡은 인간의 수많은 감정을 표현해 낼 수 있다는 자부심과 중압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을 때의 쾌감이 그들의 음향처럼 생생했다. 그렇다면 이런 연주들을 듣고서 내 삶에서는 어떤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무슨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남의 귀를 더럽히지 않으면 충분할 것이다. 관객이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정도면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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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이야기
러셀 셔먼 지음, 김용주 옮김, 변화경 감수 / 이레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아직 풋내기였을 때 나는 그때 공부하고 있던 모차르트 소나타의 구조에 대해 선생님(스토이어만)에게 불평을 한 적이 있다. 레슨 시간에 그 곡을 치면서 여덟 마디로 된 프레이즈가 계속 이어지는 단순한 형식에 대해 골난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계속 연주하라고 했다. 그때는 선생님도 내 생각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착각했지만, 어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297쪽

(모차르트의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군주제이다. 전체적인 스타일 및 표현 양식이 전통적인 명령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표면 밑에는 모든 요소가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 양분을 공급받는 벌집 모양의 민주주의가 번창하고 있다. -304쪽

이 악장(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F장조 K.332’의 제1악장)의 전개부는 모차르트의 지혜로움과 경건한 태도와 정교한 기술을 보여준다. 처음 여덟 마디-이 다음 여덟 마디는 이것이 부분적으로 바뀌어 한 옥타브 낮게 반복된 것이다-는 우아한 추상과 변형을 보여주는데, 제시부의 여러 가지 주제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합쳐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물론 여기서 ‘새로운’이라는 말은 상대적인 표현일 뿐이다. 선행 요인들에서 비롯된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늙은 뼈를 가진 참신한 얼굴, 또는 새 모자를 쓴 늙은 얼굴처럼 새로운 동시에 오래된 멜로디다. 수많은 주제가 아주 조용히, 아주 얌전히 어우러져 있는 다양한 사고의 완벽한 조화에서 절대적으로 평온한 정서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모차르트의 천재성의 극치라고 하겠다. 스트레스나 긴장이나 충격 따위는 전혀 없다. 상호 보완성의 씨가 치밀하게 준비되어 고루 뿌려져 있기 때문에, 미묘하면서도 의도적인 융합이 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다음)

(이어서) 내재적인 리듬과 동기의 대화가 은근히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사돈네 팔촌까지 다 초대된 가족 모임에 포함되어 있다. 식전에 감사 기도를 올린다. 메뉴는 채식이다. 모든 것이 건전하고 다양하다. -305~306쪽

민족주의와 신앙심이 그 도덕적 중추가 되는 피상적인 시대에서는 모차르트의 메시지와 이상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309쪽

모차르트의 우애의 윤리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한낮의 해변이라면(구름이 좀 낀), 베토벤의 우애의 이상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고, 인간이라기보다는 인류이며 어떤 날씨에도 좋다. -310~311쪽

그(하이든)가 우리 코를 잡아 비틀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 옹고집의 하루 일과에 이미 계획돼 있는 일이다.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완강한 자아이다. -312쪽

언젠가 줄리어드의 어느 선생과 의견을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중략) 내가 변주곡 악장에서 박자가 일정해야 하는지 각 변주곡의 특성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지, 묻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박자가 바뀌어야죠.˝ 왜냐고 묻자 그는 재미있는 논리로 대답했다. ˝변주곡이니까요.˝ -321쪽

쇼팽은 뒤를 돌아보고 리스트는 앞을 내다본다. -326쪽

리스트는 아마 위대한 음악가들 중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옹호하고 연주하는 한편, 비범한 학생들을 키우면서 수업료를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삼류 작곡가들의 작품을 편곡하는 등 그가 아무 생각 없이 한 것 같은 지나친 행동에 대해 흔히 그를 조롱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그는 그들의 음악올 홍보함으로써 그들이 음악가로서 성공하는 데 도움을 주려 했다. ˝때로 그는 음악과 편한 사이가 되어 음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곤 한다˝는 드뷔시의 말은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드뷔시는 같은 에세이에서 이런 말도 했다. “리스트의 작품의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음악에 대한 그의 사랑이 다른 모든 감정을 배제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330쪽

지휘자 클라우스 텐슈테트Klaus Tennstedt는 제1바이올린보다 제2바이올린을 지휘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따라서 멜로디보다 반주를, 겉모습보다 바탕을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332~333쪽

작곡가 안톤 베베른의 강의록에는 대중의 듣는 습관을 비판한 대목이 있다. 대중은 푸른 들판이나 파란 하늘이나 그 비슷한 것이 떠오르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34~335쪽

비교될 수 없는 것도 비교될 수 있듯, 아무리 독특한 것에도 일반적인 특성이 있는 법이다. -336쪽

위대한 예술가라도 완벽하게 연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신이 나무를 만들 듯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완벽이란 너무 세속적이고, 무상하고, 경직된 것이다. -343쪽

음악은 거친 현실을 장식하고 기만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환영이다. 그러나 음악이 없으면 메마른 현실은 점점 흐릿해지는, 알맹이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환영적인 순간이 된다. 다행히도 목소리가 잠잠해지면 바람과 물이 소리를 낸다. 그러므로 음악은 어디에나 있으며, 그에 따라 현실이 존속한다(근근히). -344쪽

모든 방식의 의사소통이 축약되어 있는 텔레비전의 시대에서 성공을 위한 필수적 재능은 침착이다. 진땀 빼게 하는 영감의 마귀들과 온갖 압박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345쪽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리스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열변. 노골적인 표현. 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 절제된 표현으로 그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에센셜 피아노 계간지(The Essential Piano Quarterly)’에서)-345쪽

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서로 경쟁적인 주장과 이념에 대한 유일한 ‘깨달은 대응’이다. -352쪽

역설이 없으면 냉소주의와 탐욕에 점령된다. -352쪽

분노는 완전히 정복될 수 없다. 순화될 수 있을 뿐이다. 순화는 절제와 성취의 과정이며, 모든 교육의 근본 이념이 되어야 한다. 인정되고 개선된 분노는 공상과 창의성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353쪽

브람스의 헝가리적 측면, 모차르트의 터키적 측면, 또는 폴란드적이자 프랑스적인 쇼팽, 프랑스적이자 러시아적인 스트라빈스키. 이것들은 ‘스타일’과 그 종자從者 ‘이성’의 단조로운 습관 밑에 쉽게 파묻혀버리는 정신적 실체의 대표적인 본보기다. -353쪽

학생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치면 이상해요.˝ 하지만 학생에게 맞서고 도전하는 것은 우리의 교사로서의 본분이다. -358쪽

진정한 연주는 아무리 상충적인 변수들이라도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균형을 이루게 한다. 그 결과는 통일성과 다양성의 50대 50 타협이 아니라 서로의 모든 가치를 흡수하는 것이다. 상반된 요소들의 화해와 조화에 의한 통일성은 편중된 추진력에서 비롯되는 통일성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이다. -364쪽

베토벤이 총애한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Ferdinand Ries가 그의 스승이 작곡한 ‘변주곡 작품 제34번’을 연주하다가 틀린 음을 쳤을 때, 이 스승은 이것을 단순한 실수로 여기고 너그러이 용서해주었다. 그러나 리스가 문제의 그 악절을 연주하다가 특색을 잘못 나타내자 베토벤은 화를 버럭 냈다. 리스는 스승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 악절을 열일곱 번이나 다시 연주해야 했다. -368쪽

유려함과 기품, 활력과 매력, 성실과 꿈. 이것은 삶의 게임이요 음악의 삶이다. -369쪽

한 학기가 지나자 선생님(러셀 셔먼)은 학생들에게 레슨 때마다 단어 스무 개씩을 외워오게 하고 그것으로 즉석에서 문장을 만들라고 하셨다. 문학 평론지에서 과학 잡지에 이르기까지 읽어야 하는 잡지와 신문이 매주 열 가지가 넘었다. (백혜선)-371~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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