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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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대의 전후 관계에 엄격한 사람은 아니다(연대의 전후 관계에 엄격하기란 불가능하다.어떤 글은 쓰는 데 1년이 걸리기도 하고,그 이후 2, 3년이 지나도록 발표되지 않을 수 있으며,퇴고를 거칠 수도 있다.그런 경우 글을 완성한 날을 언제로 보아야 하겠는가).- P9

이 이야기(‘샘레이의 목걸이‘)로부터 단편집의 마지막인 1972년에 쓴 단편까지, 내 글의 문체는 공공연한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그것은 발전이었다. 나는 여전히 낭만주의자이고 그 점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며 또한 내가 낭만주의자인 게 기쁘다. 하지만 ‘셈레이의 목걸이‘의 솔직 담백함과 단순함은 점차 단단하고 강력하고 복잡한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샘레이의 목걸이)- P14

그리고 정말로 딸이 태어났다. 두르할과 샘레이는 딸의 이름을 할드레라 지었고, 자그마한 갈색 머리통 위의 솜털은 길게 자라나 영주 가문의 유산인 순수한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아이가 가지게 될 유일한 황금이 될 터였다...... (샘레이의 목걸이)- P20

˝키리옌에는 여자아이들이나 황금 혹은 이야기의 결말 따위가 깃들 여지가 더 이상 없구나. 이곳의 이야기는 끝났어. 이곳은 망해 텅 빈 성일 뿐이야. 레이넨의 아들은 모두 죽었고, 보물도 모두 사라졌다. 그러니 네 갈 길로 가거라, 딸아.˝ (셈레이의 목걸이) - P26

˝(전략) 그런데 당신(샘레이)은 우리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하지 않소?˝
˝바로 떠날 수 있을까요? 집을 오랫동안 비우고 싶지 않거든요.˝ (샘레이의 목걸이)- P40

로캐넌이 손님들을 향해 걸어가지 여인(샘레이)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을 돌려 로캐넌을 바라보았고, 로캐넌은 깊숙이 허리를 굽혀 절한 다음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고개를 숙인 뒤 눈을 감았다. 이것은 로캐넌이 ‘만능 이종문화 경배법‘이라 부르는 몸짓이었으며, 로캐넌은 꽤 우아한 자세로 이 인사법을 실행에 옮겼다. 로캐넌이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미인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샘레이의 목걸이)- P44

로캐넌은 손바닥 가득히 푸른 불꽃과 황금을 담고 곧장 아름다운 외계 여인(샘레이)에게로 돌아섰다. 여인은 목걸이를 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 대신 고개를 숙였고 로캐넌은 목걸이를 들어 여인의 머리털 너머로 미끄러뜨렸다. 여인의 황갈색 목에 다리 잡은 목걸이는 불타는 도화선 같았다. 여인이 너무나 강한 자부심과 기쁨과 고마움을 얼굴에 나타내며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었기에 로캐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서 있었고, 자그마한 관장은 자기 나라 말로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라고 허둥지둥 중얼거렸다. (샘레이의 목걸이)- P47

둘(르누아르와 페니위더)은 생애 처음으로 행복했다. 사실, 너무나 행복해서 그전까지 앎에 대한 욕망에 억눌려 있던 다른 종류의 욕망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파리의 4월)- P70

여자(키슬크)는 리타 헤이워스 같은 매력을, 아니 그보다 좀 더 고상한 매력을 풍겼다. 리타 헤이워스와 모나리자를 합해놓은 듯하다고나 할까. (파리의 4월)- P74

˝견우성에서 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천 년 정도 미래에서요.˝ 여자(키슬크)는 더욱 신비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여자의 프랑스어 억양은 미식축구부 장학생으로 들어온 신입생보다도 더 형편없었다. ˝저는 고고학자입니다. 파리 제3지역의 폐허를 발굴하는 중이었지요. 말을 이렇게 형편없이 해서 죄송합니다. 말을 배울 만한 소재가 비석밖에 없었거든요.˝ (파리의 4월)- P74

르누아르가 좀이 슨 검은 가운을 입는 동안 키슬크는 자신의 은색 튜닉을 실용적이면서 특징 없는 외투로 가렸다. 페니위더가 생각에 잠겨 목에 벌레 물린 곳을 긁는 동안 보타는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넷은 아침거리를 구하러 집을 나섰다. 연금술사와 성간 고고학자가 프랑스어로 말하며 앞서 가고, 갈리아에서 온 노예와 인디애나에서 온 교수가 라틴어로 말하며 손을 잡고 뒤따랐다. 좁은 길은 붐볐고,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네 사람 위로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각탑 두 개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옆으로는 센 강이 부드럽게 출렁였다. 바야흐로 파리는 4월이었고, 강둑에는 밤꽃이 피어 있었다. (파리의 4월)- P77

나는 복잡한 기술에 대해서는 다소 지루해하지만 생물학, 심리학, 천문학과 물리학의 사색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무척 좋아한다. 내 작품에는 과학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대부분 외롭고 모험심 강하고 고립되어 있으며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명인들)- P80

˝(전략) 밤이든 낮이든 가리지 말고 언제든지 오게나. 그리고 가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가고. 배반당해야 한다면 당하는 수밖에.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 한다네. 신비로움은 사람에 속해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니라 기술을 연마할 뿐이라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명인들)- P96

미드는 이단으로 고발되었다. 사람들은 미드가 벌판에서 어떤 도구로 태양을 가리키는 장면을 목격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거리를 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이 세상과 신 사이의 거리를 재려고 시도했다. (명인들)- P100

중년의 외로운 시기인 최근, 페스틴은 힘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과 동시에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는 부담에 시달렸다. (해제의 주문)- P132

아, 개울 속의 물고기가 되었으면. 아니 그보다 더 상류, 샘이 솟아나는 근처, 숲 속의 나무 그늘 아래, 오리나무 뿌리 아래 괴어 깨끗한 갈색 물에 숨어 사는 물고기가 되었으면...... (해제의 주문)- P137

˝왜냐하면 이름은 사물 그 자체니까요. 그리고 (‘통로‘를 통과하면 갖게 되는) 참이름은 사물의 참된 본질이에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물을 통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맞게 말했나요, 선생님?˝ (이름의 법칙)- P151

언덕아래 씨는 잽싸게 주문을 외워 안쪽 문을 잠갔지만 주문을 외우다 한두 근데 실수를 했나봅니다. 동굴의 텅 빈 대기실이 곧 달걀 프라이 냄새와 지글지글 잘 구워진 간 냄새로 가득 찼으니까요. (이름의 법칙)- P151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늙은 선정 포게노에게 전해주자 선장은 보이지 않는 눈 위의 하얀 눈썹을 곤두세우고 말했습니다. “바깥 해역을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딱 한 부류야. 마법사나 요술쟁이 아니면 현자지......” (이름의 법칙)- P152

젊은이는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봇짐장수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포게노 선장에게 젊은이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지니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자, 선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한 마을에 마법사가 둘이란 말인가. 안 좋아!” 그러고 나서 늙은 선장은 늙은 잉어처럼 입을 꼭 다물어버렸답니다. (이름의 법칙)- P152

검은수염은 굴드 할머니에게 물었어요. “마법사가 없는 섬은 처음 봤습니다. 이가 아프거나 소가 마르거나 하면 어떻게 하죠?” (이름의 법칙)- P154

돌연 아르가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누군가 자신을 위해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다웠다. “왜 우리가 동쪽으로 가는 거지?” (겨울의 왕)- P201

도시 전역에서 아이들은 포틀랜드의 초록빛 공원들과 긴 거리를 뛰어다니며 어린아이답게 놀고 있었다. 혼자 노는 아이들은 아주 가끔씩만 있을 뿐이었다. 뭔가 더 큰 보답을 바라며 그렇게 혼자 노는 아이들은 타고난 도박사다. (멋진 여행)- P216

어떤 사람들, 즉 타고난 도박꾼은 언제나 화산 옆에 살기를 원한다. (멋진 여행)- P218

그리고 그게 무서운 일이다. 낯선 사람이 낯설다는 것. (아홉 생명)- P228

˝그렇지. 하지만 아일랜드인은 더 이상 없어. 내가 마지막으로 듣기로는 섬 전체에 몇천 명밖에 없었어. 그리고 자네도 알겠지만, 산아제한을 하지 않아 음식이 바닥났지. 그리고 3차 기근이 찾아왔을 때 성직자만 빼고 아일랜드인은 모두 죽었어. 그리고 성직자는 모두 독신주의야. 모두가 아니라 대부분이라고 해야겠군.˝ (아홉 생명)- P242.243

동정심이란 받을 필요가 있을 때 주는 것이다. (아홉 생명)- P243

˝지금까지 목은 늘 어둠 속에서 잘려왔어. (후략)˝ (아홉 생명)- P258

세상에는 심연이, 갈라진 틈이, 맨 마지막으로 걸어야 할 걸음이 존재한다. (물건들) - P275

˝(전략) 남편은 봄이 되면 어린 양고기가 세상에서 최고 맛있다고 하다가 가을이 되면 구운 돼지고기가 세상에서 최고 맛있다고 했죠. (후략)˝ (물건들)- P279

극한 지방 탐사대원들은 팀 동료가 지성인이고 착실히 훈련을 받았으며 정서가 불안해도 개인적으로 공감대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대원들은 밀폐된 선실과 역겨운 장소에서 함께 일해야 했으며, 따라서 각자의 망상, 절망, 편집증, 혐오감, 강박 관념 따위가 대원들 간의 관계를 해칠 정도로 크지는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게 당연했다. 늘 그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P315

˝(전략) 숲이라는 단어에는 필연적으로 이질적 세계라는 은유가 함축되어 있으니까.˝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P343

˝숲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는 산불 같은 존재일지도 몰라.˝ 매넌이 말했다. ˝허리케인이나, 위험한 존재로 보일 거야. 식물이 볼 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위험한 존재야. 뿌리가 없는 건 이방인이고 두려운 존재야. (후략)˝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P349

˝옛날에는 대단한 광산이었어.˝ 광부들은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땅속의 별들)- P384

천체 물리학 전공으로 우주 프로그램에 참여한 휴즈는 아주 성적이 좋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월등하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휴즈의 군대 상관 상당수는 골머리를 앓았다. 군대에서 높은 지능이란 불안정과 불복종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시야)- P411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예술가이자 급진적 인물이었지만, 도스토옙스키 초기의 사회 급진론은 거꾸로 그를 격렬한 반동으로 만들었다. 반대로 아주 유순하고 천진난만할 정도로 세련되어 보이는(자신의 글을 읽는 모든 독자가 자신처럼 우아하리라 생각하고 ‘우리‘라는 단어를 쓴 것을 보라!) 미국인 (윌리엄) 제임스는 진정으로 급진적 사상가였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P452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모두 아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직접 와서 본 사람도 있고, 단지 그런 아이가 있다는 것만 아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아이가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이유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들의 행복, 이 도시의 아름다움,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아이들의 건강, 학자들의 지혜로움, 장인의 기술, 그리고 심지어는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조차도 전적으로 그 아이의 지독하리만치 비참한 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P463.464

나는 그곳을 제대로 묘사할 수가 없다. 그런 곳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듯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P467

원칙을 만드는 것과 그 안에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혁명 전날)- P476

편애, 엘리트 의식, 지도자에 대한 숭배. 이런 것들은 슬며시 돌아왔고 도처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라이아는 이것들이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한 세대 안에 뿌리 뽑히는 것을 보고 싶어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시간만이 거대한 변화들을 만들어낸다. 어쨌거나 이 방은 크고, 멋지고, 양지바른 곳이었고, 세계 혁명을 시작한, 침 흘리는 늙은 여자에게 꼭 맞았다. (혁명 전날)- P478.479

나이와 질환은 인간을 이원론자로 만들고 현실 도피주의자로 만든다. (혁명 전날)- P481

세이세로의 조선소를 파괴한 라이아가, 7천 군중 앞에서 아노일테 수상의 면전에 저주를 퍼부으며 당신은 조금만 돈벌이가 됐어도 자기 불알을 뗴어내 청동칠을 한 뒤 기념품으로 팔았을 거라 목소리를 높이던 라이아가, 새된 소리를 지르고 불경한 말을 해댔으며 경찰에게 발길질을 하고 성직자에게 침을 뱉었으며 공중 앞에서 ˝여기 독립 민족 국가 아이오가 세워지다 기타 등등˝ 따위 개소리가 적혀 있던 캐피톨 광장의 커다란 놋쇠판에 공공연히 오줌을 갈겨댄 라이아가 이제는 모든 이의 할머니, 사랑받는 노파, 친근한 낡은 기념물, 숭배받는 자궁이 되다니. (혁명 전날)- P489

앞쪽에, 그곳에, 저녁 녘의 넓은 들판에서 마른 하얀 꽃들이 나부끼며 속삭였다. 72년이 지나도록, 라이아는 저 풀들의 이름을 배울 짬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혁명 전날)- P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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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 도대체 이야기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듀나 지음 / 우리학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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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저는 오셀로가 그렇게 쉽게 질투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데스데모나 앞에서 허풍을 떨며 만들어낸 이야기 속 주인공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무리 훌륭한 군인이라도 이야기 속 주인공과는 경쟁이 안 되지요.- P.10

생물학적인 존재만으로서 인간은 그렇게까지 재미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P.11

하지만 여전히 저에게 허구의 이야기란 바다와 육지에서의 감동적인 사건들에 대한 것입니다. 전 이런 이야기가 제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저를 데려다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야기꾼으로서 전 독자들에게 역시 같은 일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P.12.13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어떤가요. 범죄, 음모, 모험, 섹스, 로맨스, 거의 슈퍼히어로에 가까운 주인공을 갖춘 신나는 대중소설입니다. - P.20

1920년대만 해도 추리소설은 엄격한 형식을 통해 정의될 수 있는 장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린 범죄를 다룬 거의 모든 소설을 추리물이라고 부르죠.- P.24

장르가 만들어지는 데엔 이성적인 이유 따위는 없습니다. 힘을 얻고 그 힘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냥 존재하고 그 힘이 떨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P.25

다시 말해 자신의 작업에서 문학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 문학성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들이 문학의 영토를 넓혀온 것입니다. 이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탐험가가 되려면 일단 영토 바깥으로 나가야 하잖아요.- P.34.35

예를 들어 특정 시대의 평범한 목소리를 재생하려면 위대한 책들만 읽는 건 문제가 됩니다. 그들은 당시의 평범성을 극복했기 때문에 지금도 읽히는 것이거든요. 위대한 빅토리아조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 상당수는 당시의 평범한 빅토리아조 영국인들과 다른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빅토리아조 여성의 표준으로 제인 에어를 끌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죠. 위대한 책들만 읽다 보면 우린 과거를 왜곡하게 됩니다.- P.42

대부분 옛날 연극들은 문학적, 연극적 가치 때문에 살아남습니다. 하지만 오페라는 사정이 다르죠. 음악만 훌륭하다면 당시엔 인기였지만 곧 잊힐 운명이었던 이야기도 살아남으니까요. 내용만 따진다면 ‘나비 부인’이나 ‘토스카’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공연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잖아요. 오페라 애호가는 마땅히 잊혀야 할 한심한 이야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입니다.- P.45

SF나 판타지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야기꾼이 그걸 원한다고 해도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해요.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인간이거나 인간처럼 행동하는 존재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주 어디를 무대로 삼아도 그런 존재가 주인공이어야 해요. 저에겐 좀 짜증 나는 제한입니다. 이 세계에서 달아나려고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건데 아무리 멀리 가도 인간성이라는 목줄에 잡혀 있는 거죠.- P.53.54

사람들은 예술이란 개념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예술이 되면 여분의 가치를 더 얻게 된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그럴 리가요. 무언가가 예술이라고 불린다면 그건 예술이라는 상자 안에 들어 있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사람들은 예술이란 개념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예술이 되면 여분의 가치를 더 얻게 된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그럴 리가요. 무언가가 예술이라고 불린다면 그건 예술이라는 상자 안에 들어 있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P.58.59

여전히 훌륭한 작품들은 만들어질 것이고 운이 좋다면 그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감상되고 기억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영역에서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높아질 거예요. 고정된 이야기들을 얌전히 감상하는 사람들보다 살아 숨쉬는 이야기들이 꿈틀거리고 비명을 지르고 투쟁하다가 소멸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해 즐기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 세계가 된다면 어디에나 널려 있는 창작자보다 이야기 규칙, 그러니까 우주의 창조자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날이 올 수도 있겠죠.- P.61

퍼즐 미스터리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요. 얄팍한 인물들을 말로 삼아 만든 복잡한 밀실과 알리바이 트릭의 구조물도 아주 잘 만들었을 때엔 거의 바흐의 푸가처럼 정교한 형식미를 갖출 수 있는 거죠. 인간적 매력이 떨어질 수는 있지만 그건 바흐의 음악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P.69

추리, SF, 호러, 판타지는 성격상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이웃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겹쳐져 있습니다 특히 SF의 경우 이들 중 하나라도 떼어낸다면 장르 자체가 붕괴됩니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나 세계를 상상력으로 창조하고(판타지), 미지의 대상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호러) 그 대상을 논리적으로 규명하는(추리) 장르이니까요.- P.75

예를 들어 이디스 워튼의 ‘기쁨의 집’은 제가 정말로 무서워하는 소설이고, 주인공 릴리의 몰락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한데, 어느 누구도 이 책을 호러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자생 능력이 없는 상류사회 여성의 몰락은 아무리 가차 없고 잔인해도 호러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이기 때문이죠.- P.79.80

현실 세계에서 공포는 생존을 위한 장치입니다. 우린 공포를 통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벗어납니다. 당연히 이는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하지만 허구를 통해 공포의 자극을 미학적으로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맛은 보다 미묘합니다.
이러다 보니 호러물의 공포는 매운맛이 가미된 요리 비슷하게 소비됩니다. 두 개의 방향이 존재하죠. 하나는 매운맛, 그러니까 공포의 강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풍미, 그러니까 공포의 맛이죠. 이 두 개를 곱하면 호러물의 가치가 나옵니다.- P.81

호러는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해왔고 그 결과물은 결코 공포 자극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나에게 무섭지 않다’는 게 결과물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무시해야 할 이유가 될까요? 어림없는 소리죠.- P.83

어느 순간부터 호러는 여자들이 겪는 공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호소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P.90

다시 말해 호러 장르의 잠재적인 위험성을 염려하는 건 오히려 장르의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새로운 이야기와 의미를 찾는 건 장르의 안전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90.91

그들은 당연히 장르의 탐험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비슷한 자극을 반복하고 싶어 하며, 변화를 거부하니까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 가능하다고 경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죠.- P.99.100

같은 작품이라고 해도 장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손) 웰스와 (쥘) 베른은 (휴고) 건즈백 따위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아름답고 압도적인 SF를 썼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소설에 열광했고 몇 명은 모방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의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건 건즈백이 ˝이것이 SF다!˝라고 선언한 이후였습니다.- P.104

지금도 수많은 물리학자가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을 연구하고 있지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P.105

‘과학적 상상력과 문학의 결합’으로서 SF는 현실 세계의 사회적 변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놀이터로서의 장르는 쉽게 보수화됩니다. 이야기가 쌓이면서 서부극의 우주처럼 세계가 고정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그 세계는 백인 남자들이 우주를 질주하고 날아다니며 외계인과 전쟁을 벌이는 곳이었습니다.- P.125

오리지널 ‘스타트렉’ 시리즈는 당시의 기준에 따르면 엄청나게 진보적이었습니다. 흑인 여성과 아시아인과 러시아인 남성, 외계인과 지구인 혼혈 남성이 당연한 고정 멤버였고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최초로 흑인과 백인의 키스 장면을 내보냈던 프로그램이었죠. 지금 와서 보면 여러모로 낡아 보이지만 진보를 향한 방향성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설정 놀이를 하는 팬들은 시리즈의 방향성 대신 고정된 설정에 집착하게 됩니다. 함장이 여성이고 함교에 백인 남자가 한 명밖에 없었던 ‘스타트렉: 보이저’ 시리즈에 대한 반발이 얼마나 컸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좀 이가 갈립니다. - P.126.127

하지만 창작자는 시대에 맞추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게 매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죠. 아무리 자칭 골수팬이 이를 갈아도 소용없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희생자들입니다. 모두를 얼러대며 챙길 수는 없어요. 가망 없으면 버리고 가야지.- P.127

SF와 판타지는 일반 소설보다 넓은 세상을 커버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이 세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백인 남자들의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지구에 백인 남성들은 몇 퍼센트나 되나요? 10퍼센트는 되려나요? 하나 더. 지금까지 백인 남자들이 이 우주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장르에는 엄청난 미개척지나 남아 있습니다. 백인 남자가 아닌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쓰는 게 더 재미있는 시대가 된 것이죠.- P.135.136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어드밴티지를 빼앗기면 어떨 수 없이 더 재능이 있고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들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는 작가들, 백인 남자들이 둘레에 쌓아놓은 울타리 바깥의 세상은 이해할 능력이 없는 독자들. 이들의 공격이 유치하고 추잡해 보이는 것도 다 그 삼류성이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역습은 쉽게 죽을 거 같지 않아요. 인간은 쉽게 설득되는 종이 아니니까요.- P.136

허구의 세계가 젊음을 유지하고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세계관과 아이디어를 가진 세대를 받아들이고 늙은이들은 뒤로 빠져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변화한 세계는 아무리 훌륭해도 분명 근본주의자 팬덤의 맘에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을 굳이 신경 써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P.154

하지만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글을 쓰고,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수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그냥 자기보다 미개한 사람들 사이에서 신 대접을 받고 싶은 사람들. 여러분은 임진왜란에 뛰어들어 레이저포로 일본군을 무찌르고 신 대접을 받고 싶으신가요? 전 아닙니다만 그런 욕망이 얼마나 흔한지는 알고 있지요.- P.170

독자나 이야기꾼이 추구하는 욕망과 쾌락이 너무 쉽게 제공되면 그건 포르노가 됩니다.- P.171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의 기계들을 보세요. 다들 오묘하게 낡았습니다.- P.180

운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요소예요. 운이 없었다면 인디아나 존스와 제임스 본드는 등장하고 10분 만에 죽었습니다.- P.195

캐릭터의 매력과 캐릭터의 훌륭함은 또 다른 것이고, 훌륭한 이야기가 꼭 훌륭하거나 매력적인 캐릭터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지요.- P.197

어쩌겠어요. 우리는 우리보다 똑똑한 사람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P.198

책은 독자의 이익과 즐거움을 위해 읽는 것입니다. 죽은 작가들은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에 기생하는 유령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이익까지 신경을 써주어야 할 이유는 티끌만큼도 없지요. 요즘같이 습관처럼 이어져온 가치관들을 하나씩 꺼내 검증해야 마땅한 시대엔 더욱 그렇습니다.- P.205

한때 크리스티와 아시모프로 설명될 수 있었던 추리와 SF 장르의 형태는 20세기 초중엽에만 잠시 존재했던 거품처럼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당시 장르가 점유하고 있던 세계는 지금 훨씬 정리하기 어렵고 혼란스럽고 역동적인 곳이 되었습니다. 이 책이 장르물을 구분하고 설명하고 모범적인 작법을 찾는다는 원래 기획에서 벗어난 것도 그 때문이지요.- P.205.206

전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가 마지막으로 들리는 날이 제가 아는 문명이 끝나는 때라고 생각하는데, 음악도 역시 스토리텔링이고 이야기의 가치가 일시적이라면 그 시기가 의외로 빨리 올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천국을 아름다운 음악이 울리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천국을 지배하는 것은 침묵뿐일 수도 있지요. 써놓고 보니 좀 ECM레코드의 캐치프레이즈 같군요.- P.207.208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는) ‘제인 에어’의 모방작이지만 샬럿 브론테가 절대로 건드릴 수 없었던 영역으로 용맹하게 돌진하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P.211

제 의견은 책을 쓰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요동치며 변하고 동시에 서너 개의 모순되는 의견을 품기도 하니까요. 저는 이들을 평면화해 완벽하게 아귀가 맞는 책을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결국 거짓말이 될 것이고 여러분은 어차피 이 책에서 필요한 것만 골라 취하지 않겠어요?-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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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잊으면 - 트루먼 커포티 미발표 초기 소설집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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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불을 붙이면서 여자는 솟아오르는 연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여자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찡그렸다. 이 망할 흡연의 유일한 문제점이었다. 입속에 헌 자리가 그 때문에 아팠다. (밀 스토어)-26쪽

여자는 싸구려 자명종을 힐끔 보았다. 3시 반, 하루 중 가장 쓸쓸하고 가장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각이었다. 가게는 답답한 곳으로, 등유와 신선한 옥수수 가루, 오래 묵은 사탕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다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8월 오후의 태양이 하늘에 뜨겁게 걸렸다. (밀 스토어)-27쪽

교장은 힐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연약함을 처벌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그의 마음이 움직인 티가 났다는 것을 본인도 알았다. 그는 창문으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바로잡았다. (힐다)-44쪽

“혹시 당신들 여기 괜찮은 동백나무 파는 사람 압니까? 나체즈에 집을 짓는 동부 여자를 위해서 모으는 중인데.” (벨 랜킨 양)-50~51쪽

남자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 후 나가려다가 갑자기 몸을 돌리고 말했다. “청년들, 나랑 거기까지 같이 가서 위치를 알려주면 어떤가? 나중에 도로 데려다줄 테니.”
두 건달은 재빨리 동의했다. 차를 탄 모습, 특히 낯선 사람의 차를 탄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 난 그런 부류였다. 마치 그 이방인과 무슨 연이라도 있는 듯 보일 테니까. 그리고 어쨌든 차를 탄다면 담배를 얻어 피울 건 분명했다. (벨 랜킨 양)-52쪽

이제 곧 그의 집 앞에 당도할 것이었다. 바로 저 언덕을 올라 내려가기만 하면, 곧 도착한다. 근사한 작은 집으로, 견고하고 튼튼했다. 그가 살기에 완벽한 곳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70쪽

눈이 멀 듯 환한 섬광처럼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 누가 아주 가까운 데에 서서 차갑고 계산적이며 제정신이 아닌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꽃 속의 나방)-76쪽

그녀는 중심 주택가에 있는 이 집에 늘 살았고, 그녀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진정한 개척자였으며,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과거가 되었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며, 옛 친구들도 천천히, 거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세상을 떴다. 이것이 일종의 한 왕조, 남부 귀족 가문의 소멸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는 듯했다. (익숙한 이방인)-101~102쪽

엄마가 알게 된다면 그렇게 비밀스럽지도, 그래서 그렇게 신나지도 않을 것만 같았다. (이것은 제이미를 위한 거예요)-138~139쪽

페드로는 건물 지하에서 일하는 일꾼으로, 그와 루시는 당밀보다도 끈끈했다. 루시가 뉴욕에 온 지 다섯 달 남짓 되었을 때 이렇게 되어버렸고, 그때까지도, 기술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여전히 세상물정을 몰랐다. (루시)-155쪽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째서 음악이 내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지 알았어요. 그건 일종의 대체품이었던 겁니다. 더 고운 것을 대신하는 영광스러운 대체품. 무언가. 무언가......˝ 그는 그녀를 보았다. ˝당신 같은.˝ (서쪽으로 가는 차들)-171쪽

(리튼하우스 부인은) 얼굴은 말랐지만, 철저한 원칙에 따라 모형을 뜬 듯 완고해 보이는 선을 따라 빚어졌다. 단 하나의 찌든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비슷한 사람들)-181쪽

˝장례식은 돈이 들었나요? 제 말은 마틴 장례식요.˝
리튼하우스 부인은 쿡쿡 웃더니 몸을 앞으로 내밀며 속삭였다. ˝화장했답니다. 그것 참 어처구니없지 않나요? 아, 그래요. 재를 신발 상자에 싸서 이집트로 보냈답니다. 왜 거기냐고요? 모르겠네요. 그 사람이 이집트를 혐오했다는 것만 빼고는요. 나 자신은 좋아했어요. 멋진 나라죠. 하지만 그 사람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니까 어처구니없는 거죠. 하지만 딱 한 가지 무척 안심되는 게 있었어요. 나는 소포에 반송 주소를 썼는데, 절대 돌아오지 않았어요. 어쨌든 나는 그 사람이 결국에는 적당한 안식처에 다다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비슷한 사람들)-184쪽

사후 출판은 신중함과 개방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작가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하지만, 보통은 소수의 사람만이 접근해서 볼 수 있는 자료를 일반적인 독자와 공유하면서, 작가의 발전 과정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는 개방적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린 천재 예술가의 초상), 데이비드 에버쇼프-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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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오래된 상점을 여행하다 - 소세키의 당고집부터 백 년 된 여관까지
여지영.이진숙 지음 / 한빛라이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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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개하는 오래된 상점 이야기 속에는 어쩌면 대단하게 비쳤던 일본의 장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애잔함이 있다. 사무라이 때부터의 신분 세습으로 남을 넘볼 수도 없었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역전이 안 되는 사회, 오직 주어진 환경에서만 순응하고 살아야하는 이미 정해진 신분의 숙명 때문에 장인이 계속 태어났다. (이진숙)-7쪽

일본의 격식 있는 음식점들은 작은 이쑤시개 하나에도 품격을 더한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가이세키 요리를 내면서 후식과 이쑤시개를 아주 싼 것으로 쓰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무리가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고급 음식점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쑤시개 전문 브랜드가 ‘사루야‘다. (사루야さるや, 이진숙)-44쪽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건 충분히 감사할 일이다. (이토야ITOHya, 여지영)-184쪽

일본의 술은 청주, 탁주, 소주의 구분 없이 모두 니혼슈(日本酒)라고 한다. 그 가운데 사케는 가장 맑게 거른 상태의 ‘청주’를 말하는데 흔히 사케 또는 니혼슈라 칭한다. 사실 청주는 우리에게는 정종(正宗)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중략) 일본의 맛있는 술, 정종이 우리나라로 넘어온 건 일제강점기 때다. 마산에서 생산한 ‘대전정종’, 부산의 ‘앵정종’, 인천의 ‘표정종’ 등의 상표에서 술을 만든 회사나 가문을 나타내는 대전(大典), 앵(櫻), 표(瓢) 등을 떼어버린 게 바로 ‘정종’이다. 그러니 청주를 정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주를 ‘진로’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토시마야혼텐豊島屋本店, 여지영)-196쪽

“어머니가 사도 좋다고 하기 전에는 마니아가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중요하죠. 지금 마니아들은 모두 좋은 어머니를 두었다고 생각해요. 무조건 보기만 하고 사지 말라는 것은 옳지 않아요. 가지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한 노력을 가르쳐야 해요. 이게 중요하죠.” (장난감천국 2초메 3번지おもちゃ天国2丁目3番地, 여지영)-215쪽

“인장을 전각할 때는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형태가 가지는 아름다움을 탐닉해야 한다. 그 다음 글자를 구현하기 위한 테크닉, 즉 힘 조절이 필요하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물론 처음에는 힘이 든다.” (여지영, 세이운도인방青雲堂印房)-236쪽

“며칠 전 우리 가게에 스물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손님이 찾아왔다. 막 취직을 했는데 자신만의 도장을 갖고 싶어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했다. 나로서는 아주 고마운 일이다. 물건에 대한 철학을 가진 것이 고맙고, 그것이 ‘좋은 고집’으로 보였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신이 지닌 물건에 대한 고집이나 좋은 것을 구분하는 안목을 지녔고, 작은 도구건 큰 도구건 상관없이 원하는 물건에 대한 생각과 고집이 훌륭했다. 그래서 솜씨가 좋은 장인이 많았던 거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문화가 없다. 장인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유다.” (세이운도인방)-237쪽

호메이칸은 서민을 위한 여관이다.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운영하고 있다. 과거, 특히 전쟁 시에는 군인들의 사택이었고, 전쟁이 끝나고는 집을 잃은 사람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주 고객이었다. 이때 지방에서 온 아이들 중에는 가난한 아이도 많았는데, 그런 아이들에게는 쌀이나 잡곡 등을 숙박료 대신 받았다. (여지영, 호메이칸鳳明館)-249쪽

(클래식 음악 킷사喫茶 라이온의) 초대 사장 야마데라 야노스케는 라이온의 모든 인테리어 소품 하나하나를 직접 제작하며 큰 애착을 보였고, 자신의 마지막을 라이온에서 보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 결국 야노스케 씨의 장례식은 라이온에서 치렀으며,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레퀴엠을 틀어놓고 그를 보냈다고 한다. (여지영, 라이온ライオン)-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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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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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에서 팀장대리란, 팀장은 팀장인데 팀원이 한명도 없는 사람을 일컬었다. -11쪽

경애는 언제나 어찌 되었건 살자고 말하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렇게 말해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24쪽

아무래도 마음을 잃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날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페이지의 어느 신실한 기록들도 자기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30쪽

간소하지 않다는 건 실용적이지 않다는 뜻이었고 회사에서 하게 될 ‘노동’이라는 데 감이 없다는 것이니까. -31쪽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그려지는 것이 슬펐다. 가난과 폭력, 배신과 거짓말, 종교, 정치, 국적의 차이, 집안싸움, 부모 반대, 언니 또는 형의 반대, 동생의 반대, 베프나 은사의 반대 혹은 기르는 고양이나 개의 반대, 윤리적 판단-불륜, 제삼자의 출현-같은 일종의 유형들이 있었다. 그렇게 소멸은 정확하고 슬픈 것이었다. -35쪽

물론 상수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대답이 있긴 했다. 아무리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라도 상수가 대답을 거듭하다가 지쳐, 군대 면제였어요,라고 하면 모든 게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37쪽

식장에 가서 무슨 오기인지 50만원을 축의금으로 내고 계단식 연단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평소에 신지도 않던 펌프스 때문에 발가락의 찌릿찌릿한 통증을 참아가며 식당에 가 잔치국수를 먹는 일. 관계의 변화는 그렇게 등 떠밀리듯 왔다. 우리 헤어져, 하는 선언이나 다 관둬, 하며 뒤도는 동작이 아니라 식권을 받아 식당으로 가 남들이 다 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그 절차를 기꺼이 밟으며 그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오는 것이었다. -59~60쪽

산주가 있었던 어제도 없고 산주가 없는 내일도 없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사이에서 되도록 현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경애의 마음만 있었다.
그런 여름날 속에서 경애를 집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맥주와 옥수수뿐이었다. 어느날 시장에 갔다가 옥수수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경애는 이삼일에 한번씩 나가서 옥수수를 사왔다. 옥수수의 힘센 잎들, 동물의 것처럼 부드러운 수염, 그리고 아주 꽉 차오른 알갱이들을 보고 있으면 창으로 문득 들어오는 밤바람을 느끼듯 어떤 환기가 들면서 산다, 라는 말이 생각나곤 했다. -96~97쪽

경애가 (전 애인인) 산주와 (산주의 새 애인인) 그 여자 선배의 SNS를,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계정에는 선배가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정갈한 쿄오또의 식당들, 고양이, 사회적 공헌을 게을리하지 않는 외국계 기업들에서 생산하는 목욕용품과 화장품, 외국의 식자재들과 유기농과 요가, 유년 시절을 환기하게 하는 놀이공원이나 비스킷, 인디밴드의 영상, 프랑스 소설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 모든 예쁘고 환한 것들 사이에는 산주의 사진이 올라오기도 하고. -100쪽

그녀(경애의 엄마)는 경애가 친구들을 잃고 우울증을 겪었을 때에야 깨달았다. 자기가 믿을 게 자신의 두 손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 아기 역시 믿을 건 엄마의 두 손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102쪽

상수도 한때 베트남을 공략해야 한다고 회의시간에 열변을 토하기도 했지만 자기가 가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126쪽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없다라니 얼마나 절망적인 말인가. 기껏 뭔가를 했는데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라면 얼마나 맥이 빠지는가. 상수는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묵 같은 상태의 삶이 아닐까 생각했다. 겉으로는 중량감 있는 색채에, 기포 하나 없이 단단해 보이지만 숟가락질 한번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는 묵 같은 인생. -127쪽

아이들이 내는 소리는 아름다워서 때로는 어떤 풍경을 아주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경애는 생각했다. -138쪽

누구도 상처받지 않은 채 순하게 살 수 있는 순간은 삶에서 언제 찾아올까. -139쪽

상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기숙학원의 생활조교가) 그렇게 강렬한 강도로 자기를 다그치고 닦달했던 상태가 그냥 기숙학원과의 계약이 끝나면 사라지는 것이었다니. 그렇다면 대체 자기를 그렇게 조련할 수 있는 권리는 애초에 어떻게 생겨난 것이었나. -149~150쪽

상수는 이따금 죽은 어머니와 나눈 대화들을 맥락 없이 떠올리는데 그중 하나가 엄마, 엄마는 뭐가 어려워? 하고 물으면 어머니가 설핏 웃으면서 오늘이 어려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167쪽

집이 변해가는 데는 외부의 영향보다는 내부의 소진이라는 맥락이 있었다. -171쪽

어머니가 지냈던 삿뽀로는 눈이 한 해에 6미터나 오는 눈의 나라라고 했지만 상수가 기억하는 삿뽀로는 넓게 펼쳐진 감자와 옥수수와 무와 당근 같은 것들의 도시였다. -178쪽

경애는 베트남의 여자들, 오토바이 위에 앉아서 시동을 걸고 버스와 택시의 경적에 아랑곳하지 않고 묘기를 부리듯 빠져나가는 어리고 젊고 늙은 모든 여자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189쪽

누군가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 사람과 깊은 유대를 맺거나 내가 그 사람을 좀 안다는 자부심을 얻는 것과는 다르게 무기력해지는 것이기도 했다. -200쪽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란 그렇게 함께 떨어져내리는 것이었다. -208쪽

(베트남인 직원인) 헬레나가 나름대로 파악한 (베트남에 있는 한국 거래처) 관리자들의 선호 중에는 술, 돈 이외에 가족 안부와 김치,라는 단어도 있었다. 헬레나는 어떤 영업자는 한국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클라이언트의 한국 집에 들러 베트남으로 보낼 물건을 직접 가져오기도 한다고 했다. 그중에는 무려 10킬로그램이나 되는 김치와 깍두기도 있었다고. 그렇게 보니 헬레나의 노트는 그간 호찌민 지사를 거쳐간 영업사원들의 마케팅 비망록이기도 했다. 그건 어떤 친절과 다정, 도전, 혹은 을의 생존법, 아부, 설득, 포부, 패기의 기록이었다. -211쪽

˝경애씨, 내가 영업 비밀 하나 가르쳐줄까? 동생 같아서 그러는 거야.˝
˝뭔가요?˝
˝여기서는 절대 금방 떠날 사람처럼 굴면 안돼. 떠나는 사람들한테 사이공은 지쳤거든. 일주일 있더라도 이십년 있을 것처럼 행동해야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기 마음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여기서 버티는 줄 알아?˝
˝어떻게 해야 버틸 수 있는데요?˝
˝내가 한 이삼일 내로라도 짐 싸서 한국 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해. 안 그러면 못 버텨.˝ -218쪽

경애는-나중에 서른 살이 넘어-그날 E의 집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장면이 없었다면 E를 추억할 공간이 오직 영화관과 전철역 플랫폼 그리고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로 넘쳐나는 거리뿐이었을 거였다. -240쪽

호찌민 사람들에게 중국동포란 한국인보다는 명백히 중국인에 가까웠고 그래서 경계심이 있었다. 몇해 전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 영토분쟁이 있었을 때는 반중 감정이 격해져 중국계 공장들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고 한국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동포들도 개인적인 린치를 당할까 두려워 외출을 못했을 정도였다. -249쪽

어차피 곧 밤이 되겠지만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고 싶지는 않은 것, 그런 건 욕심이 아니지 않은가 싶어서. -264쪽

경애가 온종일 엎드려만 있는 유령 같은 학생이라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마음이 너무 강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정지해 있었을 뿐이었다. -279쪽

경애는 자기가 인생을 길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기회라는 것은 그렇게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만들어낸 것은 기회가 아니라 일종의 시험에 가깝다고. -285쪽

그들(경애와 상수)이 처음 서로를 식별했던 공장 뒤편의 그늘진 창고와 비교한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성과는 별로 없고 자랑스러운 성공들은 자꾸 다음을 기약하며 미뤄질 뿐이지만 적어도 둘의 시간은 따로가 아니라 함께 흐르고 있었다. -292쪽

˝호찌민 사람들 중에 마트에서 닭을 사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런 공장 닭들이 얼마나 맛이 없는지 에일린이 먼저 알려줬어요.˝ -293쪽

그렇게 밀려난 자리에는 왜 하나같이 햇볕이 들지 않는 것인지, 앉아 있으면 정오가 왔는지 저녁이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306쪽

생각해보면 경애가 파업 이후 회사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버틴 건, 버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버려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모멸 속으로. -307쪽

지금이라도 가서 잡으면 산주는 경애의 인생에서 죽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가서 나한테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고 있지,라고 한다거나, 나한테 사과할 말들이 있지 않아, 한다거나 아니면 저녁은 먹었어? 혹은 적어도 오늘은 돌아가,라고 한다면. -311~312쪽

경애가 부당전보와 관련한 유인물을 내밀어도 누구는 받지도 않고 지나가고, 암암리에 지각비를 받는 부서들의 직원은 경애를 좀 밀치면서도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실제 시간보다 이분쯤 빠르게 설정되어 있다는 심증이 공유되어 있는 출퇴근 리더기에 간신히 카드를 긋는 것이었다. -315쪽

이별이 분노나 실망감, 적의 같은 단일한 감정으로 이루어졌다면 오히려 품고 살아가기가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순간순간 전혀 반대의 감정이 몸을 부풀려 마음을 채우기에 아픈 것이었다. 경애는 아프다고 생각했다. 아픈 것을 대체할 다른 말은 없었다. -316쪽

그렇게 해서 고통을 공유하는 일은 이토록 조용하고 느리게 퍼져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밤이 깊어지듯이 그리고 동일하게 아침이 밝아오듯이. -318~319쪽

하지만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오늘만 견디는 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수는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고 오늘이 있으면 당연히 내일이 있고 내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해결이 되든 되지 않든 마음을 쓰다가 하루를 닫는 사람이고 싶었다. -330쪽

시간이 쌓인 것, 굽은 것, 견디는 것, 부러지지 않는 것, 제자리에 앉아 있는 것, 색이 바랜 것, 유연한 것, 아주 슬프지는 않은 것은 오후의 퇴근길에 나선 이들의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344쪽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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