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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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티콘을 사용하지 않아서 상대방 기분을 상하게 하면 어떻게 하나, 내 말투가 딱딱하다고 느끼고 오해하면 어쩌나 불편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마음이 괴로웠다. 하지만 더 나를 괴롭게 만든 것은 따로 있다. 법정에서 ‘넹?’ 하며, 내 메시지를 재현하는 변호사의 목소리를 수차례, "넹? 넹? 왜 이런 말투를 쓰셨죠? 증인, 넹?" 하는 것을 듣는다면, 미쳐버릴 것 같은 "넹?"의 목소리가 귓가에 종처럼 ‘넹넹넹’ 울리면서 바로 딱 ‘ㅇ’에 가던 손가락이 멈춘다.- P226

여자 정장에는 주머니가 많이 없었지만, 수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가지고 다녀야 해서 위 주머니와 안감의 안쪽 주머니까지 보면서 샀다. 주머니가 없는 옷에는 내가 직접 달기도 했다. 안희정의 물건을 모두 지참하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안희정은 ‘슈트발‘이 안 산다고 절대 양복에 물건을 넣지 않았다. 휴대폰도, 담배도, 라이터도, 명함도, 신분증도, 휴지도, 펜도, 안경닦이까지 모두 수행비서가 가지고 다녀야 했다. 손으로 부르면 달려가 원하는 걸 전달해야 했다. 나는 만물트럭이었다. 사람들이 내 주머니에서 자꾸 뭐가 나오는 걸 보며 놀라워했다. 가방은 슈퍼를 차려도 될 정도였다. 내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화장품 콤펙트도 없었다.- P227

가끔은 예쁜 옷을 입고 싶어서 박하 맛 사탕처럼 톡톡 튀는 잔꽃무늬 파자마를 입고 잔다. 팔부의 긴 소매 옷이다. 어디 나가지는 못하지만 색깔 있는 꽃무늬 파자마를 입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리고 다시 외출을 할 일이 있으면 우중충한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스스로 피해자다움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걱정도 된다.- P227

나는 업무로 안희정을 수행하여 수많은 국내외 일정을 출장으로 다녀야만 했고, 그 업무 장소에서, 업무 시간 중에, 상사였던 안희정에게 잦은 성희롱과 성추행 등 성폭력을 당했기에 장소에 대한 트라우마(심리적 후유증세)가 심한 편이다. 안희정이 수장으로 있었던 충청남도를 포함하여 곳곳의 장소가 모두 사건 장소로 기억되고 있어 어디 하나 편안히 숨 쉴 만한 안전한 공간이 없다고 느껴진다. 사건 이후로 공포의 땅 위에 고립되어 있다.- P228

나는 멤버십 회원이지만 적립할 수 없다. 확인 차원에서 "김지은 회원님 맞으시죠?" 하고 계산대에서 이름을 불리는 일이, 사람과 마주하는 일이 여전히 숨 막힌다. 쉽지가 않다. 그저 재빨리 가게를 나가고 싶을 뿐이다. 사실 가게에 가는 일도 드물다.- P232.233

성폭행은 성폭행대로, 2차 가해는 2차 가해대로, 사생활 침해는 사생활 침해대로, 언어폭력은 언어폭력대로, 괴롭힘은 괴롭힘대로, 모욕은 모욕대로, 명예훼손은 명예훼손대로 각기 다른 화살들이 모두 다 내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P235.236

8개월 만에 다시 입원했다. 통원 치료를 꾸준히 받아왔지만, 그것만으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서였다. 최근 몇 달 새 체중이 9킬로그램이 늘었다. 병원에서는 폭식증이 너무 심해서 더 이상 살이 찌면 안 된다고 했다. 그전에는 영양실조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폭식증이라고 했다. 몸도 마음도 바스라진 상태였다. 추슬러서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응급실을 경유해 전문의 진료를 받았고 의료진 판단에 따라 늦은 밤 긴급히 입원이 결정됐다.- P270.271

우울의 구름이 내 머리 위에 비를 내린다. 한참을 맞다 우산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내리는 우울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간호사 호출기를 눌렀다. "안정제 좀 부탁드릴게요." 약이 흡수되어 안정을 찾아갈 때까지는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좋다.- P278

어느 친구가 내게 말했다.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영부인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다시 한 번 고마워." 민망할 정도였다. 서글펐다. 내가 그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 일한 시간들이 스쳐 갔다. 온 몸이 서늘하고 머릿속은 스산해졌다. 내가 죽을 때까지 이 고통은 계속될까? 벗어나고 싶다.- P279

가족들이 나를 걱정하는 게 싫었다. 어쩌면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내 불안한 미래를 들킬까 봐 철저하게 가림막을 치고, 좋은 것만 짜잔 하고 선물처럼 드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잘 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늘 나를 믿어주셨다.- P286

24시간 업무 중인 수행비서에게 상사의 지위는 24시간 그대로 유지된다. 그것을 고의적으로 성범죄에 이용한 가해자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P294

성폭력 신고는 쉽지 않다. 얼굴과 이름을 내놓고 자신의 인생을 걸어야 한다. 비공개로 신고를 하더라도 피해자가 속한 조직 내에서는 신고자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낸다. 알음알음 피해자의 신상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대부분의 성폭력은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되기에 가해자들은 여전히 조직의 핵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피해자를 향한 조직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2차 가해다. 가해자는 여전히 해당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서 피해자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피해자가 그 힘 밖으로 나오려면 그 분야에서 쌓아온 자신의 미래도 함께 버려야 한다.- P295.296

피해자의 SNS를 모두 털어서는 왜 이날 이렇게 웃었냐며, 왜 아무렇지 않게 일했냐며 공격했다. 피해자의 삶은 잘게 분절되어 해체당했다. 성폭력을 겪었고, 문제를 제기했을 뿐인데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겪는 부당함은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피해 사실을 인정받은 이후에도 피해자는 회사와 학교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이게 내가 만난 미투 이후 피해자들이 겪는 진짜 현실이다.- P296.297

도청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안희정의 운전비서에게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 이에 대해 조직에 호소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야 한다는 이유로, 외부에 알려지만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핑계로 내 피해는 감내되어야만 했다. 그런 조직인 것을 알았기에 나 역시 참고 참다 고심 끝에 시정을 요청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일말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고, 자존심은 무너졌다.- P298

가끔은 나의 삶이 너무 끈질긴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작은 숨결만 있으면 되었다. 메마른 겨울 나무처럼 소리 없이 죽어가다가도, 아주 작은 봄의 기운만 느끼면 새순을 피워내는 그런 삶. 손톱만큼의 희망만 있으면 되었다. 미투를 하기까지, 거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그 작은 희망을 보고 말할 수 있었다.- P311

다만, 성폭력 피해자는 당신과 다르지 않다. 그저 잠깐 교통사고를 당했을 뿐, 그 사고가 깊어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뿐, 결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겪지 말아야 할 끔찍한 경험을 했을 뿐이고, 보통의 사람으로 보통의 일상을 살아간다.- P317

나는 안희정의 다른 피해자들에게 고소나 미투를 권유하지 않는다. 그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P337

저는 단 한 번도 피고인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저한테 피고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사님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피고인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수행비서는 지사님 옆에서 지사님이 업무하는 데 조금의 불편함도 없게 하는 역할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의 임무라고 인수인계받았고,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때는 저의 이러한 열심을 성실하다고 칭찬하였던 주변 동료들이 이제는 법정에서 저의 그런 성실과 열의의 마음을 피고인에 대한 사랑인 양, 애정인 양 몰아가는 것에 다시 한 번 좌절하였습니다. (2018.07.27 1심 결심공판 최후진술)- P344

어쩌면 그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저한테 했던 말들, "나는 어떤 여자와도 잘 수 있다" "모든 여자들은 나를 좋아한다" "나는 섹스가 좋다" "내가 그렇게 잘생겼니?"라는 말, 그건 왕자병이 아니라 치료받지 못한 비정상적인 성적 욕구를 숨기지 못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피고인은 말로는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방식은 굉장히 폭력적이었습니다. 여성, 인권, 젠더 감수성이 중요하고, 이 사회에 대화가 없는 불통을 척결해야 한다면서 실제로 피고인은 폭력과 불통을 행하고 있는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2018.07.27 1심 결심공판 최후진술)-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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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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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의) 지인이 감장을 하는데 가뭄과 홍수로 고춧가루를 구하기 어렵다 하니 좋은 고춧가루 10근을 사서 보내라고 시켰고, 가족에게 줄 간식과 선물도 내가 사 오도록 했다. 그리고 이런 비용들은 수행비서의 사비로 내야 했다.- P100

안희정의 부인이 빵이 먹고 싶다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 시간에 그걸 사러 다녀왔다. 유명 빵집이 멀든 그래서 내 밥을 못 먹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런 구매에 들어가는 돈은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었다.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더 주장할 수도 없었다. 처음 수행비서 인수인계 때 선배가 만들어두라고 한, 한도를 최대로 높인 개인 신용카드의 쓰임을 알게 되었다.- P100.101

정치인 안희정의 대외적 이미지와 내가 업무를 통해 겪는 실상은 낱낱이 상반되었다. 그는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았다. 나의 자리에서는 그에게 아주 기본적인 인권이나 노동권도 존중받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P101

안희정은 성 평등을 지지하는 진보적 지도자인 것처럼 알려져 있었지만 내가 본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권세를 잘 알고 누리는 사람이었다. "내 위치에 이런 것까지 해야 되겠느냐"며 일정을 당일에 취소하기도 했다. 국제 행사였던 한 토론회 참가 일정을 바로 전날 취소하기도 했는데, 패널들이 자신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거기서 반문할 수 있는 이는 그의 주변에 없었다. 나를 포함해 그의 주변인들은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대령하기 위해 노력했다.- P105

고통스러웠던 일은 노동자로서 내가 할 이유가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일들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안희정이 아들과 가는 요트 강습을 예약하거나 의약품을 대리 처방받아 전달하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러 주위에 어려움을 토로하면 "비서는 업무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지사가 지시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내야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P105

늘 괜찮은 척 웃으며 일했다. 행사 중 그에게 다가오는 팬들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며 비난받으면 그다음부터는 더 열심히 막으려 노력했다. 수해 현장을 방문한 지사를 수행했을 때 공식 일정은 10여 분 만에 끝나고 지사는 평소 연락하던 여성과 술자리를 가졌지만 나는 잠자코 수행하며 술에 취해 그가 여성과 어울리고 있는 자리를 지켜야 했다.- P106

노동자로서도 극한에 몰려 있던 상태에서 성범죄가 더해지면서 나는 극도로 피폐해졌다. 고민하고 주저하기를 반복하다 용기 내어 주변에 SOS를 보내기도 했다. 내 상황을 직, 진접적으로 들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 자리와 부름을 피하라고 내게 말했다. 그런 조언을 하는 이들은 내가 회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내게 "네가 조심해라"라고 말했다.- P106

이곳에서 나는 암묵적 제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안희정의 일부 측근들은 모임이 있을 때면 대부분 안희정의 좌석 옆에 여성들을 앉게 했다. "지사님은 여자밖에 몰라." "지사님 가까이 여자가 있어야 분위기가 좋아져." "지사님의 기쁨조가 되고 싶어도 우린 남자라서 못 하니까 너희가 최선을 다해." 여성 참모들에게 그런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했다.- P107

안희정의 참모들 중 일부는 감옥에 다녀오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안희정이 대선 자금 수사를 받고 감옥에 갔던 일은 조직에서 우상화되어 있었다. 안희정은 대의를 위해 감옥에 다녀왔다며 훈장처럼 이야기했고, 주변의 오랜 참모들은 수시로 ‘부하는 주군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와 같은 언급을 했다. 안희정을 대신해 감옥에 다녀왔다는 한 참모는 ‘성골‘로 대우받았다. 법과 원칙보다 조직을 위한 희생이 중요한 곳이었다.- P108

거듭되는 사과와 이어지는 강도 높은 업무들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안희정은 내가 정신적으로 흐트러지는 모습이 잠깐이라도 보이면 괜찮아 보일 때까지 내내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부하 직원을 성폭행하고도 암묵적인 복종을 하게 만들고, 입을 막아버렸다.- P110.111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네 번이나 당해?"
나는 이것을 안희정에게 묻고 싶다.- P111

그러나 그(안희정)가 미투를 언급하며 네 번째 범행을 내게 가할 때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닌 또 다른 처음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사과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느 때보다도 선명히 깨닫게 되었다. 진정한 사과가 아니었다. 다음 범죄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저 나를 범행에 이용하고 묶어두기 위한 목줄 같은 것이었다.- P114

"조배죽."
안희정 조직의 회식 자리에서 고위 참모가 종종 하던 건배사다. "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는 뜻의 기 건배사를 모두가 웃으며 따라했지만, 의미는 뇌리에 새겨야 했다.- P115

안희정을 대통령 만들고 그 곁에 오래 있으려던 사람들에게 나는 ‘조배죽‘의 대상이었다. 한 나라를 경영하겠다는 ‘대의‘로 모인 사함들의 조직을 뛰쳐나왔기에 내게 가해지는 형벌은 더 가혹했다. 온라인의 댓글, 주변의 평판, 지인들을 동원한 조직적인 죽이기까지 다양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악성 댓글을 달고, 법정에 나와 위증을 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P116.117

미투 이후 모든 과정은 위력 그 자체였다. 나는 사실을 밝히면, 물론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 해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내 생각은 순진했다. 내가 상대해야 할 가해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권력 조직이었다. 내가 순진했음을 깨닫고 후회한 적도 많다. 안희정은 30대에 대통령을 만들었고 이후 재선 도지사, 유력 대선 후보로서 권력을 가진 수많은 사람과 친분관계를 맺어왔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는 촘촘했다. 관계가 곧 권력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안희정은 도지사직을 내려놓았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P117

‘안희정의 000‘임을 캐치 프레이즈로 내세우고 그 후광으로 국회의원이 된, 이제 재선을 노려야 할 의원들에게 이 재판은 어떤 의미일까? 답이 정해져 있는 싸움을 나는 왜 하고 있을까? 다들 두려워하는 싸움을 왜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하고 있을까.- P117.118

지사는 전화번호를 직접 누르지 않는다. 수행비서가 전화를 건다. 송신음을 듣다가 전화가 연결되면 귀에 가져가 대드린다. 상대방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에 딱 맞춰 전달해야 한다.- P119

안희정의 잦은 외부 강연과 해위 출장이 언론과 의회에 의해 여러 차례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안희정은 하던 대로 밀고 나갔다. 처음부터 1월엔 스위스, 2월엔 호주, 3월엔 중국, 4월엔 일본 등 한 달에 한번 해외 출장 계획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P119

안희정이 해외에 가 있는 동안에는 조직 구성원들은 휴식을 취했다. 업무를 지시할 사람이 없으니 모두 해외 휴가를 다녀왔다. 나는 갈 수 없었다. 안희정이 퇴임 이후 사용할 일명 ‘안희정 포털‘을 만들어야 했다. 8년 동안 도지사로서 행한 정책과 인명 기록들을 정리하고, 향후 대선 레이스에서 사용할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는 일이었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도와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도청에 들어간 지 채 6개월밖에 안 되는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어 일을 추진해야 했다. 일부 참모는 재판 중에 ‘이 작업을 위해 전문가를 소개시켜줬고, 자신들도 열심히 도와줬다‘고 증언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예정된 회의에도 대부분이 다른 이유를 대며 참석하지 않았다.- P120

일반 공무원들도 이 작업을 탐탁지 않게 보았다. 합법적인 일 처리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도청 예산을 이용해 개인 포털을 만드는 일이었다. 일의 이면을 들여다본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중략) 도와주기로 했던 일반 공무원은 사무실에 와서 내게 커피를 타오라고 시키고는, 이어 커피를 마시며 ‘이 일은 불법이고, 자신은 일반 공무원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한 뒤 돌아갔다.- P120

"여자가 있으면 분위기가 좋아져. 지사님이 부드러워져."
그리고 그렇게 분위기를 풀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내 역할은 충분하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몰랐다. 불쾌했지만, 그 말이 성희롱이며 어떻게 부당한 것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P122

상대적으로 어린 내게 선배들은 반말과 비속어, 욕설을 쉬이 내뱉었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남자들도 자신이 정치권 선배라며 선배로 대우받기를 원했다. 이곳의 위계질서에서 나는 가장 하층민으로, 모두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조직의 막내였다. 이토록 위계를 중시하면서도 호칭은 ‘오빠‘라고 부르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터에서나 술자리에서나 늘 대화의 첫마디는 "오빠가......"로 시작했다. 징글징글했다. "나는 당신 같은 오빠 없습니다. ‘여동생 같아서‘라는 말 제발 그만하세요." 수도 없이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P123.124

나는 미투를 하고 나서야 높은 굽에서 내려왔다. 미투 이후에야 주변에서 처음으로 내게 물었다. "신발이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힘들어 보이는데." 그러고 나서 활동가가 내게 운동화를 선물했다. 끝없이 외모 품평을 받던 환경에서 시작된 높은 굽 생활이 끝나던 날이었다. 불편한 줄도 몰랐던 그 굽 높은 신발이 정말로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운동화를 신게 되었다. 물론 가끔은 내 의지로 높은 굽도 신고, 멋진 옷도 입고 싶다. 어디까지나 내가 원할 때 말이다.- P124

짐을 빼서 다른 비서실로 옮길 때는 무거운 상자를 혼자서 옮기는데 빨리 나가지 않는다며 큰소리를 들었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 동료에게 당한 대우가 너무 비참해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때 보였던 눈물은 이후 안희정과 멀어져서 울었던 것이라는 거짓말이 되어 세간에 돌았다. 정무비서가 된 것은 승진한 것인데도 내가 슬퍼했다는 거짓 주장도 나왔다. 역시 잘못된 사실이다 급수는 그대로였고 보직만 변경되었다.- P126

수행비서를 하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비협조적이었는데, 정무비서가 되면 더 심할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가장 불안하고 괴로웠던 것은 내게 왜 정무비서로 가는지 아무도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현실이 납득되지 않았다. 주변에서 내가 ‘잘렸다‘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P126.127

(충남도청 상급 공무원의 기간제 근로자에 대한) 도청 성희롱 사건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어진 화제는 안희정이 스위스 다보스포험으로 출국할 때 공항패션으로 사진 기사를 한번 내는 게 어떻겠냐는 주제였다. 토론은 활발히 이어졌다.- P130

(1심 재판부에서는) 피해자 진술 시 피고인과 분리해주겠다고 했지만, 피고인이 소리가 잘 안들린다고 하자 내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바로 재판정 안으로 들였다. 얇은 가림막이 설치되었지만 숨소리까지 그대로 들렸다. 나는 두려워서 그 방향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실상은 피해자 바로 옆에 피고인을 앉힌 것이다. 공포스러웠다.
피고인이 움직이는 소리와 기침 소리가 들렸다. 안희정은 내가 진술할 때마다 수시로 헛기침을 했다. 마치 수행할 때 관용차 안에 있는 것처럼 아주 작은 공간에서 안희정 옆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16시간을 덜덜 떨면서 진술했다. 한여름 날이었지만 체온이 급격히 내려가 손끝과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P144

증인들은 첫 번째 피해 이후 내가 찾지도 않은 순두부를 찾았다고 했고, 들어가지 않은 부부 방에 들어갔다고 했으며, 마지막 피해 이후 만나지도 않은 날 나와 만났다고 돌아가며 위증했다. 모욕적이고 괴로운 말들이었다. 언젠가 위증의 죄도 꼭 묻고 싶다.- P145

3심 상고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배정된 대법원 재판부의 대법관이 기피 신청을 했다. 피고인과의 연고로 인한 이유라고 했다. 피고인이 연고를 갖지 않은 재판부가 과연 있을까? 1심, 2심, 3심 모두 두 번 이상 재배당됐다. 전직 대통령이나 대기업이 주로 받곤 한다는 재판부 재배당과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관과 얽힌 인연들이 왜 이토록 빈번하게 생길까?. 이 반복되는 유예가 안희정의 위력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위력은 존재하나 행사하지 않았다"던 서울서부지방법원 조병구 재판부의 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내가 겪은 재판 과정의 면면이야말로 곧 그 위력이 어디까지 닿는지를 절실히 느끼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P146.147

피고인(안희정) 측 변호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답변이 나오지 않거나 내가 혼란스러워할 때 검찰 조서에는 있지도 않은 말들을 조서를 넘기듯 보며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질문했다. 안희정의 변호인에게 항의하자, 변호인은 "변호사는 얼마든지 유도심문할 수 있다"고 당당히 답했다.- P148

(1심) 재판부는 내게 정조보다 무엇이 더 중요했는지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반박하고, 관련된 증거를 내고, 담담이 이겨내는 것뿐이었다. 수치와 감내 모두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P149

직장에서 나의 생사여탈권을 쥔 안희정은 내가 도망쳐 나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P150

세 명의 판사는 안희정에게는 묻지 않았다.

‘왜 김지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여러 차례 농락했는가?‘
‘왜 직접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는가?‘
‘왜 세 번이나 입장을 번복하였는가. 일관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왜 검찰 출두 직후 휴대폰을 파기했는가?‘- P150.151

하지만 자극적인 말들과 허위 증언 앞에 내가 낸 객관적인 증거와 수십여 시간에 걸쳐 받은 진술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들로 치부되었다. 사실이 중요한 것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채로 여론과 선정성만이 중요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드는 데 얼마 전까지 나의 동료였던 사람들이 참여했다. 2차 피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큰 배신감과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꼈다. 권력 앞에서 사인 간의 우정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배웠다. 인간은 없고, 조직만 있었다.- P156

1심 재판의 심문이 검찰 측 증인은 일부 공개, 피고인 측 증인은 전부 공개가 되면서 언론에 노출된 정보의 불균형이 극심했고 수많은 억측과 거짓이 양산됐다. 이 거짓의 파도에 쓸려 내려온 거친 유리 조각들을 지금도 여전히 줍고 있다. 하지만 언제쯤 다 치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괴로운 일이다.- P157

이후 2심 중 안희정은 ‘연인 관계‘에 대한 진술을 여러 번 번복했다. 모든 성추행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번복했다. 결코 그런 적이 없다, 어쩌다 그랬을 수도 있다, (나는) 대중의 시선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친밀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손을 잡는 등의 가벼운 접촉은 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호감이 있었기 때문에 잠깐잠깐 만지는 스킨십은 있었을 수 있다, 연인 관계라면 그 정도는 가능한 것 아니냐......- P158

안희정의 수행비서로 일하기 전 정부 부처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지만 그 어떤 상사도 친하다는 이유로 내 손을 잡지 않았다. 그것이 엄연한 성추행이라는 것은 사회인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안희정이 그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무엇이든 허용된 자리라고, 자신은 그래도 된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 같다.- P158

함께해주는 사람들은 말했다. 조직의 배신자로 비난받고 있지만 김지은을 돕는 게 내 소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이어서 다행이라고, 김지은 개인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 자아를 지키고 내 가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말이다.- P160

모든 것이 끝나고 마음이 추슬러지면 정식으로 항의하고 싶었다. 어떻게 피해자도 받지 못한 (항소심) 판결문 전문을 단독 입수하게 되었는지, 왜 개인정보 보호도 없이 공개했는지 묻고 싶다. 왜 법원은 이것을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외부에 주었는지, 왜 실명 버전을 주었는지, 성폭력 사건의 판결문이 단독 입수되고 외부로 노출되어 버젓이 기사화되는 데도 왜 어느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피해자가 겪을 고통과 모욕은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다.- P168

그저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신뢰해주는 것, 그것이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가장 큰 힘이 됨을 직접 경험했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그 말 한마디에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성폭력 피해자는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다.- P170

전략의 목적은 명확했다. 메시지를 반박하지 못하니 메신저를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이 여자가 어떠어떠한 사람이기 떄문에 피해자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어떤 과거가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아닐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내가 낸 증거들과 상관없는 진술들로 나의 말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애초에 ‘피해자의 과거의 이력‘을 묻는 것은 해외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P172

위력의 무서운 점은 위협적인 말을 듣지 않아도, 스스로 몸이 굽혀진다는 것이다. 위력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다. 타인의 의사를 제합할 수 있는 유형적, 무형적인 힘이다.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한 경우는 물론,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의사를 제압할 경우도 포함된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힘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다. (중략) 그 위력에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참는 일은 많다. 그럼에도 개인은 그 안에서 자신의 업무나 학업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위력이 존재한다고 해서 학교나 직장을 바로 그만두지는 않는다. 그것이 위력의 실상이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P174.175

안희정의 성폭력 범죄를 증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증거는 따로 있었다. 그런 자료들이 재판에서 증거로 다루어졌고 판결문에 인용되어 유죄 판결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재판은 비공개였다. (중략) 합리적이고 공정한 판결에 의문을 제기하는 언동들이 2심 재판부를 비난했다. 일부 언론들도 "같은 사안, 다른 판결"이라며 "피해자 말이면 다 믿는 성 인지 감수성"이라고 기사를 썼다. 추가 증거와 추가 증인 신술에 피고인 진술까지, 그 외 모든 점에서 1심과 2심은 엄연히 다른 재판이었다. 그저 공소 제기된 범죄가 같을 뿐이다.- P178

성폭력 기사만 봐도 내 얘기가 아닐까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른 뉴스에 사건을 연상시키는 말들, 충남도청, 민주당, 국회의원, 도지사, 러시아, 스위스, 미투 등이 나오면서 나는 불안에 휩싸인다. 연쇄 작용이라는 것은 놀랍다. 찰나에 순간이동을 해 나는 다시 한 번 사건을 경험한다. 어느 때는 내 심장이 콩콩콩 뛰는 것조차도 아프고 저리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된 것 같다.- P221

수행비서를 할 때 안희정에게 꾸중을 듣고 욕도 먹었지만, 안희정 팬들에게는 더 심한 욕과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저런 깐깐한 년, OO년, 지사 옆에 붙어 있는 년, 비서년, 여자수행년...... 인수인계받은 원칙대로 일했지만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이전 남자 수행비서들이 듣지 않았던 욕을 더 들어야 했다.-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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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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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의 무분별한 선동을 주워 담는 데는 수백 개의 정리된 문장이 필요했다.- P10

살아내겠다고 아등바등 지내온 시간들이 흰 종이 위의 활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며 위로받았다.- P11

피해를 당한 이후 죽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살고도 싶었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을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다. 살기 위해 잊어야만 했다.- P14

사건과 일을 철저히 분리했고, 가해자 안희정과 직장 상사 지사님을 철저히 분리했다. 그렇게 가해자에게서 도망치지도 소리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붙들려 살았다. 이것이 ‘해리 증상‘이라는 것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P15

안희정의 참모진들은 나를 ‘순장조‘라고 불렀다. 왕이 죽으면 왕과 함께 그대로 무덤에 묻히는 왕의 물건처럼, 수행비서는 왕과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비서는 누구도 모르는 왕의 비밀을 알고, 죽을 때까지 함구하다, 죽음으로 그 입을 끝까지 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P15

"제가 감히 어떻게 미투를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내게서 미투를 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결국 내 대답으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후 안희정은 내게 다시 성폭행을 가했다.- P17

범죄가 끝나고, 새벽 2시가 넘은 늦은 시간 안희정은 내게 말했다. "아침에 아내가 오기로 했으니 청소를 하고 나가라." 청소 도구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었다. 먼지 제거 테이프로 침구를 정리했다. 내가 청소하고 있을 때 골프 채널을 보던 안희정이 빨리 안 나가고 뭐 하냐며 재촉했다. 청소가 늦어져 언짢았던 것 같다. 그 격앙된 목소리에 놀란 나는 청소하며 주운 한 줌의 쓰레기들을 어디에 버려야 할지 몰라 가방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밖으로 나왔다.- P17.18

K는 그 전부터 안희정을 매우 어려워했다. 늘 일을 하러 들어갈 때 나나 다른 여자 동료인 Y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영상 촬영 때 함께 있어달라고 했다. 여성이 있어야 촬영 분위기가 나아진다는 이유에서였다.- P20

하지만 내가 안희정의 ‘사생팬‘이었고 안희정이 보고 싶어서 (안희정이 KBS ‘명견만리‘를 촬영 중이던) 방송국에 갔다고 안희정 측은 주장했다. 동료 K도 그런 맥락으로 이야기했다. K는 자신이 내게 업무 도움 요청을 했고 내가 도와줘서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주변 동료에게 했었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그 말이 달라졌다.- P20

사심으로 일을 한, 지사의 사생팬인, 신뢰할 수 없는 이상한 여자. 그리고 나를 향한 그런 프레임화는 이후 이어진 지난한 재판 과정 내내 그들의 집요한, 거의 유일한 전략이었다.- P21

안희정은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였고 미래 권력이었다. 미래 권력은 현재 진행형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청와대부터 정재계에 이르기까지 안희정과 관계를 맺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차기 대통령이라 여겼다. 차기 1위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뒷받침해주고 있었고 실제로 사람들은 안희정을 그렇게 대했다. 학생운동과 386이라는 끈끈한 연대도 있었다. 안희정은 그에 상응하는 의전과 예우를 받았다. 안희정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 유명세를 함께 누렸고, 외부의 많은 사람이 그와 알고 지내고 싶어했다. 사회 곳곳과 관계 맺어 생물처럼 다각도로 뻗어 나가는 살아 움직이는 거대 조직, 그 자체가 안희정이었다.- P22

후배와 나눈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이전에 나는 후배에게 안희정의 눈빛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내게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낸 것이다. "언니가 전에 말한 지사님이 쳐다보는 그 눈빛, 온몸을 훑는 그 느낌이 뭔지 알겠다"며, 안희정이 그를 계속 부르고 찾는다고 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만 도망쳐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로 끝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이 악몽 같은 소굴에서 벗어나도 다른 피해자는 계속 생길 것이다.- P25

기자를 만나면서도 안희정이 사전에 손을 쓰기 전에 무사히 고발할 수 있도록 보안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안희정이 알아버리는 순간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제발 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바로 다음 날 안희정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애초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다. 나는 이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희정의 네트워크를 잘 알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든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P27

그러나 방송국에 들어서는 순간 주저했다. 피해 사실만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면 평탄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방송을 앞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주저하고, 용기 내고, 다시 주저하고 용기 내기를 반복했다. 이를 악물었다. 죽어서 사는 길에 들어섰다.- P29

앵커의 첫 질문을 받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조명 빛이 점점 커지며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어지러웠다. 나를 여기에 앉게 한 모든 상황이 다 원망스러웠다.- P30

김지은/충남도 정무비서: (전략) 그가 가진 권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늘 수긍하고 그의 기분을 맞추고 항상 지사님 표정 하나하나 일그러지는 것까지 다 맞춰야 하는 게 수행비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원해서 했던 관계가 아닙니다. (JTBC 인터뷰)- P32

김지은: 저는 지사님이랑 합의를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지사님은 제 상사이시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그런 사이입니다. 저랑 지사님은 동등한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JTBC 인터뷰)- P33

김지은: 제가 증거이고 제가 지사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다 얘기할 것입니다. 제 기억 속에 모두 다 있습니다. (JTBC 인터뷰)- P39

언론이 아닌 법정에 증거로 제출한 모든 것이 여과 없이 자극적인 소비재로 가판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P51

오랜 시간 정신을 부여잡고 진술하는 건 숨이 막히게 힘들었다. 나는 가해자가 아니고, 피해자였지만 내가 고발한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끊임없이 질문받고, 답을 했다. 밤을 새고 나왔을 때 나와, 번갈아가며 조사를 함께 한 변호사들,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한 활동가 모두 기력이 바닥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갈 떄보다 이상하게 더 생생해져 있었다. 켜켜이 묵혀 놨던 진실을 드러내놓으니 그제야 살아 있다는 게 느껴졌다.- P55

2018.03.21
심리 분석 전문가를 만나 하루 종일 심리 분석을 받았따. 수많은 질문지에 답하고 수많은 테스트를 받았다. 힘겨운 기억들을 꺼내야 했기에 분석을 받는 동안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P57

마치 조직적으로 움직이기라도 하는 듯 빠르게 만들어지고 퍼 날라지는 가짜 뉴스들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수천 명이 가입한 안희정 지지 카페나 유튜브에 누군가 허위 사실을 만들어 올리면 그것은 그대로 사실이 되어 순식간에 수만 명의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P60

(전략)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소신으로 리더의 정치관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캠프에 참여했고, 열심히 일했지만, 지금은 도려내고 싶은 시간으로 기억될 뿐입니다. (후략) (2018.03.11 편지)- P61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하지 않은 유명인들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안희정과 자신을 한팀이라 불렀다. 안희정은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였다.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걸 보아왔기에 나를 드러내지 않고 수사 기관에 수사를 요청한다면, 이 사건이 덮이거나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함께 지켜봐달라고 말하는 것만이 내가 죽지 않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거대 권력 앞에서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P64

성폭력 사건 본질 그대로, 진실 그대로 알려지길 원했다.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을 테니 제발 사건에 집중해달라, 제발 제대로 수사해달라, 진행 과정을 지켜봐달라 애원하는 마음으로 나를 방송에 드러냈다.- P65

허구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거짓은 생명력이 강했다.- P72

그런 구조 속에서 계약 연장으로 살아남은 선배와 정규직 선배들이 해준 공통의 조언은 ‘공부‘였다. 전문 학위를 따야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며 학업을 권유했다. 그 조언을 듣고 빚을 내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루 업무를 마치면 곧장 학교로 가서 공부를 했다. 예술학 석사학위를 통해 생존을 조금 연장할 수 있었고, 행정학 박사과정을 통해 계급을 약간 올릴 수 있었다. 지식과 지혜를 얻기 위한 공부이기보다는 계약직으로서의 삶을 조금 더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분투였다.- P75

지내면서 알게 되었으나 캠프의 사람들은 대부분 말로만 일을 하고, 정작 움직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P78

여전히 정치라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캠프에서 나는 일을 미친 듯이 하는 아주 괴이한 존재였다. 동료들은 나를 ‘일의 노예‘라고 불렀다.- P78

일을 하면서 캠프가 정부 부처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캠프는 단순히 일하는 능력이나 학위 같은 스펙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평판을 중요시 여겼다. "누가 그러는데 걔 어떻다더라"라는 평판조회가 비일비재했기에 선배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누군가의 눈 밖에 나면 그것은 곧 커리어의 끝을 의미했다.- P78.79

종종 위법과 편법을 목격했다. 선거라는 것이 원래 이런가 싶었다. 알아서는 안 되는 일투성이인 무서운 곳에 온 것 같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많았다.- P79

경선이 끝난 뒤, 안희정 조직의 결정에 따라 문재인 캠프에 가서 일했다. 그곳에서도 홍보 업무를 맡았고 선거는 민주당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선배들로부터 충남도청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아 도청에 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내게는 ‘안희정 사단‘이라는 꼬리표가 문재인 캠프에 있을 때에도 나는 ‘안희정 캠프‘ 사람으로 분류돼 소외되었다. 정치권에서 출신 꼬리표를 떼는 것은 흡사 호적을 말소하는 것과 같이 여겨졌다. 다시 정부 부처에 들어가는 일도 어려워졌다. 내가 정치적 중립을 가져야 하는 공무원 직급에서 얼마나 큰 리스크를 가진 사람이 되었는지 뒤늦게 알게 됐다.- P79.80

캠프에서 일할 당시 캠프 안의 분위기는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모두가 후보 앞에서는 경직됐다. 후보의 말에 대들지 말고 심기를 잘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를 선배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다. 정치권에 온 이상 한번 눈 밖에 나면 다시는 어느 직장도 쉽게 잡지 못한다는 말도 늘 함께였다. 이력서보다 선배들의 추천과 입김이 채용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정치권의 평판 조회는 무서운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봐야 했고 웃어야 했다.- P81

불공정함을 바로잡고 약자를 보호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곳이 더없이 세상의 부정과 불의를 합축하고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대의 앞에서 다른 모든 것은 사사로움으로 치부됐다. 때로 용기 내어 조직의 문제에 대해 말하면 그저 견디라고 했다.- P81

2017년 7월, 별정직 공무원으로 도청에 들어가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채용이라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충남 홍성으로 내려갔다. 전임 수행비서는 운전비서로 시작해 지사를 8년 가까이 모셨지만 해고 일주일 전에 통보를 받고 나가게 되었다고 했다. 전임자에게는 부양해야 할 두 명의 자녀와 아내가 있었지만 생계를 위한 어떤 조치도 없었다. 별정직 공무원의 임면 권한은 절대적으로 기관의 도지사에게 있다는 걸 실감하며 일을 시작했다. 수행비서의 업무 특성상 통상 두 달이 걸리는 인수인계도 5일 만에 끝났다.- P83

도청에서 여성 수행비서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우려와 반발이 컸다. 고된 업무이고 조정 능력이 필요하니 남자가 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뤘다. (중략) 우려대로, 도청 조직을 처음 경험하고 부족한 인수인계를 받은 내가 수행비서 역할에 적응하는 과정은 너무나 어려웠다. 부서 업무를 조율하고 지사의 지시를 전달해야 했지만, 내게 협조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것이 지사의 지시 사항이라고 할지라도 여성, 그것도 조직의 신참 여성이 전달하는 지시를 제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 P84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져 매일매일 유리 조각처럼 깨지는 정신을 쓸어 담으며 버텼다. 수행을 하며 안희정이 주변의 친한 여성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아야했다. "지은아, 수행비서는 봐도 못 본 거야." 내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다른 여성들과 스킨십을 했다. 그런 모습들을 가까이에서 보는 일은 혼란스럽고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업무 현장에서 다들 내가 여자인게 문제라 말했으니, 나는 그저 주어진 업무를 성실하게 하는 능숙한 직원이 되어야 했다. 가르침받은 대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P85

안희정에게 첫 피해를 당할 때쯤에는 이미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직 대권만을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 갇힌 채, 어디에도 어려움을 이야기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는 상태였다.- P87

제일 처음 인계받은 내용은 지사가 구두를 편히 신을 수 있도록 어떤 위치에 어느 정도의 각도로 놓아야 하는지였다. 지사가 공관에서 나가서 들어오기까지의 모든 것이 다 수행 업무라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시작이 지사의 구두였다. (중략) 수행비서는 지사보다 2시간 일찍 일정을 시작해 1시간 늦게 끝마치는 패턴이었다.- P88.89

"(전략) 병장을 웃기는 이등병의 마음을 가져라, 공식 일정 이후 시간, 기업, 친구, 여자 이야기는 주변에 함구하라, 특히 여자 관련해서는 인수인계서 메모에서도 삭제해라, 단어 언급조차 하지 말고 어디에 쓰지도 마라, 보고 듣고 알아도 비밀을 유지하고 반드시 함구하라, 중요하니 재차 강조한다 (...)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인수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사님 기분‘이다. 여기에 별표 두 개를 그려라, 인수인계 사항들은 모두 지사님 기분을 맞춰드리기 위한 것이다."- P90

안희정은 전지적 상사였다. 특히 비서는 그의 기분을 건드리면 안 된다. 기분이 중요하다는 말은 무형화된 권력을 구성하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가 누군가를 자를 때는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는 한마디면 됐다. 특히 별정직은 도지사에게 절대적인 채용과 면직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지사의 말 한마디면 바로 해고될 수 있었다. 상사의 기분에 따라 잘릴 수 있었다. 비서의 중요한 역할이 지사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라고 인수인계를 받을 때도 여러 번 들었다. 실수로라도 기분 나쁘게 하면 안 된다고 당부받았다. 인사권자의 ‘기분‘이 업무의 핵심이었다.- P90

안희정은 침묵만으로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침묵만으로도 불편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지위를 갖고 있었다. 문자 연락에 답이 늦으면 바로 "..."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 이 메시지는 내 전임자들에게도 사용하던, 무언의 질책이 담긴 불편한 심기의 표현이었다.- P90.91

보안, 함구, 비밀 유지를 원칙으로 지사를 보필하면서 지사의 마지막 방패가 되는 사람이 수행비서라고 전임자에게 들었다. 지사도 인수인계 당시 나를 전 일정에 배석시키며 말했다. "너는 직언하지 말고 모두가 NO할 때 YES해야 한다. 너는 나의 보조 이거 장치로 작동하면 된다." "너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고, 내 그림자다. 내 눈을 봐라. 나는 눈으로 얘기한다. 너는 나를 지켜야 한다." 그런 말들을 세뇌하듯 반복했고 전화가 오거나 뭔가를 할 때 항상 비밀 유지를 강조했다.- P99

(안희정의) 휴가 때나 명절에 아들과 요트를 타러 가거나 가족끼리 놀러 가는 일정의 숙소, 식당, 체험 활동 등을 알아보고 예약해야 했고 지사의 친구 가족이나 지인들이 묵을 장소도 알아봐야 했다.- P100

맥주, 담배 같은 개인 기호품도 수행비서가 대신 사서 숙소나 집무실로 가져다주어야 했다. 미투 이후 나는 "왜 네 번이나 지사의 방에 갔으냐"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지만, 그날들은 사적 심부름 때문에 불려 갔던 수백 번 중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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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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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의 첫날이 다시 떠올랐다. 독일인. 적. 불구대천의 적. 패퇴한 적. 이 마지막 생각은 소름 끼치는 전율도 함께 안겨주었다. 그는 순간 특정 회로의 전체 임피던스(*교류회로에서 전압과 전류의 비율)을 구하는 계산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마리아)는 패했다. 당연히 그의 소유였다. 정복자의 전리품,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과 영웅적인 행위와 희생을 통해 얻어낸 그의 것이었다. 얼마나 굉장한 희열인가! 옳다는 것, 승리한다는 것, 보상받는다는 것은.- P148.149

이제 그만의 비밀스러운 연극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다른 것을 원했다. 판타지가 아닌 리얼리티를. 어쨌든 그녀에게 말하는 건 불가피한 다음 수순이었다. 자신의 힘을 인정받고 그 힘 때문에 마리아가 아주 조금만 괴로워하길, 그래서 최고의 쾌감을 느끼길 바랐다.- P152

시키는 대로 하기 시작하면 그녀도 이 무언극이 모두 쾌락을 위한 것임을, 그만이 아니라 그녀의 쾌락을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겠지. 그러면 두려움도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내 말대로 하게 될 거야." 그는 그래주겠느냐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눌렀다.- P155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턱이 툭 떨어지고 입술은 벌어져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경이, 아니 심지어 감탄 섞인 존경이었을지도 모른다. 곧 모든 게 달라져 즐거운 순응과 변신이 이어지겠지. (중략) 이제 같이 깔깔 웃고 있어야 하는데, 그는 생각했다. 이건 게임이었다. 짜릿한 게임. 이런 식으로 지나치게 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잘못이었다.- P156

"이제 네 차례야, 이 개새끼야, 떨려나기 싫으면 웃어."- P175

그후 몇 달 동안 가끔씩 블레이크 부인을 집 근처에서 보았다. 등이 꼿꼿한 미모의 그녀는 레너드를 보면 미소지으며 인사했지만 그는 그녀를 피했다. 그녀 앞에서는 스스로가 초라한 느낌이 들어 거북했다. 로비에서 어쩌다 그녀가 얘기하는 걸 들었을 때도 주눅들게 하는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P180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남자가 강간을 사과하면서 어둠 속에서 슬금슬금 다가온단 말인가?- P196

두번째 사건은 옥토버페스트 기간중에 일어났다. 그들은 일요일에 티어가르텐을 찾았고 다음날과 그 다음날 저녁에도 갔다. 텍사스 로데오도 보고 소규모 공연도 샅샅이 구경하고 맥주를 마시고 통돼지를 꼬치에 끼워 굽는 것도 구경했다. 파란색 네커치프를 한 어린이 합창단이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마리아는 움찔하면서 그애들을 보니 히틀러유겐트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나 레너드에게는 노래가 아련하면서도 퍽 아름답게 들렸고 아이들은 어려운 화음을 자신만만하게 소화했다.- P211

크리스마스를 맞아 귀국하면서 레너드는 마리아에게 함께 가자고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그녀는 자기가 연상의 이혼녀에 독일인이고 더욱이 약혼한 사이도 아니니 레너드 어머니의 환영을 받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너무 융통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부모님이 여러 규칙들을 고지식하게 지키며 절제된 생활을 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집에 온 지 하루 만에 그녀가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쉽지가 않았다.- P214

레너드는 마리아가 그리웠고 마리아만큼이나 터널도 그리웠다. 팔 개월 가까이 매일같이 터널 끝에서 끝까지 발소리를 죽이고 다니면서 습기가 차지는 않는지 전선을 점검했던 그였다. 그러는 사이 터널의 흙과 물, 금속은 물로 지상의 그 어떤 정적과도 다른 깊고 숨막히는 정적을 사랑하게 되었다. 멀리 떠나와 있는 지금, 동독군의 발밑에서 비밀을 훔친다는 게 얼마나 대담무쌍하고 터무니없이 신나는 일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구조물의 완벽함, 제대로 된 첨단장비, 비밀 엄수 습관과 그에 따른 온갖 소소한 의례가 그리웠다. 구내식당의 조용한 동지애, 목적의 단일성, 모든 구성원의 유능함, 이 기획 전체와 어울리는 넉넉한 음식에 향수를 느꼈다.- P216.217

마리아는 말했다. "자기(오토)가 얼마나 용감한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을 땐 자기가 목격한 온갖 전투 얘기를 늘어놓는 거야. 그러다 술에 취하면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자랑하고 싶어서 야전본부 전화교환병으로 간 덕분에 전투를 피할 수 있었다고 떠벌리지."- P224

파트너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 상대의 마음을 읽는 것은 신나는 놀이였다.- P227

레너드는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추지도 않고 출 수도 없는 춤을 추고 그들이 싫어할 음악을 좋아하고 그들은 절대 오지 않을 도시를 고향처럼 느낀다는 사실에 흥분 이상의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자유였다.- P228

블레이크는 한참 동안 레너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레너드를 조용한 구석으로 데려갔다. "충고 하나 하지요. 저기 저 친구, 글래스 맞습니까? 저 사람은 빌 하비 밑에서 일합니다. 나한테 저 사람과 같이 일한다고 하면 당신 일이 뭔지 알려주는 꼴이에요. 알트글리니케. 작전명 골드. 나는 알 필요가 없는 것이죠. 당신은 보안상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P235

이 모든 게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과거의 두 사람으로 돌아가려면 힘겨운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두 사람이 하려는 일은 그 길을 영영 막아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그러므로 지금 하는 이 일은 잘못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든 고민을 마쳤고, 밤새도록 상의했다. 그녀는 그를 등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갑은 벗었다. 손끝을 테이블에 대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피곤했지만 한때 두 사람이 그랬듯 질문처럼 끝을 살짝 올려서, 사랑, 섹스, 우정, 함께하는 삶, 그 무엇을 막론하고 본질적인 문제를 상대에게 환기시킬 때면 그랬던 방식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고 애썼다.- P299.300

그들은 시스템을 갖췄으니, 꼭 필요하다면 이 일을 다시 해낼 수도 있었다.- P310.311

상상은 현실보다 더 잔혹했다.- P318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건 정말 너무나,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었어.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자니 당신이 내 말을 들어주고 또 믿어주길 내가 얼마나 바랐는지 새삼 깨닫게 돼.- P407.408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누구와도 그렇게 가까워질수 없었어. 이런 말을 한다고 밥의 추억을 더럽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내 경험으로 볼 때,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것 같지만. 우리 관계는 정말 아주 특별했어. 그건 진실이니까 그 말을 하지 않고, 그 점을 확실히 적어두지 않고 이 생애를 흘려보낼 수는 없는 거야.- P411

그가 옳았다. 분명 그녀의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 먼길을 올 필요가 있었다. 아달베르트 가가 아니라 여기, 이 폐허의 한복판으로. 서리Surrey의 거실에서 포착할 수 없었던 의미가 여기서는 충분히 또렷해졌다.-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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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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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 후에 우리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다. 밥 호프가 나오는 ‘공주와 해적‘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대강당에 앉아 축음기에서 지나치다 싶게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미카도‘를 들었다. 수상은 이 오페라가 ‘빅토리아시대, 그러니까 영국 열도의 역사에서 안토니우스 피우스 시대에 필적할 팔십 년‘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승리의 그늘‘이 우리를 덮고 있으므로......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쇠약해질 테고, 돈도 힘도 없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가만있어야만 할 거라고 수상은 덧붙였다.

얄타 회담이 끝나고 열흘 후 수상 별장에서 벌어진 처칠과의 만찬에서,
존 콜빌, ‘권력의 언저리: 다우닝 스트리트 일기, 1939~1955‘- P5

만남의 자리를 주도한 쪽은 로프팅 중위였다. "이것 봐요. 마넘 선생. 방금 도착했으니 상황을 알 리가 없지요. 이곳(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독일 베를린)의 문제는 독일인도 러시아인도 아닙니다. 프랑스인도 아니에요. 미국인들이지. 그치들은 뭐 하나 아는 게 없어요. 설상가상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니까. 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위인들이에요."- P9

아까 오후에 템펠호프 공항에서 레너드를 데려온 육군 운전병이 올림픽 스타디움 주차장에 대기중이었다. 레너드의 숙소는 차로 몇 분 거리였다. 상병은 조그만 카키색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어주었지만, 슈트케이스들을 꺼내는 것까지는 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P12.13

자기만의 집이라니. 그로 인해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P13

전쟁 당시 할머니와 함께 살던 웨일스의 시골 마을 하늘에는 적군 비행기 한 대 뜬 적이 없었다. 총을 만져본 적도, 사격연습장 밖에서 총성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심지어 베를린을 해방시킨 건 러시아군인데도 그날 저녁 베를린의 쾌적한 주거지역을 활보할 때는-바람은 잦아들었고 아까보다 따뜻했다-이 땅의 주인인 양 뻐기며 처칠 수상의 연설에 박자라도 맞추듯 걷게 되는 것이었다.- P16.17

지붕을 날리고 내부를 박살내 창문들이 빠끔히 뚫린 건물 전면만 남겨둔 천 파운드짜리 포탄들을 떠올리면 소년처럼 들뜨지 않기 힘든 법이다. 십이 년 전이었다면 자축의 의미로 두 팔을 벌리고 엔진 소리를 내면서 일이 분쯤 폭격기 흉내라도 냈을 텐데.- P17.18

다음날 아침 그는 여섯시에 일어나 목욕을 했다. 그러고는 다양한 명도의 회색과 다양한 질감의 흰색을 두고 한참 고심하며 천천히 옷을 골랐다. 그는 두번째로 좋은 양복을 입었다가 다시 벗었다. (밥 글래스와) 전화 통화를 할 때처럼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팬티 한 장과 어머니가 챙겨준 매우 두꺼운 조끼만 걸친 채 옷장 앞에 서서 정장 세 벌과 트위드 재킷 한 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이 젊은이는 미국 스타일의 힘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고 있었다. 뻣뻣한 자신의 태도에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에게 영국적이라는 것은 이전 세대가 느끼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공격당하기 쉬운 약점이라는 느낌이었다. 반면 미국인들은 자기네 방식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스포츠 재킷과 어차피 손뜨개 하이넥 스웨터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을 선명한 빨간색 니트 넥타이를 골랐다.- P21

(글래스의) 감색 정장은 구겨지고 군데군데 천이 닳아서 반들거렸다. 레너드는 유심히 보았다. 저렇게나 제각각으로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는 법도 있다.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P23

레너드는 로프팅과 만났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목소리가 꼭 새침데기 같았다. 글래스를 존중하는 뜻에서 그는 자신의 ‘t‘ 발음을 순화하고 ‘a‘ 발음을 죽이려 애썼다.- P24.25

글래스는 딱하다는 눈으로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영국인들이란. 스타디움에 들어앉은 친구들이 뭘 좀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세. 신사인 척하기 바빠 일들을 안 하신다니까."- P25

글래스는 운전대 윗부분을 양손으로 움켜잡고 보행자들과 다른 운전자들을 낱낱이 뜯어보았다. 수염이 난 턱을 치켜든 채였다. 그는 미국인이고 이곳은 (베를린의) 미국 구역이었다.- P27

과묵한 사람은 실수가 훨씬 적다. 아니, 적어 보인다.- P28

"(전략) 하지만 그 친구 생각은 틀렸어. 3급을 받았다면 그게 레이더기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까. 셸드레이크에게 브리핑을 받았다면 자네도 알 테고, 나야 알지만, 자네 보안등급을 조정해줄 자격은 없거든. 그래도 요점은 이거야. 누구나 자기 보안등급이 최고인 줄 알고, 누구나 자기가 전모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 더 높은 등급이 있다는 건 누군가 알려줄 때야 알게 되는 거지. 이번 일에도 4급이 있을지 모르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등급이 조정되는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야 알게 되겠지. 하지만 자네는......"
(중략) 글래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자넨 2급이지만, 3이 있다는 걸 알지. 그건 사실 규정 위반이야. 변칙적 상황이라고. (후략)"- P31.32

정말이지 공을 던지기 직전 왼손을 그렇게 과장스레 쭉 뻗거나 상대의 피치를 보고 바보처럼 야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주황색 공을 높이 띄우는 것은 솔직하게 발산되는 의기양양한 힘이었다. 하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공의 정확성, 상승했다 낙하하는 포물선의 대칭, 캐치를 절대 놓칠 리 없다는 확신은 거의 아름다울 지경이었고, 그 배경-콘크리트, 이중 철책과 그것에 딸린 기능적인 Y자형 기둥들, 그리고 추위-을 자연스럽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P34.35

"(전략) 저 (쇠네펠트) 대로 너머 배수로에 모스크바 고위사령부와 연결되는 소련 육상통신선이 매설돼 있네. 동유럽 수도들과 주고받는 모든 통신은 베를린을 거쳐 다시 나가지. 옛날 제정 통치가 남긴 유산이랄까. 그쪽 일은 위로 파올라가서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거야.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할 거고."- P43.44

레너드는 뭐라 설명하긴 어렵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옴계를 하나 집어들었다. 갈색 베이클라이트 합성수지로 마감된 독일제였다. "저항이 낮은 물질에는 이보다 더 정밀한 기기가 필요합니다. 통풍장치도 필요해요. 이 안에서는 결로가 문제될 수 있으니까요."
글래스는 치하하듯 수염 난 턱을 치켜들더니 레너드의 등을 툭 쳤다. "바로 그런 정신이야. 무리하다 싶을 만큼 요구를 하게. 그런 건 전부 존중할 테니."- P45

"내(글래스)가 말해주지. 다 정치적인 문제야. 우리가 직접 도청장치를 설치 못해서 안 하는 줄 알지? 우리라고 엠프가 없을 것 같나? 자네들을 끼워주는 건 다 정치적 이유 떄문이야. 자네들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어야 하거든. 그래서야."- P48

"그저 보안이나 망치지 말게. 입조심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도 조심하란 말이야. 자네 동포 버지스와 매클린(*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으로 소련을 위해 첩보활동을 한 ‘케임브리지 파이브‘의 멤버 가이 버지스와 도널드 매클린)을 잊지 말라고."- P49

두 사람은 RASC(영국 육군 병참단) 소속으로, 특별히 귀향을 서두르지 않는 징집병이었다. (베를린의) 맥주와 소시지, 여자들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작업을 시작한 그들은 고무 덩어리에 감은 사포로 나무 부분을 매끈하게 문질렀다. 월섬스토 출신이라는 첫번째 남자가 말했다. "여기 여자들은 말이에요. 그쪽(레너드)이 러시아인만 아니면 절대 실패할 일이 없어요."
루이셤에서 온 그의 친구도 동의했다. "러시아인들이라면 끔찍이도 싫어하더라고요. 45년 5월에 이리 진군해 들어왔을 때 짐승처럼 굴었나봐요. 진짜 짐승이요. 이 여자들은 그러니까, 자기네 언니나 엄마나 심지어 망할 할멈까지 강간당하고 찔려 죽었으니까, 아니면 건너건너라도 그런 사람을 아니까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거죠."- P56

"이 삭막한 거리가 한때 도시의 신경중추였습니다. 유럽에서도 가장 유명한 간선도로 중 하나였지요. 운터 덴 린덴이라는...... 저기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정식 국호)의 진정한 본부라 할 수 있는 소련 대사관입니다. 원래 그 자리에는 호텔 브리스틀이 있었어요. 한때 부유층이 자주 찾던......"- P60

러셀은 십 년 전 자신이 스물두 살의 젊은 중위였던 1945년 5월 미국 점령구역 접수를 위해 베를린으로 출발한 프랭크 하울리 대령의 선발대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러시아인이 좋은 놈들인 줄 알았어요. 수백만 사상자를 감수했잖습니까. 투지가 넘치는데다 보드카를 들이켜는 덩치 크고 활달한 놈들인 줄 알았죠. 전쟁 기간 내내 우리가 그쪽으로 산더미 같은 장비들을 보내기도 했고요. 그러니 동맹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요. 하지만 그건 직접 만나기 전의 얘기입니다. 베를린 서쪽 90킬로미터 지점에서 그 친구들이 나오더니 길을 막더라고요. 트럭에서 내린 우리는 두 팔 벌려 그들을 맞았죠. 선물도 준비해놨고, 직접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거든요." 러셀은 레너드의 팔쭉을 덥석 움켜쥐었다. "하지만 놈들은 냉랭했어요! 냉랭했다고요. 레너드! 우리는 샴페인도 준비해놨어요. 프랑스 샴페인이었는데, 그들은 손도 대지 않더군요. (후략)"- P65.66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루이제 에크도르프였고, 나이는 서른살, 레너드의 아파트에서 차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크로이츠베르크의 아달베르트 가에 살고 있었다. 슈판다우의 작은 영국 육군 차량정비소에서 타이피스트 겸 통역으로 일하는 그녀에게는 일 년에 두세 번 불시에 찾아와 돈을 요구하는 오토라는 전남편이 있었다. 가끔은 그에게 머리를 얻어맞기도 했다. (중략) 영어는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스위스에 있는 영국 여학교에서 독일어 교사로 근무했던 할머니에게 배웠다.- P76

"근무시간에 대해 할말이 있다 이건가? 어디까지가 자네 일인가 하는 것도? 이게 그 유명한 영국 공산당 노조의 말투인가? 보안등급을 부여받은 순간부터, 여기서 자네가 맡은 일은 명령을 수행하는 걸세. (후략)"- P84

지금보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그리고 조금만 덜 피곤했다면 자기도 사랑에 사로잡힌, 사랑에 빠진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꾸벅꾸벅 졸지 않고 좀 제대로 앉아서 그 문제에 정신을 쏟을 필요가 있었다. 환상이 피어날 수 있도록 권태와 닿아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일이었다.- P85

그녀(마리아)의 아파트 현관문은 다른 집과는 달리 새로 칠한 녹색이었다. 봉투를 문틈으로 밀어넣고 나서 그가 한 행동은 설명할 수도 없고 전혀 그답지도 않은 것이었다. 문손잡이를 잡고 밀어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잠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일상을 채우는 무의미하고 사소한 행동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문은 저항 없이 활짝 열렸고, 거기 그녀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P94

뒤편의 그 아파트들은 창문이 가운데뜰이나 비좁은 공간 너머의 옆 건물을 향해 나 있었다. 그런 까닭에, 레너드는 성가시게 깊이 따져보지 않았지만, 그때 어떻게 열린 욕실 문에서 늦은 오후의 겨울 햇살이 두 사람 사이의 마룻바닥으로 비쳐들 수 있었는지, 어떻게 허공에 떠돌던 먼지가 붉은 기 도는 황금색의 비스듬한 빛기둥 속에서 반짝였는지 하나같이 수수께끼였다. 이웃 창문에 반사된 빛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아무 상관 없었다. 당시에는 좋은 징조로 느껴졌으니까.- P95

꼭 그가 상상했던 그대로 그녀(마리아)는 쪽지를 두 번 반복해 읽었다.
"무슨 뜻이죠, 이 ‘들렀다’는 게? 다짜고짜 우리집 문을 열어젖히는 게, 그게 들른 건가요?" 그가 막 해명하려는데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게다가 바이 탄테 엘제로 왔으면 좋겠다고요? 탄테 엘제. 그러니까 그 창녀들이 나오는 술집으로?" 그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는 깜짝 놀랐다. ‘미국의 소리’에서 항상 틀어주는 노래였다. "어째서 당신은 나를 그렇고 그런 여자라고 생각한 거죠?"(*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중 ‘Take Back Your Mink’라는 곡의 가사) 브루클린 억양을 흉내내려는 독일 여자에게 이런 말도 안 되게 달콤한 조롱을 당하다니. 레너드는 이대로 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하고 또 짜릿했다.- P96.97

그녀는 영국식으로 차를 끓이고 있었다. (중략)
그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녀는 영국 육군 전기기계기술부대 제12장갑정비소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소장과 부소장을 위해 하루 세 번 차를 끓이는 게 담당업무였다고 말했다. (중략) 젊은 여자들이 대접해준 차는 전에도 여러 번 마셔봤지만, 우유를 밀크저그에 따로 담아내는 수고를 하지 않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P99.100

더이상의 침묵을 견디느니 차라리 시시한 얘기라도 하자고 마음먹은 그는 "여기서 오래 살았어요?"라는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불쑥 말했다. "안경 벗으면 어떻게 생겼어요? 한번 보여줘요. 부탁이에요." 이 마지막 단어를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치다고 여길 만큼 길게 끄는 바람에 레너드의 뱃속에 종잇장이 파르르 떨리는 듯한 섬세한 전율이 퍼져나갔다. 그는 낚아채듯이 안경을 벗고 그녀를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1미터가 좀 안 되는 거리까지는 상당히 잘 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도 부분적으로만 흐릿해졌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생각했던 대로네요. 눈이 이렇게 예쁜데 그동안 내내 가리고 다녔던 거예요. 눈이 예쁘다는 얘기 아무도 안 해주던가요?" (다음)- P101.102

(이어서) 처음 안경을 꼈던 열다섯 살 때 레너드의 어머니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몸이 방에서 부드럽게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안경을 가져가 다리를 접어 선인장 화분 옆에 놓았다.- P102

"그러면 영국에서는 여자 친구들이 있었어요?"
"많진 않았어요."
"얼마나 있었는데요?"
그는 주저하다가 진실을 향해 돌진했다. "그게, 사실, 한 명도 없었어요."
"한 번도 사귄 적이 없다고요?"
"그래요."
마리아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당신 한 번도......"
그녀가 어떤 표현을 쓸지는 몰라도 그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네, 한 번도 없습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1955년에 레너드 같은 배경과 품성의 남자가 스물여섯이 다 되어가도록 성 경험이 없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남자가 제 입으로 털어놓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그는 대번에 후회했다.- P104.105

그녀는 그가 또렷하게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섰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남자가 두렵지 않다니. 그 사실은 그녀로 하여금 그를 좋아할 기회를, 단순히 그의 욕망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욕망을 품을 기회를 주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감싸쥐었다. "하지만 전 아직 당신 눈을 다 들여다보지 못했는걸요."- P109

한번은 옆자리의 수직굴착기사 둘이 미국인 동료들 앞에서 웃음을 애써 참아가며 옛날 얘기를 하는 걸 들었다. 빈에서 이런 터널을 팠던 전례가 있는 모양이었다. 1949년 MI6가 굴착한 그 터널은 슈베하트 교외의 사유주택에서 시작해 도로 밑으로 20미터가량 뻗어가 임페리얼 호텔 주재 소련 점령군 본부와 모스크바 사령부 사이의 통신을 도청하는 용도로 쓰였다. "위장을 해야 했거든." 기사 하나가 말했다. 동료가 그의 팔에 손을 얹자 목소리를 낮추었고, 덕분에 레너드는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도청 장치를 설치하는 동안 드나드는 것들을 위장할 뭔가가 필요했던 거야. 그래서 해리스 트위드(*스코틀랜드의 해리스 섬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트위드) 수입 상점을 열었지. 빈 사람 중 누가 그런 데 관심을 가질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야. (다음)- P117

(이어서)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아나? 거기 사람들이 해리스 트위드를 너무 좋아했던 거야. 줄을 서서 사가는 바람에 처음 들여온 물량이 며칠 만에 동났어. 그래서 그 불쌍한 치들은 해야 할 일은 하지도 못하고 하루종일 주문서를 쓰고 전화나 받아야 했지. 결국 손님들을 돌려보내고 가게를 닫아야 했어."- P117.118

이 작은 소동의 와중에도 레너드는 반사적으로. 거의 무의식 중에 또다른 영국인의 지위를 읽어내는 영국인의 특기를 발휘해 남자의 몸가짐과 외모, 목소리를 평가하고 있었다.- P124

소탈하고 재능 있는 인물들로 이루어진 이 특별한 세대는 현대 과학전의 필요에 따라 1940년대에 정부 요직에 기용된 사람들이었다. 레너드가 그간 만나본 정부 과학자들은 존경스러웠다. 그에게 자신이 매사 어설픈데다 올바른 단어도 구사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불러일으키는 퍼블릭스쿨(*주로 상류층 자제를 위한 대학 진학 예비교육이나 공무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영국의 사립학교) 출신들과는 달랐다. 그런 녀석들은 구내식당에서 절대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적당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에 기대어 사령부의 고위직으로 출세할 생각뿐이었다.- P125

그(존 맥나미)의 치아는 낡은 묘석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P127

맥나미가 다시 그의 귓전에서 중얼거렸다. "이 프로젝트에서 마음에 드는 게 뭔지 말해줄까. 바로 태도라네. 미국인들은 일단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제대로 해내고 비용은 신경도 안 쓰지. 나도 원하는 건 전부 얻어냈는데 군말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다니까. ‘예산을 절반으로 줄여서 해볼 순 없겠나‘ 따위의 헛소리는 절대 하지 않아."
레너드는 누군가 자신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는 생각에 우쭐해서는, 재치 있게 받아쳐보려고 했다. "음식 준비에 얼마나 갖은 애를 쓰나 보세요. 전 미국인들이 감자튀김을 요리하는 방식이 정말 좋아요......"- P129

"간단히 설명해주지. 발견된 사실에 따르면 말이지, 메시지를 전기신호로 암호화해서 송신하면 희미한 전지 반향, 그러니까 원본의 암호화되지 않은 평문의 자취가 함꼐 전송돼. 그런데 그게 너무 희미해서 30킬로미터 이상 가면 사라져버리지. 하지만 적절한 장비만 있다면, 그리고 30킬로미터 이내에서 회선을 도청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암호화를 잘해놔도 판독 가능한 메시지가 텔레프린터로 곧장 들어온다고. 이것이 여기서 벌어지는 전체 작전의 근거야. 별 시답잖은 전화 수다나 듣자가 이런 규모의 설비를 건설한 게 아니라고. 그 사실은 (칼) 넬슨이 발견한 거야. 장비도 그가 고안했고. 빈에서 그 장비를 러시아 회선에 시험해볼 좋은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던 차에 마찬가지로 러시아 회선을 도청하려고 우리가 만든 바로 이 터널로 들어온 거지. 그래서 우리는 아주 너그러운 마음으로 미국인들을 터널에 들이고 설비를 내주고 도청장치도 쓰게 해줬다고. (다음)- P134.135

(이어서) 그런데 저들이 어땠는지 아나? 우리한테 넬슨의 발명품은 언급조차 안 했어. 우리가 암호를 풀려고 골머리를 썩이는 동안 그 물건을 워싱턴으로 가져가 평문을 읽고 있었던 거지. 이런 게 우리 동맹이란 말이야. 황당해서 기가 막힐 노릇이지, 안 그런가?"- P135

"(전략) 자, 저쪽에선 뭐든지 발견하는 대로 우리한테도 알려주기로 약속을 했어. 우리는 그걸 무조건 믿을 수밖에 없거. 그렇지만 저쪽 식탁에서 흘려주는 부스러기에 의지해 살 생각은 전혀 없어.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양측 관계가 아니란 말이지. 우리는 넬슨의 테크닉을 우리 식으로 개발중이고, 훌륭한 잠재적 작전지역도 몇 군데 찾아냈어. 미국인들에게는 함구하고 있지. 고만간 러시아인들도 같은 발견을 할 것이고 그러면 기기를 손볼 테니까 속도가 중요해. 돌리스 힐 팀이 매달려 있지만 누구 한 사람이 여기서 눈과 귀를 열어놓고 있다면 도움이 되겠지. 여기도 넬슨의 장비에 대해 아는 미국인이 한 둘은 있을 거라 생각돼. 기술 분야의 경험이 있으면서 지위는 너무 높지 않은 인물이 필요해. 그들이 나(맥나미)를 보면 1킬로미터는 도망갈 테니까. (다음)- P135.136

(이어서) 우리가 찾는 건 세부사항일세. 전자기기에 관련된 자질구레한 뒷소문이라든가, 뭐든 상황을 진척시킬 수 있는 정보. 양키들이 얼마나 경솔한지는 자네도 알지. 말도 많고, 뭔가 그렇게 흘리고들 다니거든."- P136

밤은 이런저런 변주와 함께 반복되었고, 아침은 변주 없이 반복되었다.- P143

휘파람을 불며 이 노래 저 노래를 조금씩 흥얼거렸다. 처음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야성적인 노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감미로운 사랑 노래들은 지나치게 점잖고 차분했다. 사실, 지금 그에게 딱 어울리는 노래는 그가 경멸한다고 생각해온 요란한 미국식 허튼소리들이었다.- P144.145

어떤 심리적인 요소가, 자아의 편린, 정말로 좋아하지는 않는 편린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있었다. 처음이라 모든 게 새롭던 단계가 지나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너무 빨리 사정하지 않을 자신이 생기고, 이런 문제들이 말끔히 해결되자, 그리고 마리아가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고 원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확신이 생기자, 사랑을 나눌 때마다 도저히 쫓아낼 수 없는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이 생각들은 욕망과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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