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491
이혜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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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롭게도 여름, 그것도 이렇게나 무더운 해에 이 시집을 읽었다. 백수여서 시원한 집에만 거의 내내 머물렀던 작년에 보았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해 할 겨를마저 없을 정도로 이 여름은 어지럽다. 다만 이 시집에는 다른 해가 아닌 이 해여서 더듬게 된 갈피가 적지 않았다. 비록 요행일지라도 마냥 나쁜 계절은 아닌 셈이다.

 

손끝마다 안개를 심어둔 저녁에는 익사한 사람의 발을 만지는 심정으로 창을 열었다 (습기의 나날)-p.76

 

 올해는 34일 동안 평창대관령음악제에 다녀왔다. 지난해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지지난해에도 겨우 12일을 빼냈을 뿐이다. 올해는 평창도 퍽 더워서 한낮에는 28도를 오르내렸지만, 4일을 머물다 서울로 돌아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익사한 사람의 양 팔이 어깨에 감긴 양 섬뜩했다. 이렇게나 답답하고 축축할 일인가.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이 시를 먼저 읽은 덕에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도망치고 싶었던 기분을 이해했다. 도무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올 여름의 습기는 물에 빠진 듯하고, 그것이 내 생각보다도 죽음에 가깝다는 사실을 배웠다. 게다가 4일 동안 햇빛이 쨍쨍한 평창에서는 물에서 빠져 나와 숨을 돌린 덕에 즐거웠다는 사실까지 알았다. 몇 해의 여름을 그곳에서 보내며 단지 선선한 곳에서 음악만 듣는다고 이렇게 늘 행복할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 모든 풍경에 여름의 생기(生氣)만 가득했음을 실감했다. 죽음에 가까운 습기로 가득 찬 그악스러운 여름을 건조하게 그렸을 뿐인데, 그 사이사이에 스미는 생각들이 이다지도 현격하다.

 

비파가 오면 손깍지를 끼고 걷자. 손가락 사이마다 베어드는 젖은 나무들. 우리가 가진 노랑을 다해 뒤섞인 가지들이 될 때, 맞붙은 손은 세계의 찢어진 안쪽이 된다. (비파나무가 켜지는 여름)-p.11

우리는 방금 돋아난 현악기가 되어 온통 곁을 비워간다. 갈라진 손가락이 비로소 세계를 만지듯이 나무가 가지 사이를 비워내는 결심. (비파나무가 켜지는 여름)-p.11

 

 평창은 애인과 함께 갔다. 공연을 듣거나 마스터클래스를 참관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는 외딴 곳에서 4일을 어찌 보낼지 걱정했더랬다. 물론 애인은 그곳에서 잘 지냈다. 3번의 저녁 공연과 1번의 아침 마스터 클래스를 함께 본 것 외에는 자신의 시간을 느긋하게 흘려보낸 듯하다. 소리에 다소 민감한 편이라 점심 무렵의 공연 2번까지 들으면 내내 피곤할 듯해서 혼자 다녀왔다. 같이 여행을 와서 일부러 따로 일정을 잡는 것이 어색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각자 맞는 시간을 보낸 셈이다. 내가 낮부터 서둘러 음악을 듣는 동안, 애인은 낯설고 높은 곳에서 잠시나마 보내는 첫 여름을 더듬었다. 낮에 억지스레 붙지 않았기에 밤마다 함께 본 공연이 더욱 각별했다. 비파나무가 켜지는 여름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떠오른다. 함께 떠나서도 때로 떨어진 덕에 이 여름의 생기가 온전해졌다. 언제든 맞잡을 손이 있다면 떨어진 만큼 관계는 넓어진다. 깍지 낀 손에 매달려서 풀지 않는 두 손과 주먹을 쥐고서 맞잡지 않는 한 손은 의외로 가깝다.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과 너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은 이미 하나의 무덤이다.

 

 여름 나기가 쉬운 해는 없었지만, 올해는 유별나다. 몸이 편했던 지난해에는 어느 곳에서 일을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마음은 불편했다. 일을 하는 지금은 일을 하느라 무덥다. 이런 여름이라도 떠나고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주 조금은 서운할 테지만, 가자마자 돌아올 테니 애틋할 까닭이 전혀 없다. 순환이야말로 열기, 습기보다 지독하다. 시는 다만 감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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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바닐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491
이혜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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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가 오면 손깍지를 끼고 걷자. 손가락 사이마다 베어드는 젖은 나무들. 우리가 가진 노랑을 다해 뒤섞인 가지들이 될 때, 맞붙은 손은 세계의 찢어진 안쪽이 된다. (비파나무가 켜지는 여름)-11쪽

우리는 방금 돋아난 현악기가 되어 온통 곁을 비워간다. 갈라진 손가락이 비로소 세계를 만지듯이 나무가 가지 사이를 비워내는 결심. (비파나무가 켜지는 여름)-11쪽

속눈썹을 타고 길게 날아오르는 빛의 무리들이 정처를 만날 때 풍경이 탄생한다 (도착하는 빛)-12쪽

그늘을 품었던 방을 뒤집어 환한 구(球)를 얻으면 흔적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도 있었지 잠든 눈가에 진창이 고이듯, 당겨진 눈시울에 먼 빛이 와서 일렁이듯 (도착하는 빛)-12쪽

잠든 이의 코에 손을 대어본 사람은
영혼을 믿는 자다 (숨의 세계)-14쪽

안겨 잠든 새벽에만 들리는 소리가 있어
하나의 검불이 흰 들판으로
순하게 내려앉는 소리
젖은 귀를 어루만지는
외바퀴 소리 (숨의 세계)-14~15쪽

금목서 가지를 꺾어 태우고 향불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불에 물든 장작을 헤집었는가, 연기와 향내가 강 건너까지 자욱하다 누구인가 저 닿지 않는 곳에서도 나의 눈썹을 온통 잔설로 물들이는 이는 (극야)-20쪽

저 너머에 모닥불이 있었다 찾으러 떠나기엔 멀고 바라보자니 추운 (극야)-20쪽

나의 귀머거리여, 사라지는 불빛에 눈과 입술을 데일 때, 부서질 종도 종지기도 없이 종소리만 날카롭게 살얼음 하늘을 찢어놓았지 (극야)-21쪽

나에게 여분의 계절이 있다면, 부리가 사라지려는 새처럼 서둘러 속된 말들을 속삭이고 썩기 직전의 가장 달콤한 노래를 언니에게 선물했을 텐데. (딸기잼이 있던 찬장)-22쪽

눈을 깜빡일 때마다 노크 소리가 난다 (노크하는 물방울)-26쪽

네가 후- 바람을 불어넣자
열린 문 틈으로부터 여름이 시작되었다 (노크하는 물방울)-27쪽

몸의 모서리에만 깃드는 악천후다 (엘보)-28쪽

팽팽히 시위를 걸어둔 입술이 찢기는 순간
나무에게서 밀려난 숲이 되어 구석에게 내버려진 중심이 되어

멀어진다
사랑받았던 속도로 그만큼의 힘으로 (엘보)-29쪽

근사하다는 건 가깝다는 것. 나는 하얗고 너는 희다. 나는 혼자이고 너는 하나뿐이다. 비슷하지만 같은 건 아니야. 우리는 서로의 지붕에 지붕을 보태며 지속되는 빗속을 조금쯤 가깝게 걸어간다. (개인적인 비)-31쪽

동시에 포옹하는 두손은 서로의 박자를 의심한다 (간절)-34쪽

좋은 위로에는 없는 관심이 필요한가요 (잠든 물)-36쪽

옅은 바람에도 온몸을 뒤집어엎는
봄이라는 계절의 안감 (노팬티)-42쪽

깃털을 뽑아 쓰고 싶은 것들을 모두 적는다면 곧 날개를 잃고 낙서들 위에 쓰러져 죽겠지 (탑 속에서)-46쪽

만들어낸 그늘 밑 잠기는 볕
말려드는 이마와 말들이 겹치는
잠시의 잎사귀 속 (손차양 아래)-51쪽

꽃은 물이 색을 빌려 꾸는 꿈
옛 꽃들에 둘러싸인 검은 돌벽 위로
생소한 돌기를 내뿜으며
무수히 가지를 뻗는 여름의 넝쿨 (넝쿨 꿈을 꾸던 여름)-62쪽

가장 연한 거죽을 지녀 스치는 포옹에도 짓무르고 쉽게 흘러내릴 때, 발자국을 씻으며 찾아가야 할 곳이 있었네. (불가촉)-72쪽

기다릴 땐 매초가 칼이 되었다 (순간의 손)-75쪽

손끝마다 안개를 심어둔 저녁에는 익사한 사람의 발을 만지는 심정으로 창을 열었다 (습기의 나날)-76쪽

빛나는 곳에서 눈을 돌리면
언제나 수놓이는 얼룩들의 세계 (밤은 판화처럼)-78쪽

얼어붙지 않기 위해
지속적인 눈물이 필요했다. (눈송이의 감각)-83쪽

날짜들이 웅덩이를 향해 쏟아질 때 얼룩진 눈 뭉치 속에 갇혀 중얼거립니다 내쳐진 펫처럼 녹지 않는 눈사람처럼 (당신 아내를 봤어요)-84쪽

병을 본성으로 삼아 분별과 과거를 잊을 때, 어둠은 비로소 자신의 몫을 얻는다오. (불성실성의 별)-88쪽

입술이 매일 새로 짓는 무덤이라면 뼈는 우리들의 마지막 수의가 아니겠소. 그러니 눈 감는 자에게는 밤이 없다오. (불성실성의 별)-88~89쪽

멍든 자리를 들여다보면 몸의 내부로부터 캄캄한 조명이 비치는 것 같다. 달아다는 죄수를 겨두듯 부딪힌 자리마다 뒤늦게 어두워지고

정원이 깊어진다. (스프링클러)-102쪽

각주가 많은 몸은 슬프지.
죽으면 생전의 멍들이 피부 위로 떠오른다는 이야기처럼. (스프링클러)-102쪽

잠 속에 신발을 한 짝 빠뜨리고
울며 도망치는 아이야.
너는 절룩이며 떠올린다.
신발 속에 아직도 들어 있을
따듯한 발목을. (잠의 검은 페이지를 건너는)-109쪽

나무가 색색의 손인사들을 맞추어
낯익은 단어를 완성하는 공원에서

약속을 생각하면 입술이 녹아내린다
평생 모아둔 라일락을 탕진한 늦봄처럼 (근린)-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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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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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면 어느 슈트라우스라도 만족스럽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유명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지어 왈츠의 왕으로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모두 아름답게 들려 줄 수 있는 지휘자는 카라얀과 그의 선배 격인 클레멘스 크라우스뿐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서 “그 수준에 필적하는 연주를 지금 거의 들을 수 없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보며, 지금도 그의 음반을 들으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펼쳐지는 경지가 이 시대에는 참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높이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게다가 두 슈트라우스와 같이 성격이 상반되는 작품에서 모두 뛰어난 연주를 해 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카라얀이나 클레멘스의 존재는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다.


 이 두 지휘자와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지금은 사라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출신지 외에도, 오스트리아를 강제적으로 병합한 히틀러의 나치 독일 치하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영달을 누렸다는 사실을 공유한다. 나치의 제3제국에 협력한 동기는 서로 다를지언정, 수많은 소수자가 이산과 절멸의 파국에 처했을 때에 이 세 음악가는 바로 히틀러의 비호 아래서 착실히 직업적 성취를 향유하고, 축적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슈트라우스에게서 찾았던 “예술적 에고이즘”은 카라얀이 그 시대에 자신의 예술을 연마하는 데 기계적으로 매진했던 바탕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슈트라우스는 여전히 서양 고전 음악의 거장으로 대우받았고, 카라얀은 오히려 현대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급성장했다. 그 부자연스러우면서도 태연한 서사에는 그들이 전쟁 속에서 희생당한 소수자들을 외면하고 ‘오직’ 예술에 몰입했다는 배경이 존재했다. 만약 그들이 히틀러의 권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는 않았다면 당대의 정치·법률적 책임만 면할 뿐이다. 인간과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본질적 목적과 가치는 외면하고서 외면적 형식과 기술에만 몰입해서 명성과 업적을 이룩했다는 예술적 책임이야말로 더 크고 무겁다. 다만 카라얀이나 슈트라우스야말로 이런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만큼 도저한 성취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까지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피상·독선적인 비난의 한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가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보기 위해 오랫동안 매년 여름마다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림보다도 더 깊이 감각을 자극하는 음악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마냥 빠져들기에는 늘 마음이 무겁고 어두워 보이는 그가 꾸준히 이 도시를 찾는 이유가 궁금했었다. 심지어 그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취소했던 음악제의 한 공연이 일품이었다는 전언에 분한 심정이 들 정도로 음악이라는 예술을 아낀다. 개인적인 선호나 호오를 드러내기보다는 어느 시대에나 발생하고, 지속되는 소수자들의 위기와 이산이라는 운명을 근심하는 모습이 익숙했던 그의 또 다른 면모를 저 짧은 소회에서 엿본 듯했다. 그는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음악적 성취를 보았을 때의 기쁨만큼이나 그 순간에만 통찰할 수 있는 인간·시대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점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카라얀이 빚어냈던 화려한 연주와 슈트라우스가 남긴 정교한 선율에 여전히 찬탄하는 것만큼이나 예술의 본질을 외면한 두 거장의 과오를 비판하는 것도, 실상은 가볍고도 쉬운 일이다. 현재의 인류 앞에 남은 걸작들의 과오를 인식해서 반복하지 않고서도, 그것들이 보여 주었던 탁월한 경지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예술의 길을 모색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언제나 끊임없이 이산하는 소수자의 존재와 위기를 외면하지 않도록 오늘날 시민들을 고양시킬 단서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인 까닭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예술을 외면하거나 부조리한 걸작들만 삭제한다면 무척 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역사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불가능하다는 역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게 특정한 윤리적 방향으로 치달은 예술은 낱낱이 실패했고, 본질과 목표를 외면하거나 부정하고서도 수준과 미감이 탁월한 작품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슈트라우스와 카라얀, 크라우스는 유대인 작가들인 장 아메리나 파울 첼란, 프리모 레비를 나치가 강요했던 참혹한 이산과 자살에서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서로 다른 방향의 이 모든 예술가들을 관통해야만 그러한 역사의 반복을 막을 실마리에 다가갈 수 있다. 언제나 이산당한 소수자로서의 심경에 사로잡힌 이 책의 저자에게 매년 여름 한철, 한 순간을 스치는 잘츠부르크의 모든 선율은 힘겨워도 붙잡아야 하는 자문자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음악을, 예술을 매개로 삼아 디아스포라의 악순환이 끊이지 않는 세계와 그것이 강요하는 근심과 비관을 평소와는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기 위해 애쓴 이 여정은 고단하고도 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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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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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근대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내던져진 디아스포라야말로 ‘근대 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형식이 앞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곤란한 길을 거쳐야만 할 것인가. -6쪽

디아스포라에게 ‘조국’은 향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국’이란 국경에 둘러싸인 영역이 아니다. ‘혈통’과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으로 굳어버린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이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을 의미한다. 우리 디아스포라들은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선 저편에서 ‘진정한 조국’을 찾고 있는 것이다. -7쪽

어떤 떄는 완곡하고 부드러운 말로, 어떤 때는 거친 목소리로 싫으면 나가라고 하는 말을 들어가면서, 그래도 여기밖에는 살 곳이 없는 것이다. -30쪽

2001년 12월, 나는 열흘 정도 런던에 머물렀다. 특별한 용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얼마 전 화제를 모으며 개관한 현대미술관 테이트모던Tate Modern을 찾는 것,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한두 편 보는 것, 필하모니아 관현악단Philharmonia Orchestra과 BBC 교향악단BBC Symphony Orchestra의 연주를 듣는 것,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32쪽

런던에 온 건 몇 번째인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네댓번째는 될 것이다. 젊을 때는 랜트카를 빌려 스코틀랜드며 웨일스를 도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스코틀랜드의 북쪽 끝, 하일랜드Highlands 지방에는 두 번이나 들렀다. 두번째 갔을 때 에딘버러Edinburgh에서 인버네스Invarness로 차를 달려 북상해, 거기서 서쪽으로 더 간 스카이Skye 섬의 던베건Dunvegan이라는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32쪽

자폭공격이라는 행위가 어떤 필연성을 지니고 존재하는 한, 내가 거기에 말려든다는 건 이치에 맞는 일이다. -47쪽

그래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은 이유는 잘 생각해보면 결국은 너무 아플 것 같아서다.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다는 걸 안다면 뛰어내리지 않을 자신은 없다. -49~50쪽

아는 재일조선인 중에 자살한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려봐도, 화를 내야할 때 서글프게 웃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다가 스위치를 뚝 끄듯이 사라져 버렸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런 죽음과 만났을 때 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감개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아 역시나’ 하는 심정에 가깝다. ‘그 사람은 이제 어깨의 짐을 전부 내려놓았구나’ 생각하고픈 (한나 아렌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51쪽

부모님의 묘소는 교토의 아다시노넨부쓰사(化野念佛寺)에 있다. 거기에 있는 첫째 이유는 예부터 무연보살을 묻어온 이 절이 신도가 아닌 사람들이나 불교도가 아닌 사람도 대범하게 묘지에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무연보살로 간주되어 그 묘지에 묻힐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많은 재일조선인의 무덤이 있다. 모두 우리집과 엇비슷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묘비의 형식은 다양하다. 많은 경우 묘비의 정면에 고인의 일본식 이름을 새기고, 측면에는 조선의 출신지와 ‘본관’을 새긴다. 죽어서 묘비명에까지 일본 이름이라니 서글프지만 그래도 측면에나마 자신의 뿌리를 새기고 싶어하는 마음이 애틋하다. -58쪽

끊임없이 ‘타자’를 상상하고, 그들과의 차이를 강조해, 그것을 배제하면서, ‘우리’라는 일체감을 굳혀간다. 추도의 의례는 그 소름끼치는 국민적 상상력과 깊이 연결돼 있다. 타자와의 싸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바친 자들의 묘. 그것은 이미 개별적인 사자의 묘가 아니라, ‘우리’라는 관념, ‘국민’이라는 관념의 묘인 것이다. -59쪽

‘이탈리아를위해 죽는 자는 죽지 않는다.’ 1937년 크리스마스, 밀라노 대성당Duomo di Milano 정면에 내걸린 거대한 깃발에는 이 문구가 크게 씌어 있었다. 스페인 시민전쟁 중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에 파병된 이탈리아군 전몰자를 추도하는 문구였다.(Ernst H. Kantorowicz, ˝Pro Patria Mori in Medieral Political Thought˝,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56 No.3, Indiana University Press, 1951) -61쪽

자신의 재산, 혈통, 문화를 영구히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내셔널리즘의 토대가 된다. 이 관념에 맞서 이기기 위해서는 결국 죽음이라는 숙명과 삶의 우연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62쪽

그러나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 형성된 배경에서 유대-기독교적인 종말론의 영향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는 바다. 계급투쟁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를 거쳐 계급의 소멸에 이르면 그 시점에서 인류의 진정한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는 구상은, 일종의 종말론적 유토피아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불사에의 바람을 이러한 구상에 기대어 해소하고자 한 이도 많을 것이다. -62쪽

2001년 12월 런던에 도착해 3일째,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코벤트가든Covent Garden의 로열오페라하우스Royal Opera House로 향했다. 사이먼 래틀Simon Rattle이 지휘하는 바그너Richard Wagner의 ‘파르지팔’Parsifal 공연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페라 애호가이지만 바그너를 관람하는 것은 세번째에 불과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러 멀리해온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십수 년 전에 빈 국립가극장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ander을 보고 아주 따분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건 내가 미숙했던 탓이리라. 두번째 이유는 바그너와 반유대주의, 바그너와 나치즘의 관계라는 곤란한 문제 때문이다. -63쪽

그런데 실은 그 전 해인 2000년 여름 잘츠부르크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본 적이 있다. 지휘는 병으로 자리에 누운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를 대신해 로린 마젤Lorin Maazel이 맡았다. 두번째 바그너 체험이었다. 그게 좋았던 것이다. 불가해한 감동이었다. 더 알고 싶다는 강한 호기심이 솟아났다. 여전히 ‘위험한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호기심의 수위가 경계심보다 높은 것이다. -65쪽

바그너의 세계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한 그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편집증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안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68쪽

베토벤에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던 (사이먼) 래틀의 지휘가 바그너에서는 유감없이 역량을 발휘했다. (암포르타스) 왕의 역을 맡은 토머스 햄프슨Thomas Hampson의 가창도 일품이었다. 막이 내린 후 나는 흥분됨과 동시에 무척 당황했다. 한편에는 크나큰 감명을 느꼈으며 다른 한편에는 깊은 의문이 솟았다. 68~70쪽

바그너의 작품은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게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등의 감정을 일단 젖혀주고, 말하자면 몰주체, 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바그너의 작품은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게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등의 감정을 일단 젖혀주고, 말하자면 몰주체, 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시대와 사상을 깊이 담지 못한 범용한 예술이라면 오히려 어떤 정치체제하에서도 편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그너의 예술이 빼어난 것은, 그것이 이 두 가지를 완벽할 정도로 융합해놓았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서 고민도 시작된다. -71쪽

당시(1970년대) 나는, 적어도 내 주관적 상상 안에서는 김지하로 대표되는 민족, 민중문학을 매개로 민주화투쟁을 하는 한국 동포들과 함께였다. 그것은 내가 일본이라는 장소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 2세로서 내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모색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살기 위해 꼭 필요했다고까지 할 수 있다. -75쪽

나는 이전에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진정으로 괄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였던 한국의 민중신학이 지금은 김지하와 ‘선민사상’選民思想을 공유해 ˝일종의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시즘˝에 전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재일조선인과 같은 ‘디아스포라 조선인’을 시야의 밖에 두는 대신 ‘디아스포라’와 과제를 공유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자기중심주의의 함정을 피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고 썼다.(徐京植,「在日朝鮮人は‘民衆’か?」,『半難民の位置から』,影書房, 2002 참조) -76쪽

내셔널리즘을 넘는다는 것은 ‘선진국’이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기득권을 무비판적으로 향수하면서 타자를 내셔널리스트라고 지칭하는 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피억압자가 저항을 위해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피억압자를 내셔널리즘에 결집시키는 억압적 구조,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방향성도 갖고 있지 않다면 그 담론은 ‘내셔널리즘’이 아닌 ‘저항’을 무력화하는 힘으로만 작용할 것이다. 77쪽

‘아이덴티티’라는 말은 일본에서는 때에 따라 ‘애국심’이나 ‘민족의식’과 같은 의미로 잘못 쓰이기도 한다. 아이덴티티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끈질긴 물음일 것이다. 많은 다수자들은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우가 거의 없고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이 그렇듯 디아스포라의 특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철이 들고부터 이 물음과의 인연이 끊긴 적이 없다. -103쪽

왜 모든 것이 이렇게 어색하고 딱딱한가. 아무리 해도 더 자연스럽게 살 수는 없는 걸까. 그 원인이 나 자신이라는 외곬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자의식이 너무 강한 것 같은 나 자신을 애처로워하고 미워했다. -104쪽

재일조선인들에게 선조의 출신지(조국)는 조산반도, 그것도 지금과 같이 분단되기 전의 조선반도다. 그러나 재일조선인 2세, 3세가 태어난 장소(고국)는 일본이다. 그들이 ‘국민’으로서 속해 있는 나라(모국)는 한국, 일본, 종국으로 나뉘며 그들 중의 일부는 ‘조선적’이라는 사실상의 무국적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고국인 일본은 과거 그들의 조국인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했으며 지금도 그 사실을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조국, 고국, 모국의 삼자가 분열해 상극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15쪽

미술사나 미술비평의 담론 역시 ‘민족’이나 ‘국가’라는 관념적 틀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화된 그 틀에 담기지 않는 존재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억지스럽게 정의하거나 혹은 내쳐져버리고 만다. -120쪽

‘나는 재일조선인’이라고 나서는 사람만이 재일조선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은 누구인가 자문하는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다. 재일조선인이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고려하면 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포함한 전체야말로 재일조선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128쪽

나는 2003년 서울에서 열린 그(이우환)의 전시회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그가 애장해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온 여러 예술품도 자료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 진열대의 맨 끝자락에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문인화를 보았을 때 ‘아, 이것이야말로 내게 없는 것이다’라고 느꼈다. 그것은, 이우환에게는 있고 나나 (재일조선인 예술가인) 문승근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우환은 조선어가 모어이며 ‘조선 문화’에 대한 소양도 풍부한 1세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가 모어이며 ‘조선 문화’에 대해 기본적인 소양조차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바라지도 않고 ‘일본 문화’에 젖어버린 것이 나나 문승근과 같은 재일조선인 2세다. -134쪽

(장) 아메리는 고문을 강간에 비유한다. 그것은 ˝그 어떤 도움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을 때, 실존의 절명 속에서 완료된다˝고. -168~169쪽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終戰에 이르기까지 벨기에에서 추방당한 유대인은 2만 5,000명이며 그 가운데 약 2만 3,000명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전후에 살아남은 사람은 615명에 불과했다. 장 아메리는 그 중 한 사람이다. -179쪽

한 5년 전부터 나는 여름이면 ‘잘츠부르크 음악제’Salzbruger Festspiel를 찾는다. 구시가의 뒷골목에 있는 오래된 호텔에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오페라 두세 작품, 교향악과 실내악, 그 외의 가곡 리사이틀 등을 각각 한두 공연씩 즐기는 것이 언제나의 일정이다. -182쪽

2002년 여름에 본 공연 중에서 여기서 언급할 만한 것은 역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오페라 <다나에의 사랑>Die Liebe der Danae이다. <다나에의 사랑>은 1952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초연되었다. 이번 상연은 그 50주년을 기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사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여름 초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총력전’의 구호에 눌려 <다나에의 사랑> 초연은 물론 음악제 자체가 나치 당국에 의해 취소되어버렸다. 당시 여든 살의 작곡가가 볼 수 있던 것은, 의상을 갖춰 입고 진행한 전막全幕 리허설뿐이었다. 그것도 괴벨스의 묵인하에 겨우 치러질 수 있었다. -182~183쪽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는 오늘날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이념 및 존재이유와 맞물리는 중대한 문제다. 그가 평범한 음악가였고 작폼도 범용한 수준에 머물렀다면 평가도 간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런 물음은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혹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맞먹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우며, 또 그만큼 흥미로운 것이다. -185쪽

나치 권력에 협력한 것이나, 가끔 반골 기질을 보여준 것이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행동을 관통하고 있던 원리는 어디까지나 그가 ‘예술’이라 믿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예술적 에고이즘˝이라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표현은 그런 점에서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187쪽

그러나 (잘츠부르크에 있는) 츠바이크 자택의 테라스에서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의 저편, 국경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베르히테스가덴Berchtesgaden의 산 위에는 히틀러가 있었다. -188쪽

츠바이크에게 ‘어제의 세계’란 유럽의 중세적 신분주의가 막을 내린 시대, 곧 유대인에 대한 신분차별이 폐지되고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흐드러지게 꽃피었던 시대다. 그것은 또한 ‘유럽의 정신’으로서의 휴머니즘을 신봉하며 그 이상을 몸소 구현하는 삶을 지향한 코스모폴리턴들이 배출된 시대기도 하다. 빈은 그 중심에 있었다. -190쪽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대극장 옆 광장은 옛날에 말을 씻기던 자리로, 그 유래에 따라 멋진 말 조각의 분수가 있는데 지금은 카라얀Karajan 광장이라고 불린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잘츠부르크 음악제 중흥의 최고 공로자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나치당 입당 경력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 역시 그 사실에 대해 눈을 감고 불문에 부쳤다.
나는 카라얀이 지휘하는 연주가 들려주는 처절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다. 나는 그 수준에 필적하는 연주를 지금 거의 들을 수 없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기에 카라얀 광장이라는 안이한 이름에 위화감을 넘어 위기감까지도 금할 수 없다. 슈트라우스의 예술, 그리고 카라얀의 예술을 사랑하면서도 그들의 ‘예술적 에고이즘’이 앞으로도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어제의 세계’가 보여주었던 ‘휴머니즘’을 오늘에 계승해 발전시켜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1~192쪽

2004년 여름 나는 잘츠부르크에 도착하기까지 엄청난 고생을 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출발을 며칠 연기한 탓에 이미 티켓을 구입한 두세 개의 연주를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나중에 내가 단념한 오페라 <아서 왕>(King Arthur, 헨리 퍼셀Henry Purcell 작곡,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지휘Nikolaus Harnoncourt 지휘)이 일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지간히 분한 심정이 들었다. -193쪽

그건 그렇고 (특별영주권이 있는 재일외국인으로서의) 재입국허가 기한이 지났음을 안 순간 내 마음은 즉시 (잘츠부르크행을) 단념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도,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의 <죽음의 도시>Die tote Stadt도, 토머스 햄프슨의 가곡 리사이틀도 단념하자. 비행기 예약취소 수수료를 포함한 막대한 손실이 있겠지만 단념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버둥거릴 정신적 에너지가 거의 고갈된 것이다. 최소한 태연한 얼굴을 하자는, 억지로 갖다 붙인 오기는 있다. -195쪽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의 생애는 ‘뒤늦게 나타난 조숙한 천재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년 시절 이미 말러에게 재능을 인정받고 그 부인인 알마Alma Schindler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는 좋았던 시절 빈의 문화를 체현한 마지막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이었던 그는 나치에 의한 오스트리아 병합의 위협을 앞두고 친구의 권유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쪽

‘여기서 장 아메리는 자살했다.’ 오늘 밤도 누군가가 향락적인 오페라를 만끽한 후 가볍게 와인이라도 마시고 기분 좋게 방으로 돌아가 갑자기 목을 매는 것이 아닐까? 아메리가 자살한 것은 어느 호텔일까? 혹시 지금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일까? 매년 잘츠부르크에 올 때마다 확인해보려고 하면서 지금껏 못 하고 있다. -200쪽

이렇듯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단테의 시구를 암송하는 행위를 통해 ‘증인’, ‘인간’, ‘이탈리아인’이라는 삼중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했던 것이다. -206쪽

이탈리아의 유대인은 19세기 중반의 국민국가 형성과 때를 같이해 ‘이탈리아 국민’으로 사회에 통합되었다. 레비와 같이 이탈리아어를 모어로 하는 동화 유대인은 모어, 모국어, 국민 삼자를 잇는 등식에 의해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했다. 아우슈비츠로부터 풀려난 후 레비는 망설임 없이 고향 토리노로 돌아갔는데 그것은 모어의 공동체가 파괴되지 않은 채 그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의 경우는 어땠을까. 그가 열거한 베토벤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이르는 ‘정신의 유산과 미적 자산’은 레비에게 있어서 단테나 다빈치 같은 것이었으리라.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접해온 문화, 자아 형성에 바탕이 된 문화. 학문이나 예술뿐 아니라 미감과 미각, 심지어는 ‘젓가락을 올리고 내리는’ 것과 같은 몸에 스민 습관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문화. 그것을 ‘모어’라는 표현을 빌려 ‘모문화’라 부를 수 있다면 아메리의 경우는 ‘모문화’가 고스란히 나치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점령되어버린 것이다. -208쪽

나치즘은 ‘모어’, ‘모국어’, ‘국민’을 엮는 국민주의의 등식에 ‘아리아인’이라는 인종주의 개념을 연결했다. 독일어를 모어와 모국어로 하는 것이 ‘독일 국민’이며, 그것은 동시에 ‘아리아인’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등식 앞에서 ‘비非아리아인’은 국민이라는 틀뿐만 아니라, ‘모어’나 ‘모문화’로부터도 추방될 수밖에 없다. 아메리는 ‘자기 자신임’에서, 즉 자기의 아이덴티티로부터 추방당했던 것이다. 따라서 아메리에게 ‘향수’란 ‘자기소외’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208~209쪽

무덤이 갖는 기능 중 하나는 고인의 계보를 기록해 후세에 전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파울) 첼란의 무덤에 새겨진 것은 성조차 전승된 것(본래의 성인 안첼Antschel)이 아닌 (첼란 자신이 본래 성의 철자를 고쳐서 만든) 인위의 것이다. 계보로부터 차단된 존재의 무덤다운, 어제도 내일도 없이 소속할 공동체도 없이 홀로 뚝 떨어져 고립된 무덤이었다. -219쪽

과거 한 세기 동안에 조선반도에서 세계 각지로 이산하게 된 조선인들, 재일조선인, 중국의 조선족, 스탈린 시대에 중앙아시아로 보내진 구소련의 ‘고려인=카레이스키’, 오늘날 20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코리언 아메리칸, 1960년대 당시의 서독 정부가 정책적으로 받아들인 이주노동자 자손으로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수만 명의 코리언, 그리고 한국이 국가적으로 추진해온 국제입양의 결과 현재 20만 명이 넘는 코리언 입양자들. 이 전부를 합한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총수는 대략 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222~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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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학의 세계사 - 중학적 세계를 넘어 일본이 유럽과 열대에서 접속하다
이종찬 지음 / 알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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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중국을 정복하고 인도까지 지배하겠다며 꿈을 늘어놓았다는 일화는 이 인물 특유의 과대망상 혹은 전쟁을 일으킨 말년의 병적 증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로 자주 등장한다. 어쩌면 그의 나라인 일본보다도 한국에 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역사적 원인과는 별개로, 이 전쟁의 핵심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얼마나 미치광이 같았는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까닭이다. 사실상 도요토미의 분별없음을 조롱하는 유용한 수단 정도로 이용된 셈이다. 그 결과 일본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기까지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준비를 하지 못했던 조선이 마치 상식적인 판단을 했던 것처럼 보이는 효과도 없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언제인가부터는 도요토미라는 인물이 이런 구체적인 망상을 어쩌다가 품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전국 시대 말기와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고 싶어졌다. 중국을 확고부동한 세계의 중심으로 인식했던 동시대 조선의 대외관이 얼마나 협량했는지는 이미 나름대로 충분히 확인했다고 생각한 까닭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일본은 자신들이 속한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보다 역동적으로 수용한 듯이 보이는 단서가 적지 않았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역을 담당했던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라는 장소의 존재는 물론이고, 종종 즐겨 보는 NHK의 대하드라마 중에서 일본의 전국 시대를 다루는 작품들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다스렸던 영지의 수도격이었던 아즈치성(安土城)을 언급할 때마다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며 유럽의 상인들이 모일 정도로 번성했다는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어릴 때 왜구의 섬나라로 배웠던 일본이 어떻게 거대 강국인 미국이나 러시아와 전쟁을 치를 마음을 먹게 된 것인지, 또한 만주를 비롯하여 열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과 인도양으로까지 진출하려는 지리적 상상력을 갖게 된 것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려면 난학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봐야 한다. -p.9

 

 이 책은 한국인들의 생각보다 더 일찍·멀리·깊이 세계를 인식했던 근세 일본의 대외관을 간명하면서도 유창하게 서술해 냈다. 본문에서 거듭 강조하듯이 공간적으로는 네덜란드에서 출발해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를 거쳐 일본과 동아시아로 향하며, 시간적으로는 16세기인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에서 시작해 도쿠가와 막부를 거쳐 19세기의 메이지 시대에 도달하는 일본 난학의 실질적 형성 과정과 그 영향을 이런 식으로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의 난학이 형성된 시공간적 배경의 크기와 무게를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그 방대함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 속에서 주목해야 하는 핵심을 향해 곧바로 다가가는 과감함이 특히 돋보인다. 말할 만하고,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단서가 너무나 많은 주제에서, 반드시 밝혀야 하는 소재들을 선택해서 하나의 관점을 구성하는 과정은 당연하면서도 난해한 까닭이다. 이 책은 가장 기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준을 확실하고 탁월하게 만족시켰다.

 

 인도까지 밀고 들어가겠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희망은, 실현은 불가능해도 상상이 가능한 범주에 속했다. 무엇보다 당시의 일본은 중국과 한국이 속한 동북아시아 밖의 세계, 즉 동남아시아와 그 너머의 인도는 물론 유럽의 국가들까지 점점 더 또렷이 바라보게 되었다. 도요토미의 말은 벼락출세한 권력자의 대책 없는 탐욕인 동시에, 일본의 대외적 시야가 앞으로 꾸준히 확장되리라는 전조이기도 했다. 그렇게 도쿠가와 막부 시대 내내 넓어진 시야가 마침내는 메이지 유신을 지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망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다시 도요토미의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 책에서도 근세 일본의 적극적인 국제 교류를 상징하는 난학의 제국주의적 단서를 지적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핵심 논제는 아니다.

 

덴쇼天正소년사절단이 열대 풍토와 질병을 이겨내면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아프리카, 대서양을 몸소 체험했고, 도쿠가와 막부가 주인선 무역 제도를 통해 열대 동남아시아에 일본인 정착촌을 형성했으며, 바타비아에 본부를 둔 VOC와 데지마에서 문화접변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난학자들은 열대의 을 실증적으로 탐구했다. 조선 실학자들이 연경(현재 북경)을 통해 배우려던 유럽 지리학은 구체적인 이 사상捨象되어버린, 다시 말해 시각적 근대와는 동떨어진 관념적인 지도에 불과했다. -p.257~258

 

 분명한 사실은 한국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고 과거의 조선보다 동시대의 일본은 아시아 너머의 세계를 훨씬 명확히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경험했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도요토미 시대에 가톨릭을 믿는 다이묘들이 이탈리아 로마의 교황에게 직접 파견했던 4명의 소년들인 덴쇼소년사절단의 지난한 여정과 독특했던 그 속의 경험들을 중국이나 한국과 구별되는 일본의 대외 경험이 시작되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한다. 단순히 이례적인 사건이나 여행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 일본과 상이한 각 지역들의 자연과 문명을 실증적으로 학습하는 계기로 해석한 까닭이다.

 

 이 책은 저자 본인의 저작과 그가 번역한 도쿠가와 막부 시기의 난학자이자 사실상 일본 최초의 네덜란드어 번역서로 유명한 해체신서(解體新書)의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의 자전적 기록인 난학사시(蘭學事始)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 난학이 성립하고 발전·전파된 과정을 나름대로 소상히 밝힌 겐파쿠의 기록과, 난학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신학문이 아니라 그 이전의 도요토미·도쿠가와 막부 시대부터 지속된 일본과 유럽의 문화 접변이라는 일련의 역사·학문적 흐름 속에서 획득한 성과라는 저자의 해석이 부합하는 까닭에 이렇게 구성이 된 듯하다.

 

 저자의 글은 겐파쿠의 원사료에 담긴 단서를 충실히 활용해 난학의 형성 과정과 영향력의 시공간적 범위를 자신의 시각으로 재구성했다. 저자는 난학을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열대 지역)와의 적극적인 교역을 매개로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세계에 자신들의 개성과 문화를 전파하는 동시에 그들의 지식을 직접 수용했던 상호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해한다. 이런 글과 겐파쿠의 자술(自述)이 한 권의 책으로 결합하면서, 겐파쿠는 자신을 비롯한 학자들의 업적으로 난학을 소개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사회·경제적 기반까지 시야가 확장되고 겐파쿠의 기록에 담기거나 빠진 내용들에 대한 분석이 더해짐으로써 전체적으로 난학 자체에 대한 맥락이 더욱 풍성해졌다.

 

다시 말해, 16세기 이후 일본은 유럽의 힘에 눌려 일방적으로 문호를 연 것이 아니라 열대 동남아시아에서의 무역 활동을 통해 유럽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며 문화접변을 실현해나갔다. 이런 점에서 페리를 통해 미국이 일본의 문호를 강제로 열었다.”라거나 막부 시대 내내 쇄국정책을 실시했다는 역사적 기술은 네덜란드로 상징되는 유럽-열대 동남아시아-동아시아-데지마로 이루어진 문화접변을 통해 근대적 일본이 형성된 과정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일본은 데지마를 통해 조심스럽고도 주의 깊은 관찰력으로 열대 동남아시아 및 유럽과의 문화접변을 깊고도 넓게 실행했다. -p.151~152

1630년대 막부가 취했던 일련의 쇄국령은 오히려 1716년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전 해금海禁 정책(*하해통번지금下海通蕃之禁의 약자로 명나라의 왜구 대책 중 하나로, 해외 도항 무역을 금지한 정책)에 가깝다. 시즈키 다다오志筑忠雄가 러시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었던 용어는 1850년이 되어서야 막부의 공식적인 문헌에 포함되었을 정도로 쇄국은 도쿠가와 막부의 공식적인 해외 정책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17~18세기에 일본은 중국 및 조선과 무역 관계를 꾸준히 증가시켜나갔다. 유럽이 중국 및 일본과의 무역에 박차를 가하기는 했지만 유럽이 차지했던 무역의 비중은 동아시아 권역 내부의 그것에 비하면 부수적이고 부차적이었다. -p.182~183

 

 일본이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와 교역하면서 난학이 성립됐다는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졌지만, 동시에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이 그리스도교 전파를 막기 위해 쇄국 정책을 실시했다는 주장도 일종의 역사적 상식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난학이 소수 학자들의 지적 교류 정도로 이해된 데는 쇄국 정책에 대한 통념이 큰 원인을 차지하며, 더 나아가 이런 관점은 도쿠가와 막부를 대체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의 급격한 국내외적 변화를 극적으로 재구성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만큼 도쿠가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선뜻 납득되지 않는 문제들을 만들기도 했다. 국내적으로는 막부 체제 유지를 지지했던 수구 세력의 대표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대외적으로 반발을 무릅쓰고 미국과의 통상·수교를 뜻하는 개항(開港) 정책을 추진하고, 국내적으로는 천황 통치 복구를 주장한 신진 세력이 대외적으로는 기존의 선별적 교류 정책을 지지하더니 이내 표변해서 적극적인 대외 개방을 추진하게 된 일련의 모순과 비약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형성해 교역 관계를 유지하며 인도네시아를 식민 통치하던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유럽과 깊이 접촉했고, 그런 맥락에서 데지마도 단순히 일본에서 고립·통제된 무역항이 아니라 해외와 교섭하는 일본 국내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된다. 일본은 한국이 속했던 중화적 질서에서 벗어나 꾸준히 동남아시아와 유럽의 변화를 학습해 왔다면, 막부의 상층부에 속하는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들이 그에 관한 정보를 가장 오랫동안 풍부하게 접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권력과 정보의 중심인 에도(江戸, 도쿄(東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출신인 메이지 유신의 신진 세력은 활동 초기에는 해외의 물정에 어두웠을 것이다. 결국 이이 나오스케가 막부를 수호하는 동시에 대외 개방의 문호를 더욱 확대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통치했다는 사실은, 그 이전의 일본이 철저히 소극적이며 폐쇄적인 쇄국 상태였다는 통념에서 벗어나야 보다 정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비록 극적 쾌감은 줄어들겠지만 말이다. 메이지 유신 세력이 겪었던 대외관의 급격한 변화 역시 유사하다. 시모노세키 전쟁(下関戦争)과 사츠에이 전쟁(薩英戦争)만으로 모든 흐름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난학은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일본의 대외 교류에서 비롯된 문화적 결실인 동시에, 사회적 변화라고 이 책은 이해한다. 무엇보다 중국과 문자(청각)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 유럽과 열대, 그리고 물질(시각) 중심의 질서를 새롭게 홀로 구축하게 된 계기였음을 강조한다. 특히 난학 자체가 시작된 계기는 다름 아닌 도판 중심의 해부학 서적인 해체신서의 발간이었다는 점에서, 읽고 듣는 과정을 중시했던 유학·경전·청각 중심의 중국과 달리 대상을 직접 보여 주는 박물학(博物學삽화·시각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한 유럽이 일본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는 점까지 분석해 냈다. 스기타 겐파쿠의 해체신서처럼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脱亜入欧) 역시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은 셈이다. 또한 이 책은 동남아시아가 속하는 열대 지역과의 교류 및 그곳에서 유입된 새로운 경험과 지식들이 난학을 포함한 일본의 다방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규명했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이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열대 지역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학문들의 교류와 접합을 추구하는 열대학의 연구 방식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했다.

 

이날 해부 대상이 된 시체는 50세 정도의 여자로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 교토 출신으로 별명은 아오차바바靑茶婆였다고 한다. (난학사시)-p.58

 

 지난해와 올해의 교토에서 종종 스친 묘비가 하나 있다. 일부러 찾아간 적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가다 보니 공교롭게도 그 방향을 거치고는 했다. 한국의 부도와 형태가 비슷한 일본의 납골묘로 보였는데, 크기가 다른 곳에서 본 것보다 무척이나 거대했을 뿐 아니라, 그 위치도 언덕에 가까운 야산을 끼고 주택과 신사가 모인 조용한 동네여서 느닷없기도 하고 다소나마 위압감도 있었다. 교토 대학 의학부가 시신을 해부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묘지였다. 목적을 생각하면 형식적인 감사를 표하는 정도로 꾸미기 쉬운 장소인데, 그곳의 의미를 무겁게 되새기고자 노력했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다. 물론 투박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겐파쿠가 에도 코츠가하라(, 코즈카하라(小塚原))의 사형장에서 해부 과정을 보고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시신의 내력을 짧게나마 적어 둔 문장을 읽고서, 다시 그 육중한 묘지를 떠올렸다. 일본의 서양 의학이 시작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비로 저 사람의 시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 묘지의 의미도 당연히 깊을 것이다. 기억은 가벼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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