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일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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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히 나라(奈良)로 가는 길이었다. 날씨는 조금 더운가 싶었지만, 워낙 화창해서 멀리 떠나기에는 사뭇 알맞았다. 교토(京都)의 데마치야나기 역(出町柳駅)에서 산 킨테츠-케이한 일일 패스로 추가 요금을 내지 않고 나라까지 가려면 열차를 한 번이나 두 번 갈아타야 한다. 킨테츠탄바바시 역(近鉄丹波橋駅)에서 나라까지 한 번에 가는 급행열차가 있지만, 이 열차가 그리 자주 다니진 않는다. 타지 못하면 킨테츠 나라선으로 환승하는 야마토사이다이지 역(大和西大寺駅)까지 가서 한 번 더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다. 62일에는 일단 야마토사이다이지로 가야 했다. 그런데 도중에 모모야마고료마에 역(桃山御陵前駅)에서 내렸다.

 

열어둔 거실 창문 아래쪽에 풍경을 매단 넉줄고사리가 달려 있다.*(*일본에서는 여름에 시원해 보이도록 넉줄고사리의 뿌리줄기를 여러 모양으로 엮어 처마 끝에 달아놓는다.) 풍경은 이따금 생각이라도 난 듯 은은하게 소리를 냈다. (아베 일족)-p.19

 

 서울로 돌아갈 날이 코앞이었고, 이 역의 이름에 붙은 어릉(御陵)이 메이지 천황(明治天皇)과 쇼켄 황후(昭憲皇后)의 릉을 뜻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80일간 여유만만히 교토를 둘러본 지금이 아니라면, 교토 중심부에서 멀기도 한 이 황릉까지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찰나에 스쳐서 충동적으로 내렸다. 이렇게 찾아가서 맘에 든다면 아무리 멀고 번거로워도 나중에 또 올 수 있지만, 지금 가지 않으면 나중에도 올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낯설고 작은 역 바로 앞의 고코노미야(御香宮) 신사에 들렀다. 하늘은 여전히 빛났고, 바람이 어느새 제법 불어와서 유서 깊은 신사의 나무들이 목소리를 모아 노래하듯 흔들렸다. 필시 잊지 못할 소리.

 

 릉으로 가는 길은 깊고 높았다. 메이지 천황이 서거한 1912년에 심었나 싶은 거목들이 참도(參道) 양 옆에 늘어서서 속세와 격절(隔絶)된 성지(聖地)로 향하는 듯했다. 교토 곳곳에 산재한 주택가 사이의 황릉들을 처음부터 철저히 의식하고 조영됐다는 인상을 받았다. 교토 안의 릉들이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공존하는 죽음의 공간이었다면, 모모야마의 메이지 천황릉은 완전히 그 대척점에 있다. 삶이 끝나고서도 또 다른 삶을 사는 신과 같이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공간에서 만인의 숭배를 받는 통치자의 존재를 과시하는 무대처럼 보였다. 극적 매력이 충만했다고 할까.

 

순사에 대해서는 언제 어떻게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주군을 소중히 검겼다고 해도 아무나 함부로 순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태평한 시대에 산킨의 임무를 위해 주군과 함께 에도로 길을 떠나는 것이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군과 같이 종군을 할 수 있는 것도 주군과 같이 황천길에 길동무를 할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주군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허락 없이 죽는다면 그것은 개죽음일 뿐이다. (아베 일족)-p.14~15

 

 결국 이 릉이 메이지 천황을 드높이 모실수록, 그런 숭배가 이전까지의 전통과 얼마나 대조적인지 부각될 뿐이다. 메이지 천황의 릉이야말로 그가 일본의 역사를 벗어나, 유럽의 일부가 되고자 했던 시대의 산물이었음을 가장 선명하게 표현했다. 에도 시대의 순사 사건을 세밀히 묘파한 모리 오가이의 아베 일족을 읽으며, 아직 아련한 여행의 끝자락을 떠올린 것은 그 역시 과거에서 벗어날 길을 전통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만세일계(萬世一系)를 강변하는 천황의 자리는 메이지 천황을 맹신하는 수단에 불과했듯이, 주군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는 순사(殉死)는 무사도의 파국을 폭로하는 상징으로만 보였다.

 

초주로(나이토 초주로모토쓰구)는 다다토시의 병이 깊어지자 은혜를 갚을 길은 순사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이 사내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순사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결의가 있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당연히 순사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순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죽음의 길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거의 같은 힘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아베 일족)-p.17

 

 물론 메이지 유신과 모리 오가이가 모두 일본의 전통과 과거를 벗어나려 했더라도, 그 너머를 향한 이 둘의 의도와 목표는 판이했다. 유신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단일한 국민 국가라는 형식을 추구했다면, 오가이의 소설은 적어도 그렇게 변혁된 국가라는 형식 안에서는 개인의 삶과 의지가 존중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현한 것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아베 일족에서 단지 지나간 역사의 완벽한 모사가 오가이의 의도였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저 역사 속에서 충성심을 고양하기 위해, 병사한 번주(藩主)를 따라 19명의 가신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결하는 과정을 재구성했다는 단정은 역시 안이해 보인다.

 

 단지 과거의 충성심을 현재에 재현하고자 했다면, 오가이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참조했다는 아베 차사담(阿部茶事談)을 읽으면 된다. 그가 여러 무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결과보다 그들의 서로 다른 삶과 배경을 섬세하게 그려낸 데는, 그러면 어째서 이들이 결국 같은 최후를 맞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담겼다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의문은 종속적인 죽음이라는 전통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에 대한 우려와 직결된다. 당장 이 소설보다 1년 앞서서(1912)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 부부가 메이지 천황의 서거와 함께 순사했다. 그때만 해도 일본의 여론은 이 죽음을 사뭇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결국 천황 숭배와 결합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폭주로 치달았다. 명목뿐인 천황과 변칙적인 쇼군의 통치라는 구체제에서 벗어나 근대 국가로서 면모를 일신하는 것만으로는 개개의 삶은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오가이는 예측했던 듯하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한없이 크고도 멀어 보였던 메이지 천황의 능이 거듭 떠올랐던 탓에 든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이 그렇게 새로운 나라로 바뀐 후에도, 에도 시대와 똑같이 통치자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만 했던 무수히 다른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면, 거대한 변혁이라는 것조차도 때로는, 실은 자주 소란한 요설에 불과할 뿐이다.

 

부모가 자식을 보아도, 늙은이가 젊은이를 보아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 앞에서는 부모든 늙은이든 굴복하기 마련이다. (기러기)-p.140

“(전략) 교토는 정말 좋은 곳입니다만, 그 나무랄 데 없는 좋은 곳에서 지금까지 제(기스케)가 겪었던 고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후략)” (다카세부네)-p.226

 

 책을 읽으며 품은 생각이 우습게도, 정작 그날의 날씨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미 사라진 천황의 무덤은 높고 깊은데다 넓기까지 해서 위에서 보나 아래서 보나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돌아갈 때가 코앞에 이르러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정경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 어쩐지 속상할 정도였다. 새로 생긴 전통을 마치 본래 천황이 누렸던 권위인양, 사뭇 가소롭게 드높인 무덤이 우습다 싶다가도, 그 높은 계단을 다시 돌아보니 마치 푸른 하늘에서 내려온 듯해 이내 경이로웠다. 돌아와서 이 소설들이나마 읽지 않았다면, 그 기억은 지나치게 아름답게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스친 덕분에 너무도 우연히 메이지 천황의 릉까지 털레털레 다녀왔다. 고등어된장조림이 싫었던 기러기속 화자의 반찬 투정 탓에 자신만을 기다리며 얼굴에 빛을 냈던 오타마와의 만남을 가뭇없이 놓쳐 버렸던 오카다에 비춰 보면, 한순간에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지는 삶의 단면들이 얼마나 많을지 새삼 아득해진다. 물론 이 사실을 안다 한들 아무것도 바꿀 수 없지만, 그래서 또한 아름답다. 오타마, 이름 모를 화자, 오카다, 스에조, 이시하라의 시간과 우연들이 겹치고 스쳐서 이른 결과가, 가장 간절했던 두 사람의 막막한 무연(無緣)이라니, 가볍고도 무거운 이야기라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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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일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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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4위하(從四位下) 좌근위소장(左近衛少將) 겸 엣츄의 수령인 호소카와 다다토시(細川忠利)는 간에이(寬永) 18년(1641) 봄, 다른 지역보다 일찍 꽃이 핀 영지(領地) 히고 지방의 벚꽃을 뒤로하고, 54만 석 다이묘의 위세에 어울리게 앞뒤 행렬의 호위를 받으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가는 봄바람과 같이 산킨(전국의 안정을 위해 격년으로 영주들을 영지에서 떠나 에도의 쇼군(將軍) 곁에서 봉사하게 한 일종의 인질 제도)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에도를 향해 출발하려고 할 즈음 뜻하지 않게 병이 들었다. (아베 일족)-9쪽

순사에 대해서는 언제 어떻게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주군을 소중히 검겼다고 해도 아무나 함부로 순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태평한 시대에 산킨의 임무를 위해 주군과 함께 에도로 길을 떠나는 것이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군과 같이 종군을 할 수 있는 것도 주군과 같이 황천길에 길동무를 할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주군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허락 없이 죽는다면 그것은 개죽음일 뿐이다. (아베 일족)-14~15쪽

초주로(나이토 초주로모토쓰구)는 다다토시의 병이 깊어지자 은혜를 갚을 길은 순사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이 사내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순사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결의가 있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당연히 순사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순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죽음의 길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거의 같은 힘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아베 일족)-17쪽

열어둔 거실 창문 아래쪽에 풍경을 매단 넉줄고사리가 달려 있다.*(*일본에서는 여름에 시원해 보이도록 넉줄고사리의 뿌리줄기를 여러 모양으로 엮어 처마 끝에 달아놓는다.) 풍경은 이따금 생각이라도 난 듯 은은하게 소리를 냈다. (아베 일족)-19쪽

(순사를 위해) 할복을 하려고 할 때 마침 성 안에서 때를 알리는 북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하시타니(하시타니 이치조시게쓰구)는 자신을 따라온 노비에게 밖에 나가서 몇 시인지 알아보고 오라고 말했다. 노비는 돌아와 ˝마지막 네 번의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전부 몇 번 울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시타니를 비롯해 주변에 늘어선 사람들이 모두 미소를 지었다. 하시타니는 노비에게 ˝마지막 가는 길에 내게 웃음을 선사했구나˝라고 말하고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주고 할복했다. 요시무라 진다유가 뒷마무리를 담당했다. (아베 일족)-25쪽

누군가의 저택에서 시를 짓는 모임이 열렸을 때 보았던 대로, (쓰자키 고스케는) 반지(半紙)를 옆으로 두 번 접어서 ˝가로들은 부디 그만두라고 만류하시지만 그만 둘 수 없는 나 고스케로세˝라고 시가의 초고같이 적어두었다. 서명은 하지 않았다. 시 내용 속에 고스케라는 이름이 있기 때문에 이중으로 적지 않아도 되리라는 순수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형식에 어우러졌다. (아베 일족)-29쪽

야이치에몬(아베 야이치에몬미치노부)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시켜야 하는 일을 시키지 않아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주군에게 말씀드리고 할 일을 말씀드리지 않고 했다. 그러나 할 일은 정확하게 해서 비난할 여지가 없었다. 야이치에몬은 스스로의 의지로 주군에게 충성을 다했다. 처음 다다토시는 그저 그에게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뿐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한다는 것을 알고는 미워졌다. 그러나 현명한 다다토시는 야이치에몬을 미워하면서도,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된 건지 생각해보고, 결국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반대하는 버릇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달이 흐르고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고치기 어려워졌다. (아베 일족)-30~31쪽

주군에게 얼마만큼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순사하는지 확실한 기준은 없다. 같이 주군 곁에서 봉사해 온 젊은 무사들 중에 순사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다케노우치 가즈마나가마사)도 그냥 살아있었다. 그때 순사를 해야 했다면, 자신은 누구보다 먼저 순사를 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누가 보아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연히 순사해야 하는데 순사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혀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분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베 일족)-49쪽

앞뒤 양쪽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쳐들어갔다. 장지문을 모두 걷어내도 다다미 30장이 채 안 되는 공간이다. 시가전의 처참함이 야전(野戰)보다 훨씬 심하다. 접시에 수북이 담긴 벌레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광경과 비슷할까!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의 아비규환이었다. (아베 일족)-55쪽

마타시치로(쓰카모토 마타시치로)는 (아베 일족의 토벌에 세운 공으로) 주군에게서 마시키 고이케 마을에 저택용 땅을 하사받았다. 뒤편은 대나무가 우거진 산이었다. 미쓰히사가 마타시치로에게 ˝대나무 산도 가지겠느냐?˝하고 물었지만 마타치시로는 사양했다. 대나무는 평소에도 쓸모가 많은 나무이다.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대나무가 많이 필요하다. 그런 것을 받는 건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대나무 산은 영원히 주군의 소유가 되었다. (아베 일족)-59쪽

나(오타 도요타로)는 막연한 공명심과 절제에 익숙한 학구열을 가지고 홀연히 유럽의 신도시(베를린) 한가운데에 섰다. 이 무슨 광채인가, 내 눈을 자극하는 것은. 이 무슨 색채인가, 내 마음을 유혹하는 것은. ‘보리수 아래’라고 번역할 때는 그윽하고 조용한 곳처럼 생각되지만, 쭉 뻗은 큰길, 운터 덴 린덴(보리수 아래)에 와서 양쪽이 돌로 포장된 인도를 삼삼오오 무리지어 오가는 신사 숙녀를 보라. (무희)-65~66쪽

이렇게 3년 정도는 (베를린에서) 꿈처럼 흘러갔다. 그러나 때가 되면 감추려 해도 감추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취향이다. (무희)-67쪽

가만히 생각하니, 어머니는 나(오타)를 살아 있는 사전으로 만들려 했고, 관장은 나를 살아 있는 법률로 만들려 했다. 사전이라면 그나마 견딜 수 있지만 법률이 되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전에는 사소한 문제에도 매우 정중하게 일본의 관청에 답신을 하던 나였지만, 그 무렵부터는 관장에게 보내는 서면에 자주 법률의 세세한 조목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논하면서, 일단 법의 정신만 살리면 사소한 문제는 대나무를 쪼개듯 명료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을 했다. (무희)-67~68쪽

조명이 찬란한 번화가를 지나 좁고 어슴푸레한 거리로 접어들자 2, 3층 나무 난간에 이부자리 등을 널어놓고 말리는 집,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유대교도 할아버지가 문 앞을 서성대는 선술집, 사다리 하나가 곧바로 위층에 닿아 있고 또 다른 사다리는 지하의 대장간으로 통해 있는 셋집이 보였다. 이러한 집들을 마주 보며 凹자 형태로 세워진 300년 전의 유적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황홀해져서 몇 번이나 잠시 멈춰 서곤 했다. (무희)-70쪽

메이지 21년(1888) 겨울이 왓다. (베를린) 중심가의 도로는 모래를 뿌리고 가래로 눈을 치우지만 클로스터가는 심하게 울퉁불퉁하고 표면은 온통 얼어붙어, 아침에 문을 열면 굶주린 참새가 떨어져 죽어 있는 것이 애처로웠다. (무희)-78쪽

나(오타)는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무언가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 대답의 범위를 잘 헤아리지 못하고 바로 승낙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승낙한 이후에 어려움을 깨달아도, 억지로 승낙했을 때의 사려 깊지 못함을 숨기고, 참고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무희)-82쪽

(베를린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기차로는 그리 멀지 않은 여행이기 때문에 준비랄 것까지도 없었다. 몸에 맞춰 빌린 검은 예복, 고타에서 출판된 러시아 궁정의 새 귀족명부(독일 튀링겐 주의 도시 고타에 소재한 출판사 유스투스페르테스에서 냈던 인명록 ‘고타 연감’), 두세 종류의 사전 등을 작은 가방에 넣은 것뿐이다. (무희)-83쪽

대신(야마카타 백작) 일행을 따라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동안 나(오타)를 둘러싼 것들은, 파리 최고의 사치품을 빙설 속에 옮겨 놓은 듯한 왕성(王城)의 장식, 마치 황금색 촛불을 무수히 밝혀 놓은 듯한 많은 훈장과 견장들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빛, 조각품들, 최고의 조각기술로 만든 벽난로의 열기에 추위를 잊고 부채질하는 궁녀들. 그 사이에서 프랑스어를 가장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나였으므로, 손님과 주인 사이를 오가며 이것저것 통역하는 사람 또한 대부분 나였다. (무희)-83쪽

그 당시 간다묘진 신사 앞의 언덕길을 내려다가 보면 길모퉁이에 갈고리 모양으로 평상을 내놓고 고서적을 늘어놓은 가게가 있었다. 그곳에서 어느 날 내가 중국의 ‘금병매’를 발견하고 주인에게 값을 묻자 7엔이라고 했다. 5엔으로 깎아달라고 하자 ˝지난번에 오카다 씨가 6엔이면 산다고 하셨는데 거절했습니다˝라고 했다. 때마침 형편이 좋았기 때문에 부르는 값에 샀다. 이삼일 후에 오카다와 마주치자 그가 말을 꺼냈다.
˝자네 참 너무했네. 내가 모처럼 보아두었던 ‘금병매’를 사버렸더군.˝
˝그래. 자네가 부른 가격에 흥정이 안 되었다고 책방 주인이 말하더군. 자네가 갖고 싶다면 내가 양보하지.˝ (기러기)-100쪽

(오카다는 오타마의) 이름을 모르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문패를 본다면 이름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창가에 그녀가 있을 때는 그녀에게 조심스러웠다. 그렇지 않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나 오가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다. 결국 그는 처마의 그늘에 가려진 작은 나무 문패에 어떤 글자가 쓰여 있는지 보지 못했다. (기러기)-105쪽

또 하나는 무엔자카 중턱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그 집에는 팻말 따위는 붙어 있지 않았지만 팔려고 내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러 갔다. 주인이 유시마기리도시에서 전당포를 하던 집인데, 얼마 전까지 그 집에 살던 노인 영감이 그만 죽어버려서 할머니가 본가로 가게 되어 집이 비었다는 것이었다. 옆집이 바느질을 가르치는 집이라서 좀 소란스럽겠지만, 노인이 살던 집이라 특별히 나무도 좋은 것으로 골라 지어 어쩐지 살기 좋을 것 같았다. 입구의 격자문에서 화강암을 깔아놓은 정원까지 깔끔하고 정취 있게 꾸며져 있었다. (기러기)-112~113쪽

세세한 데까지 마음을 써서 휴지를 두 장으로 나눠 사용하거나, 용건을 엽서 한 장에 다 써 넣기 위해 현미경 없이는 못 읽을 정도로 자잘하게 글씨를 쓴다거나 하는 것은 모든 구두쇠들의 공통된 성질이다. 그러나 그것을 철저하게 자신의 생활 전반에 걸쳐 실행하는, 정말이지 지독히 인색한 사람과, 어딘가에 구멍을 남겨 숨통을 터놓고 사는 사람이 있다. 지금까지 소설에 나오거나 연극에 등장하는 수전노들은 거의 모든 일에 절대적으로 인색한 구두쇠들뿐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돈을 모으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인색한 주제에 여자에게는 사족을 못 쓴다든지, 이상하게도 밥만큼은 살 사준다든지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전에도 잠깐 이야기한 것 같지만, 스에조는 말씀한 옷차림을 좋아해서, 대학의 사환을 하던 시절 휴일이 되면 늘 입던 무명 통소매 옷을 벗어 던지고 멋진 상인같이 기모노로 갈아입곤 했다. (기러기)-115~116쪽

그런데 보통이라면 예단 비용이라고 하면서 목돈을 상대편에게 건네주었을 테지만, 스에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옷에 멋을 부리는 것을 낙으로 삼던 스에조는 즐겨 이용하던 옷가게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오타마를 첩으로 맞는) 사정 이야기를 하고 두 사람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맞추었다. 단 치수는 중매를 주선한 할멈을 통해 오타마에게 물었다. 안타깝게도 이 빈틈없고 인색한 스에조의 처사를, 오타마 부녀는 오히려 대단한 선의로 해석하여 현금으로 직접 건네주지 않는 것을 그가 자신들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기러기)-119쪽

평소 처자식에게 폭군 같은 행동을 해온 터라 아내의 행동을 반항 혹은 굴종으로만 보던 스에조는, 여종업원이 나간 후 수줍음으로 발갛게 물든 얼굴에 얌전한 미소를 띠며 술을 따르는 오타마를 보고,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산뜻하고 그윽한 환희가 밀려옴을 느꼈다. 그러나 스에조는 이 자리에서 환영같이 떠오르는 행복감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면서도, 왜 자신의 가정에서는 이런 행복감이 없었나 반성한다든지, 이런 색다른 감정을 지속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런 노력이 자신과 아내에게 충분히 있었는지 없었는지 헤아려볼 정도의 치밀한 사고는 하지 못했다. (기러기)-123쪽

오타마는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체념은 그녀가 가장 많이 경험한 심적 작용이라 그녀의 정신은 이 방향에서라면 기름을 친 기계처럼 매끄럽게 움직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기러기)-135쪽

야트막한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니, 상록수 가지 사이로 상쾌한 아침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버들가지와 함께 맞은편 연못에 무성하게 우거진 연꽃잎이 보였다. 그 녹음 속에 여기저기 엷은 선홍색 점을 찍어놓은 듯 아침에 핀 꽃들도 보였다. 북향집이어서 춥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으나 여름에는 일부러라도 찾아가 있고 싶을 정도로 시원했다. (기러기)-139쪽

부모가 자식을 보아도, 늙은이가 젊은이를 보아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 앞에서는 부모든 늙은이든 굴복하기 마련이다. (기러기)-140쪽

(오타마) 부녀는 어제도 그제도 함께 있었던 것처럼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러기)-142쪽

첩이라 해도 서방의 집에 있으면 일상적인 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지만, 숨겨진 첩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고생이 있다. 오타마의 집에 어느 날 시루시반텐을 뒤집어 입은 30대 전후의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시모사가 고향인데, 고향에 가고 싶으나 다리를 다쳐 걸을 수가 없으니 좀 도와달라고 말했다. 10전짜리 은화를 종이에 싸서 우메에게 줘 보냈더니 남자는 종이를 펴 보고는 히죽 웃으며 ˝겨우 10전이야! 아마 잘못 생각한 모양인데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오너라˝하고 말하며 내던졌다. (기러기)-169쪽

교육자들은 망상을 일으키지 않도록 젊은이들에게 이부자리에 들어가면 바로 잠을 자고, 눈을 뜨면 바로 일어나라고 훈계한다. 젊고 혈기 왕성한 몸을 따뜻한 이불 속에 두면, 독초의 꽃을 불속에서 피운 것처럼 사상(寫像)이 싹트기 때문이다. 오타마의 상상도 꽤 자유분방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에는 눈에서 어떤 빛이 나며 술에 취한 듯 눈꺼풀에서 볼까지 홍조가 넘쳐흘렀다. (기러기)-196쪽

오타마는 처음에는 서방님(스에조)을 깍듯이 모시는 여자였지만 주변 환경이 급격히 변하자 반문해보기도 하고 성찰해보기도 한 끝에 뻔뻔스럽다고 해도 좋을 만한 위치에 스스로를 놓고, 세상 여자들이 많은 남자와 접한 후에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냉정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기러기)-197쪽

메이지 십몇 년경인 당시에는 에도 시대 상가(商家)의 관습법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같은 마을에서 같은 마을로 고용살이를 들어가도 야부이리날(정월과 7월 전후로 고용살이하는 사람들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 외에는 쉽게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기러기)-199~200쪽

다카세부네에 타는 사람들의 과반수는 한순간 마음을 잘못 쓴 탓에 생각지도 못한 죄를 범한 자들이었다. 흔한 예로 사랑하는 남녀가 같이 죽으려고 정사(情死)를 기도하다가 여자만 죽고 남자만 살아남은 그런 경우였다.
다카세부네는 이런 죄인들을 태우고, 날이 저물 무렵 사찰의 종이 울릴 때쯤에야 출발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교토 거리의 가옥들을 양옆으로 바라보면서 동쪽으로 달리다가 가모 강을 가로질러 하류로 내려간다. (다카세부네)-222쪽

언제 적이었을까! 아마 다이묘 시라카와 라쿠오가 에도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간세이(寬政, 1789~1801) 무렵이었을 것이다. 치온원의 벚꽃이 저녁을 알리는 사찰의 종소리에 어우러져 떨어질 무렵,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기이한 죄인 한 사람이 다카세부네에 탔다. (다카세부네)-223쪽

˝(전략) 교토는 정말 좋은 곳입니다만, 그 나무랄 데 없는 좋은 곳에서 지금까지 제(기스케)가 겪었던 고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후략)˝ (다카세부네)-226쪽

˝(전략) 숨통을 끊으면 바로 죽을 줄 알았는데, 숨이 그 자리에서 샐 뿐 죽지 않아! (후략)˝ (다카세부네)-231쪽

(모리 오가이의 어머니인) 미네는 1916년 70세(오가이 나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지만, 육군 군의총감, 육군성 의무국장의 지위에까지 오른 오가이를 마지막까지 곁에서 보호하고 격려했다. 오가이도 그런 어머니를 경애해서 평생 절대복종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순종했다. (해설)-238~239쪽

오가이는 1881년 7월, 19세라는 젊은 나이로 도쿄 대학 의학부를 최연소 졸업했다. 그리고 동급생인 고이케 마사노리의 추천과 양친의 뜻에 따라 육군 군의부에 들어간다. 그는 도쿄 대학 의학부 졸업생으로 문부성 국비유학을 희망했으나, 하숙집에 불이 나 강의노트가 불에 타는 등 불운이 겹쳐 졸업성적이 3등 안에 들지 못하고 서구로 가는 국비유학생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쓰와노번이라는 작은 시골의 전의였던 모리 가문은 오가이가 문부성 국비유학생이 되는 것보다 육군이라는 국가조직 안에 들어가 ‘입신출세’의 길을 걷는 것을 더 원했다. 그의 육군 입대는 집안을 안정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기대와 가문의 요구에 보답하는 길이기도 했다. (해설)-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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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2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지음, 이미경 옮김 / 책세상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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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 전 한국 최초의 장편 에니메이션 홍길동의 신동헌 감독이 별세했다. 그는 서양 고전 음악의 애호가로도 명성이 높아서, 그에 관한 책도 몇 권 쓴 바가 있다.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때도, 그의 책 음악가를 알면 클래식이 들린다를 읽었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었다. 바그너를 추종했던 브루크너를 거세게 비판했던 음악 평론가로 언급됐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바그너의 스승격인 리스트의 작품들을 즐기게 되면서, 한슬리크의 이름도 종종 접하게 됐다. 리스트와 교향시와 바그너의 악극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표제 음악의 조류와 대립했던 절대 음악의 수호자가 바로 그였다.

 

 리스트의 방향에서만 접근한 탓이 크겠지만, 그동안 바라본 한슬리크는 항상 완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옹호했던 브람스의 치밀하고 견고한 작품들도 언제부터인가 자주 듣게 됐지만, 그보다 더 맘에 내키는 쪽은 언제나 리스트의 곡들이었기 때문이다. 오페라의 화려한 선율들을 피아노 한 대 위에서 현란하게 재구성한 리스트의 편곡 작품들이야말로 언제 들어도 놀랍고 달콤했다. 한슬리크는 음악은 문학 혹은 가사나 감정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예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주장했지만, 바로 그 힘을 빌린 까닭에 리스트의 음악에 매혹됐던 것이다.

 

우리가 음악적인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감정 표현 가능성이 언젠가 음 예술의 미적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설사 음악에서 정확한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음악에서의 아름다움은 감정표현의 정확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p.65

 

 그래도 결국 그의 이 책을 사고, 또 한참 시간이 지나서 결국 읽게 된 것은 그동안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한슬리크의 훈계를 의식해 왔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 책 속의 그는 여전히 완고했다. 이제 다시 이렇게 그의 논변을 듣는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동안 자주 들었다. 앞으로도 음악 자체를 위해 음악을 듣는 일은 없으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음악이 한슬리크의 말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내 감정을 지탱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어서다. 다만 이 선율들이 창작된 목적이나 구성된 법칙은 듣는 자의 감정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

 

회화, 교회 건축, 희곡 작품을 수프를 떠먹듯 그렇게 감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리아는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예술 감상도 액세서리 같은 역할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음악 작품도 식사 음악으로 연주될 수 있고 꿩고기의 소화를 도울 수 있다. 음악은 가장 뻔뻔한 예술이면서 동시에 가장 겸손한 예술이다. 우리 집 앞에서 계속 징징대는 [뻔뻔한] 손풍금 소리는 들어야 하지만 멘델스존의 교향곡조차 [겸손하게도] 꼭 들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p.138

 

 한슬리크의 비유를 빌리자면, 난 음악에게 계속 겸손함만을 강요하는 쪽에 가깝다. 꼭 들을 필요는 없는 음악을 내가 들어주는 까닭에, 그 내부의 원리까지는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야말로 특별히 주시하지 않아도 일상과 공존할 수 있는 드문 예술이다. 그런 음악을 시간을 장식하는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 이 작품들의 가치를 경시하는 태도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집 안에서 내가 원하는 선율들을 들어야만, 집 밖에서 들을 수밖에 없는 뻔뻔한 소음들을 잊을 수 있다. 집에 오자마자 트는 음악들은 일종의 결계와도 같다. 역시 태만하지만, 알 필요는 없더라도 들을 필요가 남는다.

 

어떤 음악 작품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내거나 그 특징을 밝혀내거나 혹은 해설하는 것 등은 모두 비유적이거나 아니면 허구적이다. 다른 모든 예술에서는 설명에 해당하는 것도 음 예술에서는 이미 은유가 된다. -p.81

 

 지난해에 아쿠타가와 야스시의 음악의 기초를 읽고 적었듯, 음악을 배우며 들을 의지는 여전히 미미하다. 이 책에서도 음악 밖에는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없다는 한슬리크의 완고함이 역시 거부감을 초래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제는 작곡가들이 청자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유도할 목적으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좀 더 의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밖의 작품을 푸는 실마리가 내 안에만 있다고 믿는 것은 억지다. 듣지 않을 길이라도 그 방향만큼은 알고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 길로 더 깊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든, 언젠가 그 길로 걸어갈 때를 위해서든 생각의 이정표는 꽂아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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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2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지음, 이미경 옮김 / 책세상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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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최종 가치는 항상 감정의 명료함과 관련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완전히 동의한다. -18쪽

아름다움은, 그것이 아무 감정을 환기시키지 않더라도, 사실상 우리가 보거나 관찰하지 않는 경우에도 아름다우며 계속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26쪽

음악은 청자들의 환상을 위해 예술가의 환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은 그저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지성을 통한 직관, 즉 표상과 판단을 포함한 직관이다. -28쪽

아름다움에 대해 지성만이 활동하게 되면 미적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되지만, 감정 작용이 지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더 위험하며 병적이다. -29쪽

음악적 논문들은 음악과 건축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셀 수 없이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건축가라면 어느 누가 건축은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거나, 감정을 내용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겠는가? -30쪽

얼마나 많은 모차르트의 작품들이 그 당시에는 정열적인 것으로, 격정적이고 모험적인 것으로 여겨졌던가? 하이든FranzJoseph Haydn의 교향곡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쾌적함은 모차르트 음악에서의 격정과, 심각한 투쟁, 쓰디쓴 고통들에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20년 내지 30년 후에 사람들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바로 그렇게 구별했다.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음악의 대표 격이었던 모차르트의 자리는 베토벤이 차지했고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올림포스적인 고전성을 물려받았다. -32쪽

우리가 음악적인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감정 표현 가능성이 언젠가 음 예술의 미적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설사 음악에서 정확한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음악에서의 아름다움은 감정표현의 정확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65쪽

춤이 특정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몸동작과 표정으로 말을 하기 위해, 춤의 형식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율동성을 버리면 버릴수록, 형식은 없고 의미만 있는 단순한 판토마임에 더 가까워질 뿐이다. 춤에서 극적 원칙이 우세해지면 그만큼 춤의 조형적이며 율동적인 아름다움은 손상된다. -68~69쪽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대상의 품위가 떨어지는 일은 없다. -80쪽

어떤 음악 작품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내거나 그 특징을 밝혀내거나 혹은 해설하는 것 등은 모두 비유적이거나 아니면 허구적이다. 다른 모든 예술에서는 설명에 해당하는 것도 음 예술에서는 이미 은유가 된다. -81쪽

동백꽃은 향기 없이 꽃을 피운다. 백합은 색깔 없이, 장미는 향기와 색깔을 모두 갖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여기서 이것의 속성이 다른 것의 속성으로 옮겨지지 않으며, 그럼에도 이들은 저마다 모두 아름답다! -90쪽

음악만큼 그렇게 신속하고 다양하게 많은 형식들을 사용하는 예술도 없다. 전조들, 종지구들, 음정 진행과 화성의 연결은 50년, 아니 30년 만에 진부해져, 뛰어난 작곡가는 더 이상 그것을 사용할 수 없고, 계속해서 순수하게 음악적인 새로운 특징을 찾아야 한다. -92쪽

바흐, 모차르트, 하이든의 세계관을 비교하면서 그들 작품이 대조적인 이유를 세계관의 상이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일은, 아주 흥미롭고 가치 있는 시도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너무나 복잡하여, 그 인과 관계를 철저하게 밝히려 하면 할수록 그릇된 결론으로 이끌릴 위험이 많아진다. 이 원칙을 따르는 연구는 과장의 위험이 너무나 심각하다. 사람들은 단지 동시대에 일어났을 뿐 긴밀한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쉽사리 내적 필연성이 있는 것으로 서술하고, 음 언어가 영원히 번역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당장의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해석한다. 같은 사실이라도 현명한 사람이 말하면 진리가 되고 평범한 사람이 말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되어버리는 그 같은 역설이 얼마나 교묘하게 잘 펼쳐졌는지에 오로지 좌우되는 것이다. -97~98쪽

음 예술의 물리적 부분을 연구하는 데 수학이 없어서는 안 될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완성된 음악 작품에서 그 의미가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작품이 훌륭하든 나쁘든 간에, 음악 작품에서 수학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환상의 창조가 계산 문제는 아닌 것이다. 모든 모노코드(한 줄로 된 발현 악기) 실험이나 소리 음형, 음정 비례 등은 여기에 속하지 않으며, 미학적 영역은 그러한 요소들의 관계가 그 의미를 중단한 지점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수학은 단순히 기본 요소들을 규칙화하여 정신적으로 취급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뿐이며, 가장 단산한 관계들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음악적 사고는 수학 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100~101쪽

인생에서 어떤 위대한 것도, 어떤 아름다운 것도 내면의 따뜻함 없이 성취되지 않았다. -111쪽

시인들이 그렇듯 작곡가도 감정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겠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창조적인 요인이 아닐 뿐이다. 그가 어떤 강렬하고 열정적인 정념Pathos으로 가득 차 예술 작품을 만들게 되면, 그 정념은 작품의 원인과 동기가 될 수는 있을지라도 -특정한 정서를 표현할 능력도 임무도 갖고 있지 않은 음 예술의 본성을 통해 알 수 있듯이-결코 예술 작품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111~112쪽

감정이 직접적으로 음으로 분출되는 것이 허용되는 행위는 음악 작품의 창조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음악 작품의 재생산, 연주에서 일어난다. -115쪽

음악의 주관적 인상을 연구할 때 그러한 (작곡과 연주의) 분리는 특히 유효하다. 연주자는 자신의 악기를 통해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감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또한 연주를 하면서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거친 격정, 불타는 그리움, 밝은 기운과 호흡할 수 있다. 손가락 끝을 통해 내적인 떨림이 직접 현에 전달되거나, 활로 켜거나, 노래로 소리를 내거나 하는 신체적인 친밀함이 일어난다. 그래서 연주에서는 가장 개인적인 기분이 표출될 수 있다. 여기서 주관성은 단지 음 속에 형식화되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음으로 울리며 현실화된다. 작곡가의 창작은 천천히, 가끔 중단되어가며 이루어지지만, 연주가의 작업은 한 번에 끝나는 비행과 같다. 작곡가의 작업은 영원히 남겨지기 위한 것이고, 연주가의 그것은 충분한 순간을 위한 것이다. 음악 작품은 형식화된 것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것의 연주가. 감정이 분취되고 흥분되는 음악의 순간은 재생산의 행위에 있다. 이 재생산의 행위는 어둠에서 깜빡거리는 불빛을 끌어내어 청자들의 마음속에 옮겨 붙게 한다. 물론 연주자는 작곡된 것을 연주할 뿐이다. (다음)

(이어서) 작품은 음표대로 연주할 것만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작곡가의 정신만 이 존재하고 연주자는 그것을 추측하고 드러낼 뿐˝이라고 말한다. 그 말도 옳다. 그러나 바로 이 재창조의 순간에 작곡가의 정신을 자기화하는 것은 연주가의 정신이다. -115~116쪽

회화, 교회 건축, 희곡 작품을 수프를 떠먹듯 그렇게 감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리아는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예술 감상도 액세서리 같은 역할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음악 작품도 식사 음악으로 연주될 수 있고 꿩고기의 소화를 도울 수 있다. 음악은 가장 뻔뻔한 예술이면서 동시에 가장 겸손한 예술이다. 우리 집 앞에서 계속 징징대는 [뻔뻔한] 손풍금 소리는 들어야 하지만 멘델스존의 교향곡조차 [겸손하게도] 꼭 들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138쪽

만약 인간이 예술의 요소적인 것들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겨,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졌다면, 이것은 예술을 위해서도 명예로운 일이 아니며, 인간 자신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140~141쪽

(고대의 음악은) 4분음[반음보다 더 좁은 미분음]과 ‘이명동음적인 음조Tongeschlecht‘[4분음을 포함한 음조]로까지 선율 재료가 미세하게 다듬어져, 오늘날의 음 예술이라 할지라도 그 이상으로 각 선법(旋法)에 특징적인 특수한 표현을, 이야기되거나 노래되는 말과의 긴밀한 유착을 보여줄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미세하게 발달된 음 관계들은 좁은 범위에서이긴 하지만 청중들을 훨씬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둔한 평균율로 교육된 우리의 귀보다 예민한 그리스인들의 귀가 끝없이 미세한 음정들까지 구별해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 민족의 정감 역시 우리보다 음악에 의한 분위기 변화에 훨씬 더 민감했으며 그러한 변화를 더욱더 열망했다. 우리의 경우엔 음 예술에 대한 예술적 훈련을 받았기에, 음 예술의 요소적 영향력을 마비시키는 관조적 쾌에 이르려 한다. 그래서 고대에는 음악이 더욱더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144~145쪽

하나의 음악 작품을 이해하는 데 수반되며 우리를 즐기게 해주는 심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번번히 간과된다. 그 요소란, 작곡가의 의도를 계속 쫓아가며 때로는 앞서 기대하기도 하고, 떄로는 추측을 확인하며, 때로는 유쾌하게 속기도 하면서 청자가 발견하게 되는 정신적 만족이다. 이러한 지적 과정들이, 이러한 끊임없이 주고받는 과정들이 무의식적이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일임은 자명하다. 오로지 그러한 음악만이 완벽한 예술적 향유를 제공할 것이며, 이러한 향유는 본래 환상의 사색Nachdenken der Phantasie이라 부를 수도 있을 정신적 후속물들을 야기한다. 정신적 행위 없이는 어떠한 미적 향유도 없다. 음악에서는 이러한 정신 활동의 형식이 특히 고유하다. 음악 작품들은 확고부동하게 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청자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따라서 음악 작품들은 청자에게 임의의 정지나 중단을 허락하는 관찰이 아니라 예민하게 깨어 있으면서 끊임없이 따라올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반은 아주 복잡한 작품들에서는 정신적 노동이 될 수도 있다. -147쪽

음악에서는 모든 것이 측정할 수 있는 것인 데 반해 자연음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두 음향 세계가 거의 매개 없이 양립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자연은 우리에게 완성된, 모방할 수 있는 음 체계의 예술적 재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질 그대로의 원재료를 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음악에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동물의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내장이며[내장으로 악기를 만들므로], 음악이 가장 고마워해야 할 동물은 나이팅게일이 아니라 양이다. -165쪽

어떤 하나의 주제에서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내려는 모든 시도는 모순에 부딪히거나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어떤 동기가 다른 악기로, 혹은 한 옥타브 위에서 반복된다면, 그 동기의 내용이나 형식은 바뀌는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 형식이 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동기의 내용으로 남게 되는 것은 단지 음정들의 나열 같은 것들이거나 우리 눈앞의 총보에 그려져 있는 음표들의 윤곽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음악적 규정이 아니라 추상일 뿐이다. 이것은 원기둥의 채색된 창문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창문으로 보면 같은 대상도 빨갛게, 파랑게 또는 노랗게 보일 것이다. 이때 대상의 내용도 형식도 바뀌지 않았다. 오로지 색깔만 변한 것이다. 동일한 형식을 이같이 가장 강렬한 대조에서 섬세한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다양한 색채로 변화시키는 것은 음악의 매우 고유한 특징이며, 음악의 효과 중 가장 풍부하고 가장 정제된 측면의 하나다. -184~185쪽

작곡이 형식적인 미적 법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은 자의적으로 무계획적으로 방황하는 즉흥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듯이 유기적으로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하게 하면서 점점 발전해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186~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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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그루 소령의 마지막 사랑
헬렌 사이먼슨 지음, 윤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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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꺼워도 금방 읽을 것이라 생각하고 집었던 책인데,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책을 읽는 속도가 많이 느려진 탓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호흡이 미친 영향도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60은 넘긴 영국 육군의 퇴역 소령과 같은 동네에서 작은 잡화점을 운영하는 파키스탄 혈통의 여성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그들의 작은 마을 에지컴세인트메리를 산책하는 걸음 마냥 완만한 템포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계속 걸을 길이기 때문이다.

 

거트루드는 영리한 아이라고 했잖아, 퍼거슨.” 대거넘이 말했다. “내 누이인 이애의 엄마는 대단한 여자였지. 나만큼 그애를 사랑한 사람은 없어.” 그는 냅킨으로 눈가를 두드렸다. 소령은 이런 말은 예상도 못했다. 메이 대거넘은 새파랗게 젊은 가수와 달아난 뒤 가족에게 거의 의절당한 것으로 마을에 알려져 있었다. -p.320

 

 이야기에 큰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서로 인종과 배경이 다른 두 노인의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체면과 시선에 퍽 연연하는 어니스트 페티그루 소령은 시종일관 그 감정이 남들의 입질에 오르지 않도록 하는 데, 자신의 연정만큼이나 큰 기력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가게를 함께 꾸리던 파키스탄 인 남편과 사별한 재스미나 알리 역시 소령의 그런 태도를 관대하게 이해한다. 게다가 그들의 연애를 훼방 놓을 소읍(小邑)의 영국인들 역시, 타인의 사생활을 두고 험담을 나눌 때조차 자신의 평판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이 소설의 화자가 바라보는 이야기의 표면에서는 두 사람의 애정을 손가락질하는 자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짓이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큼 양식이 있고, 동시에 그럼에도 그것을 수군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비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마을의 목사와 그 사모를 비롯해 소령의 오랜 지인들의 뒷공론이 오래도록 이어지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사랑에 빠진 퇴역 소령이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빠져 나왔을 뿐이다.

 

모자걸이 옆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맞아줄 여신이 필요했거든요.” 앨마가 말했다. “그리고 미시즈 알리는 순수한 인도인, 아니면 적어도 파키스탄인이잖아요.”

사실 난 케임브리지 출신이에요.” 미시즈 알리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립병원 3병동 출신이죠. 와이트 섬보다 멀리 가본 적도 없고요.” -p.224~225

 

 물론 이 소설 속의 사람들이 마냥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은 충분히 교양 있다고 자부하는 에지컴세인트메리의 사람들이 그나마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불편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무굴 제국을 주제로 골프클럽의 댄스파티를 연다면서 파키스탄 출신인 미시즈 알리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소읍의 영국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잘 보여 준다. 타인의 정체성을 향해 그게 그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반성과 분별이 필요하다.

 

 이런 장면이야말로 미시즈 알리와 페티그루 소령의 사랑이 이 작은 동네에서 결코 따뜻하고 쉬울 수만은 없으리라는 너무나 명확한 단서이다. 이 단면을 두 사람의 미래에 놓인 걸림돌로 확장시키지 않은 까닭에 이 소설은 비좁고 짜증날 때도 있지만, 동시에 온기를 품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저 사람들의 턱없이 교만한 올바름은 그들과 함께 살아온 페티그루 소령의 일부이기도 했다. 페티그루 소령은 미시즈 알리에 빠져들면서, 비로소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남김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이제 미시즈 알리의 눈앞에서 그는 숨을 곳이 없었고, 숨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수조에 빠뜨려 죽였지.”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서 바늘 끝으로 잔디밭에 원을 그렸다. “난 봤어. 아버지가 한 손으로 어머니를 수조에 밀어넣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걸. 아버지는 어머니를 정말 사랑했거든. 어머니는 카펫과 구리 솥을 팔러 온 남자와 웃었고, 우리 할머니의 가장 좋은 찻잔에 차를 담아 자기 손으로 직접 건넸지.” 그녀가 다시 일어섰다. “난 항상 아버지와 아버지의 희생이 자랑스러웠어.” p.481~482

 

 이 작품에는 미시즈 알리의 시집 조카이고 그의 가게를 물려받은 압둘 와힛과 그의 애인 아미나, 두 사람 사이에서 탄생한 아들 조지도 등장한다. 집안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한 두 사람을 둘러싼 갈등은 이 작품에서 그나마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파키스탄 혈통의 이슬람 신자인 이들의 종교적, 개인적 완고함뿐만 아니라, 그들이 영국의 작은 동네에서 눈에 띄는 존재라는 사실까지 겹쳐서 그들의 사건은 이야기 속에서 더 눈에 띈다. 가족의 명예를 더럽히고 이슬람의 교리를 벗어났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압둘 와힛과 아미나의 혼인을 반대했던 압둘 와힛의 외고모할머니가 말하는 명예 살인의 과거사는, 사실상 에지컴세인트메리의 사람들이 입으로 내놓지 않는 파키스탄이며 인도에 대한 가장 어두운 인상을 스스로 증명한다.

 

 압둘 와힛이 아미나를 사랑하면서도 가문의 명예와 종교의 교리에 얽매여서 결혼을 회피하는 태도의 근원으로 명예 살인을 제시하는 흐름은 일견 태만하기도 하며, 또한 이민자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고 우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악한 풍습이 아직까지도 정당화되거나 박멸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민자이자 소수자라는 다양성의 범주에 앞서서 인간으로서 범해서는 안 되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훨씬 중대한 까닭에, 적절한 전개라고 보았다. 노인들의 사랑인 동시에 다수자와 소수자의 결합인 이 이야기가, 명예살인을 마치 오래 전 끝난 전설처럼 다루지 않은 덕분에 미시즈 알리와 페티그루 소령의 애정 역시 허공을 맴돌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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