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대를 잊으면 - 트루먼 커포티 미발표 초기 소설집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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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에 이것저것 주워 모은 구슬이며 과자 포장지, 놀이동산의 입장권 등을 담아둔 알루미늄 상자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우연히 찾아서 다시 열어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마 이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할 듯하다. 꼭 트루먼 커포티가 작가 시절의 가장 초기였던 10대 때 쓴 작품이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단편의 단편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짧은 분량에 하나의 이야기가 잘 담긴 까닭이다. 어린 시절의 하루하루도 지금 보면 비좁고 어수선하지만, 당시에는 나름대로 넓고 가지런했다. 그래서 그때는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 작품들은 10대 초중반의 어린 커포티가 자신의 삶 속에서 얻은 그 다양한 소재와 사유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었는지 잘 보여 준다.

 

여자는 싸구려 자명종을 힐끔 보았다. 3시 반, 하루 중 가장 쓸쓸하고 가장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각이었다. 가게는 답답한 곳으로, 등유와 신선한 옥수수 가루, 오래 묵은 사탕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다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8월 오후의 태양이 하늘에 뜨겁게 걸렸다. (밀 스토어)-27

 

 훗날 활짝 꽃피는 대가의 초기작이기에, 그 단서이자 맹아로서의 성격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면 이 단편들 자체의 가치는 다소 가려질 듯하다. 이 매끄러운 이야기를 쓴 작가가 당시에 작가로서의 야심이 가득한 10대 소년이었다는 사실에 좀 더 주목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헤어진 남자를 생각하며 한적한 동네의 심심한 오후를 보내던 어느 젊은 여성 점원에게 닥친 한 사건으로 순식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가 이내 태평하게 해결해 버리는 밀 스토어, 당시의 커포티가 밋밋한 일상을 감내하면서도 날카롭게 연마한 극적 상상력을 드러낸다. 자신의 도벽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기보다는 자기도 이걸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면서 마치 남의 사건인 양 초조해하는 여고생의 이야기 힐다는 자신의 모순을 남다른 매력으로 포장하고 싶어 하는 10대 특유의 욕망이 그럴싸하게 반영되었다.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척하면서.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째서 음악이 내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지 알았어요. 그건 일종의 대체품이었던 겁니다. 더 고운 것을 대신하는 영광스러운 대체품. 무언가. 무언가......” 그는 그녀를 보았다. “당신 같은.” (서쪽으로 가는 차들)-171

 

 서쪽으로 향하는 차를 함께 타게 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사연을 각각 그려낸 서쪽으로 가는 차들은 파국에 가까운 결말도 그렇거니와, 그 차에 모인 사람들의 상이한 성격과 서사들을 압축적으로 그려내는 수완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장거리 버스를 타면서 그 안의 여러 승객을 보며 그들의 삶과 생각을 이리저리 궁리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물론 10대다운 평면성도 드러나지만, 스스로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마치 인식한 듯이 그 안에서 가능한 한 가장 생생한 세계와 인물을 구현해 내려는 집요함이 더 또렷하다. 훗날의 커포티에 비하면야 미숙하더라도, 이 또래의 어떤 작가가 그보다 더 낫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뭇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저 장면은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자신은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다고 허세를 피우느니,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지극히 충실했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트루먼 커포티였다.

 

이제 곧 그의 집 앞에 당도할 것이었다. 바로 저 언덕을 올라 내려가기만 하면, 곧 도착한다. 근사한 작은 집으로, 견고하고 튼튼했다. 그가 살기에 완벽한 곳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70

 

 이 이야기들 속에는 어쩔 수 없는 애틋함이 있다. 단순히 유년 시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성숙하지만-에 쓴 작품이어서도, 이 중 여러 작품의 화자나 배경이 유년기의 아이들이어서도 아니다. 자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언제라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환상이나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마냥 부여잡은 채 현실을 외면하는 소녀, 샐리의 이야기인 세계가 시작되는 곳조차도 조금은 애틋한 구석이 있다.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지속될 수 없는 것들에게 대한 이야기를 너무도 태연하게 풀어낸 까닭이다. 나른한 여름 오후 한때의 소동이든(밀 하우스), 꽤 긴 시간 이어졌던 첫 사랑의 끝이든(내가 그대를 잊으면), 소년이 소문의 탈옥수를 추적하는 한밤의 모험(늪의 공포)이든, 커포티는 어떤 사건이라도,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그렇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어린 작가가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짐작을 넘어서,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럼에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 나섰기에, 이 쓸쓸함이 고스란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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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잊으면 - 트루먼 커포티 미발표 초기 소설집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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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불을 붙이면서 여자는 솟아오르는 연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여자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찡그렸다. 이 망할 흡연의 유일한 문제점이었다. 입속에 헌 자리가 그 때문에 아팠다. (밀 스토어)-26쪽

여자는 싸구려 자명종을 힐끔 보았다. 3시 반, 하루 중 가장 쓸쓸하고 가장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각이었다. 가게는 답답한 곳으로, 등유와 신선한 옥수수 가루, 오래 묵은 사탕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다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8월 오후의 태양이 하늘에 뜨겁게 걸렸다. (밀 스토어)-27쪽

교장은 힐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연약함을 처벌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그의 마음이 움직인 티가 났다는 것을 본인도 알았다. 그는 창문으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바로잡았다. (힐다)-44쪽

“혹시 당신들 여기 괜찮은 동백나무 파는 사람 압니까? 나체즈에 집을 짓는 동부 여자를 위해서 모으는 중인데.” (벨 랜킨 양)-50~51쪽

남자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 후 나가려다가 갑자기 몸을 돌리고 말했다. “청년들, 나랑 거기까지 같이 가서 위치를 알려주면 어떤가? 나중에 도로 데려다줄 테니.”
두 건달은 재빨리 동의했다. 차를 탄 모습, 특히 낯선 사람의 차를 탄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 난 그런 부류였다. 마치 그 이방인과 무슨 연이라도 있는 듯 보일 테니까. 그리고 어쨌든 차를 탄다면 담배를 얻어 피울 건 분명했다. (벨 랜킨 양)-52쪽

이제 곧 그의 집 앞에 당도할 것이었다. 바로 저 언덕을 올라 내려가기만 하면, 곧 도착한다. 근사한 작은 집으로, 견고하고 튼튼했다. 그가 살기에 완벽한 곳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70쪽

눈이 멀 듯 환한 섬광처럼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 누가 아주 가까운 데에 서서 차갑고 계산적이며 제정신이 아닌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꽃 속의 나방)-76쪽

그녀는 중심 주택가에 있는 이 집에 늘 살았고, 그녀의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진정한 개척자였으며,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과거가 되었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며, 옛 친구들도 천천히, 거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세상을 떴다. 이것이 일종의 한 왕조, 남부 귀족 가문의 소멸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는 듯했다. (익숙한 이방인)-101~102쪽

엄마가 알게 된다면 그렇게 비밀스럽지도, 그래서 그렇게 신나지도 않을 것만 같았다. (이것은 제이미를 위한 거예요)-138~139쪽

페드로는 건물 지하에서 일하는 일꾼으로, 그와 루시는 당밀보다도 끈끈했다. 루시가 뉴욕에 온 지 다섯 달 남짓 되었을 때 이렇게 되어버렸고, 그때까지도, 기술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여전히 세상물정을 몰랐다. (루시)-155쪽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째서 음악이 내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지 알았어요. 그건 일종의 대체품이었던 겁니다. 더 고운 것을 대신하는 영광스러운 대체품. 무언가. 무언가......˝ 그는 그녀를 보았다. ˝당신 같은.˝ (서쪽으로 가는 차들)-171쪽

(리튼하우스 부인은) 얼굴은 말랐지만, 철저한 원칙에 따라 모형을 뜬 듯 완고해 보이는 선을 따라 빚어졌다. 단 하나의 찌든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비슷한 사람들)-181쪽

˝장례식은 돈이 들었나요? 제 말은 마틴 장례식요.˝
리튼하우스 부인은 쿡쿡 웃더니 몸을 앞으로 내밀며 속삭였다. ˝화장했답니다. 그것 참 어처구니없지 않나요? 아, 그래요. 재를 신발 상자에 싸서 이집트로 보냈답니다. 왜 거기냐고요? 모르겠네요. 그 사람이 이집트를 혐오했다는 것만 빼고는요. 나 자신은 좋아했어요. 멋진 나라죠. 하지만 그 사람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니까 어처구니없는 거죠. 하지만 딱 한 가지 무척 안심되는 게 있었어요. 나는 소포에 반송 주소를 썼는데, 절대 돌아오지 않았어요. 어쨌든 나는 그 사람이 결국에는 적당한 안식처에 다다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비슷한 사람들)-184쪽

사후 출판은 신중함과 개방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작가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하지만, 보통은 소수의 사람만이 접근해서 볼 수 있는 자료를 일반적인 독자와 공유하면서, 작가의 발전 과정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는 개방적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어린 천재 예술가의 초상), 데이비드 에버쇼프-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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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오래된 상점을 여행하다 - 소세키의 당고집부터 백 년 된 여관까지
여지영.이진숙 지음 / 한빛라이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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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 사는데, 굳이 도쿄에 가야 하나?”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주제 파악 못한 소리다. 아니다, 실은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기는 하다. 휴가를 내서 일본에 간다면 역시 교토에 가고 싶으니까. 도쿄에 가면 이곳을 베끼려다 말아 먹은 서울이 생각나지만, 교토에서는 굳이 한국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동안 몇 번 다녀왔지만, 여전히 도쿄로 향하는 길은 좀 어렵다.

 

 올해 초에 며칠 시간을 내 도쿄에 다녀왔다. 1월이어서 아직 겨울이라고 부를 법한데도 제법 포근했다. 산토리홀에서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에라자드>를 들었고, 우에노(上野)의 도쿄국립박물관에서는 안진경(顏眞卿) 특별전의 제질문고(祭姪文稿)와 이공린(李公麟)오마도권(五馬図巻)을 보았으며, 우에노노모리미술관에서는 베르메르 특별전을, 국립서양미술관에서는 루벤스 특별전을 보았다. 도쿄는 도쿄다웠다.

 

호메이칸은 서민을 위한 여관이다.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운영하고 있다. 과거, 특히 전쟁 시에는 군인들의 사택이었고, 전쟁이 끝나고는 집을 잃은 사람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주 고객이었다. 이때 지방에서 온 아이들 중에는 가난한 아이도 많았는데, 그런 아이들에게는 쌀이나 잡곡 등을 숙박료 대신 받았다. -249

 

 45일 중에서 앞의 2박은 숙소가 마침 우에노 근처의 호메이칸(鳳明館)이었던 덕분에,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저 세 미술관을 한 번에 모두 둘러보았다. 딱히 료칸(旅館)을 동경하지 않고 서민풍의 숙소에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1898년에 지은 오래된 건물을 아직까지 여관으로 쓰고 있다기에 한번 묵어 보고 싶었다. 마침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았고.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근처 도쿄대학 학생들을 겨냥한 하숙집이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무릎 꿇고 시중드는 여주인과 종업원이 있는 그런 격식 높은 료칸이라기보다는, 학생 시절에 수학여행의 숙소로 묵었을 법한 정취가 감도는 여관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은 허름하지도 근사하지도 않은 그 나름의 위치를 지금까지 지켜왔다는 사실이야말로 어느 격식보다도 대단한 것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적절한 요금을 받고, 그에 맞는 안온한 시설과 접객의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 요소들 사이의 현실적인 균형을 찾아내는 감각과 그 가치에 대한 확신이 계승되어야만 가능한 까닭이다. 이만한 규모와 자본의 도시에서 이런 적당한 공간과 그 지향이 지금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쿄는 충분히 인상적이다.

 

며칠 전 우리 가게(세이운도인방)에 스물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손님이 찾아왔다. 막 취직을 했는데 자신만의 도장을 갖고 싶어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했다. 나로서는 아주 고마운 일이다. 물건에 대한 철학을 가진 것이 고맙고, 그것이 좋은 고집으로 보였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신이 지닌 물건에 대한 고집이나 좋은 것을 구분하는 안목을 지녔고, 작은 도구건 큰 도구건 상관없이 원하는 물건에 대한 생각과 고집이 훌륭했다. 그래서 솜씨가 좋은 장인이 많았던 거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문화가 없다. 장인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유다.” -237

 

 도쿄의 각 지역에서 저마다 개성과 가치를 지닌 상점들을 하나씩 뽑아서 소개한 이 책은 오래된 가치를 대를 이어 계승하는 공간과 그곳의 사람들을 소개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쉽게 상상하는 일본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지만, 그 매장들이 현재 처한 난관과 미래에 닥칠 위기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솔직하다. 그들이 지금까지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지켜온 원칙과 그것을 가능케 한 저력을 존중하고 이방인으로서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그러한 과거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변화와 압력을 극복하도록 도와 줄 것이라고 낙관하지는 않는다. 오래된 가게란 앞으로도 오래 갈 가게이기도 하지만, 이미 충분히 오래되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이 책에서는 이미 없어졌거나 곧 없어질, 혹은 지금쯤 없어졌을지도 모를 가게들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애초에 지금 여행객들이 꼭 찾아가야 할 명소로 이곳들을 소개하는 대신, 한 가게가 도쿄의 거리에서 그 동네의 사람들과 함께하며 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물려받은 전통과 자신의 역할을 의심하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가면 오래도록 가게를 이어갈 수 있다는 비결은 물론 정성스럽고 위안도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상황도 당연히 존재한다. 가게가 오래되었으므로 없어졌다면 한편으로는 스산하면서도 실은 무척 자연스럽다. 적어도 오래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어떻게든 버티는 가게보다는 훨씬 명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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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오래된 상점을 여행하다 - 소세키의 당고집부터 백 년 된 여관까지
여지영.이진숙 지음 / 한빛라이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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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개하는 오래된 상점 이야기 속에는 어쩌면 대단하게 비쳤던 일본의 장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애잔함이 있다. 사무라이 때부터의 신분 세습으로 남을 넘볼 수도 없었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역전이 안 되는 사회, 오직 주어진 환경에서만 순응하고 살아야하는 이미 정해진 신분의 숙명 때문에 장인이 계속 태어났다. (이진숙)-7쪽

일본의 격식 있는 음식점들은 작은 이쑤시개 하나에도 품격을 더한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가이세키 요리를 내면서 후식과 이쑤시개를 아주 싼 것으로 쓰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무리가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고급 음식점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쑤시개 전문 브랜드가 ‘사루야‘다. (사루야さるや, 이진숙)-44쪽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건 충분히 감사할 일이다. (이토야ITOHya, 여지영)-184쪽

일본의 술은 청주, 탁주, 소주의 구분 없이 모두 니혼슈(日本酒)라고 한다. 그 가운데 사케는 가장 맑게 거른 상태의 ‘청주’를 말하는데 흔히 사케 또는 니혼슈라 칭한다. 사실 청주는 우리에게는 정종(正宗)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중략) 일본의 맛있는 술, 정종이 우리나라로 넘어온 건 일제강점기 때다. 마산에서 생산한 ‘대전정종’, 부산의 ‘앵정종’, 인천의 ‘표정종’ 등의 상표에서 술을 만든 회사나 가문을 나타내는 대전(大典), 앵(櫻), 표(瓢) 등을 떼어버린 게 바로 ‘정종’이다. 그러니 청주를 정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주를 ‘진로’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토시마야혼텐豊島屋本店, 여지영)-196쪽

“어머니가 사도 좋다고 하기 전에는 마니아가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중요하죠. 지금 마니아들은 모두 좋은 어머니를 두었다고 생각해요. 무조건 보기만 하고 사지 말라는 것은 옳지 않아요. 가지고 싶은 것을 갖기 위한 노력을 가르쳐야 해요. 이게 중요하죠.” (장난감천국 2초메 3번지おもちゃ天国2丁目3番地, 여지영)-215쪽

“인장을 전각할 때는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형태가 가지는 아름다움을 탐닉해야 한다. 그 다음 글자를 구현하기 위한 테크닉, 즉 힘 조절이 필요하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물론 처음에는 힘이 든다.” (여지영, 세이운도인방青雲堂印房)-236쪽

“며칠 전 우리 가게에 스물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손님이 찾아왔다. 막 취직을 했는데 자신만의 도장을 갖고 싶어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했다. 나로서는 아주 고마운 일이다. 물건에 대한 철학을 가진 것이 고맙고, 그것이 ‘좋은 고집’으로 보였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신이 지닌 물건에 대한 고집이나 좋은 것을 구분하는 안목을 지녔고, 작은 도구건 큰 도구건 상관없이 원하는 물건에 대한 생각과 고집이 훌륭했다. 그래서 솜씨가 좋은 장인이 많았던 거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문화가 없다. 장인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유다.” (세이운도인방)-237쪽

호메이칸은 서민을 위한 여관이다.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운영하고 있다. 과거, 특히 전쟁 시에는 군인들의 사택이었고, 전쟁이 끝나고는 집을 잃은 사람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주 고객이었다. 이때 지방에서 온 아이들 중에는 가난한 아이도 많았는데, 그런 아이들에게는 쌀이나 잡곡 등을 숙박료 대신 받았다. (여지영, 호메이칸鳳明館)-249쪽

(클래식 음악 킷사喫茶 라이온의) 초대 사장 야마데라 야노스케는 라이온의 모든 인테리어 소품 하나하나를 직접 제작하며 큰 애착을 보였고, 자신의 마지막을 라이온에서 보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 결국 야노스케 씨의 장례식은 라이온에서 치렀으며,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레퀴엠을 틀어놓고 그를 보냈다고 한다. (여지영, 라이온ライオン)-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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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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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자주 여성이라고 여겨지는 것일까? 2004년부터 지금까지 이 서재 블로그를 오랫동안 써 왔고 그 다음에는 트위터에서 꾸준히 떠들고 있지만, 어디서나 다른 이용자들이 여성으로 짐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이 그렇게 생각한 경우가 아마 좀 더 많았던 듯도 하다. 애초에 스스로 여성이라고 말한 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 보여야겠다거나, 보이고 싶다는 의도로 글을 쓰지도 않았는데도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여성이리라 생각했던 사람을 꽤 자주 보고는 한다. 앞으로도 그럴지는 알 수 없지만.

 

물론 상수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대답이 있긴 했다. 아무리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라도 상수가 대답을 거듭하다가 지쳐, 군대 면제였어요,라고 하면 모든 게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37

 

 처음부터 여성으로 보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연애 상담을 해 주는 언니가 되어 언니는 죄가 없다’(언죄다)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게 된 반도미싱의 과장대리 공상수를 보며 내가 겪었던 소소한 오해들을 떠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당연했다. 게다가 군대를 가지 않았다는 점도 그와 같았지만, 다행히도 우리 아버지는 전직 국회의원이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못내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의 면모는, 결국 병역도 언죄다 페이지도 아닌 아버지와 그의 지위,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와 그의 죽음,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 주었던 친구의 죽음에서 기인한다. 상수가 한국에서 칭송받는 이른바 남성성을 그렇게 우회하고서도, 어떤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에 이 작품의 현재성이 빛난다. 지금 한국 남성이 그저 인간성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대단하지도 충분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모자라다는 사실을 섬세하면서도 명료하게 보여 주었다.

 

경애는 자기가 인생을 길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기회라는 것은 그렇게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만들어낸 것은 기회가 아니라 일종의 시험에 가깝다고. -285

경애가 온종일 엎드려만 있는 유령 같은 학생이라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마음이 너무 강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정지해 있었을 뿐이었다. -279

 

 이야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도 간신히 사람 구실만 하면 얼마나 한심한지 납득시키는 것이 상수의 역할이라면, 경애의 역할은 그 빈 구멍들을 느릿하게 빠짐없이 막는 것이었다. 경애는 깊고 오랜 상처와 함께 살고서도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든 심지를 굳히며 성장해 왔다. 더 유복한 환경에서 같거나 비슷한 상처를 지닌 상수와 견주면, 경애가 얼마나 굳건한지 납득할 수밖에 없다. 그런 경애 역시 19세에 세상을 떠난 E의 존재를 직시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삶을 가누지 못했다. 어설픈 산주와의 너절한 연애가 그 단면일 듯하다. 모든 면에서 상수보다 충실하게 상실을 경험한 경애조차도 여태 비틀거릴 정도로 불시의 참사는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상수의 눈물만 남았다면 그저 감정 과잉의 원인이 되었을 과거가, 경애의 목소리 덕분에 여태 기억하고서도 끝내 치유하지 못한 그 고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물론 상처를 이기지 못한 상수 덕에 그것을 견딘 경애의 심지가 드러났으니, 둘 중 하나면 충분하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그들(경애와 상수)이 처음 서로를 식별했던 공장 뒤편의 그늘진 창고와 비교한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성과는 별로 없고 자랑스러운 성공들은 자꾸 다음을 기약하며 미뤄질 뿐이지만 적어도 둘의 시간은 따로가 아니라 함께 흐르고 있었다. -292

 

 서로 무관할 두 사람을 희미한 사건으로 잇고, 그 단서를 겨우겨우 더듬으며 양쪽 끝의 경애와 상수가 서서히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과 구도가 여러모로 절묘한 작품이었다. 이 흐름이 둘 중 어느 한 사람, 특히 남성인 상수의 노력에 기대지 않고 각자가 제 역할을 하며 이루어져서 더욱 빛났다. 경애와 상수가 저마다 자신만의 실패를 딛고서야, 서로에게 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상대를 기다릴 때조차도 이미 조금씩 가까워졌던 셈이다. 뛰어넘지 않고서 먼 길을 돌아온 덕에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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