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외편집자
츠즈키 쿄이치 지음, 김혜원 옮김 / 컴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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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에서 즐거워지기는 어렵지 않다. 그냥 걸으면 되니까. 거리의 상점들은 다채로우면서도 요란하지 않고, 주택들은 단정하면서도 경직되지 않았다. 이런 공간들이 모여서 길에 리듬을 주고, 그 위를 둘러보며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들떴다. 남루하지도 휘황하지도 않은 평범한 길거리에는 주거지와 관광지 사이의 균형감이 절묘해서, 강약의 세기를 적절히 바꿔 가며 눈과 발을 밀고 당기는 공간들의 리듬은 거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짐작하게 됐다. 마냥 떠들썩하고 거창한 상점들만 가득한 강박(强拍) 천지의 거리나, 그저 조용하고 고적한 주택들만 이어진 약박(弱拍) 일색의 거리에서는 지나칠 곳도 멈출 곳도 없어서 지루할 뿐이다.

 

 주택과 상점들 각각에 강약의 박자가 있고 그 공간들이 모여서 길거리가 된다. 그리고 그 길거리들 사이에도 저마다 선명하고 희미한 차이가 있어서, 그 거리들이 모여 하나 도시를 이룬다. 도시와 거리와 공간의 균형과 리듬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교토에 사로잡힌 이유이기도 했다. 그 도시에서 생활하는 여느 사람들의 취향을 보는 것만으로도 80일이라는 시간, 봄이라는 한 철을 머물 이유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나날이었다.

 

나는 대중매체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반적이지 않은 환상이 아닌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가능성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어디든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길거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p.85

 

 언젠가부터 <BRUTUS>라는 일본의 격주간지를 즐겨보게 됐다. 같은 회사에서 나오는 <POPEYE>는 그보다 더 나중에 접했다. 이 책을 쓴 츠즈키 쿄이치는 한국에도 독자가 적지 않은 이 두 잡지의 초창기에 활약한 베테랑 편집자이자, 사진가이다. 이 책에서 <BRUTUS>를 창간한 후에 그 독자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들을 겨냥해서 <POPEYE>를 만들었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보고는, 생각지도 않게 그들의 라인업을 정확하게 따라간 것이 뒤늦게 우스웠다. ‘또 다른 가능성이 어디든 존재한다는 말은 <BRUTUS>에서 편집이라는 일을 시작한 그의 활동을 스스로 정리한 이 책의 핵심과 같다. 읽는 내내 멈출 듯 말 듯하며 내내 걸어도 좋았던 교토의 거리들이 떠오른 것은 그 덕분이다. 그곳에서 평범한 취향의 가능성이 얼마나 넓은지 비로소 납득했다. 주거와 관광 사이의 균형이 깨질수록 도시의 가능성은 밋밋해진다.

 

편집자가 작가를 만들어낸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편집자의 일은 어디까지나 막힘없이 책이 나오도록 교통정리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48

 

 저자의 활동은 편집자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흔히 떠올리는 단행본을 만드는 그것보다는, 한국에서는 흔히 에디터라고 따로 부르는 잡지를 만드는 그것에 좀 더 가깝다. 잡지의 특집, 연재 기사나 단행본의 기획뿐만 아니라, 집필의 개념까지 포괄하는 이 저자의 표현인취재’, 그리고 그에 맞는 사진의 촬영에 이르는 업무 전반이 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꾸리는 데 필요한 베테랑 편집자의 노하우 같은 것은 이 책의 중심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편집에 기술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취재와 촬영까지를 편집자와 편집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그의 관점에서는 기획에서 취재와 촬영까지 거쳐 완성된 원고는 이미 완성된 책(잡지)이기 때문이다. 분명 편집자 본인이 저자의 역할을 겸하는, 예를 들어 저자처럼 잡지 편집자의 경우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최근의 활발한 독립출판 역시 원고를 책으로 꾸리는 별도의 편집 과정 대신, 기획, 취재와 편집이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에 속할 것이다.


그러니까 <TOKYO STYLE>은 분명한 나의 원점이다. 책을 만드는 데에는 도구나 기술이나 예산이 없어도 주변에서 찬성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호기심과 아이디어와 추진할 에너지만 넘치도록 있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따라온다. 이 책은 그런 확신을 나에게 주었다. -p.81

1%의 성공적인 만남은 별로일 거야하고 생각하면서도 유턴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p.96

 

 이런 특성상 저자는 책을 만드는 법보다는 책을 쓰는 법에 대해서 더 힘 있게 이야기하는 듯이 들린다. 그에게 책은 쓰면 이미 만들어진 셈이다. 이런 관점이 주어진 원고의 완성도를 높이고 책의 형상을 부여하는,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문제에도 도움이 된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개개의 책을 만드는 데 집중하면서 놓치기 쉬운, 실현 가능한 기획의 범위와 출판 시장과 매체의 변화 같은 주제를 상기하고 그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는 어느 책보다도 유용하다. 결국 그는 책 밖에서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됐고, 분명 편집은 책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작업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닌, 교정지와 책 안에서만 일하는 편집자가 보면서도 놓치기 쉬운 현실이 분명히 존재한다. 충분히 안다고 자신하고서는 잊기 쉽지만.

 

일을 그만두고 센다가야에 작은 작업실을 빌려서 자유기고가로 일하면서 사소한 계기로 교토를 오가게 되었는데, 교토는 도쿄보다 집세가 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팩스로 원고를 보냈기 때문에 딱히 도쿄에 있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교토에 연립주택을 빌려서 2년 정도 살아보기로 했다. (중략)

버블경제가 붕괴하기 전이어서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장기 프로젝트를 맡지는 않았어도 단발성 의뢰가 많이 들어와서 돈에 쫓기듯 일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만했다. 덕분에 교토대의 청강생이 되어 1년째에는 일본 건축사 수업을, 2년째에는 일본 미술사 수업을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자전거를 타고 교토대에 가서 강의를 들었고, 수업이 끝나면 그대로 자전거를 타고 그날 수업에 나왔던 신사나 불당, 박물관을 돌아보았다. 1m가 넘는 큰 교토 지도를 사서 방에 붙여놓고 그날 갔던 장소에 핀을 꽂아 놓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꿈같은 시절이었다. 앞만 보며 달려왔던 내 인생에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조금씩 줄여가다가,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된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p.58

 

 4년 좀 넘게 편집자로 일했던 회사를 나와서, 봄철을 기다려 교토에 다녀왔다. 80일은 봄이 오기 직전에 들어가서 여름이 오기 직전에 돌아오기에 딱 맞는 시간이었다. 저자는 1미터가 넘는 지도에 그날 갔던 장소를 표시했다는데, 나는 구글맵에 그날 그날 가는 장소와 걸어가면서 눈에 들어온 특이한 가게들이며 건물들을 찍고 다녔다. 덕분에 이제는 교토 일대에만 구글맵은 별표로 빼곡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대목은 바로 그가 <BRUTUS>를 그만두고 교토에 머문 2년을 짧게 묘사한 곳이었다. 남의 이야기라기에는 엇비슷한 부분이 많고, 똑같다기에는 내 시절이 너무 짧았다. 마침 교토대 바로 앞 햐쿠만벤(百万遍)의 에어비앤비에서 40일을 머문 덕에 나 혼자 괜히 더 가깝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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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즈키 쿄이치 지음, 김혜원 옮김 / 컴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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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준비는 결과를 가정하고 단정 짓는 과정이 아니라 기초를 닦아두는 과정이다. 취재 상대가 ‘이 기자는 이런 의도로 이런 기사를 구성하고 싶은 거구나’ 하고 간파하는 순간에 인터뷰는 시시해지고 만다. -192쪽

도쿄아트북페어 행사장에서 사진잡지 편집자를 하고 있는 지인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는 맥빠진 얼굴로 ˝우리 잡지의 독자는 고령이신 분들뿐이어서 망하는 일만 남았는데,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사진집을 만들고 사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니 마음이 복잡해지네요˝라고 했다. 사진업계의 대표적인 잡지로는 <아사히카메라アサヒカメラ>와 <일본카메라日本カメラ>가 있는데 양쪽 모두 주요 독자층은 60대에서 70대 후반이다. 정기구독한 지 50년이 넘었다는 고정 독자들이 많기 때문에 새로운 기획을 시도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편집부에서도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 같은 계절 특집이나 후지산 특집을 하거나,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필름카메라여, 다시 한번!’이나 ‘꿈의 브랜드 라이카 카메라’ 같은 기사를 몇 번이나 우려먹게 되는 것이다. -195~196쪽

어떤 장르의 소재든 그 분야에 대해 필자보다 더 잘 아는 독자가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미디어와 독자의 거리가 멀면 독자의 의견이 전해지지 않는다. -222쪽

하지만 점차 알게 되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메일 매거진(ROADSIDERS‘ weekly)에 관해 적극적으로 공유해주는 사람과 충실한 독자는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228쪽

이런 시대에는 ‘프로는 아마추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편집의 프로이자 사진의 프로이지만 어떻게 하면 ‘아마추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마추어가 하지 못하는 일’이 아니라 ‘아마추어가 감당하지 못하는 분량의 일’을 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답은 이것 하나인 듯하다. -233쪽

술 한잔 하면서 ˝안도 다다오도 이제 끝났지˝라고 말하는 건축잡지의 편집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그 편집자가 ‘굿바이 , 안도 다다오’ 특집을 기획하느냐 하면 절대로 아니다. -234~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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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즈키 쿄이치 지음, 김혜원 옮김 / 컴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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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로 사는 사소한 행복은 출신 학교나 경력, 직함, 연령, 수입과는 상관없이 호기심과 체력과 인간성만 있으면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에 있다. 이런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7쪽

더구나 계획이 순조롭게 세워졌다면 누군가가 먼저 찾아낸 정보가 있다는 뜻이다. 그 시점에서 기획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나에게 검색 결과가 많다는 말은 패배나 마찬가지다. -10쪽

그러나 지금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취재해온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정말 엄청난 책을 만드는 사람은 평범하고 과묵하며 혼자서 꾸준히 하는 작업을 좋아하는 이들뿐이었다. 말로 설명하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어서 모두에게 보여주는 행위가 그들에게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인 것이다. -13쪽

편집은 기본적으로 고독한 작업이다. 단행본 편집이든 잡지 편집이든 매한가지다. 잡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많은 사람이 관여하지만 최종적인 판단은 편집장 한 사람이 내린다. 편집장의 판단에 의해 잡지의 개성이 뚜렷해진다. 반대로 편집장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잡지는 재미없다. -13쪽

<POPEYE>는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76년에 창간되었다. 창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생에서 20대 초반이었던 독자들이 나이를 먹어갔고, 그러자 조금 더 어른의 향기가 느껴지는 잡지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서 <POPEYE> 창간 5년째에 자매지인 <BRUTUS>가 태어났다. 그쪽에서도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아서 결국 <POPEYE>와 <BRUTUS> 합쳐서 10년 동안 편집부에 다녔는데 이 경험은 내가 편집자로서 살아가기 위한 초석이 되었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는데 우연히도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일도 있는 것이다. -15~16쪽

회의는 위험을 회피하려는 ‘리스크 헤지Risk hedge’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모두 함께 결정했으니 만약 실패한다 해도 ˝다들 괜찮다고 했잖아˝라며 둘러댈 핑곗거리를 만들어두는 것이다. -18쪽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단번에 ‘최고다!’라고 느끼기는 어렵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으니 괜찮은지 아닌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무언가와 만났을 때 마음이 요동치는 순간이 있다. 물론 순간의 느낌만으로 좋은 소재라고 확신하기에는 불안한 요소가 많다. 좋은 소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만 모르거나, 아예 잘못 짚었을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써왔던 기사는 대부분 그러한 불안을 끌어안고 작성했다.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내 돈 주고 구입하기’다.
예를 들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화가를 특집으로 다룰 기획을 세운다고 해보다. 그 화가의 그림을 내 돈을 주고 구입한다고 가정해보면, 돈을 지불할 만큼 괜찮은 아이템인지 아니면 괜찮아보였던 아이템인지 바로 판단할 수 있다. -21~22쪽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게 자신을 다져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22쪽

<POPEYE>는 카탈로그 잡지의 선구자라고 불렸지만, 잡지를 만드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미국에서 발간된 히피들을 위한 잡지 <Whole earth catalog>가 있었다. <Whole earth catalog>의 정신은 자기 주변에 있는 것들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편집장들은 특히 지배적인 문화에 반대하는 카운터 컬처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 여파는 밑에서 일하는 우리에게까지 미쳤다.
<POPEYE>에서는 테니스나 스키 같은 스포츠 특집을 자주 다루었다. 결코 새로 나온 스포츠 용품을 소개하거나 광고를 따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편집자들은 하나 같이 스포츠를 좋아했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스포츠를 ‘열혈 스포츠 정신’에서 해방시키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있을 따름이었다. -23쪽

지금도 <BRUTUS>에서 연재되고 있는 ‘거주공간학居住空間学’이라는 코너가 있다. 생각해보면 이 코너도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업계에서 철저하게 바보 취급당했던 기획이었다. -24쪽

자신과 전혀 관련없는 사람이 ‘저 사람은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겠지’라고 멋대로 정하는 것은 무척 이상한 일이고 심지어 실례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만 취재한다 해도, 그 생각에 공감해주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25세의 독신 여성일지도 모르고 65세의 할아버지거나 15세의 남학생일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에 공감해주는 사람은 ‘한 명 한 명의 독자’이지 ‘독자층’이 아니다. -27쪽

어쨌든 만약 참고 버텨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고민하지 말고 이직하면 된다. 이런 직감은 의외로 정확하니까 말이다. -34~35쪽

중년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주간지는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아저씨 냄새가 풀풀 풍기는데, 실제로 편집부에서 잡지를 만드는 사람은 젊은 편집자인 경우가 많다. 어떻게 20대인 편집자의 손에서 60대 기자가 쓴 듯한 기사가 나오는지 궁금해서 그쪽 업계를 잘 아는 편집자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런 편집부에서 두어 해 있다 보면 문장도 점점 나이 들어버린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35쪽

편집자는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있기 때문에 재료를 준비한다. 편집자가 준비한 사진이나 텍스트 같은 재료가 너무 많아서 이미 디자인이 완성된 지면에 다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턱대고 줄이려고만 하지 말고 어떻게든 지면 안에 넣고자 노력하는 것이 편집 디자인 아닐까. -37쪽

‘내용을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이라는 말을 곧잘 하는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일부는 틀렸다. 최종적으로는 내용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편집 디자인이어야 한다. -37쪽

여백이 많은 디자인이 모두 잘못되었다거나 지면을 무조건 내용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이나 잡지가 무엇을 얼마나 전할 그릇으로 쓰일지 정확하게 아는 것. 바로 이 능력이 편집 디자이너의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44쪽

편집자가 작가를 만들어낸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편집자의 일은 어디까지나 막힘없이 책이 나오도록 교통정리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미술관의 큐레이터와 편집자는 비슷하다. 큐레이터 중에는 종종 ˝같이 좋은 전시화를 만들어봅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엄청난 착각이다. 큐레이터의 역할은 같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홍보나 비용에 신경 쓰지 않고 제작에 전력을 다하도록 돕는 것이다. 누가 더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밀히 말해 대등한 관계는 아니다. 창작자가 기마전의 대장이라면 큐레이터는 대장을 떠받치는 말인 셈이다. 이 점을 잊으면 낯 뜨거운 착각을 하게 된다. 머지않아 명함에 ‘슈퍼 에디터’ 같은 직함을 새길지도 모른다. -48쪽

자연은 그 웅장함으로 감동을 주거나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평화롭게 하지만 재미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이면 인구가 많든 적든 재미있는 일은 하나라도 있게 마련이다. 전혀 예기치 못한 만남은 예상을 뛰어넘은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53쪽

(<BRUTUS>의 프리랜서 편집자를 그만둘 때) 두 번째로는 ˝잡지에는 수명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POPEYE>도 <BRUTUS>도 여전히 나오고 있으니 수명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이상하지만, 잡지는 대체로 3년이면 크게 한 바퀴를 도는 듯하다. <POPEYE>를 시작할 떄 편집장은 사장에게 ˝3년은 가만히 지켜봐주세요˝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요즘 같은 시기였다면 출판사는 3개월도 기다려주지 않았으리라. 잡지를 창간한 지 3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4, 5년째부터는 반응이 좋았던 기획을 재탕한다. 그런 방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했던 기획을 다시 할 때는 같은 사람이 담당해서는 안 된다. 결과물이 전과 똑같이 나올 테니 말이다. 5년 정도를 주기로 물갈이를 해야 편집부가 건강하게 유지된다는 점을 나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57쪽

일을 그만두고 센다가야에 작은 작업실을 빌려서 자유기고가로 일하면서 사소한 계기로 교토를 오가게 되었는데, 교토는 도쿄보다 집세가 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팩스로 원고를 보냈기 때문에 딱히 도쿄에 있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교토에 연립주택을 빌려서 2년 정도 살아보기로 했다. 도쿄 안에서는 이사를 몇 번 해봤지만 도쿄를 벗어나서 이사를 가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버블경제가 붕괴하기 전이어서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장기 프로젝트를 맡지는 않았어도 단발성 의뢰가 많이 들어와서 돈에 쫓기듯 일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만했다. 덕분에 교토대의 청강생이 되어 1년째에는 일본 건축사 수업을, 2년째에는 일본 미술사 수업을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자전거를 타고 교토대에 가서 강의를 들었고, 수업이 끝나면 그대로 자전거를 타고 그날 수업에 나왔던 신사나 불당, 박물관을 돌아보았다. 1m가 넘는 큰 교토 지도를 사서 방에 붙여놓고 그날 갔던 장소에 핀을 꽂아 놓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꿈같은 시절이었다. (다음)

(이어서) 앞만 보며 달려왔던 내 인생에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조금씩 줄여가다가,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된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58쪽

나중 일이지만 1500페이지 정도 되는 (1980년대의 세계 예술을 소재로 한 현대미술전집) <ArT RANDOM> 102권 전체를 3권짜리 문고판 세트로 재판하려고 가제본까지 만들었는데 그 시점에 (이 시리즈를 낸) 교토쇼인 출판사가 도산해버렸다. 결국 문고판으로 출간하지 못해서 이제 <ArT RANDOM>을 구하려면 헌책방에서 열심히 찾는 수밖에 없다. -60쪽

교토에서 2년 동안 살면서 점점 지인이나 단골 가게가 늘어나자 ‘이대로 있다간 눌러앉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생활비는 저렴한 편이어서 사치부리지 않으면 지낼만 했고, 주로 학생들이 가는 편안한 분위기의 술집도 많이 있었다. 그런 가게에서 매일 밤 친구와 ˝뭔가 재미있는 거 하고 싶다˝는 둥 수다를 떨며 술을 마시다 보니 10년은 금방 지나버렸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눌러앉은 외국인 히피 할아버지나 자칭 아티스트 아저씨도 많았다. -67쪽

<TOKYO STYLE>를 출간할 때 (교토쇼인) 출판사에 억지로 떠넘겨서 책으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만큼 인세를 무척 낮게 잡아서 아마 3%로 계약했을 것이다. 책이 나오고 나자 문득 집을 촬영하도록 허락해준 젊은이들은 정작 자신들의 집이 나온 책을 비싸서(1993년에 12,000엔) 살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초판 인세로 책을 100권 정도 구입한 다음, 이케지리에 있는 클럽을 하루 빌려서 출간 기념 파티를 했다. 파티에 촬영을 하게 해준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서 책을 한 권씩 주었다. -72~77쪽

갑자기 원고료나 인세 같은 금전적인 이야기를 꺼내면 편집자나 출판사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지 걱정될지도 모르지만, 돈 이야기를 한다고 안색이 어두워지는 출판사는 정상이 아니다. 그런 출판사와는 일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기 때문에, 금전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이 출판사가 어떤 출판사인지 가늠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세상 대부분의 일은 처음에 ‘얼마’인지를 정하고 시작한다. -78쪽

내가 땀범벅이 되어 촬영하고 있는 사이에 한 사람이 겨우 들어설 만한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더니 ˝스파게티 만들었는데 같이 드실래요?˝ 하고 권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촬영이 끝난 뒤에 ˝혹시 이 건물에 아는 사람은 없어요?˝라고 물어보자 ˝옆집에 친구가 살고 있어요. 가볼래요?˝라고 해서 옆집에 가서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얘는 문 안 잠그고 다니니까 그냥 들어가서 찍어도 돼요. 나중에 말해둘게요˝라며 부재중인 집주인을 대신해 문을 열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무방비함이라고 해야 할지, 천진함이나 다정함이라고 해야 할지. 그들의 이런 신선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나 역시 악의 없이 ‘이런 것도 멋지다!’라는 마음을 담아 촬영에 임했는데, 이런 마음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전해지게 마련이다. -79~80쪽

그러니까 <TOKYO STYLE>은 분명한 나의 원점이다. 책을 만드는 데에는 도구나 기술이나 예산이 없어도 주변에서 찬성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호기심과 아이디어와 추진할 에너지만 넘치도록 있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따라온다. 이 책은 그런 확신을 나에게 주었다. -81쪽

나는 대중매체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반적이지 않은 환상이 아닌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가능성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어디든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길거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85쪽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집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성 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당신은 어머니에게 ˝저런 데는 가면 안 돼˝라고 20년 동안이나 들어왔다면, 당신의 눈에 그 성 박물관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반드시 그 지역 사람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다. 도쿄에 모인 여러 지방 출신자들에게 진기한 장소에 대해 물어봐도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출신지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고향을 떠나왔으니 고향에 대해 잘 알리가 없다. -90~95쪽

(‘진기한 일본기행’에 연재하기 위해) 취재할 장소를 찾지 못하면 돌아갈 수 없었다. ‘내일은 도쿄에 돌아가야 기한에 맞출 수 있을 텐데, 전혀 취재할 만한 곳이 없어!’ 하는 위기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그저 국도를 내달렸다. 그러면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 되었을 때 ‘5km 전방, 순금 불상!’ 같은 간판이 나타나는 것이다. -95쪽

단지 멈춰 서 있기만 하면 인연은 찾아오지 않는다, 취재하러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이 되어 지친 몸으로 꼬불꼬불한 산길을 운전할 때였다. 이제 30분만 더 달리면 온천이 나오니까 푹 쉴 수 있다며 마음을 놓는데 이런 순간에 전봇대 옆에 버려진 간판에서 ‘이 고장이 배출한 천재 화가의 개인전 개최 중. 무료!’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말았다.
어차피 별로겠거니 생각하며 산속에서는 유턴하기도 힘들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나를 기다리는 목욕과 식사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아까 본 간판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결국 유턴을 해서 되돌아갔다. 물론 그렇게 해서 찾아간 장소의 99%는 별로지만 1%의 성공적인 만남도 있다. 그런 기회는 항상 유턴하고 싶지 않은 절묘한 순간에 나타난다. 1%의 성공적인 만남은 ‘별로일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도 유턴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96쪽

한적한 장소에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미국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점을, 미국 여행을 하며 깨닫게 되었다. -108쪽

(일본의 러브호텔들을 촬영하러 다니면서) 딱 한 번 촬영을 거절 당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는데 그곳은 내가 모르는 ‘일반 건축업계의 일류 건축가’가 디자인한 러브호텔이었다. 러브호텔 측에서는 부디 취재해주었으면 했지만 자신의 작품이라는 점을 숨기고 싶었던 건축가가 허락을 해주지 않아 무산되었다. 당장 건축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런 태도는 건축을 의뢰한 시공주에게 실례이지 않느냐며 따지고 싶었다. -120~121쪽

나는 화장품회사 시세이도에서 나오는 <하나츠바키花椿>라는 홍보잡지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는데, 그 감각에 무척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전에는 <하나츠바키>를 좋아하는 남자아이도 꽤 많았다. 화장품 회사에서 보내온 책자가 집에 놓여있던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134~135쪽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암송하는 시는 사실 얼마든지 있다. 바로 노래 가사다. 미소라 히바리나 마쓰토우야 유미의 노래는 가사집이나 노래방의 화면을 보지 않고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많다. 바로 이때를 시인이 작사가에게 진 순간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136쪽

언어에 대한 현대인의 감성은 옛날 사람에 비해 결코 둔해지지 않았다. 둔해지기는커녕 인터넷이나 휴대전화의 발달로 모든 사람이 이렇게 글을 열심히 쓰는 시대는 이제까지 없었다. ‘시인들의 문단’ 바깥쪽이야말로 전율하게 하는 언어가 지천에 널려있는 것이다. -136~137쪽

사형수의 하이쿠는 주로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를 통해서 세상에 나왔는데 하이쿠 단체의 활동가들은 ˝또 하이쿠 글쟁이가 왔구만˝ 하고 조롱했고, 책으로 (가이요샤에서) 책으로 출간되었을 때는 하이쿠 문단에서 ˝하이쿠 한 구절 한 구절에 저자의 처지를 설명하는 짧은 문장을 덧붙인 것이 거슬린다˝, ˝하이쿠를 읽지 않던 사람도 알기 쉽도록 세 줄로 나누어 쓴 것 같은데, 원래 하이쿠는 한 줄로 써야 한다˝, ˝한자 읽는 법을 작은 글씨로 표기해둔 것이 보기에 좋지 않다˝ 등등 아주 많은 꾸중을 들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같잖은 소리다. -138~139쪽

하지만 블루스라는 특정 형식에서 다양한 음악 장르가 생겨났듯이, 형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표현을 확장해갈 수도 있는 것이다. -139쪽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니 가는 건 무의미하다’라는 생각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가 보자’라는 생각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141쪽

내가 인터뷰한 (일본의) 래퍼들 중에는 국어 수업을 성실하게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비행 소년을 심사하는 소년분류심사원에서 처음으로 국민 작가인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147쪽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리얼리티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쉬운 최전선에만 있다. -173쪽

나는 ‘일류 평론가보다 이류 창작자가 더 대단하다’라고 믿고 있는데,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저널리스트와 평론가는 역할이 다르다.
평론가의 역할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많은 선택지 중에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하나를 고르는 일이다. 평론가에게는 그 선택과 설득력이 관건이다.
반대로 저널리스트의 역할은 모두가 ˝이게 좋아˝라고 말할 때 ˝이런 것도 있어˝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선택지를 많이 제시하는 일이다. 저널리스트는 모두가 ˝현대미술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할 때 비주류 예술가의 작품을 제시하거나, 모두가 ˝미국은 나쁘다˝, ˝이슬람은 나쁘다˝라고 말할 때에 다양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모두가 ˝대학 정도는 나와 줘야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야지˝라고 말해도 대학을 나오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75쪽

모든 일을 따져보고 등급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호불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말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176쪽

후지와라(후지와라 신야) 씨는 인물사진을 찍을 때 이안 리플렉스 카메라를 자주 쓴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이안 리플렉스 카메라는 뷰 파인더가 카메라 윗부분에 있기 때문에 상대를 정면으로 보지 않고 머리를 숙여서 카메라를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며 촬영하게 되는데, 이러한 자세가 상대에게 머리 숙여 인사를 하는 듯한 겸손한 마음을 만들고 그 마음이 찍히는 이에게도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상대의 얼굴은 온화하게 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나도 후지와라 씨의 말이 사실이라는 점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184쪽

인터뷰할 사람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상대를 만나면 당연하게 물어봐야 할 질문을 빼먹기 일쑤다.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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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일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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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히 나라(奈良)로 가는 길이었다. 날씨는 조금 더운가 싶었지만, 워낙 화창해서 멀리 떠나기에는 사뭇 알맞았다. 교토(京都)의 데마치야나기 역(出町柳駅)에서 산 킨테츠-케이한 일일 패스로 추가 요금을 내지 않고 나라까지 가려면 열차를 한 번이나 두 번 갈아타야 한다. 킨테츠탄바바시 역(近鉄丹波橋駅)에서 나라까지 한 번에 가는 급행열차가 있지만, 이 열차가 그리 자주 다니진 않는다. 타지 못하면 킨테츠 나라선으로 환승하는 야마토사이다이지 역(大和西大寺駅)까지 가서 한 번 더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다. 62일에는 일단 야마토사이다이지로 가야 했다. 그런데 도중에 모모야마고료마에 역(桃山御陵前駅)에서 내렸다.

 

열어둔 거실 창문 아래쪽에 풍경을 매단 넉줄고사리가 달려 있다.*(*일본에서는 여름에 시원해 보이도록 넉줄고사리의 뿌리줄기를 여러 모양으로 엮어 처마 끝에 달아놓는다.) 풍경은 이따금 생각이라도 난 듯 은은하게 소리를 냈다. (아베 일족)-p.19

 

 서울로 돌아갈 날이 코앞이었고, 이 역의 이름에 붙은 어릉(御陵)이 메이지 천황(明治天皇)과 쇼켄 황후(昭憲皇后)의 릉을 뜻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80일간 여유만만히 교토를 둘러본 지금이 아니라면, 교토 중심부에서 멀기도 한 이 황릉까지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찰나에 스쳐서 충동적으로 내렸다. 이렇게 찾아가서 맘에 든다면 아무리 멀고 번거로워도 나중에 또 올 수 있지만, 지금 가지 않으면 나중에도 올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낯설고 작은 역 바로 앞의 고코노미야(御香宮) 신사에 들렀다. 하늘은 여전히 빛났고, 바람이 어느새 제법 불어와서 유서 깊은 신사의 나무들이 목소리를 모아 노래하듯 흔들렸다. 필시 잊지 못할 소리.

 

 릉으로 가는 길은 깊고 높았다. 메이지 천황이 서거한 1912년에 심었나 싶은 거목들이 참도(參道) 양 옆에 늘어서서 속세와 격절(隔絶)된 성지(聖地)로 향하는 듯했다. 교토 곳곳에 산재한 주택가 사이의 황릉들을 처음부터 철저히 의식하고 조영됐다는 인상을 받았다. 교토 안의 릉들이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공존하는 죽음의 공간이었다면, 모모야마의 메이지 천황릉은 완전히 그 대척점에 있다. 삶이 끝나고서도 또 다른 삶을 사는 신과 같이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공간에서 만인의 숭배를 받는 통치자의 존재를 과시하는 무대처럼 보였다. 극적 매력이 충만했다고 할까.

 

순사에 대해서는 언제 어떻게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주군을 소중히 검겼다고 해도 아무나 함부로 순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태평한 시대에 산킨의 임무를 위해 주군과 함께 에도로 길을 떠나는 것이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군과 같이 종군을 할 수 있는 것도 주군과 같이 황천길에 길동무를 할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주군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허락 없이 죽는다면 그것은 개죽음일 뿐이다. (아베 일족)-p.14~15

 

 결국 이 릉이 메이지 천황을 드높이 모실수록, 그런 숭배가 이전까지의 전통과 얼마나 대조적인지 부각될 뿐이다. 메이지 천황의 릉이야말로 그가 일본의 역사를 벗어나, 유럽의 일부가 되고자 했던 시대의 산물이었음을 가장 선명하게 표현했다. 에도 시대의 순사 사건을 세밀히 묘파한 모리 오가이의 아베 일족을 읽으며, 아직 아련한 여행의 끝자락을 떠올린 것은 그 역시 과거에서 벗어날 길을 전통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만세일계(萬世一系)를 강변하는 천황의 자리는 메이지 천황을 맹신하는 수단에 불과했듯이, 주군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는 순사(殉死)는 무사도의 파국을 폭로하는 상징으로만 보였다.

 

초주로(나이토 초주로모토쓰구)는 다다토시의 병이 깊어지자 은혜를 갚을 길은 순사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이 사내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순사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결의가 있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당연히 순사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순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죽음의 길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거의 같은 힘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아베 일족)-p.17

 

 물론 메이지 유신과 모리 오가이가 모두 일본의 전통과 과거를 벗어나려 했더라도, 그 너머를 향한 이 둘의 의도와 목표는 판이했다. 유신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단일한 국민 국가라는 형식을 추구했다면, 오가이의 소설은 적어도 그렇게 변혁된 국가라는 형식 안에서는 개인의 삶과 의지가 존중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현한 것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아베 일족에서 단지 지나간 역사의 완벽한 모사가 오가이의 의도였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저 역사 속에서 충성심을 고양하기 위해, 병사한 번주(藩主)를 따라 19명의 가신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결하는 과정을 재구성했다는 단정은 역시 안이해 보인다.

 

 단지 과거의 충성심을 현재에 재현하고자 했다면, 오가이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참조했다는 아베 차사담(阿部茶事談)을 읽으면 된다. 그가 여러 무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결과보다 그들의 서로 다른 삶과 배경을 섬세하게 그려낸 데는, 그러면 어째서 이들이 결국 같은 최후를 맞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담겼다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의문은 종속적인 죽음이라는 전통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에 대한 우려와 직결된다. 당장 이 소설보다 1년 앞서서(1912)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 부부가 메이지 천황의 서거와 함께 순사했다. 그때만 해도 일본의 여론은 이 죽음을 사뭇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결국 천황 숭배와 결합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폭주로 치달았다. 명목뿐인 천황과 변칙적인 쇼군의 통치라는 구체제에서 벗어나 근대 국가로서 면모를 일신하는 것만으로는 개개의 삶은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오가이는 예측했던 듯하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한없이 크고도 멀어 보였던 메이지 천황의 능이 거듭 떠올랐던 탓에 든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이 그렇게 새로운 나라로 바뀐 후에도, 에도 시대와 똑같이 통치자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만 했던 무수히 다른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면, 거대한 변혁이라는 것조차도 때로는, 실은 자주 소란한 요설에 불과할 뿐이다.

 

부모가 자식을 보아도, 늙은이가 젊은이를 보아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 앞에서는 부모든 늙은이든 굴복하기 마련이다. (기러기)-p.140

“(전략) 교토는 정말 좋은 곳입니다만, 그 나무랄 데 없는 좋은 곳에서 지금까지 제(기스케)가 겪었던 고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후략)” (다카세부네)-p.226

 

 책을 읽으며 품은 생각이 우습게도, 정작 그날의 날씨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미 사라진 천황의 무덤은 높고 깊은데다 넓기까지 해서 위에서 보나 아래서 보나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돌아갈 때가 코앞에 이르러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정경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 어쩐지 속상할 정도였다. 새로 생긴 전통을 마치 본래 천황이 누렸던 권위인양, 사뭇 가소롭게 드높인 무덤이 우습다 싶다가도, 그 높은 계단을 다시 돌아보니 마치 푸른 하늘에서 내려온 듯해 이내 경이로웠다. 돌아와서 이 소설들이나마 읽지 않았다면, 그 기억은 지나치게 아름답게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스친 덕분에 너무도 우연히 메이지 천황의 릉까지 털레털레 다녀왔다. 고등어된장조림이 싫었던 기러기속 화자의 반찬 투정 탓에 자신만을 기다리며 얼굴에 빛을 냈던 오타마와의 만남을 가뭇없이 놓쳐 버렸던 오카다에 비춰 보면, 한순간에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지는 삶의 단면들이 얼마나 많을지 새삼 아득해진다. 물론 이 사실을 안다 한들 아무것도 바꿀 수 없지만, 그래서 또한 아름답다. 오타마, 이름 모를 화자, 오카다, 스에조, 이시하라의 시간과 우연들이 겹치고 스쳐서 이른 결과가, 가장 간절했던 두 사람의 막막한 무연(無緣)이라니, 가볍고도 무거운 이야기라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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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일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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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4위하(從四位下) 좌근위소장(左近衛少將) 겸 엣츄의 수령인 호소카와 다다토시(細川忠利)는 간에이(寬永) 18년(1641) 봄, 다른 지역보다 일찍 꽃이 핀 영지(領地) 히고 지방의 벚꽃을 뒤로하고, 54만 석 다이묘의 위세에 어울리게 앞뒤 행렬의 호위를 받으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가는 봄바람과 같이 산킨(전국의 안정을 위해 격년으로 영주들을 영지에서 떠나 에도의 쇼군(將軍) 곁에서 봉사하게 한 일종의 인질 제도)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에도를 향해 출발하려고 할 즈음 뜻하지 않게 병이 들었다. (아베 일족)-9쪽

순사에 대해서는 언제 어떻게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주군을 소중히 검겼다고 해도 아무나 함부로 순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태평한 시대에 산킨의 임무를 위해 주군과 함께 에도로 길을 떠나는 것이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군과 같이 종군을 할 수 있는 것도 주군과 같이 황천길에 길동무를 할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주군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허락 없이 죽는다면 그것은 개죽음일 뿐이다. (아베 일족)-14~15쪽

초주로(나이토 초주로모토쓰구)는 다다토시의 병이 깊어지자 은혜를 갚을 길은 순사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이 사내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순사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결의가 있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당연히 순사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순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죽음의 길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거의 같은 힘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아베 일족)-17쪽

열어둔 거실 창문 아래쪽에 풍경을 매단 넉줄고사리가 달려 있다.*(*일본에서는 여름에 시원해 보이도록 넉줄고사리의 뿌리줄기를 여러 모양으로 엮어 처마 끝에 달아놓는다.) 풍경은 이따금 생각이라도 난 듯 은은하게 소리를 냈다. (아베 일족)-19쪽

(순사를 위해) 할복을 하려고 할 때 마침 성 안에서 때를 알리는 북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하시타니(하시타니 이치조시게쓰구)는 자신을 따라온 노비에게 밖에 나가서 몇 시인지 알아보고 오라고 말했다. 노비는 돌아와 ˝마지막 네 번의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전부 몇 번 울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시타니를 비롯해 주변에 늘어선 사람들이 모두 미소를 지었다. 하시타니는 노비에게 ˝마지막 가는 길에 내게 웃음을 선사했구나˝라고 말하고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주고 할복했다. 요시무라 진다유가 뒷마무리를 담당했다. (아베 일족)-25쪽

누군가의 저택에서 시를 짓는 모임이 열렸을 때 보았던 대로, (쓰자키 고스케는) 반지(半紙)를 옆으로 두 번 접어서 ˝가로들은 부디 그만두라고 만류하시지만 그만 둘 수 없는 나 고스케로세˝라고 시가의 초고같이 적어두었다. 서명은 하지 않았다. 시 내용 속에 고스케라는 이름이 있기 때문에 이중으로 적지 않아도 되리라는 순수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형식에 어우러졌다. (아베 일족)-29쪽

야이치에몬(아베 야이치에몬미치노부)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시켜야 하는 일을 시키지 않아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주군에게 말씀드리고 할 일을 말씀드리지 않고 했다. 그러나 할 일은 정확하게 해서 비난할 여지가 없었다. 야이치에몬은 스스로의 의지로 주군에게 충성을 다했다. 처음 다다토시는 그저 그에게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뿐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한다는 것을 알고는 미워졌다. 그러나 현명한 다다토시는 야이치에몬을 미워하면서도,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된 건지 생각해보고, 결국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반대하는 버릇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달이 흐르고 해가 지남에 따라 점차 고치기 어려워졌다. (아베 일족)-30~31쪽

주군에게 얼마만큼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순사하는지 확실한 기준은 없다. 같이 주군 곁에서 봉사해 온 젊은 무사들 중에 순사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다케노우치 가즈마나가마사)도 그냥 살아있었다. 그때 순사를 해야 했다면, 자신은 누구보다 먼저 순사를 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누가 보아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연히 순사해야 하는데 순사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혀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분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베 일족)-49쪽

앞뒤 양쪽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쳐들어갔다. 장지문을 모두 걷어내도 다다미 30장이 채 안 되는 공간이다. 시가전의 처참함이 야전(野戰)보다 훨씬 심하다. 접시에 수북이 담긴 벌레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광경과 비슷할까!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의 아비규환이었다. (아베 일족)-55쪽

마타시치로(쓰카모토 마타시치로)는 (아베 일족의 토벌에 세운 공으로) 주군에게서 마시키 고이케 마을에 저택용 땅을 하사받았다. 뒤편은 대나무가 우거진 산이었다. 미쓰히사가 마타시치로에게 ˝대나무 산도 가지겠느냐?˝하고 물었지만 마타치시로는 사양했다. 대나무는 평소에도 쓸모가 많은 나무이다.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대나무가 많이 필요하다. 그런 것을 받는 건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대나무 산은 영원히 주군의 소유가 되었다. (아베 일족)-59쪽

나(오타 도요타로)는 막연한 공명심과 절제에 익숙한 학구열을 가지고 홀연히 유럽의 신도시(베를린) 한가운데에 섰다. 이 무슨 광채인가, 내 눈을 자극하는 것은. 이 무슨 색채인가, 내 마음을 유혹하는 것은. ‘보리수 아래’라고 번역할 때는 그윽하고 조용한 곳처럼 생각되지만, 쭉 뻗은 큰길, 운터 덴 린덴(보리수 아래)에 와서 양쪽이 돌로 포장된 인도를 삼삼오오 무리지어 오가는 신사 숙녀를 보라. (무희)-65~66쪽

이렇게 3년 정도는 (베를린에서) 꿈처럼 흘러갔다. 그러나 때가 되면 감추려 해도 감추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취향이다. (무희)-67쪽

가만히 생각하니, 어머니는 나(오타)를 살아 있는 사전으로 만들려 했고, 관장은 나를 살아 있는 법률로 만들려 했다. 사전이라면 그나마 견딜 수 있지만 법률이 되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전에는 사소한 문제에도 매우 정중하게 일본의 관청에 답신을 하던 나였지만, 그 무렵부터는 관장에게 보내는 서면에 자주 법률의 세세한 조목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논하면서, 일단 법의 정신만 살리면 사소한 문제는 대나무를 쪼개듯 명료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을 했다. (무희)-67~68쪽

조명이 찬란한 번화가를 지나 좁고 어슴푸레한 거리로 접어들자 2, 3층 나무 난간에 이부자리 등을 널어놓고 말리는 집,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유대교도 할아버지가 문 앞을 서성대는 선술집, 사다리 하나가 곧바로 위층에 닿아 있고 또 다른 사다리는 지하의 대장간으로 통해 있는 셋집이 보였다. 이러한 집들을 마주 보며 凹자 형태로 세워진 300년 전의 유적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황홀해져서 몇 번이나 잠시 멈춰 서곤 했다. (무희)-70쪽

메이지 21년(1888) 겨울이 왓다. (베를린) 중심가의 도로는 모래를 뿌리고 가래로 눈을 치우지만 클로스터가는 심하게 울퉁불퉁하고 표면은 온통 얼어붙어, 아침에 문을 열면 굶주린 참새가 떨어져 죽어 있는 것이 애처로웠다. (무희)-78쪽

나(오타)는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무언가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 대답의 범위를 잘 헤아리지 못하고 바로 승낙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승낙한 이후에 어려움을 깨달아도, 억지로 승낙했을 때의 사려 깊지 못함을 숨기고, 참고 그것을 실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무희)-82쪽

(베를린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기차로는 그리 멀지 않은 여행이기 때문에 준비랄 것까지도 없었다. 몸에 맞춰 빌린 검은 예복, 고타에서 출판된 러시아 궁정의 새 귀족명부(독일 튀링겐 주의 도시 고타에 소재한 출판사 유스투스페르테스에서 냈던 인명록 ‘고타 연감’), 두세 종류의 사전 등을 작은 가방에 넣은 것뿐이다. (무희)-83쪽

대신(야마카타 백작) 일행을 따라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동안 나(오타)를 둘러싼 것들은, 파리 최고의 사치품을 빙설 속에 옮겨 놓은 듯한 왕성(王城)의 장식, 마치 황금색 촛불을 무수히 밝혀 놓은 듯한 많은 훈장과 견장들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빛, 조각품들, 최고의 조각기술로 만든 벽난로의 열기에 추위를 잊고 부채질하는 궁녀들. 그 사이에서 프랑스어를 가장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나였으므로, 손님과 주인 사이를 오가며 이것저것 통역하는 사람 또한 대부분 나였다. (무희)-83쪽

그 당시 간다묘진 신사 앞의 언덕길을 내려다가 보면 길모퉁이에 갈고리 모양으로 평상을 내놓고 고서적을 늘어놓은 가게가 있었다. 그곳에서 어느 날 내가 중국의 ‘금병매’를 발견하고 주인에게 값을 묻자 7엔이라고 했다. 5엔으로 깎아달라고 하자 ˝지난번에 오카다 씨가 6엔이면 산다고 하셨는데 거절했습니다˝라고 했다. 때마침 형편이 좋았기 때문에 부르는 값에 샀다. 이삼일 후에 오카다와 마주치자 그가 말을 꺼냈다.
˝자네 참 너무했네. 내가 모처럼 보아두었던 ‘금병매’를 사버렸더군.˝
˝그래. 자네가 부른 가격에 흥정이 안 되었다고 책방 주인이 말하더군. 자네가 갖고 싶다면 내가 양보하지.˝ (기러기)-100쪽

(오카다는 오타마의) 이름을 모르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문패를 본다면 이름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창가에 그녀가 있을 때는 그녀에게 조심스러웠다. 그렇지 않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나 오가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다. 결국 그는 처마의 그늘에 가려진 작은 나무 문패에 어떤 글자가 쓰여 있는지 보지 못했다. (기러기)-105쪽

또 하나는 무엔자카 중턱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그 집에는 팻말 따위는 붙어 있지 않았지만 팔려고 내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러 갔다. 주인이 유시마기리도시에서 전당포를 하던 집인데, 얼마 전까지 그 집에 살던 노인 영감이 그만 죽어버려서 할머니가 본가로 가게 되어 집이 비었다는 것이었다. 옆집이 바느질을 가르치는 집이라서 좀 소란스럽겠지만, 노인이 살던 집이라 특별히 나무도 좋은 것으로 골라 지어 어쩐지 살기 좋을 것 같았다. 입구의 격자문에서 화강암을 깔아놓은 정원까지 깔끔하고 정취 있게 꾸며져 있었다. (기러기)-112~113쪽

세세한 데까지 마음을 써서 휴지를 두 장으로 나눠 사용하거나, 용건을 엽서 한 장에 다 써 넣기 위해 현미경 없이는 못 읽을 정도로 자잘하게 글씨를 쓴다거나 하는 것은 모든 구두쇠들의 공통된 성질이다. 그러나 그것을 철저하게 자신의 생활 전반에 걸쳐 실행하는, 정말이지 지독히 인색한 사람과, 어딘가에 구멍을 남겨 숨통을 터놓고 사는 사람이 있다. 지금까지 소설에 나오거나 연극에 등장하는 수전노들은 거의 모든 일에 절대적으로 인색한 구두쇠들뿐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돈을 모으는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인색한 주제에 여자에게는 사족을 못 쓴다든지, 이상하게도 밥만큼은 살 사준다든지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전에도 잠깐 이야기한 것 같지만, 스에조는 말씀한 옷차림을 좋아해서, 대학의 사환을 하던 시절 휴일이 되면 늘 입던 무명 통소매 옷을 벗어 던지고 멋진 상인같이 기모노로 갈아입곤 했다. (기러기)-115~116쪽

그런데 보통이라면 예단 비용이라고 하면서 목돈을 상대편에게 건네주었을 테지만, 스에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옷에 멋을 부리는 것을 낙으로 삼던 스에조는 즐겨 이용하던 옷가게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오타마를 첩으로 맞는) 사정 이야기를 하고 두 사람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맞추었다. 단 치수는 중매를 주선한 할멈을 통해 오타마에게 물었다. 안타깝게도 이 빈틈없고 인색한 스에조의 처사를, 오타마 부녀는 오히려 대단한 선의로 해석하여 현금으로 직접 건네주지 않는 것을 그가 자신들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기러기)-119쪽

평소 처자식에게 폭군 같은 행동을 해온 터라 아내의 행동을 반항 혹은 굴종으로만 보던 스에조는, 여종업원이 나간 후 수줍음으로 발갛게 물든 얼굴에 얌전한 미소를 띠며 술을 따르는 오타마를 보고,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산뜻하고 그윽한 환희가 밀려옴을 느꼈다. 그러나 스에조는 이 자리에서 환영같이 떠오르는 행복감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면서도, 왜 자신의 가정에서는 이런 행복감이 없었나 반성한다든지, 이런 색다른 감정을 지속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런 노력이 자신과 아내에게 충분히 있었는지 없었는지 헤아려볼 정도의 치밀한 사고는 하지 못했다. (기러기)-123쪽

오타마는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체념은 그녀가 가장 많이 경험한 심적 작용이라 그녀의 정신은 이 방향에서라면 기름을 친 기계처럼 매끄럽게 움직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기러기)-135쪽

야트막한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니, 상록수 가지 사이로 상쾌한 아침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버들가지와 함께 맞은편 연못에 무성하게 우거진 연꽃잎이 보였다. 그 녹음 속에 여기저기 엷은 선홍색 점을 찍어놓은 듯 아침에 핀 꽃들도 보였다. 북향집이어서 춥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으나 여름에는 일부러라도 찾아가 있고 싶을 정도로 시원했다. (기러기)-139쪽

부모가 자식을 보아도, 늙은이가 젊은이를 보아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 앞에서는 부모든 늙은이든 굴복하기 마련이다. (기러기)-140쪽

(오타마) 부녀는 어제도 그제도 함께 있었던 것처럼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러기)-142쪽

첩이라 해도 서방의 집에 있으면 일상적인 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지만, 숨겨진 첩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고생이 있다. 오타마의 집에 어느 날 시루시반텐을 뒤집어 입은 30대 전후의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시모사가 고향인데, 고향에 가고 싶으나 다리를 다쳐 걸을 수가 없으니 좀 도와달라고 말했다. 10전짜리 은화를 종이에 싸서 우메에게 줘 보냈더니 남자는 종이를 펴 보고는 히죽 웃으며 ˝겨우 10전이야! 아마 잘못 생각한 모양인데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오너라˝하고 말하며 내던졌다. (기러기)-169쪽

교육자들은 망상을 일으키지 않도록 젊은이들에게 이부자리에 들어가면 바로 잠을 자고, 눈을 뜨면 바로 일어나라고 훈계한다. 젊고 혈기 왕성한 몸을 따뜻한 이불 속에 두면, 독초의 꽃을 불속에서 피운 것처럼 사상(寫像)이 싹트기 때문이다. 오타마의 상상도 꽤 자유분방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에는 눈에서 어떤 빛이 나며 술에 취한 듯 눈꺼풀에서 볼까지 홍조가 넘쳐흘렀다. (기러기)-196쪽

오타마는 처음에는 서방님(스에조)을 깍듯이 모시는 여자였지만 주변 환경이 급격히 변하자 반문해보기도 하고 성찰해보기도 한 끝에 뻔뻔스럽다고 해도 좋을 만한 위치에 스스로를 놓고, 세상 여자들이 많은 남자와 접한 후에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냉정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기러기)-197쪽

메이지 십몇 년경인 당시에는 에도 시대 상가(商家)의 관습법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같은 마을에서 같은 마을로 고용살이를 들어가도 야부이리날(정월과 7월 전후로 고용살이하는 사람들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 외에는 쉽게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기러기)-199~200쪽

다카세부네에 타는 사람들의 과반수는 한순간 마음을 잘못 쓴 탓에 생각지도 못한 죄를 범한 자들이었다. 흔한 예로 사랑하는 남녀가 같이 죽으려고 정사(情死)를 기도하다가 여자만 죽고 남자만 살아남은 그런 경우였다.
다카세부네는 이런 죄인들을 태우고, 날이 저물 무렵 사찰의 종이 울릴 때쯤에야 출발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교토 거리의 가옥들을 양옆으로 바라보면서 동쪽으로 달리다가 가모 강을 가로질러 하류로 내려간다. (다카세부네)-222쪽

언제 적이었을까! 아마 다이묘 시라카와 라쿠오가 에도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간세이(寬政, 1789~1801) 무렵이었을 것이다. 치온원의 벚꽃이 저녁을 알리는 사찰의 종소리에 어우러져 떨어질 무렵,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기이한 죄인 한 사람이 다카세부네에 탔다. (다카세부네)-223쪽

˝(전략) 교토는 정말 좋은 곳입니다만, 그 나무랄 데 없는 좋은 곳에서 지금까지 제(기스케)가 겪었던 고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후략)˝ (다카세부네)-226쪽

˝(전략) 숨통을 끊으면 바로 죽을 줄 알았는데, 숨이 그 자리에서 샐 뿐 죽지 않아! (후략)˝ (다카세부네)-231쪽

(모리 오가이의 어머니인) 미네는 1916년 70세(오가이 나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지만, 육군 군의총감, 육군성 의무국장의 지위에까지 오른 오가이를 마지막까지 곁에서 보호하고 격려했다. 오가이도 그런 어머니를 경애해서 평생 절대복종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순종했다. (해설)-238~239쪽

오가이는 1881년 7월, 19세라는 젊은 나이로 도쿄 대학 의학부를 최연소 졸업했다. 그리고 동급생인 고이케 마사노리의 추천과 양친의 뜻에 따라 육군 군의부에 들어간다. 그는 도쿄 대학 의학부 졸업생으로 문부성 국비유학을 희망했으나, 하숙집에 불이 나 강의노트가 불에 타는 등 불운이 겹쳐 졸업성적이 3등 안에 들지 못하고 서구로 가는 국비유학생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쓰와노번이라는 작은 시골의 전의였던 모리 가문은 오가이가 문부성 국비유학생이 되는 것보다 육군이라는 국가조직 안에 들어가 ‘입신출세’의 길을 걷는 것을 더 원했다. 그의 육군 입대는 집안을 안정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기대와 가문의 요구에 보답하는 길이기도 했다. (해설)-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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