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 도대체 이야기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듀나 지음 / 우리학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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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듀나가 생각하는 장르의 원칙이란 무엇보다도 그 장르의 오래된 팬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인 듯하다. 이 책은 장르의 범위, 개념, 문법부터 그에 반영된 사회의 통념까지 끊임없이 바뀌었고 바뀌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그런 까닭에 이 세계에서 기득권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팬들은 장르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훼방을 놓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시종일관 신랄하게 지적한다. 듀나가 생각하는 장르의 특성과 각각에 부합하는 문법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듣고 싶어서 이 책을 집어든 독자가 있다면, 퍽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하나 이상의 장르의 애호가라고 자부하는 사람일 테니까. 보다시피 이 책은 이른바오래된 장르 팬들이 개인적 취향과 추억을 내세워서 장르와 사회의 변화를 외면하며 장르의 변화와 성장을 지체시키는 원인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오리지널 스타트렉 시리즈는 당시의 기준에 따르면 엄청나게 진보적이었습니다. 흑인 여성과 아시아인과 러시아인 남성, 외계인과 지구인 혼혈 남성이 당연한 고정 멤버였고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최초로 흑인과 백인의 키스 장면을 내보냈던 프로그램이었죠. 지금 와서 보면 여러모로 낡아 보이지만 진보를 향한 방향성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설정 놀이를 하는 팬들은 시리즈의 방향성 대신 고정된 설정에 집착하게 됩니다. 함장이 여성이고 함교에 백인 남자가 한 명밖에 없었던 스타트렉: 보이저 시리즈에 대한 반발이 얼마나 컸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좀 이가 갈립니다. -126~127

 

 작가로서 골수팬의 애정이 지니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다. 특히 오랜 독자들의 열성이 세계관과 저변을 확대시키는 강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장르 문학에서 그런 팬들의 한계 효용을 인식하기는 쉬워도 적시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장르 문학의 경계와 저변이 확대되는 이 시기에 작가 중 누군가는 해야만 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꾸준히 한두 권 씩 꾸준히 나오고 있는 장르 문학 소개서들 사이에서 이 책이, 다름 아닌 듀나의 책으로서 갖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렇듯 내부를 향한 (자각 혹은 자정에의) 충고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당연히 장르의 탐험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비슷한 자극을 반복하고 싶어 하며, 변화를 거부하니까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 가능하다고 경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죠. -99~100

 

 바로 그래서 듀나, 혹은 이 책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 보아야 자기 손해다. 설령 장르 문학에 닥친 페미니즘의, 다문화의, 다인종의, 비백인의, 탈경계의 흐름이 부당하고 역차별적이라 하더라도 이제 이 추세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고 충실한 팬들의 분노와 저항을 가볍게 무시하고 그들을 계몽하려 노력하는 대신, 앞으로 장르 문학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돕는다. 한 사람의 낙오자라도 정성스럽게 교화시켜서 함께 미래로 향하는 역할은 자기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한 덕분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 어쩌면 사회나 문화의 변화란 무엇인가가 크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조차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집착하지 않는 데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장르 문학도 그렇지 않을까.

 

허구의 세계가 젊음을 유지하고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세계관과 아이디어를 가진 세대를 받아들이고 늙은이들은 뒤로 빠져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변화한 세계는 아무리 훌륭해도 분명 근본주의자 팬덤의 맘에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을 굳이 신경 써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154

 

 단순히 장르 문학의 범주를 소개하고 현재의 문법과 미래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책이었다면, 과거와 현재의 자산인 팬덤과 그들이 신봉하는 장르 세계의 기존 규칙들은 소중하고 섬세하게 서술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공적이며 정중한 이론평론서들이 택하는 방식이며, 물론 타당하다. 보편적으로 생각한다면 앞으로의 이야기는 이제까지의 그것과 떼어 낼 수 없으니까. 하지만 미래가 전적으로 현재와 과거에 구속될 수는 없으며, 그렇지도 않다. 다가오지 않은 시간인 까닭에 예측할 수 없는 사고(事故)의 지분은 미미하지 않다. 하물며 미래에 닥칠 이야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거기서 지분의 크기를 걱정해야 하는 쪽은 과거와 현재에 속한 존재들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점을 사뭇 편파적으로 저격했다. 그동안 즐기며 아껴온 이야기에서 벗어나야만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은 냉소적인 동시에 낙관적이다.

 

SF나 판타지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야기꾼이 그걸 원한다고 해도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해요.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인간이거나 인간처럼 행동하는 존재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주 어디를 무대로 삼아도 그런 존재가 주인공이어야 해요. 저에겐 좀 짜증 나는 제한입니다. 이 세계에서 달아나려고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건데 아무리 멀리 가도 인간성이라는 목줄에 잡혀 있는 거죠. -53~54

 

 앞으로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이 책이 신경 쓰는 대상은 과거에 집착하며 발목 잡는 낡은 팬들이 아니라, 인간을 독자로 삼는 이상에는 벗어나기 어려운 인간성이라는 속성 자체이다. 이 조차도 자신들의 관심과 애정과 투자가 갖는 힘을 과신하는 애호가들에 대한 냉소로 여겨지는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누구나 필연적으로 집착하고야 마는 인간성의 개념이 결국은 바뀔지, 어떻게 바뀔지의 문제가 장르 문학의 미래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짚어 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낡은 팬과 새로운 팬의 요구를 적당히 중재하는 차원이 아닌, 인간성에 대한 관점을 넓히는 데에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극적 설득력을 발휘한 셈이다. 버리고 떠나야 할 대상과 떠나서 쫓아갈 대상을 집요하고 명쾌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장르적 매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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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잊으면 - 트루먼 커포티 미발표 초기 소설집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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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에 이것저것 주워 모은 구슬이며 과자 포장지, 놀이동산의 입장권 등을 담아둔 알루미늄 상자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우연히 찾아서 다시 열어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마 이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할 듯하다. 꼭 트루먼 커포티가 작가 시절의 가장 초기였던 10대 때 쓴 작품이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단편의 단편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짧은 분량에 하나의 이야기가 잘 담긴 까닭이다. 어린 시절의 하루하루도 지금 보면 비좁고 어수선하지만, 당시에는 나름대로 넓고 가지런했다. 그래서 그때는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 작품들은 10대 초중반의 어린 커포티가 자신의 삶 속에서 얻은 그 다양한 소재와 사유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었는지 잘 보여 준다.

 

여자는 싸구려 자명종을 힐끔 보았다. 3시 반, 하루 중 가장 쓸쓸하고 가장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각이었다. 가게는 답답한 곳으로, 등유와 신선한 옥수수 가루, 오래 묵은 사탕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다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8월 오후의 태양이 하늘에 뜨겁게 걸렸다. (밀 스토어)-27

 

 훗날 활짝 꽃피는 대가의 초기작이기에, 그 단서이자 맹아로서의 성격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면 이 단편들 자체의 가치는 다소 가려질 듯하다. 이 매끄러운 이야기를 쓴 작가가 당시에 작가로서의 야심이 가득한 10대 소년이었다는 사실에 좀 더 주목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헤어진 남자를 생각하며 한적한 동네의 심심한 오후를 보내던 어느 젊은 여성 점원에게 닥친 한 사건으로 순식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가 이내 태평하게 해결해 버리는 밀 스토어, 당시의 커포티가 밋밋한 일상을 감내하면서도 날카롭게 연마한 극적 상상력을 드러낸다. 자신의 도벽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기보다는 자기도 이걸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면서 마치 남의 사건인 양 초조해하는 여고생의 이야기 힐다는 자신의 모순을 남다른 매력으로 포장하고 싶어 하는 10대 특유의 욕망이 그럴싸하게 반영되었다.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척하면서.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째서 음악이 내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지 알았어요. 그건 일종의 대체품이었던 겁니다. 더 고운 것을 대신하는 영광스러운 대체품. 무언가. 무언가......” 그는 그녀를 보았다. “당신 같은.” (서쪽으로 가는 차들)-171

 

 서쪽으로 향하는 차를 함께 타게 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사연을 각각 그려낸 서쪽으로 가는 차들은 파국에 가까운 결말도 그렇거니와, 그 차에 모인 사람들의 상이한 성격과 서사들을 압축적으로 그려내는 수완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장거리 버스를 타면서 그 안의 여러 승객을 보며 그들의 삶과 생각을 이리저리 궁리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물론 10대다운 평면성도 드러나지만, 스스로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마치 인식한 듯이 그 안에서 가능한 한 가장 생생한 세계와 인물을 구현해 내려는 집요함이 더 또렷하다. 훗날의 커포티에 비하면야 미숙하더라도, 이 또래의 어떤 작가가 그보다 더 낫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뭇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저 장면은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자신은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다고 허세를 피우느니,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지극히 충실했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트루먼 커포티였다.

 

이제 곧 그의 집 앞에 당도할 것이었다. 바로 저 언덕을 올라 내려가기만 하면, 곧 도착한다. 근사한 작은 집으로, 견고하고 튼튼했다. 그가 살기에 완벽한 곳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70

 

 이 이야기들 속에는 어쩔 수 없는 애틋함이 있다. 단순히 유년 시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성숙하지만-에 쓴 작품이어서도, 이 중 여러 작품의 화자나 배경이 유년기의 아이들이어서도 아니다. 자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언제라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환상이나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마냥 부여잡은 채 현실을 외면하는 소녀, 샐리의 이야기인 세계가 시작되는 곳조차도 조금은 애틋한 구석이 있다.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지속될 수 없는 것들에게 대한 이야기를 너무도 태연하게 풀어낸 까닭이다. 나른한 여름 오후 한때의 소동이든(밀 하우스), 꽤 긴 시간 이어졌던 첫 사랑의 끝이든(내가 그대를 잊으면), 소년이 소문의 탈옥수를 추적하는 한밤의 모험(늪의 공포)이든, 커포티는 어떤 사건이라도,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그렇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어린 작가가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짐작을 넘어서,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럼에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 나섰기에, 이 쓸쓸함이 고스란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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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오래된 상점을 여행하다 - 소세키의 당고집부터 백 년 된 여관까지
여지영.이진숙 지음 / 한빛라이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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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 사는데, 굳이 도쿄에 가야 하나?”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주제 파악 못한 소리다. 아니다, 실은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기는 하다. 휴가를 내서 일본에 간다면 역시 교토에 가고 싶으니까. 도쿄에 가면 이곳을 베끼려다 말아 먹은 서울이 생각나지만, 교토에서는 굳이 한국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동안 몇 번 다녀왔지만, 여전히 도쿄로 향하는 길은 좀 어렵다.

 

 올해 초에 며칠 시간을 내 도쿄에 다녀왔다. 1월이어서 아직 겨울이라고 부를 법한데도 제법 포근했다. 산토리홀에서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에라자드>를 들었고, 우에노(上野)의 도쿄국립박물관에서는 안진경(顏眞卿) 특별전의 제질문고(祭姪文稿)와 이공린(李公麟)오마도권(五馬図巻)을 보았으며, 우에노노모리미술관에서는 베르메르 특별전을, 국립서양미술관에서는 루벤스 특별전을 보았다. 도쿄는 도쿄다웠다.

 

호메이칸은 서민을 위한 여관이다.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운영하고 있다. 과거, 특히 전쟁 시에는 군인들의 사택이었고, 전쟁이 끝나고는 집을 잃은 사람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주 고객이었다. 이때 지방에서 온 아이들 중에는 가난한 아이도 많았는데, 그런 아이들에게는 쌀이나 잡곡 등을 숙박료 대신 받았다. -249

 

 45일 중에서 앞의 2박은 숙소가 마침 우에노 근처의 호메이칸(鳳明館)이었던 덕분에,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저 세 미술관을 한 번에 모두 둘러보았다. 딱히 료칸(旅館)을 동경하지 않고 서민풍의 숙소에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1898년에 지은 오래된 건물을 아직까지 여관으로 쓰고 있다기에 한번 묵어 보고 싶었다. 마침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았고.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근처 도쿄대학 학생들을 겨냥한 하숙집이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무릎 꿇고 시중드는 여주인과 종업원이 있는 그런 격식 높은 료칸이라기보다는, 학생 시절에 수학여행의 숙소로 묵었을 법한 정취가 감도는 여관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은 허름하지도 근사하지도 않은 그 나름의 위치를 지금까지 지켜왔다는 사실이야말로 어느 격식보다도 대단한 것이다. 부담스럽지 않은 적절한 요금을 받고, 그에 맞는 안온한 시설과 접객의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 요소들 사이의 현실적인 균형을 찾아내는 감각과 그 가치에 대한 확신이 계승되어야만 가능한 까닭이다. 이만한 규모와 자본의 도시에서 이런 적당한 공간과 그 지향이 지금까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쿄는 충분히 인상적이다.

 

며칠 전 우리 가게(세이운도인방)에 스물두세 살 정도로 보이는 손님이 찾아왔다. 막 취직을 했는데 자신만의 도장을 갖고 싶어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했다. 나로서는 아주 고마운 일이다. 물건에 대한 철학을 가진 것이 고맙고, 그것이 좋은 고집으로 보였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신이 지닌 물건에 대한 고집이나 좋은 것을 구분하는 안목을 지녔고, 작은 도구건 큰 도구건 상관없이 원하는 물건에 대한 생각과 고집이 훌륭했다. 그래서 솜씨가 좋은 장인이 많았던 거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문화가 없다. 장인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유다.” -237

 

 도쿄의 각 지역에서 저마다 개성과 가치를 지닌 상점들을 하나씩 뽑아서 소개한 이 책은 오래된 가치를 대를 이어 계승하는 공간과 그곳의 사람들을 소개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쉽게 상상하는 일본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지만, 그 매장들이 현재 처한 난관과 미래에 닥칠 위기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솔직하다. 그들이 지금까지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지켜온 원칙과 그것을 가능케 한 저력을 존중하고 이방인으로서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그러한 과거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변화와 압력을 극복하도록 도와 줄 것이라고 낙관하지는 않는다. 오래된 가게란 앞으로도 오래 갈 가게이기도 하지만, 이미 충분히 오래되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이 책에서는 이미 없어졌거나 곧 없어질, 혹은 지금쯤 없어졌을지도 모를 가게들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애초에 지금 여행객들이 꼭 찾아가야 할 명소로 이곳들을 소개하는 대신, 한 가게가 도쿄의 거리에서 그 동네의 사람들과 함께하며 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물려받은 전통과 자신의 역할을 의심하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가면 오래도록 가게를 이어갈 수 있다는 비결은 물론 정성스럽고 위안도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상황도 당연히 존재한다. 가게가 오래되었으므로 없어졌다면 한편으로는 스산하면서도 실은 무척 자연스럽다. 적어도 오래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어떻게든 버티는 가게보다는 훨씬 명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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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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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자주 여성이라고 여겨지는 것일까? 2004년부터 지금까지 이 서재 블로그를 오랫동안 써 왔고 그 다음에는 트위터에서 꾸준히 떠들고 있지만, 어디서나 다른 이용자들이 여성으로 짐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이 그렇게 생각한 경우가 아마 좀 더 많았던 듯도 하다. 애초에 스스로 여성이라고 말한 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 보여야겠다거나, 보이고 싶다는 의도로 글을 쓰지도 않았는데도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여성이리라 생각했던 사람을 꽤 자주 보고는 한다. 앞으로도 그럴지는 알 수 없지만.

 

물론 상수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대답이 있긴 했다. 아무리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라도 상수가 대답을 거듭하다가 지쳐, 군대 면제였어요,라고 하면 모든 게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37

 

 처음부터 여성으로 보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연애 상담을 해 주는 언니가 되어 언니는 죄가 없다’(언죄다)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게 된 반도미싱의 과장대리 공상수를 보며 내가 겪었던 소소한 오해들을 떠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당연했다. 게다가 군대를 가지 않았다는 점도 그와 같았지만, 다행히도 우리 아버지는 전직 국회의원이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못내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의 면모는, 결국 병역도 언죄다 페이지도 아닌 아버지와 그의 지위,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와 그의 죽음,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 주었던 친구의 죽음에서 기인한다. 상수가 한국에서 칭송받는 이른바 남성성을 그렇게 우회하고서도, 어떤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에 이 작품의 현재성이 빛난다. 지금 한국 남성이 그저 인간성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대단하지도 충분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모자라다는 사실을 섬세하면서도 명료하게 보여 주었다.

 

경애는 자기가 인생을 길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기회라는 것은 그렇게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만들어낸 것은 기회가 아니라 일종의 시험에 가깝다고. -285

경애가 온종일 엎드려만 있는 유령 같은 학생이라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마음이 너무 강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정지해 있었을 뿐이었다. -279

 

 이야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도 간신히 사람 구실만 하면 얼마나 한심한지 납득시키는 것이 상수의 역할이라면, 경애의 역할은 그 빈 구멍들을 느릿하게 빠짐없이 막는 것이었다. 경애는 깊고 오랜 상처와 함께 살고서도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든 심지를 굳히며 성장해 왔다. 더 유복한 환경에서 같거나 비슷한 상처를 지닌 상수와 견주면, 경애가 얼마나 굳건한지 납득할 수밖에 없다. 그런 경애 역시 19세에 세상을 떠난 E의 존재를 직시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삶을 가누지 못했다. 어설픈 산주와의 너절한 연애가 그 단면일 듯하다. 모든 면에서 상수보다 충실하게 상실을 경험한 경애조차도 여태 비틀거릴 정도로 불시의 참사는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이다. 상수의 눈물만 남았다면 그저 감정 과잉의 원인이 되었을 과거가, 경애의 목소리 덕분에 여태 기억하고서도 끝내 치유하지 못한 그 고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물론 상처를 이기지 못한 상수 덕에 그것을 견딘 경애의 심지가 드러났으니, 둘 중 하나면 충분하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그들(경애와 상수)이 처음 서로를 식별했던 공장 뒤편의 그늘진 창고와 비교한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성과는 별로 없고 자랑스러운 성공들은 자꾸 다음을 기약하며 미뤄질 뿐이지만 적어도 둘의 시간은 따로가 아니라 함께 흐르고 있었다. -292

 

 서로 무관할 두 사람을 희미한 사건으로 잇고, 그 단서를 겨우겨우 더듬으며 양쪽 끝의 경애와 상수가 서서히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과 구도가 여러모로 절묘한 작품이었다. 이 흐름이 둘 중 어느 한 사람, 특히 남성인 상수의 노력에 기대지 않고 각자가 제 역할을 하며 이루어져서 더욱 빛났다. 경애와 상수가 저마다 자신만의 실패를 딛고서야, 서로에게 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상대를 기다릴 때조차도 이미 조금씩 가까워졌던 셈이다. 뛰어넘지 않고서 먼 길을 돌아온 덕에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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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고운기 옮김 / 눌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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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인과 사귀기 전, 80일간 교토에 머물 때에 이 도시는 그늘이 빛나고 빛은 그늘질 때가 많아요.”라고 전한 적이 있다. 그때는 아직 이 책을 읽기 전이었지만, 내용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던 까닭에 나름대로 의식하며 건넨 말이었고, 애인은 그 맥락을 잘 알고 있었다. 교토는 그늘이 그저 가라앉게 버려두지 않고, 빛이 아무렇게나 흩어지도록 들이붓지도 않아서 구석구석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도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꾸며야 사람과 거리가 지루하지 않을지 항상 깊이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오래되었다고 무작정 받들지 않고, 새로 나왔다고 그저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향토요리를 둘러보면, 현대에는 도시인보다 시골 사람의 미각이 훨씬 더 확실하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화려함이 있다. 그래서 노인들 중에는 점차 도시를 단념하고 시골로 은둔하는 사람이 있는데, 시골 거리도 은방울꽃 모양의 장식용 가로등 따위가 설치되어 해마다 교토처럼 되기 때문에,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늘에 대하여)-p.65

 

 그러다 보니 때로는 모두가 교토를 부족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늘이니 마냥 어두워야 하고, 빛이라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무슨 큰 깨달음인양 가르치려 드는 사람은 의외로 많으니까. 심지어는 이 책의 저자인 저 다니자키 준이치로조차도 좋았던 과거에서 멀어지는 옛 수도를 사뭇 호들갑스레 걱정할 정도다. 물론 그가 그늘에 대하여를 쓴 1933년이라면 거리에 은방울꽃 모양의 가로등만 놓여도 밤의 어둠이 송두리째 사라진 듯 불안했겠지만, 역시 경박한 불평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이미 40대 후반이었던 그는 캄캄한 어둠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허무는 조금의 빛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나는 우리가 이미 잃어 가고 있는 그늘의 세계를 오로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 되불러 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전당의 처마를 깊게 하고, 그 벽을 어둡게 하고, 지나치게 밝아 보이는 것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쓸데없는 실내장식을 떼 내고 싶다. 어느 집이나 모두 그런 것이 아닌, 집 한 채 정도만이라도 그런 집이 있었으면 좋을 것이다. , 어떤 상태가 되는지, 시험 삼아 전등을 꺼 보는 것이다.

_1933. 12 (그늘에 대하여)-p.67

 

 그는 이 글의 끝에서 자신은 그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인공적인(그리고 서구적인) 빛이 침입할 수 없는 세계를 다시 이루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범위를 좁히더라도 왜 굳이 문학만이 사회와 동떨어져서 음예(陰翳)가 아닌 암흑(暗黑)을 추구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집집마다 놓인 전등, 골목마다 선 가로등이 밤을 낮으로 바꾸지 못했다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데, 세계의 변화를 찬찬히 숙고하기보다 부르르 반발부터 한 탓에 마치 어둠이 아닌 그늘이 없어질 것처럼 역정을 낸 셈이다.


한 가지 일이 만 가지 일이다. (게으름을 말한다)-p.87

 

 게다가 사회의 전등과 격리된 문학이라고 해 보아야, 기껏 한다는 소리는 방종하여 노골적인 것보다도, 내부로 억제된 애정을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아서, 때로 무의식적으로 말씨나 몸짓 끝에 드러나는 것이 한층 남자의 마음을 이끈다. 색기라는 것은 대개 그런 애정의 뉘앙스이다.”(연애와 색정, p.137)라는 수준의 구차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백번 양보해서 남성이 이런 색기에 끌릴는지는 몰라도, 어째서 여성이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듯 숨기지 못하며 표현해야하는 것일까. 다니자키는 물론 여기에 대해서 어떤 숙고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때 지난 망상을 언제까지고 중얼대기 위해서 어떤 빛도 들지 않는 골방, 혹은 문학이 필요하다고 자인한 셈인데, 이렇게 소수의, 고립된, 신념만 강한 문학이 얼마나 해로운지 충분히 확인한 현재로서는 역시 어둠에 빛을 들이대서 새로운 그늘을 만들어야 한다고 되새길 뿐이다.

 

나는 꽃구경을 좋아해서, 봄에는 뭐니 해도 화려하게 꽃이 한창인 경치를 보지 않으면 봄의 기분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데, 이때도 역시 지금의 요령으로 간다. 빈틈없는 철도성에서는 매년 산들의 눈이 녹아서 스키를 탈 수 없게 된 때부터 서서히 꽃 선전을 시작해, 4월 중은 꽃구경 열차를 내보내는 것은 물론, 다음 일요일에는 어디가 볼 만한 곳인지, 어디가 곧 만개할 정도로 피었는지 일일이 게시를 해 주고 있으므로 조용한 꽃구경을 하고 싶은 사람은 그런 장소를 피해서 돌아가면 괜찮다. 어쨌든 꽃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명소의 꽃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어서, 보기 좋게 핀 오직 한 그루의 벚꽃이 있으면, 그 나무 그늘에 휘장을 펴고 찬합 도시락을 열면, 마음 어딘가가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p.170

 

 물론 이 책 속의 글에서 그가 무턱대고 암흑과 음예를 혼동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경험했던 그늘의 미묘함에 집착한 나머지, 더 이상의 빛을 완고하게 거부했을 뿐이다.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늘을 말할 때의 섬세하고 경묘한 표현은 그 그늘 혹은 문화의 미래를 염려할 때의 편협하며 장황한 훈계와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보인다. 8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다니자키의 역할은 음예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뿐이었음이 꽤나 분명하지만 일본에 오래도록 드리웠던 전통의 그늘이 마치 사라질 듯 끊임없이 급변한 당시의 시점에서는 이 둘이 뗄 수 없는 인과로 오해되었을 법도 하다. 다니자키 같은 사람 덕에 여태껏 교토의 그늘이 옛 모습을 좀 더 지켜 냈다고 역성은 들 수도 있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들만 굳이 골라서 아쉬워하는 사람에게는 별반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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