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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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하지만 읽지 못했던 작품이었는데 이런 연애담일 줄은 정말 몰랐다. 전혀 몰랐다. 그만큼 꽁꽁 숨겨두듯 혼자서 이 작가를, 이 작품을 아껴 왔다는 것도 나 역시 이제야 알았다. 이것 또한 까맣게 몰랐다. 충분히 기대를 하고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마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마냥 즐거웠다. 이 이야기의 단맛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짙었으며, 여운까지도 깊고 길었다.

 

경민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아는 그 순간에도 체념하듯 생각했다. 체념이라고 부르는 애정도 있는 것이다. -23

흐르지 않는, 진득한 피가 갈라진 입술 사이로 배어나왔다. -194

 

 이야기는 저 좋을 대로 사는 남성 애인 경민과의 연애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쳐 버린 여성인 한아로부터 시작한다. 경민은 딱히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충분히 좋지 못한 사람이다. 헤어지고 싶을 정도의 사람이 아닐 뿐, 함께 하기에는 충분히 버거운 애인이란 어떤 존재인지 그리 구구하지 않은 묘사 속에서도 충분히 잘 드러났다. 선량하지만 무책임하며, 끝까지 자신의 애정을 구실로 삼는 사람. 어쩌면 이 버거운경민의 역할은 새로 다가올 가뿐한, 그렇지만 이상한경민을 맞기 위한 도구 내지는 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같은 경민이 전혀 다른 지향과 상태로 한아에게 돌아왔기에, 그 차이와 혼란은 어느 새 연인이 접근할 때보다도 극대화된다.

 

처음에 얼마짜리 옷이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빛과 습기와 오염으로부터 소중하게 보호받은 옷이라면, 귀한 옷이다. 여왕의 옷자락을 드는 시동처럼 두근거리며 나무 옷걸이에 옮겨 걸었다. 상하지 않도록 한 솔기 한 솔기 치밀하게 뜯어내는 건 다음의 일이었다. -39쪽

 

 이 작품에서 가장 환상적인 지점은 경민이 변한 경위나, 갑자기 종적을 감춘 작중의 스타 가수 아폴로보다도, 한아라는 인물 그 자체다. 지극히 올곧으며 조금이라도 나은 지구와 환경을 바라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 가치의 행간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는 이런 사람은, 일상에 깊이 스며 있기 때문에 도리어 무척 희귀하다. 게다가 한아는 이런 자신의 지향으로 자신의 삶을 자립할 정도로 꾸려 나간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은 오직 한아와 경민의 낯선 연애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충분해졌다. 이런 흐름은 경민보다도 한아에게 의존하는 바가 더 크며, 이것이야말로 SF와 판타지를 아우른 장르적 토대를 이룬다. 오직 연애만 생각할 수 있는 세계라니. 그 점만으로도 감미로움이 충만하다.

 

. 따지고 보면 전혀 자연스러운 관계가 아닌데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대화가 끊이질 않아. 매일 소리 내어 웃고, 서로를 할퀴지 않아. 경민이의 한도는 어디까진지 모르겠어.” -205

한아는 이후 채 겪어보지 않은 광막함에 대해 계속 떠올렸고, 우주가 언제나 광막한 곳이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마음속에도 그것이 일부 녹아들지 않았을까 여기게 되었다. 누군가는 어렴풋하게, 누군가는 살을 찔러오는 강렬함으로 안쪽의 춥고 비어 있는 공간을 더듬는 것이다. -161

 

 부자연스러운 한아와 경민의 연애는 결국 그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경민은 한아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한아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경민이 이 변화의 이면에 감춘 비밀은 이 작품의 핵심인 까닭에 굳이 여기 적을 이유가 없지만, 그가 한아에게 드러내는 지극한 애정 역시 경이롭기는 매한가지다. 서사와 상상의 규모를 우주의 끝까지 넓힌 것으로도 부족해서 그 광대한 공간을 오직 애정과 이해만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절감했다. 책 속에 자연스러운 구석은 별로 없는데, 결국은 자연스러울 정도로 편안한 이유였다.

 

“(전략)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95

 

 책이 시작하자마자 유성우를 보겠다며 캐나다고 혼자 떠나 버렸던, ‘버거운경민이 이 작품의 결말에서 맡은 역할 내지는 취한 행동은 너무나 그답지만 그렇다고 딱히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내가 한아도 아니고, 그와 연애를 했던 사이도 아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무책임하게 떠났던 사람이 뒤늦게 돌아오는 것이 무척 싫고, 자신은 사랑했기에 떠났던 것이라고 설명인지 변명인지를 늘어놓는 것은 더더욱 싫다. 다만 여기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한아가 경민을 향해서 정리해야 할 감정과 서사가 있었기에 간신히 납득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어쨌든 한아는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두 사람은 그 과제를 해 냈다.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217쪽

 

 결말부의 내용만으로 어느 이야기를 호평하거나 혹평하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말이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부러 비판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억지로 상찬하는 것도 그리 적절하지는 않다. 다행히 이 소설은 처음이 좋았듯이 끝도 그러하였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제는 어디서도 도저히 확신할 수 없는, 앞으로도 변치 않는 연애를, 관계를, 여기서는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한아를 사랑하는 소설이겠거니 싶었던 책의 제목조차도 실은 그 이상의 의미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진짜 경민에게는 지구에서 한아밖에 없으니까. 이 제목이야말로 어찌나 감미롭고 타당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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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 그림과 원리로 읽는 건축학 수업
로마 아그라왈 지음, 윤신영 외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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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구상해서 건축했는지 말하는 책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건축해서 사용하는지 말하는 책은 아직도 적다. 사람들이 공학적 결과보다는 예술·인문적 영감 비슷한 것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이 방향에서 일반 대중들의 관심과 이해를 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글을 쓰기 어려운 탓도 있을 것이다. 어떤 연유로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생각해 냈는지에 비하면, 어떤 자료와 방법으로 그 건물을 지어 냈는지는 조금은 덜 매력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멋진 건물들을 여럿 보고, 관련된 책들도 적지 않게 접하며 의 영역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나름대로 충분히 살펴보았다고 생각한 까닭에, ‘어떻게의 영역이 더 궁금해졌다. 그럴 때에 마침 이 책이 나왔다.

 

사람들은 구부러진 캐노피와 기다란 실루엣 그리고 독특한 파사드 등 설계에 투영된 야망과 상상력에 감탄하고 반응하며 셀카봉에 장착한 휴대전화 속의 수많은 사진에 드라마틱한 배경으로 남겨둔다. 이것은 건축학적 드라마로, 공학이 얼마나 낭만적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219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구조 공학자가 쓴 이 책은, 철저히 어떻게에 집중한다. 이 저자는 오늘날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는 현대 건축의 규모와 개성이 단순히 건축가 한 개인의 설계, 의도를 넘어선 공학의 지속적 성장과 혁신의 결과임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물인 까닭이다. 그는 (storey)’부터 다리(bridge)’까지 지금 사람들이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건축 공학의 요소들을 소개하고 나서, 앞으로 변화할 건축과 공학의 미래를 일별하는 으로 마무리한다. 이 책만으로 지금의 건축과 공학을 낱낱이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낯설었던 방향에서 건축을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지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내가 설계한 건축물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고 건물 안에서 일하며 집에서 살아간다. 내 작품이 자신들에게 문제를 일으킬 거라는 걱정은 꿈에서도 하지 않는다. -20~21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엔지니어의 꿈이다. 건물이 안전하게 설계되어 거주자들은 건물이 서 있기 위해 동원된 수많은 복잡한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자신의 일을 편안하게 계속하는 것 말이다. -56~57

 

 애초에 공학자, 엔지니어의 글을 읽은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았던 까닭에, 공학자이자 여성으로서 이 분야에서 활약한 저자의 생각 자체가 흥미롭게 다가온 점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엔지니어들이 바라는 바는, 이용자인 시민들, 즉 공학의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서도 편안히 지내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오직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 결과물, 이 책의 경우에는 건축물로서만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고풍스럽고 교만한 전문가주의의 소산이라고 말할 구석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 짓고 말기에는 건축·구조 공학자들이 담당하는 결과물이 외부인들, 문외한인 시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 중요성이 너무도 크다. 사회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 전문성에 대한 책임감을 밝힌 구체적, 자발적이며 견고한 문장이 아무래도 다소 낯설었던 탓이라고 여긴다.

 

건축 기술과 구조 시스템 그리고 계산 능력이 매년 향상되고 있다. 구조공학자가 되기에 더없이 신나는 시기다. -171

회의실에 들어가면 나만 여자인 경우가 많다. 가끔 세어보면, 남자 11명에 나, 아니면 남자 17명에 나다. 대개는 남자 21명에 나였다. (중략) 나는 미스터 아그라왈 씨에게라고 적힌, 일과 관련된 수많은 편지를 받았다. 내 이름에서 성별을 유추할 수 없다면 그냥 남성이라고 추측하는 편이 낫다. 그게 맞을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이니까. 실망스럽게도 나는 이 직종에서 소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263

 

 지금 한국, 특히 서울에서 곳곳에 지어졌고, 또한 지어질 여러 특별한 건물들을 생각할 때, 건축 기술과 그 구조의 시스템이 크게 발전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화하리라는 것은 비전문가조차도 짐작할 수 있다. 건축 공학 기술의 발달을 시공간적, 입체적으로 이 책에서 소개한 저자 역시, 그런 까닭에 자신의 일이 앞으로 더욱 흥미진진해지리라는 기대를 아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남성이 주도했던 이 분야에서는 여전히 소수인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여러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궁극적으로는 끈기와 탄력성으로 이런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건축, 공학이라는 분야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중, 사회의 이면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문성과 원칙을 중시할 수밖에 없기에, 그런 개인적 자질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건축가, 공학자가 독립된 까닭에, 그 안의 여성들이 고립될 수도 있다는 의문이 남았다.

 

재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공학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사람들은 때로 콘크리트를 구식 재료라고 생각한다. 고대에 뿌리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중략) 아마 언젠가는 콘크리트를 완전히 대체할 새로운 재료가 등장할 것이다. 한편으로 계속 늘고 있는 인구의 수요에 맞추기 위해 도시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어질 것이다. 콘크리트 건물은 앞으로 오랫동안 지평선을 빛낼 것이다. 내가 쓰다듬을 콘크리트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135

새로운 공학이 항상 크고 담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변변찮은 근본에 의지할 수도 있다. -309

 

 결국 무수한 재료들이 아래서 위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누적되어야만 하나의 건축물이 완성되듯이, 그 건축물의 이면에 있는 공학 역시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무수한 시행착오와 지식, 원리가 축적되어서 이루어진 학문이라는 사실을 이 책에서 거듭 배웠다. 건물이 완성되고 나면 가장 밑바닥의 가장 작은 일부분을 굳이 살피지 않게 되듯이, 오늘날처럼 웅장 휘황한 건물들이 즐비한 시대에는 도리어 그것을 세운 건축·구조 공학을 의식하기가 더욱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물며 그 세계는 의식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이들이 모여 있으므로 더더욱. 그럼에도 이 책은 바로 지금 이 건축의 기초와 원리를 조금씩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알려 주었다. 기초의 시작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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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열두 방향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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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상상력을 엿보면 그의 다채로운 세계에 매혹되는 동시에, 나의 단조로운 사고를 자각하게 된다. 전자가 전적으로 재미의 문제라면 후자는 일종의 학습의 문제다. 어느 작품에서 이 두 문제를 모두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나라도 제대로 제시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 이 책에는 두 가지 문제가 모두 들어 있는데, 하나의 작품이 둘을 모두 갖춘 경우는 거의 없어서 그조차도 흥미로웠다. 두 종류의 이야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르 귄이 무슨 의도를 두었던 것인지까지 생각하거나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이야기 속 의도의 명료함과 흥미의 농밀함이 반비례한다는 인상은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전략) 그런데 당신(샘레이)은 우리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하지 않소?”

바로 떠날 수 있을까요? 집을 오랫동안 비우고 싶지 않거든요.” (샘레이의 목걸이)-40

 

 책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머나먼 길을 떠난 엔기어의 이야기 샘레이의 목걸이로 시작한다. 르 귄이 만족한 그 자신의 낭만성이 무엇인지 참 잘 보여 주었다.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것이 의외로 가뿐히 손에 들어오는 것도, 그렇게 없던 것을 쥐는 사이에 당연히 내 것이리라 생각했던 무언가가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것도, 무척이나 낭만적이었다. 얻는 만큼 잃어서 낭만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제각각 그렇다는 소리다.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처음에는 내 것이 아니었던 그것을 결국은 얻을 것이다. 하다못해 그 일부라도. 그리고 그렇게 갖는 동안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것이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게 어떻게 없어지는지도 몰랐던 것이 사라지는 이치를 그렇게 배운다. 이렇게 될지 알았다면 없는 것을 찾지 않고, 있는 것을 잃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한 번쯤은 생각하겠지만 입 밖에 내지도 깊이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그때는 원하는 것이 있었을 뿐이므로. 누구나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르누아르가 좀이 슨 검은 가운을 입는 동안 키슬크는 자신의 은색 튜닉을 실용적이면서 특징 없는 외투로 가렸다. 페니위더가 생각에 잠겨 목에 벌레 물린 곳을 긁는 동안 보타는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넷은 아침거리를 구하러 집을 나섰다. 연금술사와 성간 고고학자가 프랑스어로 말하며 앞서 가고, 갈리아에서 온 노예와 인디애나에서 온 교수가 라틴어로 말하며 손을 잡고 뒤따랐다. 좁은 길은 붐볐고,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네 사람 위로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각탑 두 개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옆으로는 센 강이 부드럽게 출렁였다. 바야흐로 파리는 4월이었고, 강둑에는 밤꽃이 피어 있었다. (파리의 4)-77

 

 「파리의 4이 참 아늑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일 뿐인데도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만큼은 그저 평온했다. 시간을 건너뛰고서도 어떤 소란도 없이 그때 겪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경우만을 잘도 이어서 붙여 놓았다. 르 귄은 이 네 사람이 이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이대로 그렇게 파리의 골목골목을 거닐며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그려냈다. 대단한 갈등이나 사건, 무엇보다도 사유가 없어서 이런 마음을 끌어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렇게나 소소한 서사로 이렇게 따사로운 정취를 이루었다는 것이야말로 탁월하다. 봄날의 교토를 거닐 때 감도는 감미로운 몽상이 무엇이었는지 여기서 배운 듯하다.

 

극한 지방 탐사대원들은 팀 동료가 지성인이고 착실히 훈련을 받았으며 정서가 불안해도 개인적으로 공감대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대원들은 밀폐된 선실과 역겨운 장소에서 함께 일해야 했으며, 따라서 각자의 망상, 절망, 편집증, 혐오감, 강박 관념 따위가 대원들 간의 관계를 해칠 정도로 크지는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게 당연했다. 늘 그럴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315

 

 인간을 자유롭게 우주로 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어도 인간관계는 여전히 복잡하고 미묘하며 왜곡될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게나 발전한 시대인 까닭에 오히려 인간들이 서로를 더욱 못 견디게 될 수도 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에서 르 귄은 그런 상황을 보여 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뿐인 배경 속에서, 여전히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 과학과 기술이 그렇게나 나아졌는데도 인간이 여전히 상대의 한계를 용인하기 위해 저렇게나 애를 써야 할 정도라면 지금보다 더 인간관계에 시달린다고 생각해도 틀리지는 않을 듯하다. 여러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대를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를 견디지 못하는 방식도 견디지 못해서 결국 자신을 망가뜨릴 때까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우고야 만다. 이방인인 그들을 공격하는 숲 속의 나무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란 무수한 혐오감과 비슷해 보인다.


앞쪽에, 그곳에, 저녁 녘의 넓은 들판에서 마른 하얀 꽃들이 나부끼며 속삭였다. 72년이 지나도록, 라이아는 저 풀들의 이름을 배울 짬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혁명 전날)-498 


 이 책에 담긴 모든 이야기를 되새길 수는 없다. 그저 내 상상력의 범위를 넓혀 준 것만으로 충분했던 이야기도 있고,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 유쾌했던 이야기도 있으므로 그 이상 말을 더하면 번거롭다. 다만 어느새 왕년의 혁명가가 되어 버린 혁명 전날속 라이아가 그랬듯이 모르는 이름의 존재만큼은 기억해 두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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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 도대체 이야기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듀나 지음 / 우리학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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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듀나가 생각하는 장르의 원칙이란 무엇보다도 그 장르의 오래된 팬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인 듯하다. 이 책은 장르의 범위, 개념, 문법부터 그에 반영된 사회의 통념까지 끊임없이 바뀌었고 바뀌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그런 까닭에 이 세계에서 기득권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팬들은 장르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훼방을 놓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시종일관 신랄하게 지적한다. 듀나가 생각하는 장르의 특성과 각각에 부합하는 문법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듣고 싶어서 이 책을 집어든 독자가 있다면, 퍽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하나 이상의 장르의 애호가라고 자부하는 사람일 테니까. 보다시피 이 책은 이른바오래된 장르 팬들이 개인적 취향과 추억을 내세워서 장르와 사회의 변화를 외면하며 장르의 변화와 성장을 지체시키는 원인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오리지널 스타트렉 시리즈는 당시의 기준에 따르면 엄청나게 진보적이었습니다. 흑인 여성과 아시아인과 러시아인 남성, 외계인과 지구인 혼혈 남성이 당연한 고정 멤버였고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최초로 흑인과 백인의 키스 장면을 내보냈던 프로그램이었죠. 지금 와서 보면 여러모로 낡아 보이지만 진보를 향한 방향성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설정 놀이를 하는 팬들은 시리즈의 방향성 대신 고정된 설정에 집착하게 됩니다. 함장이 여성이고 함교에 백인 남자가 한 명밖에 없었던 스타트렉: 보이저 시리즈에 대한 반발이 얼마나 컸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좀 이가 갈립니다. -126~127

 

 작가로서 골수팬의 애정이 지니는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다. 특히 오랜 독자들의 열성이 세계관과 저변을 확대시키는 강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장르 문학에서 그런 팬들의 한계 효용을 인식하기는 쉬워도 적시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장르 문학의 경계와 저변이 확대되는 이 시기에 작가 중 누군가는 해야만 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꾸준히 한두 권 씩 꾸준히 나오고 있는 장르 문학 소개서들 사이에서 이 책이, 다름 아닌 듀나의 책으로서 갖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렇듯 내부를 향한 (자각 혹은 자정에의) 충고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당연히 장르의 탐험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비슷한 자극을 반복하고 싶어 하며, 변화를 거부하니까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 가능하다고 경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죠. -99~100

 

 바로 그래서 듀나, 혹은 이 책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 보아야 자기 손해다. 설령 장르 문학에 닥친 페미니즘의, 다문화의, 다인종의, 비백인의, 탈경계의 흐름이 부당하고 역차별적이라 하더라도 이제 이 추세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고 충실한 팬들의 분노와 저항을 가볍게 무시하고 그들을 계몽하려 노력하는 대신, 앞으로 장르 문학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돕는다. 한 사람의 낙오자라도 정성스럽게 교화시켜서 함께 미래로 향하는 역할은 자기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한 덕분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 어쩌면 사회나 문화의 변화란 무엇인가가 크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조차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집착하지 않는 데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장르 문학도 그렇지 않을까.

 

허구의 세계가 젊음을 유지하고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세계관과 아이디어를 가진 세대를 받아들이고 늙은이들은 뒤로 빠져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변화한 세계는 아무리 훌륭해도 분명 근본주의자 팬덤의 맘에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을 굳이 신경 써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154

 

 단순히 장르 문학의 범주를 소개하고 현재의 문법과 미래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책이었다면, 과거와 현재의 자산인 팬덤과 그들이 신봉하는 장르 세계의 기존 규칙들은 소중하고 섬세하게 서술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공적이며 정중한 이론평론서들이 택하는 방식이며, 물론 타당하다. 보편적으로 생각한다면 앞으로의 이야기는 이제까지의 그것과 떼어 낼 수 없으니까. 하지만 미래가 전적으로 현재와 과거에 구속될 수는 없으며, 그렇지도 않다. 다가오지 않은 시간인 까닭에 예측할 수 없는 사고(事故)의 지분은 미미하지 않다. 하물며 미래에 닥칠 이야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거기서 지분의 크기를 걱정해야 하는 쪽은 과거와 현재에 속한 존재들일 것이다. 이 책은 그 점을 사뭇 편파적으로 저격했다. 그동안 즐기며 아껴온 이야기에서 벗어나야만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은 냉소적인 동시에 낙관적이다.

 

SF나 판타지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야기꾼이 그걸 원한다고 해도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해요.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인간이거나 인간처럼 행동하는 존재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주 어디를 무대로 삼아도 그런 존재가 주인공이어야 해요. 저에겐 좀 짜증 나는 제한입니다. 이 세계에서 달아나려고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건데 아무리 멀리 가도 인간성이라는 목줄에 잡혀 있는 거죠. -53~54

 

 앞으로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이 책이 신경 쓰는 대상은 과거에 집착하며 발목 잡는 낡은 팬들이 아니라, 인간을 독자로 삼는 이상에는 벗어나기 어려운 인간성이라는 속성 자체이다. 이 조차도 자신들의 관심과 애정과 투자가 갖는 힘을 과신하는 애호가들에 대한 냉소로 여겨지는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누구나 필연적으로 집착하고야 마는 인간성의 개념이 결국은 바뀔지, 어떻게 바뀔지의 문제가 장르 문학의 미래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짚어 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낡은 팬과 새로운 팬의 요구를 적당히 중재하는 차원이 아닌, 인간성에 대한 관점을 넓히는 데에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극적 설득력을 발휘한 셈이다. 버리고 떠나야 할 대상과 떠나서 쫓아갈 대상을 집요하고 명쾌하게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장르적 매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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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잊으면 - 트루먼 커포티 미발표 초기 소설집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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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에 이것저것 주워 모은 구슬이며 과자 포장지, 놀이동산의 입장권 등을 담아둔 알루미늄 상자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우연히 찾아서 다시 열어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마 이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할 듯하다. 꼭 트루먼 커포티가 작가 시절의 가장 초기였던 10대 때 쓴 작품이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단편의 단편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짧은 분량에 하나의 이야기가 잘 담긴 까닭이다. 어린 시절의 하루하루도 지금 보면 비좁고 어수선하지만, 당시에는 나름대로 넓고 가지런했다. 그래서 그때는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 작품들은 10대 초중반의 어린 커포티가 자신의 삶 속에서 얻은 그 다양한 소재와 사유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었는지 잘 보여 준다.

 

여자는 싸구려 자명종을 힐끔 보았다. 3시 반, 하루 중 가장 쓸쓸하고 가장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각이었다. 가게는 답답한 곳으로, 등유와 신선한 옥수수 가루, 오래 묵은 사탕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다시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8월 오후의 태양이 하늘에 뜨겁게 걸렸다. (밀 스토어)-27

 

 훗날 활짝 꽃피는 대가의 초기작이기에, 그 단서이자 맹아로서의 성격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면 이 단편들 자체의 가치는 다소 가려질 듯하다. 이 매끄러운 이야기를 쓴 작가가 당시에 작가로서의 야심이 가득한 10대 소년이었다는 사실에 좀 더 주목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헤어진 남자를 생각하며 한적한 동네의 심심한 오후를 보내던 어느 젊은 여성 점원에게 닥친 한 사건으로 순식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가 이내 태평하게 해결해 버리는 밀 스토어, 당시의 커포티가 밋밋한 일상을 감내하면서도 날카롭게 연마한 극적 상상력을 드러낸다. 자신의 도벽을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기보다는 자기도 이걸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면서 마치 남의 사건인 양 초조해하는 여고생의 이야기 힐다는 자신의 모순을 남다른 매력으로 포장하고 싶어 하는 10대 특유의 욕망이 그럴싸하게 반영되었다.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척하면서.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어째서 음악이 내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지 알았어요. 그건 일종의 대체품이었던 겁니다. 더 고운 것을 대신하는 영광스러운 대체품. 무언가. 무언가......” 그는 그녀를 보았다. “당신 같은.” (서쪽으로 가는 차들)-171

 

 서쪽으로 향하는 차를 함께 타게 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사연을 각각 그려낸 서쪽으로 가는 차들은 파국에 가까운 결말도 그렇거니와, 그 차에 모인 사람들의 상이한 성격과 서사들을 압축적으로 그려내는 수완이 인상적이다. 어쩌면 장거리 버스를 타면서 그 안의 여러 승객을 보며 그들의 삶과 생각을 이리저리 궁리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물론 10대다운 평면성도 드러나지만, 스스로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마치 인식한 듯이 그 안에서 가능한 한 가장 생생한 세계와 인물을 구현해 내려는 집요함이 더 또렷하다. 훗날의 커포티에 비하면야 미숙하더라도, 이 또래의 어떤 작가가 그보다 더 낫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뭇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저 장면은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자신은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다고 허세를 피우느니,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지극히 충실했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트루먼 커포티였다.

 

이제 곧 그의 집 앞에 당도할 것이었다. 바로 저 언덕을 올라 내려가기만 하면, 곧 도착한다. 근사한 작은 집으로, 견고하고 튼튼했다. 그가 살기에 완벽한 곳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70

 

 이 이야기들 속에는 어쩔 수 없는 애틋함이 있다. 단순히 유년 시절-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성숙하지만-에 쓴 작품이어서도, 이 중 여러 작품의 화자나 배경이 유년기의 아이들이어서도 아니다. 자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언제라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환상이나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마냥 부여잡은 채 현실을 외면하는 소녀, 샐리의 이야기인 세계가 시작되는 곳조차도 조금은 애틋한 구석이 있다.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지속될 수 없는 것들에게 대한 이야기를 너무도 태연하게 풀어낸 까닭이다. 나른한 여름 오후 한때의 소동이든(밀 하우스), 꽤 긴 시간 이어졌던 첫 사랑의 끝이든(내가 그대를 잊으면), 소년이 소문의 탈옥수를 추적하는 한밤의 모험(늪의 공포)이든, 커포티는 어떤 사건이라도,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그렇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어린 작가가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짐작을 넘어서, 그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럼에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 나섰기에, 이 쓸쓸함이 고스란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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