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의 청중이 보기에, 고루한 아리스텔레스주의 철학자는 수학자만큼이나 ‘전문적인‘(따라서 세련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 P256
1608년 무렵 갈릴레오는 군용 컴퍼스를 발명하더라도(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유용할지라도) 궁정의 고위직을 확보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컴퍼스는 성채축성술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상당수 끌어모으기야 했겠지만, 궁정 수학 교사의 자질보다 본인의 이미지를 기념하는 일에 더 정신이 팔린 위대한 군주가 그를 탐낼 만한 가신으로 여기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곤차가 가문은 컴퍼스 선물에 감사를 표했고, 메디치 가문 또한 컴퍼스 사용법을 설명한 책의 헌사를 반겼다. 하지만 두 가문의 어느 군주도 갈릴레오가 원하던 직위를 하사하진 않았다. 바로 그때 갈릴레오는 수학 교사나 군사기술공이 아닌 신사로서 궁정에 입성하려면 컴퍼스보다 기계적 성격이 덜한 선물이 필요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 P269270
과학적 경이를 궁정 담론으로(혹은 목성 위성의 사례처럼 특정한 가문의 담론으로) 번역한 갈릴레오의 작업에서 새로웠던 것은 자연철학이라고 해서 반드시 궁정 바깥의 활동일 필요는 없음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 그리고 과학적 발견과 이론을 군주의 권력 이미지와 연결함으로써 그것들을 정당화했다는 사실이었다. - P273
그러므로 시선을 ‘끌어당겨‘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향상시키는 능력은 궁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었다. 이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궁정 에티켓은 지위와 정체성의 미묘한 협상을 군주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도록 끌고 가는 틀이었기 때문이다. - P275
앞서 언급했듯이 절대군주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인 듯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그들의 소유였기에 그들에게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와 같은 자기표현은 신하로부터 받은 선물에 보답할 의무가 없다는 군주들의 주장을 정당화했다. - P283
갈릴레오는 《별의 전령》 헌사에서 그 에티켓을 상세히 설명했다. 절대군주와 독점적 후원 관계를 다지는 데 관심이 있는 가신은 본인의 선물을 실제로는 선물이 아니라 ‘처음부터‘ 군주에게 속했던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책략에서 포틀래치의 특징을 지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가신은 군주에게 도전한다거나 답례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또 관대함과 사치라는 귀족적 기풍을 군주와 공유하는 척할 수도 있었는데, 자신이 가진 제일 소중한 것, 즉 발견의 저자권까지 버릴 정도였다. 갈릴레오의 ‘자기 지우기‘는 궁정인다운 무심함의 몸짓이 극한까지 이른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군주를 상대하는 영웅다운 도전자가 아니라 ‘자기를 지우는 영웅다운 인물‘로 스스로를 내세웠다. 그렇게 ‘저자적 순교authorial martyrdom‘를 자처함으로써 그는 ‘영웅다움‘의 목적이 군주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를 기리는 것임을 강조하여 자신을 군주와 같은 부류로 내세울 수 있었다. - P284
갈릴레오의 발견이 별에서 온 징조(별의 소식)가 되려면 그에게는 별의 사자ambassador, 즉 대공의 철학자라는 지위가 반드시 주어져야 했다.•
•108 마찬가지로, 갈릴레오가 메디치가에 선물한 망원경은 과학 도구이자 일종의 가문 기념물이었다. 1610년 3월, 갈릴레오는 코시모 2세에게 망원경과 함께 《별의 전령》 헌정본을 보내면서 그 거칠고 조야한 도구는 지금 상태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썼다. "그토록 위대한 발견을 이룩한 바로 그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 대공은 세련되어 보이는 망원경을 더 많이 받게 되겠지만, ‘그 순간 그곳에’ 있었던 것은 자신의 망원경뿐이라고 말이다(Galileo Galilei, Sidereus Nuncius, or The Sidereal Mesenger, trans. Albert Van Helden 2nd edition, pp. 297~298). 모든 망원경 중에서 그것만이 특별한 현장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또 그것만이 단순한 망원경이 아닌 전령nuncius이었다. - P286287
갈릴레오는 두 가지 방법을 번갈아 사용했다. 메디치가를 곤혹스럽게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얻을 수 있는 밑천을 활용해 외부의 신뢰를 확보했고, 그렇게 끌어낸 동의를 활용해 메디치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자신의 발견을 그들의 이미지와 연결했다. 이 과정이 끝날 무렵 갈릴레오는 서서히 자신의 마차를 메디치가에 동여맸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의 권력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몇 달이 지나 철학자 겸 수학자가 된 갈릴레오는 메디치의 영광을 누리는 공식 대사로서 로마로 향할 수 있었고, 그의 발견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였던 교황의 지지를 받았다. 대공이 갈릴레오의 로마 방문을 승인했음을 알리는 빈타의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갈릴레오의 발견과 메디치 가문 이미지의 공생관계는 마침내 확립되었다. - P294
한편 갈릴레오 같은 대학의 수학자들은 그들과 철학자 간의 지위 격차에 맞닥뜨린 상태였다. 앞서 살펴보았듯, 지위의 격차는 수학을 도구로 활용해 자연현상의 물리적 차원을 연구하는 실천의 정당성을 격하시켰다. 따라서 장인들이 군주의 권력 신화를 회화와 조각과 건축으로 표현하여 아카데미 예술가가 되는 데 성공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을 메디치 가문의 상징으로 표현하여 수학자에서 철학자로 변모했다. 궁정은 과학 아카데미는 아니었지만, 사회적 정당성을 제공하여 ‘철학자로 변모한 수학자들‘이 신뢰를 구축하는 데 기여한 기관이었다. 분과학문 간의 위계와 기존의 사회기관 그리고 사회문화적 변화의 패턴을 고려하면, 갈릴레오에게 가장 유망한 선택지는 바로 궁정이었다. 비록 문제가 있는 선택지였지만 말이다. - P330
갈릴레오가 궁정의 기존 분류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사회직업적 정체성이 새로운 종류였다는 의미이다. 당시에는 그에게 부합할 만한 범주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메디치 궁정에서 갈릴레오가 경험한 것과 같은 특권적 주변성은 새롭고도 유례없는 사회직업적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시도에서 필수적인 단계였다. 그는 대학의 수학자는 물론이고 군주의 별점에 쓸 천문표를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궁정수학자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피렌체에서 확보한 궁정직은 두 가지 전문직업적 정체성의 이점을 전부 가지면서도 그것들의 많은 결점은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피렌체의 명예 궁정인이었다. 특권이 있으면서도 아직 확립되지 않은 사회직업적 공간이 갈릴레오의 활동 영역이었다. - P336337
르네 데카르트는 갈릴레오가 정연하고 일관된 사고를 하는 철학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듯하지만(오늘날 몇몇 역사학자와 과학철학자도 그의 평가에 동조한다) 갈릴레오의 연구가 체계적이지 않았던 것은 그의 지적 태도보다는 궁정의 보상 체계 탓이었을 수 있다. 갈릴레오가 활동한 궁정의 환경을 고려하여 나는 그의 과학이 ‘상연적performative‘이었다고 말하겠다. - P344
갈릴레오가 그러한 태도를 사적인 메모나 옹호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만 보였다는 사실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원인과 자신의 탐구 범위를 넘어서는 원인을 구분하는 태도가 권력의 표현이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갈릴레오 자신도 소유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던 권력이었다. - P424425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수학자가 물리적 성질을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을 용인하지 않았고, 만일 그러한 탐구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분과학문 간에 확립된 위계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갈릴레오의 가정과 물리적 원리가 틀렸거나, 실제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틀렸다고 할 때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적 범주에 맞지 않음을 지적했다. - P433
《대화》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희생시켜 웃음을 유발하는 일종의 내부자 농담insider’s joke이었다. 갈릴레오에게(혹은 그의 논쟁 방식에 반영된 문화에) 이미 동조적인 독자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그레도나 살비아티와 동일시하는 독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비웃게 하는 기능이었다. 《대화》는 비록 제목은 ‘대화‘였으나 사실 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타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
•18 《대화》를 읽은 후 캄파넬라는 갈릴레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심플리치우스[심플리치오]는 철학적 회극의 웃음거리로군요. 그 남자는 그들 학파의 어리석음, 말하는 방식, 비일관성, 고집스러운 태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 P453
철학자들이 수학적 가설의 물리적 실재성에 대한 수학자들의 주장을 사전에 일축한 것은 두 분과학문 간에 발전적인 대화가 단절되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철학자들은 수학자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활동하던 당시의 위계적 환경을 고려하면, 철학자들은 수학자들의 언어를 배우거나 그들의 물리적 원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 P465466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수학자들에게 정합적인 천문학뿐만 아니라 더욱 긴밀하게 통일된 강력한 사회직업적 정체성까지 모두 발달시킬 수 있는 ‘교리‘를 제공함으로써 이 모든 상황을 바꿔 주겠다고 약속했다. 태양중심설은 우주에는 정합성을, 천문학자들에게는 전문직업적 결속력을 가져다주었다.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철학자로 여기며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반면 프톨레마이오스주의자들은 그럴 수 없었다. - P471
철학자들은 수학적 무지에 대한 갈릴레오의 공격에 매우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그들은 그 공격에 답하려 시도함으로써 그것을 문제로 삼아 버리는 상황을 꺼렸던 것으로 보인다.• 코레시오는 부양성을 다루는 수학이 너무 단순해서 갈릴레오의 논증을 파악하고 배격하기 위해 수학자가 될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철학자들이 수학에 대한 무능을 인정하기는커녕 수학을 배척하려 했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
•51 코레시오는 그 자신이나 동료들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적 역량을 옹호했다. "그 당시에는 철학 학생들이 수학적 학문들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며, 그 학문들을 먼저 공부하기 전까지 논리학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누구보다 플라톤의 제자들이 그러했다. 그렇다면 플라톤에게 최고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에 대한 지식 없이 [플라톤의 학교에] 발을 들었을 수 있었다고 어느 누가 믿겠는가?" - P476477
요컨대 수학자들은 계속 퍼즐을 풀면서 전통적인 수학의 경계 내부에 남아 있거나, 갈릴레오처럼 철학자들의 영역으로 이어지는 퍼즐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었다. 갈릴레오가 점진적으로 코페르니쿠스주의에 헌신하게 된 데에는 그의 독특한 사회적 위치와 배경과 계층 이동, 그리고 그에 따라 부여된 정체성에 관한 인식이 영향을 미쳤다. 코페르니쿠스 본인에게도 비슷한 고찰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P490
도덕주의는 공약불가능성이 출현했음을 알리는 징후였다. - P493
서로 다른 우주론 및 사회적 기관/제도와 연관된 근본적으로 다른 두 사회직업적 문화가 부양성이라는 사소한 문제 뒤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철학자들이 수학을 배워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에 담긴 함의를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수학을 배운다는 것, 또는 수학을 자연에 대한 물리적 설명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원래는 종속적이었으나 이제 외부의 침입자로 변한 ‘타자‘의 언어를 학습한다는 뜻이었다. 이 결정에 수반되는 제도적·권력적 측면을 고려하면,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자멸을 권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P496
원론적으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자들이 보기에 기구의 사용과 그로부터 얻은 증거에 대한 믿음은 물리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수학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낯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 이론으로는 망원경의 작동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을뿐더러, 증거를 만드는 기계라는 관념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양립하지 않았다. (체사레) 크레모니니Cesare Cremonini가 망원경을 들여다보기를 거부하고 1613년 출간한 《하늘에 대한 논쟁Disputatio de coelo》에서 갈릴레오의 발견을 언급하지 않은 것(그리고 피사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갈릴레오의 물리적 원리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수학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못하도록 한 것과 똑같은 정체성 유지 동역학이 작동한 결과였다. 갈릴레오가 제안한 것(그리고 그들을 위험한 것)은 단순한 부양성 이론과 망원경이 아닌 새로운 철학적 ‘삶의 형식‘이었다. - P494
결과적으로 이중언어를 단순히 언어의 개념으로만 본다면 지적·전문직업적 선택의 바탕에 놓인 정체성 형성과 유지의 동역학을 간과하게 된다. 더 나아가 ‘타자‘의 언어를 학습하는 것의 함의가 반드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직면한 것만큼 극단적이란 법은 없더라도, 타자‘의 언어를 학습하는 것이 또다른 사회직업적 정체성의 수용을 의미한다면 이중언어자가 된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정신분열증‘을 겪는 셈이다. 다른 비유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두 가지 다른 시각으로 동시에 같은 대상을 본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그저 분산된 관점을 갖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비소통적 행동은 공약불가능성의 필연적 원인은 아니지만(공약불가능성을 산출하는 본질적인 원인은 없다) 어휘 구조를 심화하는 집단의 결속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공약불가능성의 출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소통불가능성과 공약불가능성의 관계는 (양쪽 방향 모두) 인과적이지 않지만 과학적 변화의 기반이 되는 새로운 사회직업적 정체성의 심화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 P508509
로마에서는 권력과 상관없이 모두가 세입자(혹은 단기 소유자)였다. 가톨릭교회는 성서와 그 해석에 기초한 강력한 문화적 전통을 가졌지만, 그러한 전통이 로마 궁정 문화의 구체적인 표현을 결정하지는 못했으며 주로 교황의 특정한 취향과 개성이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추기경의 궁정 문화는 종교적 전통이 중심을 이루지 않았으며, 그 궁정은 대체로 신학적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 궁정의 담론에는 종교적·세속적 요소만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신화 또한 복잡하고 변화무쌍하게 섞여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의 궁정에는 교황 통치의 모호성, 즉 종교적인 동시에 세속적인 모호성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 P544545
로마의 권력이 전개되는 상황의 변동성, 군주가 관리하는 문화적 거대서사의 부재, 바로크의 중심지 로마에서 발견되는 특유한 절충주의와 문학적 재치 그리고 덧없음에 대한 감각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적 절충주의는 절대주의 담론(그리고 국가이성raison d‘état의 원칙과 나란히 맞물린 중립적 문화)과 공생했기 때문에 모든 바로크 궁정의 특징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그러한 문화적 상황이 로마의 독특한 특징인 ‘거대서사와 비교적 안정된 문화적 틀의 부재‘로 인해 극단으로 치달았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로마의 궁정인들은 복잡하고 일관된 프로그램이나 철학 체계보다는 고유성을 가진 ‘문화적 보석들cultural gems‘을 높이 평가했는데, 이는 그들 자신의 정체성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공한 궁정인들은 그 자체로 ‘보석‘과 같았다. - P549
체제 중심의 정신‘이 로마의 문화에 이질적이었다면, 이는 궁정인들의 삶과 경력 그리고 정체성에 스며들어 있던 특유의 우연성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가 바로크라고 부르는 것이 로마에서 가장 안성맞춤인 장소를 발견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 P549550
아카데미 문화의 간단명료함compendiosità이란 궁정인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을 습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편리한 교훈 모음집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아고스티노) 마스카르디Agostino Mascardi는 야간 경영대학원 과정을 제안한 것이 아니다. 간단명료함은 얕은 지식이 아닌 풍부하고 다채로운 ‘보석‘ 수집품들로 구성된 지식을 의미했다. 아카데미 문화는 뮤즈의 정원에서 엄선해 만든 향기로운 꽃다발이었다. 궁정인은 정원을 무심하게 거닐면서도 꽃을 모을 수 있었다. 아카데미 문화는 또한 규칙 맹종과 대척점에 있었다. 그것은 자칭 철학자인 따분한 전문가들에게 오랜 교과과정을 거치며 배우는 문화가 아니었다. 사적인 경로"를 걸으며 "위대한 영혼들"(마스카르디는 여기에 자신을 포함했다)로부터 개인적으로(거의 내밀하게) 직접 흡수하는 것이었다. 수 세기 동안 이어진 교수들의 겉치레는 ‘싸구려‘로 거부되었다. "위대한 영혼들"(실질적으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아는 자들)은 어떠한 중개 없이도 로마 궁정인들에게 지식의 정수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전달되는 것은 전문 기술이 아닌 덕이었다. - P552553
《시금자》가 인쇄되는 동안 중차대한 후원 사건이 맞물려 오고 있었다. 갈릴레오의 좋은 지지자였던 마페오 바르베리니는 우르바노 8세로 성좌에 올랐다(마페오는 3년 전 〈위험한 찬양Adulatio Perniciosa〉이라는 시를 갈릴레오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76 〈위험한 찬양〉에서 마페오 바르베리니는 메디치의 별, 토성의 특이한 외관, 태양 흑점을 발견한 갈릴레오를 칭송했다. 마페오는 시를 첨부한 편지에 "형제로서como fratello"라고 서명했는데, 이는 추기경을 일컫는 비격식적 칭호로는 드물게 사용된 것이었다(GO, vol. 13, no.1479, p. 49). - P605
로마 최고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린체이 아카데미의 설립자인) (페데리코) 체시는 마지못해 궁정인이 되었다. 이른바 모든 로마 남작(오르시니, 콜론나, 사벨리, 체사리니, 콘티 등 소수의 최고 귀족 가문)과 마찬가지로 채시가문은 궁정의 사치스러운 생활양식으로 인해 서서히 파산해 갔다.• 정치적 절대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흔히 목격되듯이,로마의 귀족들은 정치적 권력이 쇠퇴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쓸모는 없지만 그럴듯한 작위를 받았다. 예를 들어 체시는 젊은 시절 산 폴로 및 산트 안젤로의 군주였으며 아콰스파르타의 공작이자 몬티첼리의 후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소들은 대부 분 인상적인 명칭만 그럴듯하게 붙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의 남작들은 정치권력이 거의 없었으며, (덜 고귀하더라도 훨씬 부유한) 새로운 교황 가문과 혼약을 맺거나 그들 가문에서 추기경을 거듭 배출해 체면치레에 필요한 특권을 얻음으로써 사회적으로 살아남았다.••
•83 대체로 체시 가문은 체사리니 가문과 함께 로마 남작의 두 번째 계층에 속했다(첫 번째 계층에는 콜론나, 오르시니, 사벨리, 콘티와 같은 가장 유서 깊은 가운들이 포함되었다). 로마 남작 계급의 재정적 쇠퇴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중략) 엔리코 스툼포Enrico Stumpo는 이렇게 말했다. "콜론나와 오르시니, 체사리니, 카에타니와 같은 영향력 큰 가문들이 관련되어 있었지만, 그들 가운은 이미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해 있었으므로 그들이 보유한 ‘자금원monte‘의 자산은 작위 시장에서 성공을 가져다주기에 충분치 않았다. 그들은 영지에서 상당한 수입을 얻긴 했으나 당시 로마에서 필요했던 매우 높은 생활 수준을 충족하고 유지하기에는 부족했다. 그것은 많은 교황의 자비가 없이는 보장받지 못할 수준이었다." (중략) 이런 쇠퇴를 동시대인들 또한 분명하게 감지했다. 트라이아노 보칼리니는 "사이프러스처럼 높이 자랐던 양귀비들"은 "초라하고 천박한 난쟁이 같은 제비꽃"이 되어 버렸다고 비꼬았다. (하략)
••85 예컨대 체시가 겪은 재정적 곤경은 추기경이었던 그의 삼촌 바르톨로메오가 1621년에 사망하자 더 심각해졌음이 분명하다. 바르톨로메오는 체시 가문의 부채를 갚을 자금원을 마련하고 갱신할 권한을 얻은 참이었다. 삼촌이 사망한 후 페데리코는 카에타니 가문 소속의 두 추기경을 이용하기 위해 빠르게 조치를 취했다(페데리코의 조모는 베아트리체 카에타니Beatrice Caetani였다). (하략) - P610611
갈릴레오는 《시금자》에서 사변적인 궁정 자유사상가라는 의미의 철학자를 자청했으나 《대화》에서는 우주의 물리적 구조를 연구하고 그에 관한 주장을 펼치는 ‘철학적 천문학자‘로 돌아가길 원했다. - P651
그 특유의 권력 주기로 인해 로마는 이례적인 지위 상승, 적극적인 가신들, 눈에 띄는 지출, 막대한 후원이 대표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은 공간이 되었다. 혈통이 사회적 신분과 경력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이었던 사회역사적 시기에 로마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사회적 정체성도 정당화할 수 있는 ‘카니발적‘ 장소였다. 마페오 바르베리니 같은 민간 신사들도 교황이 될 수 있었고, 갈릴레오 같은 수학자들도 철학자나 신학자를 대신할 수 있었다. - P664
로마는 고위험 고수익 내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으며, 자기형성을 위한 매우 유력한 선택지가 있는 곳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로마는 매우 보수적인 기관이 자리 잡은 곳이었으나 동시에 (그 틀 안에서) 변화와 새로움이 (로마의 틀로 볼 때) 당연시되던 곳이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잘못된 판단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고 위험으로 치닫는 공간이기도 했다. - P676
궁정사회의 이러한 이미지는 권력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비교적 넓거나 권력의 형태와 중심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근대와는 달리 어떤 유형의 권력이든 그 유일한 원천은 오직 군주임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권력 구조로 인해 궁정사회의 경쟁은 독특한 양상을 띠었다. 궁정인은 성공이 아닌 은총, 즉 연봉이나 학술지 인용 횟수로는 측정되지 않는 목표를 추구했다. 은총은 군주가 가신을 총애한 결과였다. 궁정인이 정상에 오를수록 그의 경력은 군주와 맺은 친족 관계의 한 형태로 간주되었고 심지어 시적으로는 배타적인 연인 관계로 표현되기도 했다. (마테오) 펠레그리니Matteo Pellegrini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주를] 사랑하는 두 사람은 사랑받는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없다. 총애의 옥좌는 두 명을 위한 공간이 없다."
몰락의 즉시성은 군주의 총애를 잃은 궁정인과의 관계를 주변의 모든 사람이 끊어 버린 결과이기도 했다. 운명의 여신 또한 과거에 보살폈던 이가 바치는 공물을 더 이상 받지 않았다. "(전략)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을 때조차 운명의 여신은 견고하지 않았다." - P687
갈릴레오와 마페오 바르베리니의 관계는 독립적이고 서로 경쟁하지 않으며 각자 매우 출세한 두 개인의 관계였다. 둘 다 1623년 무렵 경력의 정점에 올랐다. 우르바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이자 마이케나스였고, 갈릴레오는 문화계에서 가장 돋보이던 유명인이었다. 마페오가 보기에 둘의 관계는 서로 다른 지위와 활동 영역의 간격을 메우는 사적인 친족 관계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군주와 총신의 관계와도 비슷했다. 총신들은 반드시 전문 궁정인일 필요도 없었고, 정치권에서 나타 날 필요도 없었다. 또 특별히 빼어난 배경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매우 예외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법에 해당할 규칙을 무시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총신은 궁정 분류 체계의 예외 사례가 제도화된 존재였다. 중요한 것은 군주와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관계였다. - P697
나의 의도는 궁정인의 물락과 갈릴레오의 재판을 엄밀히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두 사건의 유사성을 발견법적 도구로 삼아 기존의 해석이 재판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후원 의존적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앞으로의 분석은 총신의 몰락에 존재하는 두 가지 차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첫 번째 차원은 군주가 한때 긴밀했던 가신의 제거를 정당화하기 위해 배신이라는 수사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차원은, 군주의 권력이 절대적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총신의 몰락 또한 반드시 절대적인 것, 즉 끔찍하고 돌이킬 수 없으며 매우 확고하게 결정된 것으로 보여야 했다는 점이다. - P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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