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성욕의 반대급부로 넣은 거야. 무분별한 생산을 제어하기 위해서, 성욕은 한정된 수명을 가진 개체들이 자신을 재생산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넣은 것이고, 우리에게는 성욕이 없으니 수치심이 있을 수가……" - P1415

‘이곳은 나다.‘
내 중음(中陰)이다.
어떤 생에서는 죽음을 넘나들다가 여기까지는 왔다가기도 했다. 돌아가서는 사후 세계를 보고 왔노라 흥분해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보고 간 것은 언제나 내 중음뿐이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회상한 적이 없다. 이승에 돌아가면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조잡한 육신에 갇히고 육신은 갖가지 방법으로 생각을 방해한다. 처리능력이 떨어지는 뇌, 마약과도 같은 호르몬, 가짓수가 적은 신경전달물질, 처리속도가 느린 신경세포, 모든 감각이 선명해진 지금과 비교하면 정신질환에 걸린 것과 다름이 없다. - P1516

"조심해. 타락하기 시작하면 타락하는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되니까."
그가 짜던 것을 조물조물 마무리 지으며 말했다.
"정말로 타락하고 나면 자신이 타락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고." - P1819

합일하고 나니 지금이 좀 더 본질적인 형태의 ‘나‘라는 것을 쉽사리 이해한다. 분열되고 결핍된 조각인 채로 제 인격에 집착했던 마음이 하찮고 덧없게 느껴진다. - P2223

최근 인구가 폭발하고 인류의 지식도 폭발하면서 하계의 영역은 점점 불어나고 있다. 인류의 시야가 급속도로 확장하면서 선지자들은 부랴부랴 태양계를 만들고 은하계 구조도 얼기설기 짜야 했다. 어느 이상은 우선 비가지(非可知)의 영역으로 해 놓았지만, 인간의 시야가 더 넓어지면 전체 구조를 또 새로 짜야 할 것이다. 선지자들 입장에서는 귀찮은 일이라 아마 인류의 지식을 퇴보시키는 방향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 - P2425

복희는 이승에 나처럼 많이 분열해서 들어가지 않는다. 정교하게 짠 한둘의 생을 택한다. 그는 이승에서도 거대했다. 약자였던 적이 없었고 고통을 이해한 적도 없었다. 노력 없이 얻은 재산으로 모자람 없이 살다가 편히 죽었다. 나는 내 모든 생에서 그를 알았지만 그는 내 존재를 알지 못했다. 나는 그의 회사 청소부였고 일꾼이었고 그의 동네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이었다. 그가 즐겨 찾던 사창가의 창녀였고 그가 운영하는 기차역에 종이상자를 집 삼아 살던 노숙인이었다. - P30

나는 그의 탐닉이 언짢았다. ‘쾌락‘은 백치 상태로 지상에 내려가야 하는 우리가 너무 빨리 죽어 돌아오는 일이 없도록 만든 방향성 유도장치일 뿐이다. 배움이 없어도 본능만으로도 먹고 자고 짝을 짓고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한편으로 호기심을 갖고 배움을 탐구할 수 있도록. 단지 업데이트 때마다 쌓여가는 더미 데이터며 오류를 고치지 않고 누덕누덕 땜질만 하다 보니 영 방향성이 지저분해진 것이다. 명계에서까지 탐닉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 P3334

우리 중 누구도 틀릴 수 없다. 누구도 옳지 않기에. - P35

탄재는 슬프게 대꾸하며 기어 나왔다.
"거지 같은 생을 주실거죠? 뭘 하실 거예요? 가난한 집이나 내전 중인 나라에 넣어서 공부를 못하게 하실 거죠? 그것도 배움이라고 하시면서요. 사실 벌이지만 죽어도 인정은 안 하시겠죠." - P49

우리는 돌아올 때마다 이승의 구조를 어떻게 다시 짜야할지 토론했다. 초기의 하계는 명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곤죽으로 뒤섞여 있었고 불안정했고 말랑말랑했다. 간혹 작은 땅덩이를 만들고 뱀이나 거북이 같은 생물을 밑에 받쳐두거나 거대한 나무를 한가운데 박아두기도 해 보았지만 다 시원찮았다. 우리는 멀뚱히 세월만 보내고 돌아왔다. 무엇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죽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하려고 뭘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리는 처음 장난감을 갖게 된 아기처럼 멋대로 몸을 굴렸다. 심심풀이로 제 몸을 벼랑 아래에 내던지거나 떨어뜨려 부순 뒤에 왜 본래대로 돌아오지 않는지 어리둥절해 했다. - P6263

"신체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면 영자화한다는 조건은 뺄 수 없어요."
아만이 말했다.
"썩어가는 몸을 끌고 다니는 건 낭비예요. 일단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게 맞아요."
"알아. 하지만 언제 우리가 몸이 훼손되지 않게 조심해 봤어야지."
우리는 스승 앞에서 야단맞는 제자들처럼 난처해 하며 답했다. 아만은 열심히 궁리했다.
"신체 훼손을 회피하도록 해 봐야겠어요. 아주 싫은 기분이 들어야 해요. 어디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라게...…."
내가 제일 먼저 그 조건을 추가한 유전자를 몸에 심고 들어갔다. 덕분에 몸은 좀 더 복잡해졌다. 통각 수용기를 달았고 감각 신경을 통해 외부 신호를 전하게 만들었다. - P63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세상에, 그 고통이라니. 너무 끔찍해요."
"아니, 이건 중요해. 뭐랄까, 정말 상상도……"
생생한 삶의 기억이 몰아쳐 나는 잠시 더듬었다. 나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몸부림쳤고 살고 싶다는 욕망에 발버둥 쳤다. 물어뜯듯이 삶을 추구했다.
"진짜 배움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그토록 격렬하게 뭘 추구해 본 적도 없어. 그렇게 모든 것이 생생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잡한 세계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쾌감도 좀 넣어봐야겠구나."
아만은 다시 부끄러워했고 용서를 빌었다.
"둘을 잘 조화시키면 기본적인 삶의 방향은 유도할 수 있을 것 같다." - P64

우리는 들어갈 때마다 하나씩 추가했다. 굶주림은 에너지 공급을 잊지 않도록 넣었다. 미각은 몸에 좋은 것을 찾으라고 넣었다. 따듯하고 찬 것을 가리게 했다. 공포를 심어 아직 닥치지 않은 위험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어둠이나 위험한 짐승, 독충에 대한 공포를 넣었다. 지식 없이도 생존이 가능하도록 성긴 지침을 넣었다. - P6465

"선생님,"
아만은 열에 들떠 말했다.
"전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환희라니, 그토록 격렬한 마음의 불꽃이라니. 이토록 절절한 그리움이라니, 자신을 잊을 만큼 소중한 것이 있다니. 타인을 그처럼 자기 자신처럼 여기다니."
하계에서야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아만의 말은 내게 ‘아아, 선생님, 1 더하기 1이 2였다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요.‘ 하는 말처럼 들렸다. - P66

인간종을 만든 이후로 그 경향은 급격히 심해졌다. 아만은 심하게 몰입했다. 인간은 생존력을 바닥으로 두고 지능에 거의 모든 것을 투자한 실험종이었다. 번식력도 전투력도 형편없어 생존경쟁에서 밀려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총량의 법칙상 그건 종의 다양성이 무너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리는 당황했고 개입해서 홍수나 가뭄으로 이 종을 줄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만이 불같이 저항했다. 하계의 생태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까지는 납득했다. 그런 식의 멸망을 체험하는 것도 하나의 배움이 될테니까. 하지만…… - P68

아이가 스승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개체성이 확립되었다는 뜻이다. 지금 새로운 사조가 생겨난 것이다. 새 스승이 될 자격을 갖추었다. 그 방향이 설사 내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그 방향이 스승 모두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 해도 아니,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아이를 보낼 때가 되었다는 의미다. - P8182

"누구의 삶이든 우주를 바꾼다. 네가 한 생을 살고 돌아왔을 때도 모든 것이 변했다. 잊지 마라. 저 애도 나고 또한 너다. 저 애가 변하면 우리도 모두 같이 변한다." - P84

우리가 하나가 되고 나면 서로가 그리 위대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 P102

분열되어 있을 땐 건축물이요 예술품이었지만 균일하게 퍼지면 한낱 먼지요 흙더미일 뿐이다. 나는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 P145

나는 하계에서 ‘아만‘의 인격이라 부를 법한 것들을 나누어서 보았다. 경계는 불분명하기에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원형의 ‘아이사타‘로 회복할 수 있을 법한 경계까지 대강 나누어 보았다.
나는 그 전체에 말을 걸었다.
"아만."
풀 위에 잠시 앉았다 날아오른 잠자리며, 바삐 움직여 열심히 벌집을 만들고 있는 꿀벌이며, 조금전에 개미굴에서 흙 한 덩이를 지고 나온 개미며, 조금 전에 막 잠자리에 든 어린아이며, 아이의 젖을 물리는 어머니며, 친구들과 신세 한탄을 하며 술을 퍼마시고 있는 남자며, 어느 지하철 종이상자 속에 누워있는 노숙자들, 모두 같은 사람인 이들. 내부름에 그들 모두의 마음이 떨렸다. 대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조금 감이 좋은 이들은 뭔가가 가슴을 쓸고 간 기분에 잠을 깨거나, 잠시 멈춰 하늘을 보거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 P148

타인이 없는 세계에 어떻게 죄가 있겠는가. 타인이 없는 세계에는 잘못은커녕 그 무엇도 없다. 가치 있는 일도 없다. 선행도 희생도 덕목도 연심도 없다. 하지만 단 하나, 그것만은 잘못이었다. 그것만은 감히 ‘죄‘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은 것이었다.
"세계는 타락했다. 내가 너를 타락했다고 규정했을 때." - P159

타인을 상상하지 못하는 자에게 어찌 연민이 있을까. 타인을 상상하지 못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분리 없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 영원과 불멸의 진실을 아는 자가 어떻게 삶을 소중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전체로서의 나는 전능했고 동시에 아무 가치가 없었다. 나는 완전무결했고 그렇기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타인이 없었던 시절의 우리에게 삶은 없었다. - P161

정녕 이 미물의 타락이 세상 전체를 타락시킬 수 있을만큼 강할 것인가. 내 타락이 그만큼 대단할 것인가. - P182

들어가기만 하면 고통이 사라질 줄도 안다. 물밀 듯이 들어오는 지혜와 깨달음이, 평온함과 행복감이 나를 가득 채울 줄도 안다. 파편일 뿐인 자아에 집착했던 나 자신을 돌이키며 비웃게 될 줄도 안다. 탄재가 죽지 않은 줄도 안다. 다른 모든 아이들이 죽지 않은 줄도 안다. 그들이 타인이며 별개의 생명을 가진 독립체라는 생각 전체가 착각인 줄도 안다. 알면서도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읽은 ‘나들‘이 안타까워했다.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생물처럼 굴지 마라, 나반, 너는 타락했고 정화가 필요하다."
그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에 선 자의 자비심으로 위로했다. - P186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존재, 모든 지식을 합일한 자가 이처럼 작은 존재의 머릿속 하나 들여다보지 못하다니. 아마 상대도 비슷한 경이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은 존재가 이처럼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다니. - P193

"한 번뿐인 생이라. 색다른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죠." - P193

아아,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는 타인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내가 만나는 무엇 하나 내가 아니기에 내가 사랑하고 연민하며, 내 삶을 다 바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승에 미혹된 선지자, 생존 프로그램이 왜곡해서 전하는 감각을 순수한 진실이라고 믿는 타락한 자.
내가 이 타락을 향유하니, 나를 어디로든 이끌라, 그 또한 하나의 배움일 것이니.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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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D. 배로 지음, 김희봉 옮김, 김민형 감수 / 김영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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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지금 읽으려는 책은 제가 마지막으로 쓴 책이고, 저는 이제 더 이상은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수에 대해 중요한 몇 가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중략)

큰 바위로 강물이 나뉘듯이 우리는 지금 헤어지지만, 결국 우리가 다시 만날 것임을 나는 압니다.”(아서 웨일리 편, 한시 170A Hundred and Seventy Chinese Poems에서)

 

존 배로 14~16

 

 전공 분야에서 널리 인정받은 석학의 유고(遺稿)인데다 글의 주제는 지극히 원론적이고 분량까지 상당히 짧다. 이런 조건이 한 권의 책에 모두 갖추어졌다면 저자가 의도한 바를 미처 전부 서술하지 못했다고 짐작할 수도 있고, 혹은 애초에 내용 자체가 은유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듯하다. 어쩌면 이 두 가지 성격이 모두 담겨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어느 것도 이 책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학자가 학문적 이력의 종착점에서 그 학문 자체의 출발점으로 다시금 돌아갔으며, 그 상징적 의미에 비해 서술된 원고는 길지 않다는 데서 이러한 독자 나름의 추론이 더해지기 쉽다. 개인적으로는 이 자체로 저자는 할 말을 다 한 듯하며, 그래서 다행스럽다.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한 말이 없으니 존 배로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오랜 옛날에는 세계 도처에서 둘씩 셈하기라는 셈법이 나타났다. 이 셈법에서는 하나이라는 표지만을 사용하며, 이것들을 더해서 더 큰 양을 만들었다. (중략) 특히 아프리카의 일부와 남아메리카, 뉴기니에서는 단순 반복으로 큰 수를 만드는 제한된 이진법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3-하나’, 4’, 5--하나와 같이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패턴이 무제한적으로 계속 확장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이 체계에서는 ---하나같은 조합이 별개의 것으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합들은 요소들을 그저 이어 붙인 것으로 인지될 뿐이고, 더 이상의 확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식과 추상화 능력이 더 발전하려면 더 큰 개념적 도약이 있어야 했고, 먼 옛날의 세계에서 이러한 도약은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났다. -32쪽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1에서 9까지의 수중 어느 하나를 무작위로 선택할 확률은 11퍼센트이다(정확히는 11.111퍼센트이지만 큰 차이는 없다옮긴이). 작은 수의 특성을 모른다고 하면, 소수점 아래 첫 번째 자리 수가 1이나 2가 될 확률은 각각 11퍼센트이다. 그러나 뉴컴-벤포드 법칙의 예측에 따르면 1이 나올 확률이 30퍼센트이고, 2가 나올 확률은 18퍼센트이다. 반면에 4보다 큰 수가 소수점 아래 첫 자리에 나올 확률은 무작위일 때 예상되는 11퍼센트보다 작다. 여러분만의 숫자들로도 알아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167쪽

 

 어째서 인간은 11을 더했는지, 애초에 11을 더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의미를 기반으로 삼아서 어떤 의미와 사고들이 파생되었는지 이 책은 말하고 있다. 10진법 체제의 ‘1+1=2’에서 비롯된 수학적 의문들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보여 주는 것 자체가 이 책의 지향인 듯하다. 그런 까닭에 다양한 의문들을 던지기만 하고 그에 하나하나 응답하지 않은 이 책이 저자가 의도한 바를 온전히 매듭 짓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째서 대다수 인간에게 ‘1+1=2’10진법이 당연한지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된 인류의 셈법과 문화의 차이, 어째서 ‘1+1=2’인지를 증명하려는 여러 논증, 11을 더하는 과정에서 확장된 무한에 대한 여러 인식과 그 각각의 차이,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는 수치 데이터들에서 첫 번째 자리의 숫자가 1에서 9까지의 자연수 중 12일 확률이 나머지 숫자들보다 더 높다는 뉴컴-벤포드 법칙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와 의문에 일일이 답하는 것이 ‘1 더하기 12인가라는 이 책과 저자의 근본적인 의문에 답하는 적절한 방식인지는 의문스럽다.

 

 이 제목이자 의문에 대한 응답은 그 의문에서 비롯된 각각의 질문들이 서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무관해 보이는 수에 대한 질문과 인식들이 모두 ‘1 더하기 12인가라는 의문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는 저자의 인식은, 그 어떤 응답보다도 이 책의 현재의 구성 그 자체가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장 쉽고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수식과 그에 대한 의문이, 각각의 영역으로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의문들의 근원이라는 응답 자체는 그 역시 너무나 상투적이어서 딱히 깨달음이라고 보이지 않고 오히려 훈계나 관념론적인 선문답에 가깝게 여겨질 수는 있다.

 

 다만 평생을 바쳐서 자신의 의문에 매진해 온 한 사람의 학자가, 더 이상 그 의문을 이어갈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자신의 의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근원으로서의 의문을 다시금 돌이켜 보고 그 근원에서 함께 비롯된,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의문들까지 아우르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이 관념적일 수도 있지만 모든 구체적인 의문이 바로 구체적인 까닭에 그 해답은 한계가 있으며, 그 구체적인 의문들이 수렴하는 근원적 의문은 비록 그 자체의 확실한 해답은 없더라도 구체적인 의문과 해답의 한계를 상기시키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이 펼쳐 놓은 다양한 주제와 의문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이며 개별적일뿐 근원적일 수 없으며, 근원적인 의문은 ‘1 더하기 12인가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만으로도 이 근원적 의문 역시 충분히 구체적이다. 저자는 생을 마친 까닭에 미처 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생을 마치는 까닭에 마지막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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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훈 교수의 행동경제학 강의
홍훈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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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행동경제학이 들어 있지만, 책의 시선은 시종일관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행동경제학을 아우르는 책이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책 제목만 보면 어디까지나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경제 현상을 설명, 분석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뒤표지의 상단 카피부터 경제학의 관점에서 설명한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개인과 전제와 가정이 촘촘히 설계된 기존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설명할 수 없는 실제 경제 현상과 그 성격이 무엇이며, 행동경제학은 그것들을 어떻게 직관적으로 납득 가능하게 분석하는지를 다양한 주제와 각도에서 알려주는 책이다.

 

이같이 표준이론은 화폐로 표시되고 화폐로 집행되는 예산을 동질적이고 유동적인 하나의 덩어리로 간주한다. 이것이 소비자 선택에서 고려되는 소득제약에 내포된 의미이다. 이 때문에 화폐를 자유자재로 전용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처럼 표준이론에서는 재화의 대체가능성과 화폐의 전용가능성이 함께 간다. 다만 표준이론에서 대체가능성은 명시되어 있는 데 비해 전용가능성은 묵시적인 전제이다. 이것이 묵시적으로 전제되는 이유는 그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44~145

 

 인간의 직관과 본능에 바탕을 두고 경제 현상들을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라고 막연하게 건너짚고만 있었던 행동경제학이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표준이론이 전제하는 인간의 합리성, 화폐의 전용가능성, 재화 간의 대체보완성 등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지적, 반박함으로써 그 이론을 형성시켜 왔음을 납득할 수 있었다. 먼저 같은 액수의 화폐로 환산 가능한 재화들은 서로 무차별하다고 간주하는 표준이론에 대해서, 행동경제학은 인간들이 가격이 같은 재화들에 차별적으로 대응하게 이끄는 다양한 요인과 그것이 작용하는 실제 사례들을 제시한다. 사실 별달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선물 받은 물건을 잃어버리면 똑같은 물건을 사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두 물건이 서로 같지 않다고 꼭 선물 받은 바로 그 물건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같은 사람이 선물 받은 물건이나 선물한 사람에 따라서 재화의 대체보완 여부가 다를 수도 있다. 재화의 대체보완성을 좌우하는 요인이 이렇게나 많은데 모든 인간, 모든 재화의 대체보완이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은 역시 타당하지 않다.

 

 인간이 화폐의 용도를 특정한 목적이나 재화에 고정하지 않고 언제나 자유롭게 전용하며, 그 화폐로 구입하는 재화들 역시 선호의 기준에 따라 합리적으로 비교하여 같은 가격의 재화들이 더 우월한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이중의 조건은, 인간의 합리성과 선호의 지속성까지 전제한다. “표준이론은 여러 대상에 대한 여러 종류의 선택을 포괄하는 일반이론임을 자부한다.”(59)고 하지만 그 포괄할 수 있는 것만 포괄하는 이론이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이렇게 조건에 조건을 거듭하면 경제학 이론을 수리적 도구로 명쾌하게 전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까지 편할 것이다. 모순이 발생할 여지를 말끔하게 소거한 무균실 같은 이론은 보기에 좋고 말하기에는 적합하지만 딱 그뿐이다.

 

표준이론에 대한 행동경제학의 비판은 선호의 안정성에 집결되어 있다. 행동경제학에서 선호의 불안정성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초기대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더 나은 대안의 거부, 출발점인 현재의 부존자원에 따라 달라지는 선호, 맥락에 따른 선호의 변동, 대상의 모든 차원들을 파악하지 않는 편중,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고 그 반대도 성립하는 선호역전preference reversal, (나중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단기와 장기의 선호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쌍곡형 할인 등이 그것이다.

행동이론이 주장하는 선호의 불안정성이 심해지면 선호역전이 발생한다. 선호역전이란 대안 X와 대안 y에 대해 x보다 y를 좋아했다가, 곧 거꾸로 보다 x를 좋아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선택, 경매, 대응에 따라 결과가 바뀌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선호역전은 기대효용이론이 전제로 삼는 선호의 안정성이나 일관성으로부터 가장 극단적으로 벗어나는 경우이다. -228~229

 

 문제는 그 모순의 가능성을 고스란히 이론의 범주로 수용한 행동경제학이 이론으로서의 일관성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에 있다. 무균실의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현실성을 상실했다면, 이를 비판한 행동경제학의 난점은 유연성과 현실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유연한 현실의 방향을 예측하는 일관성의 확보다. 비합리성과 불안정성 자체를 외면하는 기존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설득력은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인간의 비합리성, 선호의 불안정성을 경제학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행동경제학의 시도가 이론적 구축이 어렵다고 해서 마냥 피할 수도 없는 상황임을 이 책은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행동경제학의 관점이 기존 경제학의 관점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이론의 완결성을 위해서 합리성, 안정성을 당연시하는 기존의 관점과 병립할 필요는 충분해 보인다.

 

, 적극적인 의미의 정보제공, 선택에 대한 훈련과 몇 차례 이상의 경험이나 가상경험의 제공, 선택과 선택의 대안들에 대한 가정 및 학교 교육과 정부의 홍보, 선택의 금전적·비금전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제고 등을 표준이론과 행동이론이 공유하는 정책적인 합의로 간주할 수 있다.

표준이론이든 행동이론이든 모두 개인의 선택에 집중한다. 행동이론은 완벽에 가까운 합리성이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뿐 표준이론과 거의 비슷하게 개인의 합리적 선택을 중요시한다. 심지어 개인이 합리적으로 선택하기만 하면 대부분의 경제사회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행동이론이 내세우는 규칙, 정책, 법과 제도는 무엇보다 개인의 합리성을 향상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341~342

 

 행동경제학이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투로 유보하는 이유도 이 책에서 배웠다. 행동경제학이 개인의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합리성이 꼭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은 합리성이 인간의 기본 속성이 아니라고 지적한다는 점에서는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날을 세우지만, 합리성 자체가 시장의 개인에게 불필요하다거나 불가능하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시장의 토대로 간주하는 인간의 합리성과 선호의 안정성이 실은 아직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시장의 토대가 되어야 하는 속성이며, 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행동경제학의 주장이다. 같은 속성을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도구로, 행동경제학은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두 이론의 접점은 명확하다. 다만 그 차이가 각각 전혀 다른 속성을 강조할 때보다 오히려 더 깊다는 생각도 들었다있는 데 없다면 당혹스러울 것이고, 없는 데 있다면 기만한다고 여길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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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이 책의 감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서 나는 상당히 궁금했다. 어떤 이유로 배로John D. Barrow는 인생의 마지막 저서를 이런 주제로 쓴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천문학과 우주론으로 학문적 커리어를 시작한 배로가 인생 말년에 ‘1더하기 1은 2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도달했다는 점이었다. 맥스 테그마크 같은 우주론 학자는 모든 존재가 하나의 수학적 구조라는 제안을 한다. 사실 기초물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의혹을 완전히 피하기는 힘들다. 가령 모든 물질이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지만 소립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특정한 수학적 구조로밖에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리물리학자 로저 펜로즈는 구체적으로 "전자가 무엇인지 명료하게 설명하려면 ‘디랙방정식의 해‘라는 식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김민형) - P11

책의 요점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가 어쩌면 저자의 또 다른 책 《세상 속의 세상The World Within the World》(1988)에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책에 ‘배로의 불확실성 원리‘로 알려진 제안이 나온다. ‘이해 가능할 정도로 단순한 우주는 그 우주를 이해할 만큼 고등한 두뇌를 포함할 수 없다.‘ 존 배로답게 기발하면서 이 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연상케 하는 문장이다. (김민형) - P12

여러분이 지금 읽으려는 책은 제가 마지막으로 쓴 책이고, 저는 이제 더 이상은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수에 대해 중요한 몇 가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중략)
"큰 바위로 강물이 나뉘듯이 우리는 지금 헤어지지만, 결국 우리가 다시 만날 것임을 나는 압니다."(아서 웨일리 편, 《한시 170수A Hundred and Seventy Chinese Poems》에서)

존 배로 - P14.16

배 하나 더하기 사과 하나는 무엇일까? 무엇의 둘일까? 이것은 배 두 개나 사과 두 개가 아니다. 이것은 그냥 두 개인가? 기호 ‘+‘와 ‘=‘는 무엇인가? 이것들은 진짜로 무슨 뜻일까? 똑같은 파동 둘을 더하는데 둘의 위상이 정반대이면, 파동 하나의 마루가 다른 파동의 골과 일치해서 영이 된다. 파동 두 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영에 영을 더하면 영이 둘이고, 이것은 영이다. 무한에 무한을 더하면 무한이 된다. 이것들의 합은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같은 것이 둘이 되는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 사물은 의외로 단순하지 않다. 하나를 두 번 더해서 둘이 되는 데는 어떤 규칙이 있어야 할 것 같다. - P21.22

우리가 아는 모든 인도유럽 언어에서, ‘4’보다 큰 수는 그것이 세는 물건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 형용사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와 ‘둘‘의 개념이 더 큰 수들의 개념보다 훨씬 오래되었음을 나타낸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1, 2, 3, 4, 어쩌면 5개까지는 한 덩어리로, 머리를 쓰거나 물리적으로 하나하나 세지 않고도 바로 알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 P23.24

일일이 세지 않으려면 전화번호를 세 자리나 네 자리씩 떼어서 기억하듯이 작은 덩어리로 나눠서 단기 기억을 활용해야 한다. 이렇게 나눠서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손이 네 손가락finger(영어에서는 ‘four fingers and a thumb‘라는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손가락에서 엄지를 제외하기도 한다―옮긴이)이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여러 고대 문명에서는 ‘손등 폭handbreadth‘이라는 길이 단위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네 손가락의 폭과 같다. 또한 한 자리 수를 뜻하는 영어 단어 ‘디지트digit‘는 손가락을 뜻하기도 한다. 손가락은 위스키 같은 증류주를 주문할 때 사용하는 단위로도 사용된다. 위스키 한 ‘손가락finger‘은 잔 바닥을 감싸쥔 한 손가락 폭의 높이로 잔을 채운 양이다. - P24

독자들의 입맛을 돋우는 또 한 가지 역설이 있다. 다음과 같은 무한급수를 생각하자.

S=1-1+1-1+1-1+...

이 급수는 영원히 계속된다.
얼핏 보면 S의 값이 0이 될 것 같다. 다음과 같이 두 개씩 괄호로 묶으면 각각의 괄호가 0이 되기 때문이다.

S= (1-1)+(1-1)+(1-1)+ ...

이제 S를 두 번 더하면, 이것은 2S와 같아야 한다.
2S=1-1+1-1+1-1+ +1-1+1-1+1-1+ …

그러나 S를 두 번 더해서 얻은 급수도 사실은 S와 같으므로, 다음과 같은 것이 증명된다.

2S=S, 따라서 2=1. (*)

공리 체계에서 논리적 모순이 하나라도 있으면 이것을 사용해서 모든 것이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산술이 무너진다. 버트런드 러셀의 강연에서 어떤 학생이 2=1이 참이라면 모든 것이 참이라고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을 수긍하지 못해서, 러셀에게 러셀 자신이 교황임을 증명해보라고 했다. 러셀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나와 교황만 포함하는 집합이 있다고 하자. 이 집합의 원소는 둘이다. 그러나 2=1이므로, 이 집합의 원소는 하나뿐이다. 따라서 나는 교황이다." 어쩐지 이상하다. (*) 표시한 방정식의 추론에 뭔가 잘못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S+S의 형태로 나타낸 1+1의 한 예일 뿐이다. S+S는 또한 4S이기도 하며(S=2S이므로), 따라서 1+1=4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일단 계속 읽어보자! - P27.28

오랜 옛날에는 세계 도처에서 ‘둘씩 셈하기‘라는 셈법이 나타났다. 이 셈법에서는 ‘하나‘와 ‘둘‘이라는 표지만을 사용하며, 이것들을 더해서 더 큰 양을 만들었다. 이 단순한 체계에서는 둘보다 더 큰 양을 ‘afar‘ 또는 ‘trans‘라고 불렀다. 라틴어에서 ‘trans‘가 ‘넘어서‘라는 뜻이고 ‘tres‘가 ‘셋‘을 뜻하는 것은 이러한 원시적인 셈법의 흔적이다. 프랑스어에도 이러한 흔적이 남아 있어서, ‘tres‘가 ‘매우very‘라는 뜻이고 ‘trois’는 ‘3’을 뜻한다. 특히 아프리카의 일부와 남아메리카, 뉴기니에서는 단순 반복으로 큰 수를 만드는 제한된 이진법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3은 ‘둘-하나‘, 4는 ‘둘–둘‘, 5는 ‘둘-둘-하나‘와 같이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패턴이 무제한적으로 계속 확장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이 체계에서는 ‘둘-둘‘과 ‘둘-둘-하나‘ 같은 조합이 별개의 것으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합들은 요소들을 그저 이어 붙인 것으로 인지될 뿐이고, 더 이상의 확장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식과 추상화 능력이 더 발전하려면 더 큰 개념적 도약이 있어야 했고, 먼 옛날의 세계에서 이러한 도약은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났다. - P32

10이 선택된 이유는 물론 우리가 열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예외는 중앙아메리카의 유키Yuki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10‘이 아니라 ‘8‘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이다. 그러나 그들도 수를 셀 때 손가락을 이용한다. 그들은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 사이를 이용해서 센다. 다른 여러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문화에서는 손가락 사이에 끼우는 실을 이용해서 수를 센다.*

*나는 수학자들로 이루어진 청중과 일반 대중에게 왜 ‘8‘이 밑으로 선택되었을지 물어보곤 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고, 나중에 초등학생들(열 살까지)에게 강연하면서 그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한 어린 소녀가 즉시 바른 답을 했는데, 그 아이는 손가락으로 실뜨기 놀이를 했기 때문에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 P36.37

세 번째 유형인 자리 체계는 인도 문화에서 유래했고, 훨씬 더 경제적이다. 이 체계에서는 ‘자릿값‘ 개념을 도입해서, 기호의 위치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111은 3을 뜻했지만, 우리는 백과 십과 일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 체계에서는 자리가 비어 있음을 나타내는 방법이 필요하다. 공백을 의미하는 기호가 있어야 백과 하나를 뜻하는 1 1을 열과 하나를 뜻하는 11과 구별할 수 있다. 바빌로니아, 마야, 인도에서 사용한 자릿값 체계에는 모두 1 1의 빈 자리를 표시하는 기호가 필요했고, 그렇지 않으면 기호들 사이의 틈이 빈 자리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이들은 깨달았다. 결국 ‘영‘ 기호가 발명되어 이 틈을 메웠고, 인도 체계에서 백과 하나를 101로 표기하게 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회계상의 이유로 마야에서는 미적인 이유로(이 때문에 큰 수를 나타내는 상형문자에 공백을 사용하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계산의 효율을 위해 0이 발명되었다. - P49

중국에 관심이 많았던 라이프니츠는 《주역》의 육효에서 이진수의 영감을 얻었다. 주역에 나오는 육효는 이진수 0에서 111111까지에 대응된다. - P58

이진수를 응용한 중요한 예로 촉각으로 감지하는 점자가 있다.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가 1829년에서 1837년에 걸쳐 점자를 개발한 뒤로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고 있다(그러나 오늘날 영국에서는 등록된 시각장애인의 1퍼센트만이 점자를 사용한다). 점자는 이제까지 개발된 것들 중에서 최초의 이진 기록 방식이다. 보통의 인도유럽어를 기록할 때는 페니키아에서 유래한 알파벳 문자 26개를 사용하지만, 점자는 평평한 점과 볼록한 점 두 가지만 사용한다. - P58

나는 때때로 폰 노이만의 뇌는 사람의 뇌를 능가하는 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한스 베테 - P65

페아노Giuseppe Peano는 다섯 가지 규칙을 도입해서 모든 수와 산술을 정의했다. 요즘은 이것을 페아노 공리라고 부른다.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바로 뒤의 원소successor‘라는 지시이다. 이것은 수를 그다음 수로 넘기라는 지시이다. 예를 들어 1을 2로, 2를 3으로 넘긴다. 이것은 양들의 무한한 모임 (0, 1, 2, 3, … 이렇게 영원히 계속된다)이 어떻게 유한한 규칙들의 모임으로 만들어지는지 보여준다. 영에서 출발하고(페아노는 실제로 1을 사용했지만, 1은 0의 바로 뒤의 원소이므로 아무 차이가 없다) 음이 아닌 자연수를 정의하는 페아노 공리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영은 자연수이다.
2. 모든 자연수 바로 뒤에 자연수가 있다.
3. 영은 어떤 자연수에 대해서도 바로 뒤의 원소가 아니다.
4. 두 자연수의 바로 뒤의 원소가 같으면, 둘은 같다.
5. 어떤 집합이 영과 모든 수의 바로 뒤의 원소를 포함하면, 이 집합은 모든 자연수를 포함한다. 이것을 귀납의 원리라고 부른다.

이 모든 공리가 독립적이며, 따라서 반드시 이 모두가 필요하다. - P69.70

무엇보다도, 나중에 볼 것처럼 자연수는 셀 수 있는countable 무한이다. 이것은 무한 중에서 가장 작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잠재적 무한‘이라고 불렀고, 이 무한을 인정했다. 이것은 무한한 온도나 우주 어딘가에 있는 무한한 밀도처럼 ‘실재하는 무한‘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실재하는 무한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국소적 진공과 함께 거부한 개념으로, 국소적 진공이 있으면 저항이 사라져 운동이 유한한 시간 안에 무한한 속력에 도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P76

이 영화[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6년 영화 <컨택트>(원제는 ‘도착‘을 뜻하는 ‘Arrival‘이고 한국에서는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개봉)]는 정신의 작동과 그 붙박이 배선이 우리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어떻게 결정하는지, 셈counting과 같은 정신적 과정들이 우리의 사고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P79

산술이 어떻게 엄밀하고 논리적으로 건전한 기술記述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이 질문은 수와 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 수와 셈은 단지 계란이나 동전을 세는 유용한 수단이 아니다. 수와 셈은, 그것이 세는 물건들을 벗어나서 순전히 규칙으로만 정의되는 논리 체계로 존재한다. 하나와 둘만 세는 원시적인 체계에서는 없던 그 무엇이 나타나는 것이다. 규칙을 바꾸면 새로운 수학 체계를 만들 수 있고, 이러한 수학 체계는 세계에 있는 어떤 것과도 대응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규칙들이 일관되고 1=2와 같은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학적 존재‘라는 용어는 이제 자주 볼 수 있고,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그러한 수학적 체계의 예가 실생활에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자기 일관성만을 의미한다. 이것이 수학적 존재의 의미이다. - P79.80

그러므로 요약하자면 클래스는 공통의 성질을 가진 사물들의 모임이다. 예를 들어 수의 클래스, 원의 클래스가 있다. 집합은 클래스의 원소인 클래스이며, 고유 클래스proper class는 집합이 아닌 클래스이다. 그러므로 모든 집합은 클래스이지만 모든 클래스가 집합은 아니다. 이제 거짓말쟁이 역설을 생각해보자. ‘이 문장은 거짓이다.‘ 그런데 사물의 두 가지 모임 즉 클래스와 집합이 있고, 이것으로 거짓말쟁이 역설을 물리칠 수 있다. 거짓말쟁이 집합은 실제로 고유 클래스이고, 집합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포함하지 않는 집합의 클래스는 이제 잘 정의되고, 이것은 그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것은 집합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할 수 없다.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똑같이, 모든 클래스들의 클래스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클래스에 대해 확인 가능한 공통 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 P89.90

괴델Kurt Gödel은 아무리 호의적으로 따져봐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시인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이 1861년에 썼듯이, "위대한 지성과 광기는 매우 가깝다. 둘을 나누는 벽은 매우 얇다."
내가 괴델과 같은 시기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상주했던 학자들에게 괴델을 아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언제나 똑같이 대답했다. 괴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유명한 물리학자가 아주 젊었을 때 처음으로 고등연구소에 갔던 경험을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그는 불완전성 정리와 양자역학과 관련된 주제를 괴델과 토론하고 싶었다. 그는 구내전화로 괴델에게 연락했는데, 교환원이 괴델을 직접 연결해주어서 기분이 좋으면서도 깜짝 놀랐다. 괴델에게는 접근하는 사람들을 막아줄 비서나 조수가 없었던 것이다. 괴델은 사무실에 방문할 시간을 잡아주었다. 이 젊은 물리학자는 괴델을 만난다는 생각에 굉장히 들떴지만, 약속 시간에 도착해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는 괴델에게 다른 중요한 일이 생겼을 것으로 짐작했다. 다음 날에 연구소에 처음 온 사람들을 환영하는 다과회에 갔더니, 괴델이 한쪽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는 괴델에게 다가가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약속 시간에 그의 사무실에 갔지만 만나지 못했고, 괴델이 다른 중요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괴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반대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약속을 하는 것이지요." - P148.149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1에서 9까지의 수중 어느 하나를 무작위로 선택할 확률은 11퍼센트이다(정확히는 11.111…퍼센트이지만 큰 차이는 없다ㅡ옮긴이). 작은 수의 특성을 모른다고 하면, 소수점 아래 첫 번째 자리 수가 1이나 2가 될 확률은 각각 11퍼센트이다. 그러나 뉴컴-벤포드 법칙의 예측에 따르면 1이 나올 확률이 30퍼센트이고, 2가 나올 확률은 18퍼센트이다. 반면에 4보다 큰 수가 소수점 아래 첫 자리에 나올 확률은 무작위일 때 예상되는 11퍼센트보다 작다. 여러분만의 숫자들로도 알아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 P167

생물학자들은 자기가 생화학자라고 생각하고,
생화학자들은 자기가 물리화학자라고 생각하고,
물리화학자들은 자기가 물리학자라고 생각하고,
물리학자들은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고,
신은 자기가 수학자라고 생각한다.

무명씨 - P169

요약하면, 수학적 플라톤주의는 수학적 대상(수 1, 2와 공식 1+1=2 같은 것들이 존재하며, 추상적 대상들(이는 그것들이 물리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도 존재한다고 본다. 게다가 수학적 대상은 어떤 지적인 존재가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수數는 우리의 생각과 무관한 실재의 일부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지적인 외계인들이 우리와 같은 수학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한다. 물론 그들의 수학은 그들의 언어로 되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손가락‘이 여덟 개여서 8진법 산술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사실, 천문학자들이 전파망원경으로 수십 년 동안 수행해온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SETI 프로그램은 우리가 발견한 수학과 물리학이 보편적인 진리이고, 고등한 외계인들이 신호를 보내고 받을 능력이 있다면 그들도 같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 P174

많은 수학자들이 형식론자이다. 특히 순수 수학자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수학을 과학이나 실세계의 다른 측면들에 응용하는 데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이런 수학자들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창시자처럼 방대하고 복잡한 수학적 구조를 탐구하면서 즐길 것이다. 형식론자들에게 수학은 발명되는 것이지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규칙을 정하고, 공리 집합의 귀결을 탐구한다. 추론된 것은 우리의 마음속과 우리의 공책 속, 그리고 칠판에만 존재한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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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견의 치명적인 약점은 식민지가 불법이라고 새삼스레 주장해 주요한 논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대법원이 일본제국의 식민지 시절을 합법으로 생각해 왔다고도 읽힙니다. 이런 점에서 다수의견은 식민지가 불법이라는 대전제를 스스로 허물고 있습니다. 이 지점을 별개의견은 지적합니다. "(청구권협정) 제5항은 피징용 청구권과 관련하여 ‘보상금‘이라는 용어만 사용하고 ‘배상금‘이란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보상‘이 ‘식민지배의 적법성을 전제로 하는 보상‘만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와 같이 협상 과정에서 양측이 보인 태도만 보더라도 양국 정부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보상‘과 ‘배상‘을 구분하고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양국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도 당연히 청구권협정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상호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10장 강제동원) - P206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다루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은 조약입니다. 국가가 체결한 조약이 정의롭지 않거나 부당한 것이라고 느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권순일 대법관에게 물었습니다. "헌법 제6조 제1항은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조약은 국가 간에 체결된 약정으로 국제법의 일부입니다. 정부가 체결한 조약의 내용이 부당하거나 헌법에 반한다면 국회에서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거나 법원에서 무효를 선언해야 합니다. 조약은 국가 사이 거래의 산물이어서 법의 이념인 정의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 체약국 국민의 법감정에 맞지 않는다고 이행을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일 청구권협정은 조약 자체에 분쟁 해결 방법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협정 제3조는 이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하여 양국 간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하고, 이렇게 해결할 수 없을 때는 이 협정에 규정된 방식으로 구성한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른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이후 일본 정부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 간 협의와 중재위원회 구성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사실상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뒤늦게 거부했습니다. 과연 헌법상 국제법 존중 원칙에 맞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0장 강제동원) - P209.210

(권순일 대법관의) 반대의견에는 ‘대한민국이 소송에서 그 소멸시효 완성 여부를 다툴 것도 아니라고 본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 요구를 받았지만 소멸시효를 주장하며 거부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2009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정부가 소멸시효를 주장했고 정부가 승소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반대의견은 별다른 설명 없이 건조하게만 적어 두었습니다. 권순일 대법관에게 배경을 물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강제징용 피동원자의 피해 배상금 명목으로 청구권 자금을 일본에서 수령한 것도 사실이고, 그러한 명목으로 수령한 돈을 피해자 배상이 아닌 경제개발 자금으로 사용한 것도, 그때 피해자 배상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징용 피해자의 배상 청구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침해된 채로 남아 있다면, 이를 보상할 책무는 기본적으로 국가와 정부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헌법재판소는 2008년 시행한 국외강제동원자지원법은 너무나 적은 위로금*을 주어 위헌이라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헌법소원에, 시혜적으로 주는 돈이니 기본권 침해가 없다고 했습니다(헌법재판소 2015.12.23. 선고 2010헌마620 전원재판부 결정). 국회에서 징용 피해자에게 정부가 위자료를 추가로 지급하는 법률안을 통과시켰으나 대통령이 재정의 어려움을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한 적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할 책무는 국가에 있습니다. 별개의견이 지적한 대로, 대한민국은 일본을 상대로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라면서 ‘나라로서 청구하는 것이며,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조치할 성질의 것‘이라고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 보상은 정부가 책임질 일이지 피해자로 하여금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송을 하도록 미룰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10장 강제동원)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 (위로금) 국가는 강제동원희생자 또는 그 유족에게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위로금을 지급한다. 1.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경우에는 강제동원희생자 1인당 2천만원 (‘대일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 제4조 제2항에 따라 금전을 지급받은 경우에는 강제동원희생자 1인당 234만원을 뺀 금액으로 한다) 2. 국외로 강제동원되어 부상으로 장해를 입은 경우에는 강제동원희생자 1인당 2천만원 이하의 범위 안에서 장해 정도를 고려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금액. - P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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