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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늙을까, 왜 병들까, 왜 죽을까 - 내 안의 세포 37조 개에서 발견한 노화, 질병 그리고 죽음의 비밀 서가명강 시리즈 38
이현숙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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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적 단위 중 하나가 세포라면, 이 책은 세포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지식을 담았다. 그러므로 이미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당연하다. 어쩌면 꼭 알아야 할 지식이란, 그 속에 이미 아는 것이 모르는 것만큼은 있다는 뜻이다. 단지 이미 아는 그 지식의 의미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거나, 이 기본적인 지식이 지금은 어느 지평까지 확장됐는지, 또는 최첨단의 지식과 내가(나도) 아는 기초의 지식이 이어지는 관계와 맥락을 모를 뿐이다. 알아도 모르고, 아는 만큼 모른다. 이미 아는 것이 꼭 알아야 하는 것인 이유다.

 

BRCA2를 보면서 이게 바로 암이구나라는 생각했었다. 그 이유는 BRCA2DNA 수선 장애에도 참여하고, DNA 복제 때 복제가 제대로 완성되도록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BRCA2는 세포가 분리될 때 염색체가 제대로 분리될수록 조절하는 데도 참여한다. 이런 유전자가 망가지면 점점 세포가 분열할수록 돌연변이가 많이 생겨서 암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유전자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암 생물학에서 얘기한 여러 가지 도메인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116~117


 이 책은 현재 암세포 생물학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중견 생명과학자인 저자가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서, 세포에 관한 세포(기초)적인 지식을 전해준다. 특히 세포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들 중에서도 저자의 전문 분야인 암, 그리고 암이 발생하는 핵심적인 원인인 노화에 집중한다. 세포에 관한 분자생물학적 이해가 어떻게 암의 진단, 치료, 완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기 쉽게 구성한 점이 인상적이다. 암의 진단과 치료가 의학이라는 협소한 영역의 난제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게도 생물학을 비롯한 생명과학의 여러 학문이 함께 해결 중인 문제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줄기세포 치료가 아직도 요원한 이유는 바로 암세포가 줄기세포를 일부 닮았다는 점에 있다. 어쩌면 암은 하늘에서 떨어진 나쁜 녀석이 아니라, 줄기세포라는 아주 훌륭한 보험 세포의 발생과 분화 과정을 사생아처럼 유용해버린 나쁜 녀석이 만들어낸 질병인지도 모른다. -56

다음 그래프에서 텔로머레이스의 역기능인 발암에 대해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위기를 벗어나고 계속 분열하는 암세포들의 85~90%에서는 텔로머레이스가 발현되고 있다. 이 세포들이 유래한 정상 세포들에서는 없었는데, 위기를 극복하면서, 혹은 극복하기 위해 획득한 형질이다. 다시 말해 보통의 세포가 줄기세포와 생식세포에서 발현되는 텔로머레이스를 얻게 되면 텔로미어가 유지되면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세포, 이 범주에는 암세포가 포함된다. -158~159

 

 세포가 분열을 멈추고 노화하는 시점을 결정하는 텔로미어와 그 텔로미어의 작용을 막아서 어떤 세포는 계속 분열하며 노화하지 않게 하는 텔로머레이스의 존재는, 이제 꼭 알아야 할 지식에 속한다. 분열을 멈추고 노화하는 세포가 증가하는 것은 그 세포들이 모인 인체 자체의 노화를 의미하기에, 세포에서 텔로머레이스를 발현시켜 신체 노화를 막을 가능성은 큰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포 노화를 일으키는 텔로미어와 세포 노화를 막는 텔로머레이스의 기능이, 돌연변이 세포가 노화하지 않고 이상 증식을 계속하는 암 세포와 맞닿는 맥락을 이 책은 잘 보여 준다. 암 세포 중 일부가 노화하지 않고 이상 증식을 계속하는 것은, 텔로머레이스를 발현하거나 아예 텔로미어의 감소 자체를 회피하는 능력을 확보한 까닭이다.

 

 세포의 돌연변이이자 인체 건강의 핵심인 암세포의 관점에서 세포에 접근한다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장점이다. 일반적인 세포와 그것이 모인 인체의 건강을 추구하는 방식과 암세포를 제어하는 방식의 정교한 관계를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설명해 주어서다. 예를 들어 텔로미어를 억제해서 세포 노화를 막는 텔로머레이스의 가능성은 미래 의학의 해법처럼 언급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텔로머레이스는 이미 암 세포의 생존법이라는 점에서 단지 이 기능을 일반적으로 발현시키는 것만으로는 인체가 건강해질 수 없다. 모든 세포의 텔로머레이스를 발현시켜서 세포 노화를 막는다면, 오히려 암 세포가 더 쉽게 발생할 수도 있다. 따로 암 세포가 텔로머레이스 형질을 획득해야 하는 비용을 오히려 줄여 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자 특정한 부위에서 일정한 기능을 하게 도는 일반 세포들과 어느 부위에서 어떤 기능이나 할 수 있도록 분화되는 줄기세포 중에서 암세포는 줄기세포의 특성마저 있다. 암세포가 부위를 가리지 않고 전이되어서 일반 세포들의 다양한 기능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저자는 줄기세포가 너무 많아질 때 암이 발생하는 부작용의 사례를 지적하고 있다. 암세포와 줄기세포의 유사성 내지 연관성을 시사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부위와 기능을 가리지 않고 재생할 수 있는 줄기세포의 기능도 그 자체로는 인체의 건강을 담보할 수 없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포의 능력은 암세포에서도 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명확했는데, 단지 내 기본적인 지식이 엉성했을 뿐이다. 무작정 줄기세포의 특성도, 텔로머레이스도 우리 편이라고 단정한 셈이다.

 

팀 헌트Timothy Hunt의 서명은 특별하다. G1, S, G2, M의 순환을 그린 다음 ‘the cell cycle(세포 주기)‘이라고 쓰고, 밑에 팀 헌트라고 서명한다. G1, S, G2, M은 바로 생명의 비밀이다. 모든 진핵 세포는 세포 주기에 따라서 이렇게 분열한다.

전 세계에서 역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하게 단 한 명만이 이런 서명을 할 수 있기에 나는 그의 서명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관하고 있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부럽지 않다. 세상에는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있고, 노벨상을 받지 않은 사람 중에도 훌륭한 과학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트의 서명만은 너무 부럽다. 내가 생명의 비밀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걸 밝혔다는 사실을 서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멋지지 않은가? -46~47

 

 물론 이 책은 이런 경솔한 편 가르기가 틀렸다고 굳이 훈계하지 않는다.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는 사이에, 세포의 작용이 인체에 유익하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해 왔던 내 인식의 한계를 직면했을 뿐이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의 의도였을 듯하다. 자신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납득시킨 이런 흐름에서 교육자로서 저자의 원숙함도 엿보게 되었다. 그 덕분에 암세포 생물학, 분자생물학의 획기적인 발전과는 별개로, 암의 정복이 아닌 완만한 관리, 치료의 가능성, 중요성을 제시하고 세포와 신체 노화를 극복할 가능성을 성급히 낙관하기보다 여전히 크고 많은 과제가 주어질 것임을 예측하는 저자의 신중함도 납득할 수 있었다. 암 정복, 세포 노화의 극복, 두 과제 모두 그런 개념 혹은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저자는 이 과제의 결말을 예측하거나 낙관하기보다, 세포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은 여전히 많고, 무엇을 모르는지도 계속 알아야 한다는 통찰과 경험을 의연하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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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이 어떻게 지금과 같이 되었는지에 대한 인과적 설명은 혼란스러운 공간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 때문에 특히 매력적이다. - P14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자연주의 전통은 차츰 ‘실험에 기반한 동물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바뀌어갔다. 자연주의와 실험생물학experimental biology이라 할 수 있는 이 새로운 접근법의 차이를 명확히 밝히기 위해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고자 한다. 진자시계가 주어지고, 그 작동 원리를 알아내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상상해보자. 먼저 우리는 자연주의적 접근 방법인 관찰과 추론을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시곗바늘의 규칙 적인 움직임과 그 방식, 각 바늘의 회전과 다른 두 바늘의 회전 사이에 나타나는 연관성, 초침과 분침과 시침의 주기가 1:60으로 일정하다는 점 등등. 그러나 시계의 작동 원리, 즉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원인이나 바늘 사이의 물리적인 연관성에 대한 질문을 받을 경우, 관찰만으로는 고작해야 추측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계를 열어 내부를 들여다보고 그 메커니즘을 명확히 이해할 때까지 부품을 만지작거리는 것뿐이다. - P3132

(배아의 발생 경로를 밝힌) 그 우연의 주인공은 박사학위를 취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2세의 과학자 한스 드리슈Hans Driesch였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던 드리슈는 1889년 논문을 완성한 뒤 극동으로 여행을 떠나, 자신이 성장한 독일에서와 달리 전체론적 관점에서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철학을 흡수했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가던 중 그는 당시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가 "천국의 꽃"이 라 묘사한 베수비오산 근처의 도시 나폴리에 닿았고, 잠시 쉬어가려 했던 이곳은 이후 10년 동안 드리슈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나폴리는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그즈음 건립된 생물의학 연구 센터인 동물학 연구소Stazione Zoologica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이 연구소는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을 구축하여, 마치 예술가에게 스튜디오와 물품을 빌려주듯 과학자들에게 실험 공간과 장비를 대여하고 있었다. 그 모델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대학 생활의 경쟁적인 요구에서 벗어나 연구에 몰두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었다(운 좋게 휴직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경우라면 말이다). 게다가 나폴리만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연구에 필요한 해양 생물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에, 연구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드리슈는 대학교수 자리를 갈망할 이유가 없었고, 이러한 자유로움은 두말할 것 없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번거로운 교수직이 기다리고 있는) 연구소의 다른 동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 남기로 한 그의 결심에는 연구소의 과학적 명성이 주요한 몫을 했겠지만, 나폴리의 밤 문화 역시 하나의 즐거운 이유가 되었다. 그는 나폴리를 거점으로 삼아 지중해는 물론 북아프리카 및 아시아 전역을 여행했으며, 독신남이라는 자신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 P3940

(빌헬름) 루Wilhelm Roux와 드리슈가 실험을 수행할 당시 세포의 가소성이라는 개념은 직관에 반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세포가 갑자기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이 개념의 설계자인 드리슈가 누구보다 강력하게 이 개념에 문제를 제기했다. 세포의 운명처럼 중요한 요소가 우연에 맡겨진다고 상상하기에는 배아발생 과정이 너무도 정확하며 재현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포가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적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드리슈는 다른 설명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명력‘ 또는 ‘영혼‘이라는 의미로 만든 엔텔레키entelechy라는 용어를 끌어와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설명했다. 어떤 신비로운 영향이 아니라면 어찌 세포의 행동이 그리도 극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1910년 무렵, 드리슈는 실험생물학을 완전히 포기하고 남은 생애 동안 철학, 초심리학, 심지어 심령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바이스만의 모자이크 모델을 뒤흔들었지만,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찾지 못했다. 그는 이제 정신을 놓은 듯 보였다. - P4445

(한스) 슈페만Hans Spemann은 배순세포가 가진 힘을 포착하기 위해 이 작은 조직에 형성체onganizer라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유도현상이 발생학의 핵심 개념 으로 굳어지면서 그는 1935년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결정적인 실험을 수행했던 제자 (힐데) 만골트Hilde Mangold는 노벨상 수상에 참여하지 못했고 자신의 발견이 과학계에 미치는 영향도 보지 못했다. 1924년 9월, 부엌의 휘발유 히터가 폭발하면서 만골트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논문이 발표된 직후였다. - P51

20세기의 위대한 생물학자 중 하나인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는 발생이 유럽식 계획과 미국식 계획 중 한 가지 방식을 통해 진행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유럽식 계획에서는 계통lineage이 모든 것이므로 세포가 ‘어디에 있는지‘보다 ‘어디에서 왔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반면 미국식 계획은 보다 평등주의적이어서 세포의 출처sources보다 위치location가 더 중요하다. 브레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럽식 계획에서 세포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반면 미국식 계획에서는 "이웃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브레너의 은유는 가소성과 그 반대 개념인 전념성commitment의 차이를 드러낸다. 계통에 의해 정체성이 정의되는 세포(유럽식 시스템)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궤적을 위해 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선택지가 제한적이다. 반대로 그러한 제약 없이 태어난 세포(미국식 시스템)의 경우, 선택지가 열려 있어서 경험에 따라 미래 경로가 결정된다. 배아는 가소적 세포와 전념적 세포의 혼합물로, 그 균형이 발생 초기에는 가소성, 나중에는 전념성 쪽으로 기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세포도 나이가 들면서 그 방식이 고정되는 셈이다. - P5152

실제로 배아를 밀어붙이는 무형의 발생력developmental force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드리슈가 상상했던 엔텔레키나 ‘영혼’과 다르다. 오히려 발생에 추진력을 부여하고 전념성과 가소성 사이의 균형을 조정하는 실체는 화학과 물리학의 모든 법칙에 예속된다.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드리슈가 인식한 그 신비한 외력external force은, 수십억 년에 걸쳐 각 접합체에 ‘발생 청사진‘을 부여한 진화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말하자면, 단일세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의 유전자에 내재되어 있었다. - P53

‘흰색 눈‘이라는 표현형의 유전 여부를 확인하려면 짝짓기가 필요했다. 소중한 표본을 잃지 않기 위해 신중을 기해가며, (토머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은 흰색 변이 파리와 붉은 눈을 가진 정상 파리의 짝짓기를 시도했다. 맥 빠지게도 이 1세대 잡종, 이른바 ‘F1 세대‘의 모든 파리는 붉은 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멘델이 실험한 완두콩의 열성형질—작은 키와 흰색 꽃—이 한 세대를 ‘건너뛰는‘ 듯 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는 계속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F2 세대에 이르러 실망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F1 세대의 자손들이 멘델의 예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결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붉은 눈을 가진 파리 세 마리마다 달처럼 창백한 눈을 가진 파리가 한 마리씩 끼어 있었다. - P7273

모건은 이 결과에서 두 가지 결론을 도출했다. 첫째, (휘호) 더 프리스Hugo de Vries가 식물에서 보여주었듯, 동물에서도 변이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 식물과 동물은 동일한 유전 규칙을 따르는 우성 및 열성 대립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유전 패턴에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으니, 파리의 눈 색깔과 성별 사이에 예상치 못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즉, F2 세대의 암컷 파리는 모두 붉은 눈을 가졌지만, 수컷 파리는 절반이 흰 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수컷과 암컷을 합쳐야만 3대 1의 비율이 분명해졌다). 이 형질은 멘델의 열성 대립유전자처럼 작동하는 동시에, 파리에서만 관찰되는 특이한 방식을 보였다. 어떤 식으로든 성별이 흰 눈의 유전을 제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 P73

(앨프리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Martha Chase는 바이러스의 DNA와 단백질 중 어떤 것이 바이러스 전파를 담당하는지 알아내고자 영리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한 실험 설정에서는 방사성 황radioactive sulphur이 있는 상태에서 파지가 복제되도록 함으로써 바이러스의 단백질에 표지를 붙이고(황이 없는 물질인 DNA는 이 조건에서 표지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어 별도의 실험에서는 방사성인radioactive phosphorus이 있는 상태에서 바이러스를 배양함으로써 DNA에 표지를 붙였다(이 경우 일부 단백질에도 방사능이 표지되지만, 대부분의 방사능은 DNA에서 파생된다). 마지막으로, 허시와 체이스는 각각의 바이러스 배양액을 신선한 세균과 따로따로 혼합했다. 그러면 바이러스가 세포를 감염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세균세포에 ‘표지된 황‘, ‘표지된 인‘, 또는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하기만 하면 되었다. 결과는 너무나 명확했다. 세포에 들어간 유일한 물질은 방사성 인이었고, 방사성 황은 내부로 들어가지 않은 채 표면에 남아 있었다.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기 위한 모든 지침은 오로지 DNA만이 가지고 있었다. - P87

돌이켜보면 그것은 젊은 생물학자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최고의 일이었다. 그 일을 통해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교수인 미하일 피시버그Michail Fischlberg에게서 발생학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곤충만큼 (존) 거든John Gurdon을 사로잡지는 못했지만 발생학 또한 꽤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성장하는 배아의 모양과 형태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발생학자들을 지켜보면서, 그는 애벌레와 나비의 복잡한 날개와 가슴 무늬를 떠올렸다. 수업에서 배운 것 외에는 배아발생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때, 피시버그는 거든에게 기회를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물세 살에 거든은 피시버그의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배아의 신비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 P100101

모든 요인이 그 추진력에 기여했을 수 있지만, 여느 과학자들이 공감하는 거든의 주된 동기는 일종의 사냥, 즉 남들이 모르는 퍼즐을 혼자서만 풀 수 있는 기회였다. 새로운 자연적 사실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고, 그 특징을 설명하는 최초의 사람이 되는 즐거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거든은 교실에서의 주입식 교육을 거부하고 스스로 설계한 지식의 길을 통해 자연 세계에 대한 이해 방식을 깨우치며 자랐고, 이러한 독립성이 그를 초심자에서 실험주의자로 변모시켰다. 피시버그의 연구실에서는 온전히 혼자 일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 P106107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발견의 기쁨은 곧 의심으로 바뀌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환희는 일종의 예외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혹시 실험 과정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실험을 실패로 이끈 교란 요인이나 계산 착오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이 특히 심각해지는 것은 자신의 결과가 이전에 보고된 연구 결과와 상충될 때이다. 그리고 기존의 연구 결과가 권위 있는 연구팀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심각성은 두 배로 커진다. - P116

이듬해 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선임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가 작은 모임을 주최했다. 크릭과 다른 저명한 생물학자들, 그리고 (프랑수아) 자코브Francois Jacob도 그 모임에 초대되었다. 모임은 킹스 칼리지에 있는 브레너의 연구실에서 열렸고, 모든 참가자들이 각자의 생각을 기탄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마치 살인 사건의 증거인 양, 전 세계의 다양한 실험실에서 수행된 실험 결과가 토론의 주제로 올라왔다. 물론 핵심 질문은 이것이었다. ‘유전자와 그 단백질 산물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그룹 내에서 하나의 모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자 X가 그 중심에 있음을 알고 자코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X의 독특한 특성이 점점 분명해졌다. X는 빠르게 생성될 뿐 아니라 빠르게 파괴되었으니, 이는 세포 내에 있는 다른 물질 대부분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브레너와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은 이러한 특징을 가진 물질—파지인 람다와 유사하나 분명히 구별 가능한 세균이 박테리오파지에 감염되자마자 나타나는 분자—가 최근에 기술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문제의 분자는 특별한 유형의 리보핵산ribonucleic acid, RNA으로, 세포 내 전체 RNA의 아주 작은 부분을 구성하기에 그동안은 무시되어온 DNA의 화학적 친척이었다. 하지만 이 분자의 행동이 X와 완전히 똑같았으므로, 브레너와 자코브는 이 분자에 ‘메신저 RNA(mRNA)‘라는 이름을 붙였다. - P151

식물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기체는 전사 조절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전체에 의해 코딩된 많은 전사 억제자transcriptional repressor 외에도 세포에는 비슷한 수의 전사 활성화자transcriptional activator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활성화자들은 RNA 중합효소의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유전자 스위치를 켜는 역할을 한다. 전사를 조절하는 단백질인 억제자와 활성화자를 통칭하여 전사인자 transcriptional factor라고 하며, 이들의 유일한 목적은 유전자에 발언권을 부여하거나 침묵시키는 것이다. 인간 유전체에는 1500개에 달하는 전사인자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전체 유전체의 5~10퍼센트에 해당한다. 그 주요 목적이 다른 단백질의 생산을 조절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치다.
그렇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조절에 대한 이만한 투자는 생명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정된 지침을 지닌 정적인 유전체는 세포가 환경에 반응할 수도, 다른 세포와 소통할 수도 없게 만들 것이다. 앞 장에서 살펴본 가소성, 즉 세포 손실이나 세포 사회를 형성하는 사건에 대처하는 배아의 능력은 유연한 유전체 없이 불가능하다. 전사 조절은 세포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가장 일반적이며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따라서 성장에서 회복, 감각에서 기억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생물학적 과정은 다양한 DNA 서열이 mRNA로 변환되는 속도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 P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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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단세포, 즉 세포가 딱 하나만 있는 것도 생명체다. 그래서 어떤 공동의 조상에서 박테리아 같은 원핵 세포가 나왔다고 생각된다. 조금 더 발전해서 아케아Archaea 같은 조류, 그 다음에 여러 가지 세포로 구성해서 기관까지 만들 수 있는 사람과 같은 진핵생물로 발전했다.
이것이 생명의 계통도다. 종교적인 신념이 어떻건, 믿거나 말거나, 모든 논리력을 합해서 생각하면 이 가설은 지금까지 무너진 적이 없다. - P2627

이 그림을 보면 이중의 실 가닥이 꼬여 있는 구조다. 그래서 이것을 그 유명한 ‘이중 나선 구조‘라고 부른다. 베이스와 베이스 사이의 간격, 그리고 어떻게 꼬여 있는지를 풀어낸 것이 그들의 논문이었다.
이것이 위대한 이유는 ‘유전자가 어떻게 생겼을까?‘를 매일 고민한 위대한 석학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모형을 보자마자 ‘왜, 복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바로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한 발견이었고, 모름지기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분자 생물학의 탄생이 되었다. - P3233

팀 헌트Timothy Hunt의 서명은 특별하다. G1, S, G2, M의 순환을 그린 다음 ‘the cell cycle(세포 주기)‘이라고 쓰고, 밑에 ‘팀 헌트‘라고 서명한다. G1, S, G2, M은 바로 생명의 비밀이다. 모든 진핵 세포는 세포 주기에 따라서 이렇게 분열한다.
전 세계에서 역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하게 단 한 명만이 이런 서명을 할 수 있기에 나는 그의 서명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관하고 있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부럽지 않다. 세상에는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있고, 노벨상을 받지 않은 사람 중에도 훌륭한 과학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트의 서명만은 너무 부럽다. 내가 생명의 비밀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걸 밝혔다는 사실을 서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멋지지 않은가? - P4647

앞에서 사람 세포는 균등하게 분열하지만, 개구리알과는 달리 동시에 분열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BRCA2라는 암 억제 유전자가 있다. BRCA2가 정상일 때는 아주 균등 분열을 하지만, 이 유전자가 망가지면 염색체 밑에 꼬리를 단 것처럼 비균등 분열을 한다. BRCA2는 실제로는 세포 주기, 특히 M기의 세포 분열을 조절한다. 그런데 망가진 세포에서는 BRCA2가 비균등 분열을 하면서 유전체가 잘못 나누어진다. 이것이 암의 원인이다.
DNA가 담겨 있는 것이 염색체라고 말했다. 염색체를 균등하게 분열하기 위해 미세 소관으로 구성된 방추사가 붙는다. 그런데 방추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거나 염색체와의 결합에 문제가 생기면 염색체가 균등하게 분배되지 못하고 잘못 나뉠 수 있다. 이 때문에 BRCA2의 망가진 세포가 비균등 분열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DNA뿐 아나라 염색체 분열도 체크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우리가 세포가 어떻게 성장하고 분열하느냐를 공부한 것이 암의 비밀을 밝혀내는 데 90% 이상 일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4748

이 수정란은 2개로 이루어진 딸세포인데, 2개는 다시 4개, 8개・・・ 등으로 포배기blastocyst까지 세포 분열을 한다.
그 후 이 많은 세포는 어떻게 될까? 이동하기도 하고 다른 신호들을 만나면서 ‘분화differentiation‘를 한다. 이처럼 사람 같은 다기관 생명체에서 세포 분열은 각 기관으로 분화하기 위한 재료이며 전제 조건이다. 키가 자라는 것,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 침입한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면역 세포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 이 모든 것은 세포 분열을 전제로 한다. - P4950

하나의 세포는 영원하지 않으며 반드시 죽는다. 대신 자기와 같은 DNA를 가지는 세포로 분열하여 많은 자손 세포를 만든다. 이것이 생명 현상의 기본이며 생명의 정의다. 또 생명이 무생물과 구분되는 지점이며, 바이러스가 온전한 생명이 아닌 이유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분열하지 못하며, 숙주 세포에 들어가 숙주 세포의 세포 기구를 이용해서만 자기의 유전자를 복제하고 증식할 수 있다.
생명체가 TV나 로봇, 컴퓨터와 다른 이유는 바로 스스로 자기와 같은 세포를 만드는 세포 분열 때문이다. 이렇게 똑같은 양과 질의 DNA를 딸세포로 전달하는 세포 분열을 ‘체세포 분열‘이라고 한다. - P5051

물론 환경에 적합하지 못한 암의 딸세포들은 죽어 나간다. 암세포는 죽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인 명제다. 암세포는 많이 태어나고 많이 죽는다. 변화하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놈이 살아서 악성으로 끈질기게 나쁜 짓을 하고 다닌다고 보면 된다. 유전자와 염색체의 돌연변이가 그 이면에 있고, 끝없이 분열하는 세포 분열이 그 마당이다. 암세포의 진화에서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틀림없이 맞아떨어진다. - P55

줄기세포 치료가 아직도 요원한 이유는 바로 암세포가 줄기세포를 일부 닮았다는 점에 있다. 어쩌면 암은 하늘에서 떨어진 나쁜 녀석이 아니라, 줄기세포라는 아주 훌륭한 보험 세포의 발생과 분화 과정을 사생아처럼 유용해버린 나쁜 녀석이 만들어낸 질병인지도 모른다. - P56

그런데 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간이라면, 하나가 문제가 생겨도 다른 많은 간세포가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보다 ‘함께‘가 더 안전한 법이다. 가장 건강한 상태는 노쇠한 세포는 적절히 사라지고, 건강한 세포가 일을 하는 상태다. - P57

그래서 소아암 같은 것이 굉장히 힘든 암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아기는 세포가 계속해서 분열해서 키도 크고, 여러 가지 양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암세포가 탄생하면 더 빨리, 많이 분열한다. 그러면서 더 많은 돌연변이를 만들고, 그만큼 병세가 악화될 수 있다. - P5859

미국 MIT에 로버트 와인버그Robert Weinberg라는 암 생물학의 거두가 있다. 그는 "오래 살게 되면서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다 암에 걸리게 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불안해하라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이 암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6667

이 연구소(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위원회 분자생물학 연구소MRC Laboratory molecular biology)의 모든 층에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랑이 아니라 사실은 진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것저것 서로 배울 것이 있고 서로 열정을 교환할 수 있기에 계속해서 노벨상이 나오는 것이다. 딱 하나를 선택해서 선택적으로 열심히 훈련한다고 해서 노벨상이 나오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P91

조직이 무너지고 침투되어 있다는 것은 앞서 얘기한 침입의 흔적으로, 한마디로 암이다. - P9394

RNA는 한 가닥이고 DNA는 두 가닥으로 되어 있는데, (프랜시스) 크릭이 1974년에 노벨상을 타고 난 지 한참 뒤에도 생명에 관한 얘기를 했다.
"내가 1953년에 DNA 구조에 관해서 쓸 때는 DNA가 유전자인 이유가 복제할 때 반보존적(DNA가 복제되면 새롭게 복제된 딸 DNA의 한 가닥은 어머니 DNA를 놓고 복제)으로 복제를 하므로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봤더니 그게 아니다. 왜 이중 나선이어야 되느냐? 한 가닥이 망가졌어도 다른 한 가닥이 온전히 있는 게 유전 정보를 그대로 유지하는데 훨씬 더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가닥보다 두 가닥인 DNA가 유전자인 것 같다."
RNA가 아니라 DNA가 유전자인 이유를 크릭은 이렇게 말했다. DNA의 복제만이 아니라 DNA가 망가졌을 때 수선하는 DNA 수선 메커니즘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이 크릭의 위대함이고, 진정한 과학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발견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적인 생각을 해서 새로운 분야를 열어간다. - P9899

(암 억제 인자인) p53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세포 주기를 조절하는 것, 세포 사멸을 조절하는 것, DNA 손상 반응을 조절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다 한다. 따라서 p53은 한 50%의 암에서 돌연변이가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항암제를 만드는 사람들은 p53을 타깃으로 삼고 싶어 한다. 돌연변이 p53을 겨냥할 수 있다면 많은 암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지금도 매우 많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 P113

그런데 내가 첫 번째로 했던 프로젝트가 망하고 말았다. 결국 내 가설이 완벽하게 틀렸다는 걸 입증하는 데 한 학기를 다 썼다. 완전히 낙망해서 이러다가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는 건 아닐지 불안해하고 있을 때, 가장 위험한 순간에 행운이 찾아왔다. 교수가 이렇게 제안한 것이다.
"BRCA2 종양억제유전자를 완전히 없애버린 실험용 생쥐를 만들었는데, 이 기능을 아무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어. 네가 해볼래?"
나는 프로젝트가 없었으므로 그 일을 맡았고, 결국은 그 기능을 다 밝혀냈다. 한 학기가 날아간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다른 동기 친구들보다 훨씬 더 많이 조명받고 박사 학위도 빨리받고 상도 받았다. 엄청난 행운이었다. - P115

BRCA2를 보면서 ‘이게 바로 암이구나‘라는 생각했었다. 그 이유는 BRCA2는 DNA 수선 장애에도 참여하고, DNA 복제 때 복제가 제대로 완성되도록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도 참여하기 때문이다. 또 BRCA2는 세포가 분리될 때 염색체가 제대로 분리될수록 조절하는 데도 참여한다. 이런 유전자가 망가지면 점점 세포가 분열할수록 돌연변이가 많이 생겨서 암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유전자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암 생물학에서 얘기한 여러 가지 도메인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 P116117

(세포의 DNA 자체, 유전체에 영구적으로 영향을 주는) 이런 사례에서 보듯 지속해서 자외선에 노출됐을 때 DNA가 수선되지 않는다. DNA 수선 복구 기작의 한 유전자들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자외선 노출로 세포가 복구하지 못하게 되어도 암이 생긴다는 말이다.
만성 바이러스도 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인은 (이게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데)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활성산소가 너무 많이 생기는 것이다. 아니면 과식하고 너무 이상한 것만 먹어서 대사 질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것들도 암의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이라고 볼 수 있다. - P119

그래서 위암 같은 경우는 위염이 계속 발생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왜냐하면 만성 염증은 여러 가지 활성산소를 생성하고, 면역계에 여러 가지 요소factor를 많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DNA를 공격하게 된다. 그러면 DNA에 변화가 생기고 암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만성 염증은 면역계가 암세포를 회피하게 만들므로 아주 중요한 암 발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P120

텔로미어가 염색체를 보호할 때는 텔로미어 고리를 형성하는 t고리t-loop를 형성한다. 이때 여러 단백질이 도와줘서 고리를 구성한다.
3kb가 되었든, 150kb가 되었든 결국 이 고리 구조를 만들 수 있느냐가 텔로미어가 보호될 수 있느냐, 아니냐를 결정한다. 절대적 길이보다는 각종 염색체에서 텔로미어 고리 구조를 만드는 분자 메커니즘이 텔로미어와 노화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염색체 말단이 짧아지면 DNA가 손상된 것으로 인식되고, 세포 주기 체크포인트가 활성화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짧아진 텔로미어는 고리를 형성하지 못하고 열린 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매듭짓는 것처럼 꼬아놓는 것이다. 풀리지 않은 매듭 구조는 DNA 손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리는 실제로는 DNA 손상 반응을 피하기 위한 생물학적 구조다. - P149

알래스카의 이누이트들은 200년 정도 사는 북극고래가 있다고 믿었다. 즉 자신들이 사냥하는 북극고래의 수명이 200년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수명은 그 반도 안되지만, 대를 이어 북극고래의 수명을 추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비교 유전체 학자가 북극고래와 다른 고래들과의 유전체를 전체적으로 비교하는 비교유전체학을 실시했다. 그 결과, 북극고래와 그것과 근연종인 고래들에서 차이가 나는 유전자들로 ERCC1, PCNA 등이 확인되었다.
이 유전자들은 DNA의 손상을 복구하거나 DNA 복제에 중요한 유전자들이다. 따라서 사람과 쥐뿐 아니라 다른 종에서도 DNA 대사가 수명을 결정하는 핵심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 P153154

다음 그래프에서 텔로머레이스의 역기능인 발암에 대해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위기를 벗어나고 계속 분열하는 암세포들의 85~90%에서는 텔로머레이스가 발현되고 있다. 이 세포들이 유래한 정상 세포들에서는 없었는데, 위기를 극복하면서, 혹은 극복하기 위해 획득한 형질이다. 다시 말해 보통의 세포가 줄기세포와 생식세포에서 발현되는 텔로머레이스를 얻게 되면 텔로미어가 유지되면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세포, 이 범주에는 암세포가 포함된다. - P158159

인공지능이 내 직업을 위협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동시에 인공지능이 얼마나 예측을 잘할 수 있는지 몹시도 궁금했던 나는 로제타폴드를 바로 활용해보았다. 그 결과 인공지능이 아니었다면 6개월 정도 걸렸을 실험을 단 일주일 만에 해낼 수 있었다. 24개 정도의 실험 세트를 인공지능 로제타폴드로 예측한 구조를 통해 4개의 실험 세트로 줄일 수 있었다. 또 예측된 단백질 구조 정보를 바탕으로 이제까지 풀어내지 못한 문제의 답을 얻어내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로제타폴드의 발표는 알파폴드보다 예측 성능이 더 좋은 알파폴드 2의 개발과 발표를 바로 이끌어냈다. 바로 얼마 전 딥마인드는 단백질의 구조를 넘어 단백질과 핵산이 결합하는 구조를 예측하는 알파폴드 3를 발표했다. 2020년부터 4년도 걸리지 않아 단백질과 DNA의 결합 구조를 예측해내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 인공지능은 생명과학 연구의 중요 도구로 자리 잡았다. 바이오와 인공지능의 결합, ‘바이오 인공지능‘의 탄생이다. - P207

바이오 인공지능은 데이터를 먹고 자란다. 딥마인드의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면 구조 데이터가 기하급수적으로 추가되고 있다. 지금까지 2억 개 이상의 단백질 구조를 예측해내며 과학 발전을 촉진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풍부한 데이터를 통해 인공지능은 더 잘 학습하며 점점 더 똑똑해진다.
예측 성능도 점차 더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실험하지 않고 알아내는 구조가 정말 많아졌다.
그러나 실험이 필요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알파폴드나 로제타폴드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발되고 학습하는 인공지능이다 보니,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구조는 예측해내지 못한다. 이때 실험이 필요하다. 초저온 현미경과 생물물리학적 실험 데이터가 필요해진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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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생명의 언어라면 - 수면부터 생체 리듬, 팬데믹, 신약 개발까지, 생명을 해독하는 수리생물학의 세계
김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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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수학 교육에서 미적분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종종 들어왔다. 즉 그리 신선한 주제는 아니다.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서 그 무용성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 그 맞은편에 미적분의 효용이 최근의 과학과 기술 발달에서 얼마나 광범위한지, 대학에 입학해서야 필요한 학과에서 새로 가르치느라 어떤 비효율이 일어나는지 등의 반박도 있다. 이렇게 상이한 입장들은 물론 대학 입시라는 장에서 가장 날카롭게 부딪힌다. 하지만 수학 교육과 미적분의 역할에 관한 더 큰 문제는 대학교와 대학 입시 너머에 있음을 이 책은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렇습니다. 적분은 쉽게 측정할 수 있지만 그다지 관심 없는 속도로부터 궁금하지만 측정할 수는 없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

 

미적분학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30

미분은 속도 변화를 직관적으로 묘사하게 해주고, 이것의 적분은 직관적이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게 해줍니다. -48

 

 이 책의 부제처럼 수면부터 팬데믹까지수리생물학은 인간의 직관이 놓치거나 풀지 못한 생명 현상의 원리를 이해하고 방향을 예측한다. 그 핵심 수단이 본질적으로 계산 기계인 컴퓨터이며 그 컴퓨터의 핵심 언어는 미적분이다. 그리고 컴퓨터와 미적분이 결합해 생명 현상을 번역하는 수리생물학에서 의학, 약학, 생명과학 등의 연관 분야와의 협업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의 미적분은 인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계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직관으로 해석할 수 없는 생명 현상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수리 언어의 핵심 문법이 미적분이다. 인간의 역할은 생명 현상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도록 미적분으로 묘사하고, 그 컴퓨터가 생명 현상을 해석하는 과정을 운용하는 것이다. 당연히 인간이 미적분을 잘 알아야 하지만, 그 구체적, 세부적 계산까지 인간의 몫은 아니다.

 

이번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기존의 치료 체계를 여러 관점에서 더 정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치료 시간의 관점에서, 그리고 성별의 관점에서 질병을 바라볼 때 비로소 더욱 효과적인 치료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이라는 차원을 추가해 약의 효과를 예상하려면 시간에 따른 변화를 예측하는 미분방정식 기반의 수리 모델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132

이렇게 계산 결과를 보면 납득이 가지만, 이 결과를 보기 전까지 정상세포와 감염 세포의 수가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컴퓨터를 이용하기 전에는 우리가 직관을 이용해 얻은 결과들이 언뜻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우리의 직관에 잘 와닿지 않더라도 정상 세포와 감염 세포의 수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서로 공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시스템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이보다 훨씬 복잡한 실제 생명 시스템을 인간의 직관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불가능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결론을 내릴 가능성도 높습니다. -53~54

 

 생명 현상은 생명체의 평생부터 하루하루의 생존까지 시간 척도 간의 편차가 크고, 생명체 내외에서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종류와 그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는 양상은 다양하다. 결국 이 모든 조건이 결합한 생명 현상은 인간이 한번에 하나로 꿰어서 직관적으로 예측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영역이다. 애초에 인간의 인지 능력은 이런 수준의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까지는 상정하지 않고 진화했다. 이제야 급하게 필요해졌지만 준비되지 않은 역량이다. 생명 현상을 미적분으로 묘사하는 수리생물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이 복잡한 주제를 정확히 분석할 수 있어서인 동시에, 인간의 인지적 특성이 이 주제와는 영 상성이 좋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인간이 생명 현상의 방정식을 포괄적으로 구성하는 측면과 그 미적분을 토대로 컴퓨터가 생명 현상을 구체적으로 계산해석하는 측면은 구분될 수밖에 없다. 미적분의 역할과 효용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과 그 계산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완전히 같은 의미도 아니다.

 

 따라서 미적분의 계산 원리를 교육하고 숙지하며, 미적분 계산 능력을 제고하는 것만이 미적분의 유일한 의무 교육 방식은 아니다. 그것이 정량적 평가와 대학 입시를 전제한 가장 효율적, 일반적인 미적분 교육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미적분이 필수적인 의무 교육 과정에 편성되어야 할 이유를 보여 주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교육 방식은 내가 겪었거나 생각하는 그것과 다를 듯하다. 미적분은 생명 현상을 번역하는 수리 언어, 수식의 핵심 문법이지만 연구 주제가 아닌 연구 도구다. 인간이 미적분이라는 도구 자체가 될 필요는 없는 셈이다. 그래서 더더욱 모두가 미적분을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할지라도, 가급적 많은 사람이 미적분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남에게도 말할 수는 있어야 한다. 미적분이 의무 교육의 필수 요소가 되어야 한다면 바로 그래서다.

 

융합 연구를 자주 하는 만큼, 강연이 끝날 때마다 자주 받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녀를 어떻게 하면 융합 연구자로 키울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저의 대답은 늘 똑같습니다. 융합 연구자의 두 가지 특성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첫 번째 특성은 대화를 유쾌하게 이어가는 것입니다. 운이 좋게도, 저는 지난 10여 년간 의학, 약학, 생명과학 분야 연구자들 수십 명과 협력해 융합 연구에서 여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실패한 공동 연구도 있었지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융합 연구를 함께 성공적으로 끝맺은 이들은 모두 유쾌한 대화 상대였습니다. (중략)
두 번째 특성은 자신이 아는 것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잘 설명하는 것입니다. 융합 연구는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여 동일한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219~220쪽


 결국 이 책은 미적분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수학자의 글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막연하거나 단호한 당위의 영역과 무관하다. 뿐만 아니라 저자 본인의 구체적이며 유연한 융합 연구, 협업의 성과를 미적분의 가치와 효용으로 연결하는 까닭에 설득력이 더욱 높다. 수학교육으로 학부를 시작한 저자가 최근 각광받는 수리생물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 의학약학면역학 등 수학적 접근이 낯선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력해 연구한 경험들, 생명과학의 오랜 난제 앞에서 수학자로서 겪은 시행착오까지 간결하면서도 진솔하게 풀어내서 더욱 흥미로웠다. 앞으로도 저자에게 이렇게 대중적인 저술까지 할 수 있는 환승 시간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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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할아버지가 오래 알고 지내던 손님이 다도실을 리뉴얼하는데 문고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잘은 모르나 손님의 어머님이 다도 선생님인데 희수 기념으로 개장하는 것이라 축하의 의미를 담은 디자인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단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형이 "거북이 문고리가 좋겠네" 하고 중얼거렸다.
당시 형은 아직 여덟 살 정도였는데 창고 안에 있는 부품 전부를 놓아둔 장소까지 달달 외웠다.
깜짝 놀란 할아버지가 형과 함께 창고를 보러 가서 형이 꺼낸 문고리를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오래된 물건이지만 상태도 좋고 거북이 등딱지 부분에 손을 잡도록 만들어놓은 디자인도 근사했기 때문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그 문고리를 사용하였다니 그때부터 이미 형은 상당한 심미안을 지녔던 듯하다.
그렇게 그 무렵부터 문고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는데,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나 교토의 가쓰라리큐(일본 왕족의 별장—옮긴이)에는 ‘달‘을 본뜬 문고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그 문고리를 느긋하게 손질하고 싶어."
그 장면을 상상하는지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형 모습을 기억한다.
나도 형 일을 돕게 된 이후 그 문고리를 사진집 등을 통해 보았다.
확실히 한자 ‘달 월‘ 자를 본뜬 모양이나 달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모양 등 가쓰라리큐를 위해 특수 제작한 그 문고리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지금이라면 형이 넋을 잃는 것도 이해하지만, 당시 문고리라는 존재는 ‘우리 형은 어쩌면 조금 별난지도 모르겠다‘라고 인식한 계기에 불과하다. - P15.16

도자기를 잘 모르는 나도 네즈미시노(1570년대 일본 기후현 미노 지역에서 하얀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를 이르는 말—옮긴이)가 도자기 종류 중 하나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좋은 찻종,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져 경매될 정도의 유래가 있는 찻종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는 물건이 많다는 것도 안다.
‘가마이타치‘는 통통한 네즈미시노 회색 찻종의 이름인 듯하다.
찻종에는 풍류적인 이름이 많다. 그 찻종의 ‘정경‘(구운 색, 표면의 모양, 요철, 겉모양의 인상 등을 빗대 이렇게 말하는 모양이다)을 표현했다고들 하는데 나로서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많다.
"뭐? 이 모양이 학으로 보인다고? 정말로? 으음, 그거 거의 로르샤흐 테스트 아니야? 그 왜 그림을 그린 후 반으로 접은 다음에 펼쳐서 나온 모양을 보고 무엇으로 보이는지 조사하는 정신 분석 같은 거. 손님, 괜찮아? 고민이라도 있어?"
이렇게 묻고 싶어질 때도 있다. - P35

S 선생님은 유명한 젊은 다도 선생님인 모양이다. 고미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그에 관한 에세이도 썼다고 한다.
"선생님이 가마이타치로 몇 번인가 차를 우리셨대. 그러고는 ‘사용감은 아주 좋은데, 어쩐지 심보가 고약한 구석이 있군, 이 찻종‘이라고 말씀하셨어."
흠.
"심보가 고약하다는 게 무슨 의미야?"
"글쎄. 나도 그렇게 되물었는데 선생님도 ‘설명을 잘 못하겠네‘ 하시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뭐라 해야 좋을까. 붙임성 있고 상냥해서 쉽게 친해진 사람인데 다른 곳에서 내 험담을 하는 걸 들었다는 느낌이랄까‘라고 하셨어."
그것이 ‘가마이타치‘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일까. - P38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평범하게, 하지만 나름대로 꽤 감칠맛 나는 인생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를 테니 떳떳치 못한 심경일 때도 있고 스릴을 느낄 때도 있다. - P97

어디까지나 나는 ‘커피숍에서 치즈케이크를 먹는 것을 좋아한다‘이기에 ‘치즈케이크를 사서 집에서 먹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행동이고 흥미가 없다. - P102.103

카페 문화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서 인구 대비 커피숍이 확연하게 많은 곳과 적은 곳이 있다.
적은 곳도 카페 문화가 없어서가 아니다. 옛날부터 다도가 성행했던 곳에는 자택에 화로가 있어서 차를 끓이는 습관이 있기에 밖에서는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다.
그런가 하면 커피숍이 잔뜩 있어서 휴일에는 가족끼리 단골 커피숍에 가서 브런치를 먹는 곳도 있으니 식문화는 그야말로 흥미롭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곳저곳에서 가게를 방문하는 일은 직업상 이동이 많은 형과 나의 자그마한 즐거움이다. - P104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는 역시 블렌드 커피를 주문하는 것이 기본이다. 블렌드는 점주의 취향이 드러나기에 자신의 취향과 맞는지도 알 수 있다. - P107

K 점주가 집 정리를 부탁하고 싶다는 친구를 소개해주고, 끝내는 자기 가게의 폐점 정리도 맡길 정도로 친해지리라고 이때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N마치는 오래된 역참 마을로, 작지만 오랫동안 교통의 요지 중 하나였다. 이런 곳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사람과 물건의 왕래가 잦고 갖가지 물건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 뒤로 고마운 매입처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으로 우리가 K를 방문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K 점주에게 연락이 왔다. - P119

나는 타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 P127

이발사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몰랐는데 일본 타일은 정해진 몇 곳에서 거의 다 만들어진다더군."
"네, 메이지 시대(1868~1912년)에 국가가 운영하는 연구소와 공장이 교토에 세워지고, 국가 주도로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원래 요업이 성행했는데 처음에는 주로 메이지 유신으로 고객을 잃은 교야키(교토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총칭—옮긴이) 장인이 중심이 되었다고."
형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군. 형은 K에서의 일 이후 타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 P127

약속한 가게가 있는 곳은 신바시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커다란 상업빌딩이었다.
옛날에 지어진 빌딩은 어쩐지 분위기가 독특하다. 묵직한 공기, 느긋한 통로 공간. 전체적으로 만듦새에 여유가 있고 잘 닦여진 바닥이 둔탁하게 빛난다. - P133.134

이 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그 여기저기에서 부모님이 만든 집과 시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것이 또 엄청나게 많아서 설마 이런 벽촌에(실례)까지, 하고 생각되는 장소에서도 일한 흔적을 만난다.
"아버지랑 어머니, 얼마나 일을 하신 걸까."
"이러니 우리가 얼굴도 거의 못 보지."
"이런 페이스로 계속 일을 했다면 사고를 당하지 않았어도 언젠가 과로사하셨을 거야."
세계 유산에 등재된 산골짜기의 오래된 집락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이 지은 민가를 발견했을 때는 형도 나도 기가 막혔다.
두 분이 지은 집은 어째서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고, 마음을 담아서 지었다는 점이 전해져왔다.
친밀감이 있고 아담해서 마음이 편안한 집. 이런 집이라면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집.
일반적으로 건축가는 자택에 자신의 사상을 담아 그것을 명함 대신으로 한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결국 두 분은 자신들의 집을 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 P155

둘째, 이것은 예전부터 어렴풋이 느낀 것인데 세상은 거의 모든 일이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타이밍, 무언가를 그만둘 타이밍, 무언가를 물을 타이밍 그리고 무언가를 고백할 타이밍.
세상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있으면 그것은 대개 그쪽에서 다가온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더라‘, ‘지금밖에 없다고 직감했다....... 이런 타이밍은 대체로 옳다. - P193

촉촉이 비가 내리는 오후, 우리는 교토에 있었다.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교토는 사족을 못 쓰는 곳인지, 일을 끝낸 다음이라고는 하나 형은 항상 교토에 들를 때마다 자신의 문고리 컬렉션을 찾아 헤맨다.
형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한 골동품점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문고리는 없었지만 형은 우아한 앤티크 경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는지는 천차만별이라, 그 덕에 이 장사가 성립될 수 있는 거라 절실히 느낀다. 그리고 나는 경첩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도.
제시액이 서로 맞지 않아서 잠시 흥정이 이어진 결과 경첩은 그대로 그 골동품점에 남게 되었다. - P194

덧붙여 풍경 소인의 정식 명칭은 ‘풍경이 들어간 통신 날짜 소인‘이다. 요컨대 명승고적 등의 도안이 들어간 소인을 말한다.
우편을 보낼 때 일반적으로 찍는 소인은 날짜와 시간대와 담당 우체국 이름밖에 적혀 있지 않지만, 풍경 소인에는 각양각색의 정취가 느껴지는 도안이 그려져 있다. 가마쿠라의 대불이라든가 이세신궁 같은 명소의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 특성 탓에 어느 우체국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나름대로 기념이 될 만한 것이 있는 우체국에 비치되어 있다.
물론 각 풍경 소인이 비치된 우체국에 부탁하지 않으면 찍을 수 없다. 우송도 의뢰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우표를 사서 메모장에 붙이고 창구에 내밀어 풍경 소인을 찍어달라는 기본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 P248

"그래. 컬렉터는 모으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니 모으는 것 자체가 재미있을 뿐 실은 마음속에서는 컬렉션의 완성 그 자체는 바라지 않아. 모은다는 행위와 모은 것 하나하나가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 증명 같은 것이야. 내가 사라져도 물건은 남아. 내가 모은 것의 집합체가 내 인생의 덩어리 같은 거지."
잠깐 사이를 두고 형이 말을 이었다.
"네 풍경 소인을 보고 생각했어. 스탬프 랠리는 저도 모르게 모으고 싶잖아? 스탬프 수첩에 공백이 있으면 어떻게든 메우고 싶어져. 그것도 마찬가지야. 그 공백은 존재의 공백이야. 자신이 그곳에 없었다는 공백이 무서운 거야. 그러니 네가 말하는 ‘느슨함‘이 부러운 이유는 그 공백이 무섭지 않은 점, 공백을 개의치 않는 점이야."
"흠."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래서 컬렉터라는 인종은 그다지 자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고 더 강하게 바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
더욱더 예상외라고 생각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형은 결코 ‘나서는 타입‘이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컬렉터 또한 소극적인 사람이 많으니 놀랍네."
"응. 나도 인생 자체에 집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분석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을 때는 뜻밖이었어." - P261.262

"참 재미있단 말이야. 일러스트레이터나 화가 본인과 만나면 ‘그렇군, 이 사람이 그런 선을 그리는구나‘ 하고 늘 이해가 돼. 이름은 몸을 나타낸다가 아니고 선은 몸을 나타낸다지." - P345

또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나 긴장하는 동시에 우리는 이 장소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세월이 자아내는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셔터의 녹,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 그러데이션으로 변한 함석 색깔. 그것이 고대 유적처럼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내보인다.
"장소의 힘은 엄청나니까 그 땅이 내뿜는 에너지에 어울리는 작품을 만드는 일은 힘들어요."
갑자기 다이고 하나코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 P378

그녀들의 역할은 끝났다.
다이고 하나코에게 그 도란을 전해준 것으로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밝은 여름이 눈앞에서 달려간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여름이라는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 P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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