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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훈 교수의 행동경제학 강의
홍훈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8월
평점 :
제목에 ‘행동경제학’이 들어 있지만, 책의 시선은 시종일관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행동경제학을 아우르는 책이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책 제목만 보면 어디까지나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경제 현상을 설명, 분석하는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뒤표지의 상단 카피부터 ‘경제학의 관점에서 설명한’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개인과 전제와 가정이 촘촘히 설계된 기존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설명할 수 없는 실제 경제 현상과 그 성격이 무엇이며, 행동경제학은 그것들을 어떻게 직관적으로 납득 가능하게 분석하는지를 다양한 주제와 각도에서 알려주는 책이다.
이같이 표준이론은 화폐로 표시되고 화폐로 집행되는 예산을 동질적이고 유동적인 하나의 덩어리로 간주한다. 이것이 소비자 선택에서 고려되는 소득제약에 내포된 의미이다. 이 때문에 화폐를 자유자재로 전용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처럼 표준이론에서는 재화의 대체가능성과 화폐의 전용가능성이 함께 간다. 다만 표준이론에서 대체가능성은 명시되어 있는 데 비해 전용가능성은 묵시적인 전제이다. 이것이 묵시적으로 전제되는 이유는 그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44~145쪽
인간의 직관과 본능에 바탕을 두고 경제 현상들을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라고 막연하게 건너짚고만 있었던 행동경제학이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표준이론이 전제하는 인간의 합리성, 화폐의 전용가능성, 재화 간의 대체보완성 등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지적, 반박함으로써 그 이론을 형성시켜 왔음을 납득할 수 있었다. 먼저 같은 액수의 화폐로 환산 가능한 재화들은 서로 무차별하다고 간주하는 표준이론에 대해서, 행동경제학은 인간들이 가격이 같은 재화들에 차별적으로 대응하게 이끄는 다양한 요인과 그것이 작용하는 실제 사례들을 제시한다. 사실 별달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선물 받은 물건을 잃어버리면 똑같은 물건을 사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두 물건이 서로 같지 않다고 꼭 선물 받은 바로 그 물건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같은 사람이 선물 받은 물건이나 선물한 사람에 따라서 재화의 대체보완 여부가 다를 수도 있다. 재화의 대체보완성을 좌우하는 요인이 이렇게나 많은데 모든 인간, 모든 재화의 대체보완이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은 역시 타당하지 않다.
인간이 화폐의 용도를 특정한 목적이나 재화에 고정하지 않고 언제나 자유롭게 전용하며, 그 화폐로 구입하는 재화들 역시 선호의 기준에 따라 합리적으로 비교하여 같은 가격의 재화들이 더 우월한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이중의 조건은, 인간의 합리성과 선호의 지속성까지 전제한다. “표준이론은 여러 대상에 대한 여러 종류의 선택을 포괄하는 일반이론임을 자부한다.”(59쪽)고 하지만 그 포괄할 수 있는 것만 포괄하는 이론이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이렇게 조건에 조건을 거듭하면 경제학 이론을 수리적 도구로 명쾌하게 전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까지 편할 것이다. 모순이 발생할 여지를 말끔하게 소거한 무균실 같은 이론은 보기에 좋고 말하기에는 적합하지만 딱 그뿐이다.
표준이론에 대한 행동경제학의 비판은 선호의 안정성에 집결되어 있다. 행동경제학에서 선호의 불안정성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초기대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더 나은 대안의 거부, 출발점인 현재의 부존자원에 따라 달라지는 선호, 맥락에 따른 선호의 변동, 대상의 모든 차원들을 파악하지 않는 편중,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고 그 반대도 성립하는 선호역전preference reversal, (나중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단기와 장기의 선호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쌍곡형 할인 등이 그것이다.
행동이론이 주장하는 선호의 불안정성이 심해지면 선호역전이 발생한다. 선호역전이란 대안 X와 대안 y에 대해 x보다 y를 좋아했다가, 곧 거꾸로 보다 x를 좋아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선택, 경매, 대응에 따라 결과가 바뀌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선호역전은 기대효용이론이 전제로 삼는 선호의 안정성이나 일관성으로부터 가장 극단적으로 벗어나는 경우이다. -228~229쪽
문제는 그 모순의 가능성을 고스란히 이론의 범주로 수용한 행동경제학이 이론으로서의 일관성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에 있다. 무균실의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현실성을 상실했다면, 이를 비판한 행동경제학의 난점은 유연성과 현실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유연한 현실의 방향을 예측하는 일관성의 확보다. 비합리성과 불안정성 자체를 외면하는 기존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설득력은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인간의 비합리성, 선호의 불안정성을 경제학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행동경제학의 시도가 이론적 구축이 어렵다고 해서 마냥 피할 수도 없는 상황임을 이 책은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행동경제학의 관점이 기존 경제학의 관점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이론의 완결성을 위해서 합리성, 안정성을 당연시하는 기존의 관점과 병립할 필요는 충분해 보인다.
즉, 적극적인 의미의 정보제공, 선택에 대한 훈련과 몇 차례 이상의 경험이나 가상경험의 제공, 선택과 선택의 대안들에 대한 가정 및 학교 교육과 정부의 홍보, 선택의 금전적·비금전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제고 등을 표준이론과 행동이론이 공유하는 정책적인 합의로 간주할 수 있다.
표준이론이든 행동이론이든 모두 개인의 선택에 집중한다. 행동이론은 완벽에 가까운 합리성이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뿐 표준이론과 거의 비슷하게 개인의 합리적 선택을 중요시한다. 심지어 개인이 합리적으로 선택하기만 하면 대부분의 경제사회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행동이론이 내세우는 규칙, 정책, 법과 제도는 무엇보다 개인의 합리성을 향상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341~342쪽
행동경제학이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투로 유보하는 이유도 이 책에서 배웠다. 행동경제학이 개인의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합리성이 꼭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은 합리성이 인간의 기본 속성이 아니라고 지적한다는 점에서는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날을 세우지만, 합리성 자체가 시장의 개인에게 불필요하다거나 불가능하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시장의 토대로 간주하는 인간의 합리성과 선호의 안정성이 실은 아직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시장의 토대가 되어야 하는 속성이며, 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행동경제학의 주장이다. 같은 속성을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도구로, 행동경제학은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두 이론의 접점은 명확하다. 다만 그 차이가 각각 전혀 다른 속성을 강조할 때보다 오히려 더 깊다는 생각도 들었다. 있는 데 없다면 당혹스러울 것이고, 없는 데 있다면 기만한다고 여길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