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새벽 세시
오지은 지음 / 이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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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생각은 나쁜 생각을 불러왔고, 그 찌질한 기운에 좋은 생각들은 짐을 싸서 나가버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15쪽

나는 시간을 갖기로 결심했다. 사치스러운 결정이지만 절박한 마음에서였다, 지금 이 생각, 이 상황을 그냥 흘려버리면, 많은 것을 포기한 어른이 되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방향 없이 그저 어슬렁거리고, 변명만 가득한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무서웠다.

짐을 싸서 늦겨울의 교토로 떠났다. 조용하고 쓸쓸한 곳에 가고 싶었다. 옛것이 보고 싶었다. 싸락눈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한 달이 지난 때였다. -16쪽

일본 내에서도 교토 사람들은 좀 특이한 사람들로 분류된다. 더 놀다 가세요,라는 그들의 말은 어서 빨리 돌아가 이 멍청아,라는 뜻이라고 한다. 웃는 낯으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때가 많아서 옆 동네 오사카 사람들과는 앙숙이다. 그리고 그런 점이 조금 내 취향이다. -20~21쪽

(호텔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찾았다, 하고 작게 혼잣말을 하고는 열쇠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방에는 멋진 책상이 있어요.˝
(중략) 책상은 오래된 원목이었다. 매니저가 강조할 만했다. 이 책상을 리폼한 디자이너가 여기 있다면 어디서 발견했는지, 어떤 식으로 리폼했는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한참을 떠들 수 있을 것 같은 가구였다. 시간이 보이는 물건이 있는 덕에 방이 살풍경해 보이지 않았다.
(중략) 원래 기숙사였던 건물을 호텔로 리모델링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났다. 창문 옆에 있는 커다랗고 낡은 히터가 유일한 흔적이었다. 살면서 점점 기대 이상의 순간을 만나기 힘들어지는데 여기는 기대보다 좋은 방이다. 운이 좋다. -21~22쪽

아, 적당함이란 얼마나 충족시키기 어려운 가치인가. 적당함이란 분명 뛰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33쪽

추운 겨울에 외투가 없다면 아마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겠지. 그런데 외투를 두 벌 샀다고 두 벌분의 행복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셈법이 이상하다는 증거이다. -37쪽

그리워하던 것 그대로였는데 실망하게 되는 이 얄팍함은 무엇일까. -45쪽

나와, 어젯밤의 나와, 내 욕망과, 내 머릿속의 팬케이크와, 실제의 팬케이크. 전부 같지만 조금씩 달라서, 내 욕망의 구멍에 꼭 맞는 블록을 찾아넣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심지어 욕망의 모양, 블록의 끊임없이 바뀌어서 나는 아무리 찾아 헤매어도 영영 맞출 수 없을지도. -45쪽

마음에는 창문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닫고 열기란 쉽지가 않다. 너무 많은 요소가 그 문의 개폐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 굳게 닫혀 먼지가 쌓이고. 이산화탄소로 가득차고, 여는 법을 까먹고, 그 안에서 기침을 하고, 꼬여버린다. 예술이 창문을 열어주는 역할인지, 아니면 방향제 역할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방향제로 쓸지 창문 손잡이로 쓸지는 사실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60쪽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으면 환한 빛도 들어오지만 큰 먼지도 들어온다. 그렇구나, 눈은 시리기도 하구나, 흉한 것도 있구나, 빛은 가끔 무섭구나, 항상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서 차차 실눈을 뜨게 된다. 좋아하는 것을 오래 보기 위해선 실눈을 떠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보면 새로운 환한 빛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어지간히 두꺼운 안구를 타고나지 않은 이상. 나의 경우는 그렇다. -64쪽

절름발이

씩씩한 걸음걸이는 이미 사라졌는데
노련한 걸음걸이는 아직 배우지 못했네. -67쪽

악명 높은 교토의 꽃샘추위도 누그러졌다. 그간 기운이 밝은 곳에는 잘 가지 못했다. 하지만 겨울이 끝나가고 햇살이 조금씩 강해지면서 나에게도 조금 볕이 들었다. 좋은 길을 걷고 싶다. -76쪽

철학의 길은 은각사에서 시작이다. 은각사도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한 번에 하나씩. 표지판을 따라 걸어들어갔다.소문대로 걷기 좋은 길이었다. 작은 시냇물, 양 옆으로는 아직 움을 틔울까 말까 하는 늦겨울의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고, 드문드문 단독주택, 작은 공방, 카페가 보였다. 다른 계절에는 나무와 풀로 아름답겠지. 꽃나무도 단풍 나무도. 상상하며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비수기의 즐거움이다. -77쪽

익숙하고 생경한 풍경이 주는 위안. 모르는 사람 집 빨랫줄에 걸린 수건,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작은 카페, 음식 냄새, 버스 정류장의 벤치, 내 것이 아닌 따스함에서 느낄 수 있는 사치스러운 애잔함. 그래,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몰라도.

몰라도 된다 싶기도 하고. -78쪽

코타니 선생님은 나의 기타에서 수상함을 느낀 듯했다. 레벨테스트 겸 아무거나 한 곡 쳐보라고 했을 때 생각난 노래가 하필 ‘어긋남을 깨닫다’라는 나의 곡이었고, 치다보니 노래가 자연스럽게 나왔고, 그러다보니 눈을 감고 열심히 노래를 부르며 기타를 친 것이다. 공연도 뭣도 아닌 것이 끝나고, 착한 코타니 선생님은 ‘벌써 노래와 기타가 동시에 가능하다니 대단하세요!’ 하고 날 칭찬해 주었다. 그런 걸로 칭찬 들으면 안 될 상황인데... 냉정을 찾은 코타니 선생님은 어떤 부분은 굉장히 대담하고 어떤 부분은 굉장히 형편없는 이상한 기타라고 했다. 맞습니다, 선생님. 제가 그렇습니다. 그의 명쾌한 판단에 존경심이 들었다. -80쪽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역시 꺼내서 꼬들꼬들 말리는 것뿐이다. -81쪽

같은 교토라고 해도 꽃이 피는 시기는 다 다르다. 꽃놀이를 좋아하는 국민성과 정원으로는 한가락하는 절들이 가득한 교토의 특성 덕분에 개화시기 지도라는 것이 있을 정도다. 어디는 일찍 피어서 좋고, 어디는 늦게 피어서 좋다. -87~88쪽

그곳에 있는 나무는 위치가 응달이라 그런지 다른 나무보다 꽃을 틔우는 것이 느렸다. 사람도 별로 없었다. 작은 꽃봉오리들이 키 작은 나뭇가지에 맺혀 있었다. 참 예뻤다. 활짝 핀 꽃보다 더 예뻐 보였다. 저 작은 몸에 어마어마한 힘이 모여 있겠구나. 앞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고, 떨어질 힘. 그리고 그것을 반복할 힘. 그 옹골찬 모습을 나는 한참 바라보았다. -88~89쪽

아름다운 것을 보았고, 여행 후에 무언가가 풀렸다. 그리고 다시 아름다운 것들은 알 수 없는 서랍에 들어갔고, 새롭게 많은 것이 엉켜갔다. 더 복잡하게. 이제는 홋카이도 일주 정도로 털 수도 없다(나는 홋카이도를 일주하고 <홋카이도 보통 열차>라는 책을 썼다). 이제는 어느 서랍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좋아진 것일까, 나빠진 것일까. -97쪽

성을 목표로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덤불에 갇히고, 성에 들어가 왕과 여왕이 된 사람에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110쪽

결국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이해와 관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20쪽

우아한 레이디는 되지 못했어도 적어도 날씨와 상황에 적합한 옷을 입고, 그에 맞는 신발을 신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단촐한 짐으로 여행하는 멋진 어른이 될 줄 알았다. 나아가 내가 지금 뭘 먹어야 적당할지, 주문대에서 무슨 음료를 시키면 될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나라는 인간과 삼십 년을 넘게 살았는데 취향이나 욕구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136~137쪽

오오누마공원역에 도착했다. 가는 기차, 오는 기차가 모두 한 승강장에 서는 작은 역이다. 팻말이 많아서 숙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크로포드 인. 누군가 리뷰에서 오래된 호텔맨의 자존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작고 조금은 낡았지만 방의 나무가구들은 반질반질했고 특히나 서비스에 흠잡을 곳이 없었다. 새로 만든 번쩍거리는 건물에 압도적인 인테리어, 세련된 기기를 갖춘 호텔의 매뉴얼대로의 친절과는 달랐다. 방에 들어가서 트렁크에서 옷가지를 꺼내 원목 서랍장에 넣어두며 작은 부분부분에 감탄을 했다. 식당에서 우실 스튜를 먹었는데 정말 맛이 좋았다. 겁이 나 며칠만 예약해두었던 나는 바로 프런트에 가서 숙박을 연장하고 싶다고 얘기를 했다. -138~139쪽

오오누마공원역 안의 작은 매점에서는 병우유와 작은 빵 등을 팔았다. 일주일 중 며칠밖에 팔지 않아 나는 달력에 표시를 해두고 그날을 기다렸다. 매점에서 파는 우유는 유명한 야마나카 목장의 것이었는데 나는 마실 때마다 사치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141쪽

나는 잡념으로 이루어졌고 그걸로 곡도 써서 먹고 사는데 그걸 왜 없애나, 잡념은 나의 힘인데, 하고 생각해왔지만 진작에 떨쳐버려도 될 생각들, 미움, 질투, 집착 같은 것과 오래 생각해볼 것들은 다른 카테고리였다. 잡념도 다 같은 잡념이 아니었다. -169쪽

병을 인정받고 싶으면서 병이 없길 바라는 모순된 마음. -184쪽

<먼 북소리>에서 하루키는 장편 소설을 쓸 때 죽음을 생각한다고 했다. 이 책을 완성시킬 때까지는 절대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고 하는데, 어릴 때의 나라면 글 하나 쓰는데 무슨 비장함인가 싶었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가 앨범을 만들 때마다 하던 생각이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직 전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걸 전부 쏟아내놓기 전에는 절대 죽을 수 없지, 하고 매일매일 생각해왔다. 길을 건널 때마다, 심지어 비행기가 이륙을 할 때마다 ‘지금 죽으면 안 되는데’하고 생각했다. 어딘가 부끄러워 혼자만 생각하던 것이다. 역시 누군가는 ‘왠 비장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열여덟 살의 나처럼. 하지만 서른다섯 살의 누군가가 공감을 해준다면 그걸로 됐다. -215~216쪽

어차피 사라질 동경이라면 애초에 생기지도 말아라, 어차피 사라질 사랑이라면 애초에 생기지도 말아라, 날 나중에 싫어하게 될 거라면 좋아하지도 말아라,
라는 마음은 결국 어리광이었는데, 다르게 말하면
변하지 않는 사람을 주세요,
라는 아이 같은 마음.
흔한 패턴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타인에게 환상을 가지게 하려는 인류의 노력에도 당연히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조금 늦게 깨달은 것 같다. -221~222쪽

한때 가득차 있던
‘해야 하는 것들’ 리스트에는 이제

내일 병원가기.
우유 사놓기.
마감.

이런 것밖에 없다. -225쪽

나는 어떠한 사람이다, 라는 개념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그런 자세를 가지고 창작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리고 그 다음 시기도 있다.

지금은 내가 한계를 넘을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 그런 시도는 내 어딘가를 부수고 지나갔다. 대신 작업의 최상급은 한계 근처에 닿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의 추측은 이렇다. 일단 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지름의 평균 길이를 파악해두는 것도 중요하다. 원을 넓히는 것보다 모양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이 끝나면 파고들어가야 한다. 내 모양대로. -227~228쪽

잇님들(이웃님들을 일컫는 블로그 용어)을 찾는 파워블로거의 블로그가 아닌, 이런 블로그 누가 오겠어,라고 하면서 친구에게도 하지 않는 자기의 속 얘기를 털어놓는 블로그를 발견하면 정말 금광을 캔 것 같다. -230쪽

내 음악을 사람들이 왜 소비하는지를 나는 꽤 늦게 안 편인지도 모르겠다. 모이를 던질 때는 나중에 어떤 새가 와서 쪼아 먹을지 모르지 않는가. 편지나 쪽지에 ‘남에게 못하는 내 얘기를 대신 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는 얘기가 많았다. 나는 그런 얘기 다들 하고 사는 줄 알았지. -231쪽

언제 어디서나 흘러넘치는 재능이 진짜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멜로디가 밤이고 낮이고 퐁퐁 솟는 사람이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지금은 사라지기 십상인 멜로디를 잘 품고 진득하게 마음속에서 굴려서 두툼하게 만들어 어느 달밤에 꺼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한다.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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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마키메 마나부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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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꼭 작년 이맘때 교토에서 80일을 머물렀다. 바꿔 말하면 많지 않은 리뷰를 쓸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한 지도 거의 1년이 됐다는 뜻이다. 80일 중에서 40일을 햐쿠만벤(百万遍) 교차로 어귀의 한 방에서 지냈다. 아침마다 어딘지 신나 보이는 대학생들이 바쁘게 오가는 거리였다. 당연하다. 교토 대학이 있는 동네였으니까. 학교 근처여서 싸고 양 많으며 무엇보다 맛이 좋은 밥집도 몇 있었고, 교토에서 가장 아끼는 장소인 철학의 길도 졸 듯이 걷다 보면 어느새 닿을 거리여서 참 좋았다. 골목 곳곳에서 학생들이 나와 저마다의 학교로 흩어지는 이 도시의 아침이 얼마나 활기 넘치는지 가르쳐 준 곳이기도 했다. 관광객 없이 주민만으로 번성하고서야 비로소 볼 만한 매력이 생긴다.

 

 그렇게 지난 해 봄의 교토에서 무수히 스쳤던 대학생 중 누군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이 소설을 읽었다. 그 중 누군가는 호소카와 다마미처럼 주머니 사정이 신통치 않아서 휴대폰 요금이 연체 중이었고, 다른 누군가는 구스노키 후미처럼 아르바이트하는 식당에서 갑자기 홀 전체를 지휘해도 매니저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보였을지 모른다. 내가 매일 시간을 길에 흘리듯이 헤매고 다니기 훨씬 이전에, 모짱 같은 학생이 이미 교토 곳곳의 골목을 훨씬 이전에 마치 핥아 먹듯이 돌아다녔다. 당연히 내가 머물던 때에도 잠시 생각하다가 택하지 않았던 반대쪽 골목에는, 신기하다는 듯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지도를 보며 걷는 신입생이 있었을 듯하다.

 

모짱은 산조, 시조, 가와라마치 외곽 지리에 이상할 만큼 밝았다. 모짱이 열렬한 골목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종횡무진으로 얽히고설킨 갈림길들을 지나다가 낯선 골목을 발견하면 모짱은 망설이지 않고 발을 들여놓았다. 내가 잘 따라오는지 살피지도 않고 ˝이쪽이야, 이쪽˝ 하며 등을 구부리고 정신없이 걸어갔다. 이렇게 골목을 지날 때 전혀 모르는 동네가 나오지는 않을까, 상상하는 순간이 못 견디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실제로 좁은 골목 끝에 난데없이 음식점 문살문이 나타나거나 더 안쪽으로 또 골목이 이어지거나 지장보살 사당이 조용히 서서 기다리는 등 교토의 골목들은 신비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 때 나(아베)는 모짱이 품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이대로 계속 가다가 원래 장소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더 컸다. 아마 그런 불안마저도 모짱에게는 흥분의 소재일 것이다. -p.162~163

 

 교토는 스쳐 지나가는 뜨내기의 여행지이기 전에, 주민들의 거주지이고 학생들의 체류지다. 동시에 살고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의 시간과 경험이 무척 오랫동안 쌓인 퇴적지다. 그런 까닭에 교토 내 4개 대학교의 동아리 학생들이 각자 귀신들을 부려 승패를 겨룬다는 설명을 들어도 납득이 가지 않을 호루모’(오래 전에 본 전작 가모가와 호루모가 이 난제에서는 유용했다.) 경기와 이 단편들 속 인물들이 어떻게든 엮이는 모습이 미심쩍지 않았다. 교토의 거리와 골목 곳곳에서 헤이안(平安)에서 헤이세이(平成)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이 실은 아주 살짝 벌어진 틈새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사뭇 태연스레 묻는 듯한 풍경을 자주 보았다. 이 책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 교토가 들려 줄 법한 이야기를 모아 두었다

 

 교토의 과거와 현재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어도 그렇다고 여느 도시처럼 판이하게 다르지도 않은 까닭에 호루모라는 기상천외한 유희가 이야기 속 인물들의 일상에 제법 그럴싸하게 스몄겠지만, 반대로 호루모야말로 교토의 시간들이 얼마나 절묘하게 맞물렸는지 보여 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오랜 우정보다 새 연정을 택하려는 친구들 사이의 다툼, 고등학생 화자가 아르바이트 다니는 식당의 과묵하고 민활한 새 아르바이트 동료가 물어도 알려 주지 않을 듯한 대학교 동아리 활동, 교토의 운전면허 학원이나 도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다른 대학교 출신 지인과의 관계 속 호루모는 타인에게 말하기는 퍽 곤혹스러워도, 본인에게는 대단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여가처럼 보인다. 그저 교토의 가장 예스럽고 낡은 흔적일 뿐이다.

 

 이미 절판된 책의 표지는 언뜻 보면 아기자기하거나 부산스럽겠지만, 잘 보면 제법 착실히 압축한 교토 지도 일러스트다. 곳곳의 지명을 손 글씨풍의 서체에 한자로 적어서 이게 뭐고 또 어딘지 오랫동안 와 닿지 않았다.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면지는 같은 그림 지도를 한글로 옮긴 것이지만, 예전에 봤더라도 딱히 느낌이 다르지 않았을 듯하다. 아는 사람과 친한 사람은 다르니까. 2년 전 다녀온 첫 여름 교토 여행 후에 봤다면 조금 이른 감은 있어도 이 도시와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서 좋았을 테고, 이 책을 가져갔던 작년의 교토에서 봤다면 어디든 당장 내일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뿌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벚꽃이 많이 떠났을 교토 한 구석의 호텔에서 한발 늦은 꽃놀이 계획을 세우기 1주일 전에 읽으니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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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마키메 마나부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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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모가와 강물, 던져진 주사위, 승병(히에이잔 산의 사찰 엔랴쿠지의 승병. 강대한 무력을 갖추어 중앙 정부조차 통제하지 못했다-옮긴이).’
이것은 헤이안 시대 도읍에서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시라카와 법황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으로 꼽은 이른바 ‘천하 3대 불여의(不如意)’다.
그날 밤 두 사람(사다코와 쇼코)은 쇼코의 방에 있는 고타쓰에 앉아서 천하 3대 불여의를 새로 정했다.
˝가모가와 강변의 바퀴벌레 커플들, 발끝의 냉기, 남자 마음.˝ -29쪽

참석하는 신입생 환영회마다 남자들 무리 한가운데 앉았지만 사다코의 마음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인기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상대가 접근하지 않는 한 인기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허들을 애써 높이 세워놓고 스스로 인기 없는 아이라고 여겼다. 조금 아니꼽게 보이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다코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사다코가 볼 때 자신의 상황은 응모권을 잔뜩 받았지만 추첨을 해보니 전부 휴대용 화장지만 뽑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6~37쪽

후방 상황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사다코와 쇼코) 둘이서 ‘무소바나 어택’을 펼치는 모습을 어떤 이는 막무가내 자포자기식 행동이라고 평했지만, 그것은 참으로 정곡을 찌른 의견이었다. 실제로 그녀들에게 호루모의 승패 따위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다만 자신들의 분노가 쏠리는 대로, 공격 본능이 시키는 대로 휘젓고 싶었을 뿐이었다. -50~51쪽

기온의 시조 거리에 있는 건물 3층에 전통 주점 ‘쇼추나곤’이 있는데, 사다코는 1학년 때부터 이곳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60~61쪽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Ann’s cafe’는 교토조형예술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라카와 거리에 있었다.
그 사람이 식당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8월 중순의 일요일.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햇살 따가운 오후에 나(사토시)는 난생처음 데이트를 했다.
자전거 짐받이에 그 사람을 태우고 시라카와 거리를 단숨에 달려 내려갔다.
그 사람 이름은 구스노키 후미라고 한다. -86쪽

그날 저녁은 모든 일이 그녀(구스노키 후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거의 꽉 찬 테이블들에서 쉴새없이 주문이 날아들어도 그녀는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담담하게 지휘해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일임을 여기 직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홀 담당은 그녀가 전표를 내밀며 손으로 가리키는 쟁반을 들고 테이블 사이를 왕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매니저 자리에 가보면 인원수에 맞게 개인 접시까지 준비된 쟁반 위에, 가까운 테이블 순서대로 요리와 음료가 차려져 있었다. 점장이 지휘할 때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홀 담당은 그저 전표에 적힌 대로 가까운 테이블부터 순서대로 요리를 내가고 쟁반이 비면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틈틈이 홀을 살펴보고는 각 테이블에서 주문한 요리가 얼마나 진척되고 있는지 점검했다. 열 개가 넘는 테이블을 살피고 조리 시간까지 계산에 넣어 주문의 우선순위를 결정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주방에 있는 요리사 세 사람의 작업 속도까지 계산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나는 식당 한구석에서 그녀가 말없이 시간을 보낸 의미를 이해했다. -94~95쪽

밤이 무섭다는 건 또 무슨 말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마데가와 거리와 만나는 교차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할 때였다. 그녀(구스노키 후미)가 갑자기 자전거를 세웠다.
˝왜 그래요? 초록불이잖아요.˝
그녀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앞쪽을 응시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좇았지만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 건너편에서는 보행자용 신호가 깜박거리기 시작할 뿐이었다.
˝이쪽으로 가자.˝
그녀는 갑자기 자전거 방향을 틀더니 곧 초록불로 바뀐 시라카와 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철학의 길’로 들어섰다. 도중에도 교차로를 힐끔힐끔 돌아보는 그녀에게 ˝뭐가 있었어요?˝하고 물어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귀신이라도 본 거예요?˝
농담 투로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빙글빙글 웃는 내 표정이 이내 꽁꽁 얼어버릴 정도로 아주 무서운 얼굴이었다. (다음)

(이어서) 벚나무 가지가 검은 아치처럼 철학의 길을 뒤덮고 있었다. 이따금 매미가 잠에 취한 듯 짧게 울음소리를 냈다. 우리는 자갈 소리를 내며 말없이 길을 걸었다. 자판기의 희끗희끗한 불빛을 받아 맥없이 날갯짓하는 모기의 실루엣이 도드라졌다. 밤에 공명하듯 저음으로 으르렁거리는 자판기 바로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그녀는 정면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고마워. 저기야. ...... 이 신세는 꼭 갚을게.˝
˝그럼 여름방학 수학 숙제나 대신 해줘요. 양이 보통 많은 게 아니거든요.˝
˝그런 건 스스로해야 의미가 있지.˝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타일렀다. 아무래도 평소 모습으로 돌아간 듯했다.
˝소년은 집이 어디야?˝
˝기타야마요.˝
˝조심해서 가.˝
헬멧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100~101쪽

시라카와 거리를 따라 죽 늘어선 가로수에서 매미들이 마치 해방이라도 맞은 듯 아우성이었다. 8월도 중순에 접어들자 햇살은 광기를 띤 것처럼 매서워졌다. -102쪽

5분 뒤 나(사토시)는 그녀(구스노키 후미)의 자전거로 시라카와 거리를 힘차게 달려 내려갔다. 바로 뒤에 앉아 ˝어우 빨라, 너무 빠르잖아˝ 하고 중얼거리는 그녀를 태우고 오후 4시가 되도록 여전히 해가 높은 교토의 휴일을 향해 달렸다. -106쪽

(107쪽 밑줄 긋기 사진 참조)
˝이 문제예요. 풀 수 있겠어요?˝
햐쿠만벤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그녀(구스노키 후미)에게 보여주었다. 노트에 적힌 그림과 글자가 도망쳐버릴까 걱정될 만큼 그녀는 노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좋은 문제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너희 선생님이 만든 문제니?˝
˝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어요. 이게 무슨 수학 문제라는 건지. 더구나 그걸 증명하라니 말이에요.˝
노트에는 다카노가와 강에 가모가와[賀茂川] 강, 그 두 강이 합류한 가모가와[鴨川] 강, 나아가 비와코 수로 등 모두 네 줄기의 강물과 수로, 그것들에 가설된 다리 아홉 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각 다리를 두 번 통과하는 일 없이 9개 다리를 전부 건널 수 있는가? 수학적으로 증명하라.’
˝풀 수 있겠어요, 구스노키 씨? 그런데 이런 것도 수학에 속하긴 하나요?˝
˝한붓그리기 문제네.˝
그녀는 내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붓그리기?˝
˝딱 한 번만 통과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한붓그리기나 마찬가지잖아.˝ (이어서)

(다음)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다리를 건너는 것이 어떻게 한붓그리기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알 듯 말 듯해서 나는 모호하게 ˝음......˝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소년은 다리를 전부 건널 수 있었어?˝
˝안 되던걸요. 마지막에 꼭 하나가 남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뭘 하려는 건데?˝
˝그림에 있는 다리를 실제로 돌아다녀보는 거죠. 실물을 놓고 움직여보면 뭔가 떠오를지도 모르잖아요.˝ -106~109쪽

˝물리나 수학 세계에는 아무도 증명한 적 없어서 애초에 실재하는지 어떤지도 확실치 않은 것을 연구하는 사람이 많아. 주위에서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거니까 연구해 봐야 소용없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데도 말이야. 그런 사람들이 하려는 것도 어쩌면 염라대왕을 만나려는 것과 같은 일인지 몰라.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존재를 믿지 않으니까. 하지만 개중에는 정말로 발견하고야 마는 사람이 있어. 있을 리 없는 데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아마 그런 사람은 염라대왕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길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어.˝ -123쪽

나(아베)와 모짱이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한 기간은 아주 짧았다. 입학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모짱이 요시다에 있는 기숙사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 뒤 만날 때마다 놀러 오라고 해서 기숙사를 구경하러 가본 적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입구에서는 누가 고함을 질러대는가 하면 전부 반벌거숭이로 돌아다니고 복도에 개가 뛰어다니는 등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에 일찌감치 물러났다. -150~151쪽

하지만 아무리 우락부락해 보여도 모짱은 섬세한 사내였다. 내 방에 놀라 와도 혼자 말없이 책을 읽거나 노트에 그림을 그릴 때가 많았다. 모짱은 공학을 전공하므로 제도 숙제라도 하나 보다 생각하며 들여다보면 대개 당구를 연구하고 있었다. 모짱은 당구 실력이 뛰어나서 나(아베)도 몇 번 내기당구를 했다가 푼돈을 빼았겼다.
˝당구로 깨달음을 얻고 싶거든˝
종종 영문 모를 원대한 목표를 내세웠지만, 그 뒤 모짱의 연구가 열매를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악보를 가져다가 열심히 들여다보기에 뭘 그렇게 폼을 잡느냐고 놀리자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로 <카르멘>을 부르기 시작한 적도 있다. 정말로 악보를 볼 줄 아는지, 베토벤 교향곡을 혼자서 열심히 흥얼거렸을 때는 정말이지 말문이 막혔다. 녀석은 ˝소리는 색이야˝라고 종종 말했지만, 모짱의 뇌리에서 반짝일 선명한 색채를 그의 연주에서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온몸에서 주체 못할 에너지를 발산해 놓고 그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좋은 책과 좋은 악보만 있다면 나는 만족해.˝
그 동과 정의 신비한 조화가 모짱이라는 남자의 정수였다. -152쪽

˝아베, 너도 연애편지 쓰란 말이다. 그럼 나도 쓸게.˝
˝왜 그래야 하는데? 급한 건 너잖아?˝
목소리를 높이는 나를 두고 모짱은 가뿐하게 일어나 가방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나도 급하게 뒤를 따랐다.
˝어디 가는데?˝
˝재료 사러 간다.˝
˝재료?˝
˝편지 쓰려면 최고급 재료가 필요하지 않겠냐? 우선 고급 편지지와 펜이 필요하잖아.˝
모짱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161~162쪽

모짱은 산조, 시조, 가와라마치 외곽 지리에 이상할 만큼 밝았다. 모짱이 열렬한 ‘골목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종횡무진으로 얽히고설킨 갈림길들을 지나다가 낯선 골목을 발견하면 모짱은 망설이지 않고 발을 들여놓았다. 내가 잘 따라오는지 살피지도 않고 ˝이쪽이야, 이쪽˝ 하며 등을 구부리고 정신없이 걸어갔다. 이렇게 골목을 지날 때 전혀 모르는 동네가 나오지는 않을까, 상상하는 순간이 못 견디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실제로 좁은 골목 끝에 난데없이 음식점 문살문이 나타나거나 더 안쪽으로 또 골목이 이어지거나 지장보살 사당이 조용히 서서 기다리는 등 교토의 골목들은 신비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 때 나(아베)는 모짱이 품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이대로 계속 가다가 원래 장소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더 컸다. 아마 그런 불안마저도 모짱에게는 흥분의 소재일 것이다. -162~163쪽

˝가지이 모토지로(1901~1932. 소설가-옮긴이)는 평생 단 한 권의 책밖에 펴내지 않았어.˝
˝그래?˝
˝작품의 무대가 된 마루젠 교토 가와라마치 분점이 문을 닫기로 결정했을 때 모두 가지이 모토지로의 책을 사러 오는 통에 폐점 직전 일주일 동안 문고본이 무려 천 권이나 팔렸다더군.˝ -187쪽

가쓰라 선생은 영문과 교수이자 번역가였다.
어머니가 가쓰라 선생이 번역한 책들의 열렬한 팬이라 집에는 늘 선생이 번역한 책이 많이 꽂혀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책 읽는 데 조금씩 재미를 붙인 나(도모에 야마부키)는 가까이 있던 번역본을 들춰보다가 그만 가쓰라 선생의 팬이 되었다.
나는 여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눈물 쏙 뺴는 이야기’ 식의 단순한 책은 좋아하지 않앗다. 그 점에서 가쓰라 선생이 옮긴 책은 여성이 주인공이면서도 늘 여성에게 어딘지 심술궂은 시각을 취하고 있어 신비감과 호감을 느끼게 했다. 물론 그것은 원작에 달린 일이고 작품에 따라 예외도 있지만 ˝어느 책이나 독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하고 어머니와 나는 입을 모아 말했다. 묘한 점에서 취향이 같은 모녀였다.
원래 영문과를 지망하던 나는 기왕이면 가쓰라 선생이 있는 대학을 지원하기로 했다. -201~202쪽

도시샤대학의 1, 2학년은 교토 시내에서 남쪽으로 한참 벗어난 데 있는 교타나베 캠퍼스에서 공부했다. 교토 고쇼(예전 황궁으로 쓰이던 곳-옮긴이) 북쪽에 있는 이마데가와 캠퍼스는 3학년이 되어야 다닐 수 있었다. 이마데가와에 첫발을 딛는 날까지 1, 2학년은 오로지 ‘다나베자카’라 불리는 긴 언덕길 위에 있는 캠퍼스에 다녀야 했다. 나(도모에 야마부키)는 불평 한마디 없이 매일 열심히 언덕길을 오르내렸다. 그 위에 가쓰라 선생이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 언덕 위에 선생은 없었다. 선생은 1, 2학년이 수강히는 일반교양 과목을 가르치지 않았다. 작년까지는 교타나베 캠퍼스에서도 기초론을 한 학점 맡았지만 을해부터는 다른 교수로 바뀌 었다고 했다.
더욱 충격적인 정보가 날아들었다. 세상에, 가쓰라 선생이 올해로 정년퇴직을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하지만 연세가 지긋하니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다 곧 가쓰라 선생의 퇴직은 선생이 지도하는 동아리 선배에게 확인한 사실이라는 지극히 신뢰성 높은 정보까지 날아들었다.
세상에... (다음)

(이어서) 나는 아연해서 다나베자카를 내려다보았다. 매일 언덕길을 오르내리다 보니 구두 굽이 이상하게 빨리 닳아버렸다. 더구나 바닥의 경사 때문에 굽도 경사지게 닳는 탓에 평지를 걸을 때는 무척 어색했다. 결국 좋아하지도 않는 운동화를 신고 매일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다 무엇 때문이었나? 그렇다, 언젠가 가쓰라 선생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가쓰라 선생은 퇴직한다고 한다. 빌어먹을, 미리 알았으면 굳이 재수하지도 않았지.
나는 치를 떨며 분노했다. 재수하지 않고 합격했다면 작년에 이 캠퍼스에서 기초론을 들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그 심정을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도모에는 역시 언 럭키 걸이구나˝하며 심하게 굴려서 발음하는 바람에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모른다. -203~204쪽

이마데가와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시조 역에서 내렸다. 시조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걷고, 기온 거리를 따라 야사카신사까지 갔다가 유턴. 이번에는 가와라마치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신쿄고쿠 아케이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도중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여기저기 상점을 구경하고 게임장에 들르는 등 꼭 고등학생들이 데이트하는 것 같았다. -241쪽

˝이이는 뭘 했는데? 교토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했지?˝
˝나? 그래......˝
나오코는 승차구를 알려주는 바닥 표시 앞에 두 줄로 가지런히 늘어선 승객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도쿄 사람들은 왜 이렇게 얌전하게 전철을 기다릴까?˝
언제나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아오야마에 있는 의류회사에서 일한 지 3년이었다. 도쿄 사람들이라고 특별히 상냥한 것도 아니며, 전철에 오를 때 새치기를 하면 노골적으로 혀를 차거나 심지어 팔꿈치로 가볍게 찌를 만큼 의외로 공격적이라는 것을 나오코는 잘 알았다. -267쪽

‘역시 사람은 조직이라는 필터로만 개인을 바라보는 생물이구나.’
선입견 때문에 마음의 눈이 너무도 쉽게 흐려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을 새로이 한 (사카키바라) 야스시는 ‘그런데 이탈리아인은 어떻게 돼지고기를 이렇게 먹을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며 혀에 치즈 같은 맛을 남기는 피자의 생햄을 냉큼 해치웠다. -289쪽

“호소카와는 어디서 하숙해? 리쓰메이칸 근처?”
“후나오카야마 산기슭. 무라사키노 근처.”
“아하, 겐쿤신사가 있는곳.”
“그래, 잘 아네.”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호소카와) 다마미는 감탄했다. 그녀는 맑고 따뜻한 날 겐쿤신사 도리이를 지나 후나오카야마를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330~331쪽

내일 아즈치를 출발해 교토로 떠납니다. 나가모치(옷이나 각종 도구를 수납하거나 옮기는 커다란 궤)도 가지고 갑니다. 교토는 먼지가 많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만 총총.
덴쇼 10년 5월 스무여드레, 가시와바라 나베마루
오타마 님 -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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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 - 과감히 덜어내는 힘
마이클 바스카 지음, 최윤영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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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척 낙관적인 책이다. 그런데도 좀처럼 잘 읽히지는 않았다. 편집 상태가 다소 엉성한 탓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도 이 책의 낙관성 자체가 엉거주춤해서 신경이 쓰였다. 이 책은 큐레이션의 역할과 그 중요성이 점점 상승하며, 활동 영역도 확장되는 일련의 추세를 다채롭게 서술했다. 이렇게 현대 사회에서 큐레이션의 역할을 제고하도록 역설한 가장 큰 이유는 현대 사회가 소비 가능한 부와 상품이 포화된 ‘과잉 사회’라는 저자의 인식이다. 물론 이런 인식이 지금의 상황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으로 흐르는 것을 상당히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강조하는 큐레이션의 필요성은, 각자에게 맞는 것들을 따로 찾는 체계가 필요할 정도로 지금이 많은 측면에서 ‘풍요로운 시대’라는 판단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큐레이션은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을 없애버리기도 하고 일련의 대상을 아무런 개성 없이 밋밋한 존재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개인적 주관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에 극도로 자기 중심적이다. 또 경험은 물론 우리 자신까지도 지극히 계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우리 삶을 지배하던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는 연속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단편적인 구조로 바뀌어버린다. -p.383

      

 그런데 이렇게 조심스럽지만 선명한 낙관성은 큐레이션이 만들어 갈 시대를 포괄적으로 전망하는 데에 이르면 조심스럽고 모호한 관망으로 돌아서는 듯하다. 분명 적지 않은 분량을 들여서 현재 세계 곳곳의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진행 중인 큐레이션의 사례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일정한 방향의 사회적 변화로 수렴이 가능할지, 가능하다면 그 방향은 지금보다 더 풍요롭거나 다채로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중하고 간략한 언급에 그치려고 애쓰는 인상이다. 결국 장기 호황 속에서 이루어진 과잉 사회가 수많은 상품들 중에서 더 좋은 것을 골라서 나머지를 덜어내도록 돕는 큐레이션을 요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낙관적이지만, 정작 이 큐레이션의 역할이 증가할 향후의 미래상은 아직 뭐라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사회에서 큐레이션의 어떤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큐레이션은 정리할 수 없을 정도 엄청난 양에 압도되는 상황, 바로 과잉 현상을 타개할 대응책으로 사용돼야 한다. 물론 모든 경우에 적합하지는 않겠지만 쓸모없는 것들을 과감히 덜어낼 수 있는 큐레이션이야말로 과잉 사회의 강력한 돌파구다. -p.11

      

 여기서 큐레이션의 가치를 제창한 저자의 확신이 부족하다고 지적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것은 처음부터 이른바 ‘과잉 사회’가 된 현대의 필연적인 결과물이자 필수적인 해결책으로까지 큐레이션의 역할을 부각시키고자 했던 그의 의욕이 초래한 모순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다방면에서 큐레이션의 의도를 지닌 활동이 활발해질 정도의 과잉, 혹은 양적 팽창의 기준과 그러한 팽창이 그 자체로 큐레이션에 직결되는지의 여부에 대한 분석이나 숙고가 전체적으로 빈약하다. 그 논리의 공백을 채운 것은 사람들이 확인하고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화의 양이 크게 증가했기에, 더 필요하고 우수한 것을 찾아내는 큐레이션 활동이 산업으로서 부상할 것이라는 저자의 직관과 일종의 순환 논법이다.

      

 최근 들어 큐레이션의 영역이 확장되고 역할이 증대되는 중이며 그 배경에 현대 사회의 경제적 과잉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큐레이션과 과잉 사회의 필연성이나 과잉 사회 자체의 해결책으로서의 큐레이션의 역할 둘 모두를 인정하기에는 아직 성급할 뿐만 아니라 저자 본인의 관점도 일관성이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서 강조해야 하는 지점은 큐레이션의 세계·사회·역사적 비중이나 역할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측면을 강조하고 부각시킨 덕분에 이 책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비록 설득력이 부족하더라고, 큐레이션이 지금 세계와 우리 사회를 바꾸고 있다는 의미가 부여돼야만 사람들은 관심을 가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 중요하고 대단한 원리를 안다는 그 느낌을 참 좋아한다. 저자는 이 부분을 잘 이해했다고 본다. 그는 여러 포럼이며 콘퍼런스에서 기조 연설자로 초청할 만한 자질을 갖췄다.

      

보존하며 보살피는 의미가 결여된 큐레이션 작업은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p.398

앞서 살펴봤듯 좋은 큐레이션은 전문 지식과 취향, 판단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 공감, 배려 또한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다. 큐레이션에 이 3가지 요소가 빠지게 되면 이내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해당 큐레이션 작업은 한낱 허세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봉사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한다면, 또 큐레이션 그 자체보다 큐레이션 대상에 더욱 집중한다면 그 결과는 제대로 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p.399

      

 그러나 경제적 여건이 안정된 일부 국가들에서 큐레이션이 산업의 핵심 수단으로 전개되고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인 양상과 앞으로의 변화 가능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 책에서도 그것을 보여 주는 개별적인 사례들이, 큐레이션에 대한 세계·경제적 의미 부여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다. 큐레이션의 본래 의미가 “보살피다”인 까닭에 기업 혹은 개인으로서의 큐레이터는 항상 이용자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태도를 지녀야 하고, 그러려면 각자가 큐레이션이라는 행위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선택·선별하는 대상들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원칙도 설득력이 충분했다. 이렇게 지적한 큐레이션의 필수 요소들이 어디서나 통하는 자질이라는 점 역시, 큐레이션 작업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과잉 사회의 해결책”이라는 과대한 의미 부여보다도 더 가치 있었다. 선별하는 자신보다 그의 선택을 받는 대상과 그 대상을 선택할 타인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새삼 커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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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 - 과감히 덜어내는 힘
마이클 바스카 지음, 최윤영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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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은 능숙함과 탁월한 주관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영역으로 오늘날과 같은 기술 경제 시대에 새로운 직종을 창출할 수 있는 하나의 보루다. 하지만 이마저도 빠른 속도로 알고리즘 바탕의 자동 방식이 대체하게 되면서 확실한 미래는 보장할수 없는 상황이다. -397쪽

보존하며 보살피는 의미가 결여된 큐레이션 작업은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398쪽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질문은 큐레이션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니다. 좋은 큐레이션과 나쁜 큐레이션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398~399쪽

앞서 살펴봤듯 좋은 큐레이션은 전문 지식과 취향, 판단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 공감, 배려 또한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다. 큐레이션에 이 3가지 요소가 빠지게 되면 이내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해당 큐레이션 작업은 한낱 허세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봉사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한다면, 또 큐레이션 그 자체보다 큐레이션 대상에 더욱 집중한다면 그 결과는 제대로 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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