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건축가 - Talking Architec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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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정기용, 그 이름을 언제 처음 들었더라. 아마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짓는단 얘기할 때나, 한창 전국에 기적의 도서관 지을 때였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다. 평소 어린이 책에 관심도 없지 않고 특히 어린이들에게 제대로 된 도서관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었기에 그 건축 프로젝트 역시 흥미로웠지만 역시나 방송에서 나서는 떠들썩한 일은 별로여서 애써 모른 척 했다. 그러니 그 무렵에 건축가 이름 정도는 들었을 수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사업이 다소 잠잠해지고 정기용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그가 어린이들만을 위한 도서관을 여러 채 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가 직접 쓴 ‘기적의 도서관’을 샀을 때였다.

 

 그런 그가 죽었다. 지난해 꽃피던 봄 3월 11일이었다. 아깝다는 말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가 지은 도서관 때문이다. 책과 아이들을 아울러, 인문학과 인간을 함께 품을 수 있는 건축가라면 앞으로 할 일도, 말도 더 많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기적의 도서관’에서 보여준 것은 단순한 건축물의 진행과정이 아닌, 그곳을 이용할 아이들과 부모,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릴 책에 대한 한 인간의 깊은 애정과 통찰이었기에. 건축가라는 엄연한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아니 오히려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바깥의 요소들을 그토록 성실하게 살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보여줬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무척이나 궁금했다. 물론 그 한편을 보기 위해 부산영화제까지 가진 못했지만 말이다. 교차상영도 아닌 서울에서 각각 한 곳의 상영관에서 19일 한번, 21일 한번 상영하는 기회만큼은 놓칠 수 없었다. 부랴부랴 도착한 아담한 상영관에는 역시나 관객들이 가득했다. 상영 상황을 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건축가를 생각하는 이들이 이만큼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으리라.

 

 100분 정도의 시간에 정기용이란 건축가의 말과 생각, 작품뿐 아니라 당연히 현재 한국의 건축현실을 아우르려다보니 영화의 전개는 다소 급한 인상을 줬다. 반면 그런 만큼 이 영화는 정기용의 한 순간 한 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마치 기꺼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잘 짜인 강연처럼 정기용 본인의 생각은 물론 그에 대해 들려주는 동료들 역시 자신만이 갖고 있는 정기용에 대한 인상을 유창하면서도 예리하게 짚어냈다. 김봉렬 한예종 교수는 그를 일컬어 “사용하는 인간을 위한 건축에 천착했다”면서도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힘이 필요하지만 다소 낭만성에 치우친 면도 있다”고 말했다. 승효상 역시 “표현하는 언어에 비해 실제 구현된 도면이 아쉬워 ‘형은 그냥 말만 하라’고 한 적이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의 건축은 단순한 완결성을 추구하기보다 이용자가 책을 읽듯이 접근하는 건축”이라고 말했다. 결국 단순한 상찬을 넘어서 오직 정기용이라는 건축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을 보여준 셈이다.

 

 이 영화의 큰 축이 두 가지 있다면, 하나는 한국 공공건축의 ‘공공성’ 문제일 것이고, 나머지는 정기용이 죽음을 얼마 앞두고 열었던 그의 건축전 준비 과정이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자면 전자가 영화의 전반부를, 나날이 수척해지는 그가 마지막으로 정성을 기울인 전시회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개인적으로는 평소의 관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전반부에 좀 더 마음이 쏠렸다.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무주 산골의 면사무소에 노인용 목욕탕을 놓고 10여년 만에 그가 직접 이용하는 장면은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온 성의를 기울여 이용자를 위한 건축을 하고 그 결과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긍지를 보여줬다. 욕탕에 몸을 담그는 그의 앞에 놓인 통유리의 빛으로 말이다.

 

 바로 이런 자부심이 있는 까닭에 그는 이 공공건축에 대한 사회의 몰상식에 누구보다도 강하게 반발한다. 운동장 둘레의 관중석 위로 등나무꽃이 기적처럼 흐드러진 운동장에 들이댄 우악스런 으리으리한 태양광 집열판에 분노하는 목소리는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거친(?) 장면일 것이다. 그것을 단순히 자신의 작업에 대한 고집이나 애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는 그 건물을 설계할 때부터 그 땅에서 사는 이들에게 온전히 ‘바쳤다.’ 그는 자신의 건물을 함부로 다루어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건물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주인들을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만 더 신경 쓰고 아껴준다면 그들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공간, 오직 그곳에 사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우아함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공간을 너무도 무신경하게 망가뜨리는 공무원과 사람들이 그를 슬프게 했다. 그네들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중요한 세부였고, 더없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명분이며 명성이 얼마나 하찮은 장식인지 그는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 무신경한 건축 담당 공무원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무엇을 모르는 지마저 알지 못해 건축가에게 묻지도 않는다며 거푸 한숨을 토했다. 이 장면은 정기용이 죽는 날까지 계속 그렇게 상처받았으리란 일종의 대유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한 건축에 집중한 이상 공무원과 대중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상처이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허황된 세계적 랜드마크를 꿈꾼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다룬 짧지 않은 부분은 표현 방식이 무척 절제됐다. 정기용 주변의 프로젝트 응모자들의 육성을 중심으로 진행하며 건축 장소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무시한 건축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집요하게 의문을 던졌다. 국제적 명성에 대한 집착, 평당 건축비 수천만원에 이르는 비용의 낭비를 다시금 비판하는 대신 과연 무엇을 위해 그래야만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정기용은 이렇게 말한다. “서울시장도, 서울시민도 아닌 건축가 한 명의 만족을 위한 건축이다. 이를 위해 그 큰 돈을 써야하는가”라고. 공공건축은 공공이 우러를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공공 대중이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담아둘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항상 자신의 작품으로 인간과 소통하려 했던 사람이기에 그 작품의 처음이자 마지막 이용자인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정기용의 시선은 더욱 곡진하다. 단순한 자의식이 아닌, 자신의 작품이 떠나고 돌아오는 원점이기 때문이다. “일민미술관 건축전이 끝날 때까지는 살아있을 것”이라면서도 “항상 맑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직시하고 싶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위엄을 가지고 그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작품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그 건물과 함께 늙어가며 그들 자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위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정기용은 노인들을 위해 면사무소에 목욕탕을 설계했듯, 지방의 아이들을 위해 그들이 책을 즐길 수 있는 도서관을 구상했다. 아이도 어른도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두 건물 모두 그들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홀수, 짝수 날에 번갈아가며 목욕탕을 찾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하루하루 개운함을 느끼며 남은 삶의 거추장스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자신들에게만 허락된 독서의 공간에서 스스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으스대지 않고 드러내는 법을 배운다. 새해에 내려간 정읍 본가 근처의 기적의 도서관에서, 폐관일 알림을 보고 서운한 표정으로 돌아서던 소녀의 뒷모습을 봤다. 나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공간보다 더 소중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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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홍련 [dts] - (2disc) 할인행사
김지운 감독, 염정아 외 출연 / 메트로DVD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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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영화를 왜 봤더라...... 그래, 맞다. 학원에 다니던 시절 언제부터인가 출입문 너머로 보이는 맞은 편 반의 문에는 영화 팜플렛이 한 장씩 붙기 시작했다. 뭐 딱히 일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교체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 반의 아무나 영화를 보고 오면 자기가 가져온 팜플렛으로 갈아붙이는 것 같았다. 누구와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나는 누구에게 그런 궁금함을 물어보지도 못했으니까...... 마침 난 그 문이 맞바로 보이는 출입문 바로 앞 분단의 두번째 줄에 앉아있어서 하루에도 꽤 긴 시간을 그 팜플렛들과 눈을 마주쳐야 했다. 하지만 딱히 내가 영화관까지 찾아가서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게 만드는 녀석은 없었다.

 그건 딱히 내가 처음 혼자 서울로 올라올 때, 부모님도 나도 서로 믿지 않았던, '공연 찾아다니지 않고, 오직 공부!'라는 약속에 대한 죄책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평소 영화라면 '지식인, 또는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자의 소양'으로써의 일종의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가끔 아름답고 멋진 배우들에게 감탄하고, 내 발로는 찾아가기 힘든 배경들에 혹하고, 오직 머리 속에서만 왔다갔다하는 내 온갖 상념들의 구체적인 현현에 감탄하던 그 영화에의 애정이 고갈되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건 자괴감이었다...... 그저 지난 3년 동안 원없이 -물론 내 기준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 관점에서- 논 결과가 이 모양이라는 생각에 난 다른 건 몰라도 영화만큼은 보지 않으리라고 스스로를 들들 볶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자연스럽게 영화에 애정이 식고 말았다. 그냥 그런 매체 정도로......(참고로 난 책에 대해서는 그 방법이 절대 불가능했다. 수없이 시행해보려 노력했으나, 절대로......)  워낙 가리는 장르, 스토리, 기타 잡다한 부분이 많은 탓에 평소 영화를 많이 보는 편도 아니었고, 내 기억이 맞다면 고3 때 본 영화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2번 본 것뿐이었지만, 좌우지간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영화라는 장르가 본 후의 충격이 꽤나 오래가고 시설도 좋은 서울의 극장에서 한번 보기로 하면 끝이 없으리란 막연한 자제감으로.

 그러다가 어느 날은 또다시 맞은편 문짝의 팜플렛이 바뀌었다. 제목부터 봤을 때는 기도차지 않았다. '장화 홍련'. '이게 뭐야? 요즘이 어느 세상인데 이런 제목의 영화를 지었지? 무슨 월하의 공동묘지도 아니고, 무슨 싸구려 컴퓨터그래픽으로 말초신경이나 자극해줄 생각인가? 지겹다, 지겨워.' 대충 이랬다. 아마 처음에는 그 제목의 유치함과 고풍스러움에 기가 질려서 그 밖의 부분은 자세히 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반의 여자아이들이 코엑스몰 메가박스에서 장화 홍련 무대인사 할 때 문근영이 온다고 난리를 할 때도 무덤덤하게, 혹은 약간은 경멸스럽게 받아들였다. 사실 난 그때까지 문근영이 누군지도 잘 몰랐으니까^^;.(오히려 나로 하여금 이 영화를 보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던 내가 아는 배우라고는 무표정하게 서있었던 아버지 역의 김갑수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포스터 전체를 바라보게 되었다. 뭐 난 항상 그 포스터를 맞바로 보는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봐야 할 영화라고, 반드시. 아버지의 얼굴은 근엄하고, 어머니의 얼굴은 화사하다. 배경이 되는 벽지도 딸들이 앉아 있는 쇼파도, 부티와 무게감이 가득하다. 어느 쪽으로 봐도 적어도 중산층, 아니 그 이상은 될 법한 가정의 가족사진 풍경이다. 그런데 피투성이의 딸들. 그들이 차려입은 고운 순백의 옷은 이미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그게 내 모습이었다. 그래서 난 그 영화를 봐야만했다.

 남들이 보기 좋은, 남들이 선망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괜찮게 생각할 법한 집안에서 온갖 사람들과 시시때때로 겪어야하는 감정의 싸움은 어린 나이라고 해서 비껴가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는 바로 그녀들처럼 피투성이가 된 순백의 성의(聖衣)다. 항상 남들에게는 행복한 척 여유로운 척, 고상한 척 도도한 자세를 유지하는 수많은 집안들이 결국은 저렇게 자신들의 백의는 피에 물들다 못해서 새까맣게 변하고, 그들의 어린 자녀들은 서서히 그런 부모를 따라가고 있다. 물론 부모님 모두에게서 명석함과 현명함을 배운 것과는 별개로, 아버지에게서 지금에야 알 것 같은 항상 한 발짝 물러서는 처신의 묘와 내가 평생 동안 안고 갈 책에 대한 사랑을 물려받았으며, -아버지는 그런 책 사랑을, 지방 유지로써 남부럽잖게 호화찬란한 우리 집안의 전성기를 누렸던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머니에게서는 나이를 먹어 갈수록 그 현명함에 감탄케 하는, 타인에 대한 물 흐르는 듯한 예절바른 태도와 아름답고 예쁜 것들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그런데 계모로 나오는 염정아가 남동생 내외를 불러놓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보여주는 그 대화 장면의 경박함과 괴기스러움을 어머니는 때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때때로 드러내고는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타인'에 대해 유달리 예절바르다고 한 것이다. 별로 사이가 가깝지 않은 타인에 대해.) 하지만 그 대가가 결코 적지 않았다. 나도 내 옷을 피로 물들여야 했다. 난 어쩌면 남들보다 꽤나 빨리 그 사실을 알아차린 축에 속할 지도 모른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유키노처럼 난 초등학생 시절부터도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내가 순수한 존재로 보이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을 뿐, 순수함을 포기한 지는 오래였다. 그 또한 바로 그 중산층 가정의 부모 덕이었다.

 하지만 이 순수함이 때로는 그 껍질을 깨고 말 그대로 핏빛으로 울음을 터뜨릴 때도 있다. 바로 그 부모의 폭력을 깨닫고 만 그 순간, 남들에게 보기 좋은, 객관적 기준의 완벽함을 끝끝내 이루기 위해서 자신에게 가해진 부모의 억압을 인지한 순간 그들은 분노한다. 영화 속의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은 부인의 간병에 지친 나머지 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녀의 간병인과 외도를 한다. 그리고 결국 부인이 자살하자, 그 간병인과 기다렸다는 듯이 재혼한다. 그렇다. 실질적으로 보편적인 중산층 가정의 모델에서 아버지는 말 그대로 경제력과 바깥 일을 책임지는 가장이자 중심축으로써의 상징적 의미 -일종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제외한다면 집안에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바로 부인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부인이 부재한다면 그의 그러한 위엄 있고, 품위 있는 생활은 어려워진다. 그에게 딸린 두 딸자식은 어찌할 것이며,-하나 데리고도 고생하는 '저지걸'을 보라!- 왠지 '남들 보기에도' 아직 중년인데 짝 잃은 외기러기로 보이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 '중, 산, 층' 인데. 물론 부부생활이라던가 말 그대로 사랑도 한 원인일 수 있겠지만, 부모들은 남들이 쌓고 또 그들이 쌓은, 그리고는 자발적으로 갇힌 중산층의 환상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아버지는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거세한 셈이다. 딸 둘 딸린 홀아비가 경제력을 쥐고 있다고 한들 자기가 좋아서 결혼한 새 부인에게 무슨 큰 소리를 칠 것이며, 딸들이 극구 말린 결혼을 한 아비가 그 딸들에게는 무슨 큰 소리를 칠 것이랴. 결국 그가 이 영화 속에서 무력한 것은 말 그대로 자의 반, 타의 반이다. 그리고는 기껏 딸들에게 말한다는 소리는 이 모양일 것이다. "밥 안 굶고, 남들 부러워하는 재력에, 부모에, 교육 교양까지 길러줬으면 됐지, 무슨 말이 그리 많니?"라고.

 더구나 이 영화에서는 더욱 비극적으로 새로 들어온 어머니는 한 술 더 떠서, 완전히 앞서말한 중산층이라는 환상의 성 속의 자발적 유폐자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화장대에서 의붓딸 들볶을 궁리하다가 남편 발소리에 침대에 다소곳이 누워서 책 읽는 척하는 건 기본이고 -물론 그나마 상식인에 가까운 남편은 그런 부인의 증상을 낱낱이 알기에 무뚝뚝하게 약을 챙겨준다.^^;-, 자기 혼자 애지중지 하는 노란색 카나리아에, 그 새 때문에 의붓딸을 잔인하게 괴롭히고도 다음날 아침에 우아하게 마시는 한잔 차까지, 그녀는 사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등 여러 나라들이 공유하고 있는 중산층 환상의 원형인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귀족  시민의 삶과 그 위선상 자체를 선망하는 듯 했다.       

 사실 그녀가 선망하는 그런 삶 속에는 의붓딸 따위는 있을 자리가 없다. 물론 아끼고 잘 키워서 남들의 존경을 받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이왕이면 내 핏줄로 아들, 딸 골고루 낳아서 사랑 듬뿍 주고 남편에게 대우받고 남들에게 선망 받을 수 있는 것아 더 기분 좋은 일이다. 근대 이후에 나온 독일의 그림 동화를 비롯한 각종 동화를 보면 알 것이다. 하나같이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집안에서, 의붓자식 몇 있는 걸 밥 한끼를 제대로 안 먹이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복달하는 모습들을. 사실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편적이기에 완벽한 그들 머리 속의 중산층 가정의 이상형에는 오직 같은 핏줄로 이어진 부모와 자식들의 벽난로 옆에서의 오붓한 티타임이 있을 뿐이며, 그 사이에 끼고자 하는 반 쪽짜리 이물질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 속에서 가장 잔혹하게 희생된 것이 동생인 수연(홍련)이다. 끝끝내 누구에게도 자신의 신음을 전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시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말하는 대로 계모로 나오는 엄정화의 수연에 대한 학대가 결국은 자신이 수연을 지켜주지 못한 데 따른 언니인 수미(장화)의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실은 수연이 살아있다면 그와 같은 계모의 폭력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아마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계모인 그녀는 결혼하기도 전에 수연을 제거함으로써 결혼 이후에 충분히 자신을 거스를 수 있는 수미를 무력화시켜 버릴 수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기는 했지만.      

 그런 수미의 진실을 안 이후부터 이 영화는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지금의 폭력도 모자라서 과거의 폭력의 기억까지 짊어진 채 괴로워 할 수밖에 없는 한 소녀의 몸부림은 실은 그 어떤 공포보다도 무서운 것이었으며, 그것이 내 경험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모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뤄질 수 없는 환상에 사로잡힌 그녀가 보여준 혹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최후의 승자여서도 아니고, 그녀의 잘못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건 단 한가지 이유로만 정당화 될 수 있다. 수미와 수연 자매가, 그리고 내가 겪은 그 모든 아픔에도 불구하고, 난 그 꿈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품위 있고, 우아하며 교양 있다고 믿고만 싶은, 우리 부모의, 그리고 나의 '중산층' 아니 그 이상을 향한 꿈을.

 난 그러한 부모의 꿈속에서 많이 힘들었고, 지금도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그러한 경험 속에서 나는 나름대로 피하고 참아서 끝내 살아남는 법을 조금씩 배워나갔고, 그와 동시에 어쩌면 이제는 부모들이 요구했던 수준을 넘어서 지식의 본질적인 체계에 다가가고 싶어할 정도의 교양을 축적하고 있다.(본질적으로 중산층, 상류층이 갖춰야할 교양은 어느 정도 그 선이 정해져 있는 법이다. 그 선을 넘어서면 그것은 중산층, 상류층으로써의 자격을 갖춘다는 의미가 아닌, 그 지식 자체로 계층의 상승을 노린다는 점을 뜻한다, 쉽지는 않지만......) 어쩌면 이미 나는 그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위치에까지 이르러 버렸는지도 모른다. 택한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내가 장화 홍련 속에서의 계모와 또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부모들이 추구하는 목적과 별다른 것을 추구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후반부에 낱낱이 드러난다. 스토리의 모호함이 완전히 벗겨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뿌리는 파헤친 셈이다. 늦가을 초겨울의 갈대밭과 그 옆의 저수지, 그리고 그 풍경과 어울리는 노란색 옷을 차려입은 자매, 잠시 후 수연의 가녀린 외침, 한 순간의 수모를 견디지 못해 미래를 담보한 협박을 현재의 괴로움으로 오해해버리고, 눈을 치켜 뜬 채 홀가분한 양, 등을 돌리는 수미.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듯한 도도하고 분노에 찬 그녀의 거침없는 걸음은 갈대밭 너머로 향하고, 살의(殺意)를 품은 계모는 그 등뒤에서 하얀색 창문을 닫아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수미의 걸음 뒤로, 두 번 모두 볼 때마다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애처로운 이병우의 선율과 함께 그렇게 처연히 시들어 가는 연꽃....... 그렇다. 한 순간의 기억이,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그 단 한순간의 기억이 사람을 미치게, 미치고 싶게 만들 수도 있다. 그 때 조금만 더 자상하게,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미국 9.11 테러 이후에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가족, 친지들의 죽음에 절망한 나머지 '만약 안 그랬다면(If not)' 증후군이 유행했다는 데, 이제는 비로소 그들의 심정을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충분히. '나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삶의 순간들이 있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는 내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하는, 기억을 돌이키고 싶지 않고 결과를 돌이킬 수 없어 사람을 옭아매는 순간들 말이다.' 김지운 감독의 말이다. 그래서 난 그 두 자매 모두를 가엾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서로를 그리다 서로가 죽어 가는 모습을 눈물 흘리며 지켜봐야 했던, 죽음의 기억과 그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그 소녀들을 말이다.   

 개봉 이후에 영화의 흐름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던 이 영화의 경우에는 특히나 관객에 따라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이 영화를 관통하는 그 큰 슬픔과 그 원인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우리가 사로잡혀 왔던 중산층에 대한 환상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을 듯했다. 그것이 내 개인적 경험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나는 이 영화에서처럼 잔혹한 폭력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영화가 내가 그동안 안고 살아온, 아니 앞으로도 안고 살아갈 어두운 감정에 대한 놓쳐서는 안 될 본질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상처가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과 그 정도의 문제, 그리고 치유의 과정이며, 때로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보이는 그 문제가 모든 사람을 공포스럽게, 비참하게, 슬프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로 드러내기 힘든 감정의 복잡함을 섬세하게 표현한 이 영화는 요즘까지도 우리 영화계를 풍미하고 있는 단어인 웰 메이드(Well-Made) 영화의 시작이자, 그 대표라고 할 만하다. 김지운 감독과 임수정, 문근영, 염정아, 김갑수 네 배우의 뛰어난 연기는 기본이고, 영화의 공포와 슬픔을 드러내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 장소 설정, 아름다움과 부유한 분위기 속에 감도는 왠지 모를 어두운 분위기를 훌륭히 드러낸 고풍스러운 세트 디자인과 소품 활용 등 그동안 소홀히 생각하고 또 다루어졌던 부가적인 연출에서의 공력과 아울러, 시종일관 영화 속의 공포, 슬픔, 분노를 넘나들며 그 강약까지도 자유자재로 지배한, 정말이지 슬퍼서 아름답다고 할지 아름다워서 슬프다고 해야할지 알 수 없는 이병우 음악감독의 OST -물론 그 본인이 어느 정도 인정했듯이 그 매력의 이면에는 대중가요적인 선율의 영향이 있다.- 까지 모든 것이 자~알 만들어진 영화였다.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DVD플레이어도 없는 내가 결국은 사버리고야 말았던 '장화홍련' 초회 한정판의 DVD에 들어 있던 -그래봐야 감독, 배우의 랜덤 사인도 못 받았다. ㅜ ㅜ- 컷필름 조각이 끼워진 두꺼운 종이판 -영화 포스터가 그려져 있다- 에는 이런 문구가 써있다.
'Every family has its dark secr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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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 2004-06-0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ost가 참 맘에 들었습니다. 극장에서 봤는데, 제 양쪽에 친구들이 무섭다구 제 팔을 붙드는 바람에... 한 고생 했지요.^^

로렌초의시종 2004-06-03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역시 이병우 씨의 영화음악은 영화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아요. 전 혼자 봤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