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귀신이다.
귀신인 내가 귀신에 대해 얘기하는 건 아주 적절한 일 아닐까?
나는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 한다. 여기서는 그저 혼자 중얼거릴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존재‘ 방식은 빛도 아니고 소리도아니다. 그림자다. 물리 현상이 아니라서 과학으로 실증할 수 없다. 나의 ‘존재‘는 계량화가 불가능하고 측량도 할 수 없다. 계산할 수 있는 단위도 없다.
기억은 나의 존재이자 순환의 매개다. 나의 기억과 타인들의기억을 통해 나는 존재한다. 이곳에 존재하고 현장에 존재하고여기에 존재하고 저기에 존재한다. 나는 기억에 의지하고 기억에 기생한다. 기억이 있는 곳, 말할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있는 현장이자 구전의 역사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과구강과 혀끝에 존재한다. 손으로 이야기를 쓸 때는 펜 끝에 존재하여 빠른 속도로 종이 위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종이를 태우거나 찢어 버리기 전에 나는 종이 위에 정착한다. 하지만 종이가 훼손된다 해도 사람들에겐 암기력이 있으므로 종이는 머릿속에 완전한 복사본으로 저장된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정착하게 된다. 비밀로 가득 찬 기억이 나의 따스한 침대가 되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고 익명으로 감춰진 더럽고 사악하고 부패한,
일생에 매장된 그 비밀들이 나의 부드러운 매개체가 된다.
나무와 물, 흙과 풀도 있다. 내가 자주 기어 올라갔던 그 반얀나무는 나를 기억한다. 내가 수없이 절을 했던 그 추풍나무도 나를 기억하고, 내가 베어 버린 대나무들도 나를 기억한다. 내가 숨었던 그 밭도 나를 기억한다. 이 작은 시골은 나를 기억하고 있다.
나의 삶과 죽음이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다. 때문에 나는 바로 이곳에서 귀신이 되었다.
하지만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식탁 위 솥에 담긴 죽을 일가족 아홉 식구가 다 먹고 나면, 먼저 아찬에게 방금 먹은 죽이 물었는지 진했는지 묻고, 이어서 내게 물었다. 이어서 다섯 딸에게 묻고 다시 두 아들에게 물었다. 제각기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고 대답도 둘 중 하나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수많은 ‘중간‘이 있었다. 한 가닥 줄로 이 ‘중간‘을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진함과 묶음 사이는 한 가닥 줄이다. 어떤 외부의 힘도 이 줄을 곧게 펼 수 없다. 줄은 왜곡되어 선회하면서 수많은 굴곡과 모퉁이를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매듭을 형성한다. 모든 굴곡에는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그 그림자가 보호처를 제공하므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죽이 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마음속으로는 진했다고 할 수 있고, 진했다고 말한 사람은 더진하기를 갈망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이‘가 있기에, 나는 수시로 그 사이의 매개체를 찾을 수 있었다. 비밀이 가득 쌓여 있는 곳이 가장 좋은 매개체가 된다. 그곳은 따스하고 축축하다. 때문에 나는 계속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저 타이완 중부 시골에서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농가의 아들로, 밭에 나가 수확을 하고 차를 몰고 화물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을 뿐인데 무슨 화려한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죽음은 일종의 기묘한 전환이라 귀신이 된 뒤로 모든 언어의 한계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전에 할 수 없었던 말들을이제는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귀화(鬼話), 귀신의 말이다. 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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