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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 (양장) - 살아 있음의 슬픔, 고독을 건너는 문장들 ㅣ Memory of Sentences Series 4
다자이 오사무 원작, 박예진 편역 / 리텍콘텐츠 / 202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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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협찬 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세계를 누군가는 ‘우울과 절망 그리고 그 속에서도 어린 깜빡이는 빛’을 그린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본서에 대한 보도자료에서는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의 나약함과 위선을 통렬하게 들여다보았다’고 말하기도 그의 문학은 ‘파멸과 허무만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면서도 살고 싶어 한 이야기’라고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이 보도자료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서술한 그 외의 단어들을 키워드만 남긴다면 ‘상처, 이중성, 도망, 회복, 절망, 연민, 고독, 비극’ 등이 있겠다.
이 문장집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가운데 [사양, 인간실격, 어쩔 수 없구나, 앵두, 어머니, 셋째 형 이야기, 여학생, 직소, 달려라 메로스, 사랑과 미에 대하여, 비용의 아내, 늙은 하이델베르크] 이렇게 12개의 소설에 대한 소개와 그 문장이 일본어와 한국어로 수록되어 있다. 여기 엮인 소설들 중 나로서는 ‘사양, 인간실격, 여학생, 비용의 아내’ 정도만 읽어봤다.
내가 느낀 다자이 오사무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흔들리며 아파하는 마음 그리고 아파서 흔들리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지키고자 하고 지키고 싶어하는 마음”까지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살아있어서 슬픈’ 심정을 담은 문장들을 그려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지만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꼬집을 수 없을 만큼 세상과 잘못은 일체이다”. 이 세계에서 쓰러지는 것은, “아파하고 절망하고 그러다 슬퍼하며 나를 위한 행복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여정은, “절망도 부정도 이 세상에서는 의미도 가치도 결론도 될 수 없다”는 걸 깨우치는 하나의 과정일 거다.
다자이의 문장 속에서도 ‘불안’이라는 어휘는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불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안은 흔들리며 아파하고 아파서 흔들리는 심정과는 다른 것이다. 너무 슬플 때는 누구도 불안하지 않다. 되려 내 안에서 깜빡이는 별빛을 보기 시작한다. 아련하고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빛을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그 빛을 그려내려 집필을 해온 것일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생을 마감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보다 적거나 많거나를 떠나 자살을 결행해 봤을 것이다. 그건 멸망을 바래서도 패배했기 때문이지도 않다. 그 누구보다 살고 싶어서다.
‘직소’라는 그의 소설에서 다자이는 유다의 목소리로 예수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읊조린다. 많은 이들이 이걸 죄의식과 믿음과 배신 그리고 자기변명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다들 다자이가 유다의 심정으로 자기 죄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지만, 이 문장집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유다가 아닌 예수의 입장에서 유다의 마음을 이해하려 유다의 심정을 헤아리려 까닭을 짚어본 것이다. [달콤한 인생]이란 영화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선우라는 인물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보스를 찾아가 그에게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거예요?”라고 묻던 그 심정으로, 다자이는 예수의 입장에서 유다가 왜 그런 것인지를 알고 싶어 유다가 되어본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내게 도대체 왜 이런 것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처럼, 선우도 예수도 보스가 유다가 왜 그런 것인지 헤아려보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오해로 빚어진 곳이다. 이곳에서는 이해에 가닿을 수 없다. 서로가 자신의 세상 속에서 타인의 세상을 자기 세상의 빛깔로 물들여 바라보는데 다른 이의 세상 빛깔을 이해할 수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인간실격의 요조처럼 웃고 웃기면 사람들은 그의 눈물을 볼 수 없다. 사람들이 따라 웃을 때 요조는 울었을 것이지만, 그의 눈물은 자신 밖에는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본서에서도 그가 여성 화자가 되어 그려낸 소설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많은 여성들도 그를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추켜세우고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절 본 기사로는 그의 소설 [여학생]은 소설가를 꿈꾸던 어느 소녀가 다자이 오사무라는 저명한 작가의 평가를 부탁하며 보내온 그녀의 자전적 소설을 다자이 오사무가 그대로 표절한 것이라고 한다. 여성의 성취와 미래, 가능성을 빼앗는 페미니스트는 없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듭 호명되던 한국의 중견 문인은 여성을 만져서 그의 모든 영예가 거둬졌다. 교과서에서도 그의 작품이 사라지게 되었고 말이다. 하지만 여성을 만지는 성추행보다 더 극렬할 정도로 나쁜 건 여성의 성취와 미래를 빼앗는 것일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그러니 페미니스트 작가일 수 없다. 아마도 그의 이런 일면 역시 흔들리며 아파하고 아파서 흔들리는 그의 생의 한 단면이지 않나 싶다.
어떤 이들은 다자이의 죽음을 그가 자신의 가문에 수치라고 생각하던 데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행한 저항이라고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저항하지 않는 것은 죄인가?’라고 물었다. 그 물음은 저항하고자 해서였는지, 자살을 저항이 아닌 수용이라고 받아들여서인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인간실격’에서 요조는 죽지 않았다. 다자이도 죽지 않아야 했다. 작품을 통해 살아났어야 했다.
눈물이 날 만큼 ‘모두를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던 사람이 결국 자신을 죽인 것이다.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어서 하던 생각인 것인가? 하지만 그는 ‘아름답게 살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는 살아야 했다. 그가 살아있는 어느 우주의 지구가 있다면 그를 그리는 사람들이 그 별 밖에도 있다고 그 지구에 사는 다자이에게 말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