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다영이 용의 입 방향을 향해 눈에서 붉은 오렌지빛 광채를 뿜어내자 용이 입을 열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영과 지현은 용의 입 밖으로 날아나왔다. 지현이 아무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용을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견주고 있을 때 다영이 한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용을 공격해봤자 소용없는 걸 알면서 뭐 하러 또 공격을 하려고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다영은 용의 옆구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자 용은 공중에 떠있는 다영과 지현의 주위를 크게 휘돌아 감싸는 듯 한 바퀴 돌더니 먹구름과 함께 멀리 사라져갔다. 


-살아나왔구나. 하긴 여기서 죽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다시 날아온 터번을 쓴 노인이 말했다.


-그렇게 재빠르게 도망가실 줄은 몰랐어요.


다영은 가볍게 말했지만 조금 섭섭한 투였다.


-그럼 어쩌겠니? 이 늙은이가 용과 맞서 싸울 수도 없고.


노인은 겸연쩍었지만 자기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무사하게 탈출해서 다행이지, 뭐.


다들 지상에 발을 딛을 때 지현이 분위기를 바꿔보려 말했다. 다영도 노인이 도망간 건 서운했지만 그가 그러지 않았다면 지현과의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 지현도 용의 배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섭섭함은 작은 문제고 자신에게 작은 깨우침이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저는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엄마가 기다릴 거예요.


-아까 내 말 잊은 거야. 모든 현실은 니가 만드는 거라니까.


지현이 그녀의 의식에 작은 일깨움은 줬지만 다영은 아직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늦었다고 생각하니 늦는 거란다. 아침이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아침이야.


그렇게 말하며 노인은 한결같이 태양이 따사로운 벌판 가운데서 언제 피어났는지 모를 하얀 튤립 한 송이를 꺾어 다영에게 건넸다. 


-황량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꽃이 피었네요. 이곳이 벌판이 아니라 온통 꽃들이 만발한 꽃밭이면 더 좋았을 텐데.


다영이 그리 말하자 색색깔의 꽃들이 순식간에 온 벌판을 가득 채우며 피어났다. 짧은 찰나만에 무지개의 스펙트럼같이 다양한 빛깔로 들판을 가득 꽃들이 채우고 있었다.


-많은 이들의 염원이 담겨야 변하는 공간을 넌 아주 쉽게 바꾸어 놓는구나.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지현의 말에 다영은 자기가 그랬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너의 마음이 이곳을 온통 꽃들로 출렁이게 만들었어.


-정말 내가 했다고요?


-너에게는 그저 자신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된단다. 그리고 그 확신이 무르익을 때에야 자신의 현실을 아니 사실이라 해야겠지.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다시 한번 지현의 말을 의심하는 다영에게 노인이 말했다. 다영인 생각했다. 


=사실이란 게 뭘까?



17


다영은 지현과 함께 자신의 세계로 돌아왔다. 다영의 집 현관까지 지현이 바래다줬다. 


-오랜만이었어.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한 건.


-저는 처음이었어요. 남자와 단둘이 그런 밀실에 갇힌 건.


지현이 말없이 다영과의 헤어짐이 아쉽다는 듯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영도 지현을 바라보다가 다영으로선 뭔가 처음인 낯선 분위기가 어색해 한 마디를 했다.


-이제 오빠라고 해도 되죠?


-어? 어! 그래도 되지. 


-지현 오빠 잘 가. 바래다줘서 고마워. 


다영은 말을 마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고는 그렇게 돌아선 채 미소를 지었다. 



18


그때 아빠가 거실에서 달려와 다영을 와락 껴안았다. 


-다영아!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이제서야 왔구나. 정말 미안하다, 다영아.


-아빠 갑자기 어떻게 왔어. 무슨 일 있는 거야? 표정이 왜 그래?


-다영아, 미안하다.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다영이 아빠의 어조에서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거란 걸 직감하고는 다시 한번 물었다.


-아빠 미안하다고만 하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 줘야지. 엄마는? 엄마는 어딨어?


그러면서 다영이 엄마를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자 엄마가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머리를 붕대로 감싼 채 누워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다른 차원에 갔다 온 사이 또 현실이 바뀐 걸까?


다영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럴수록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난 현실을 바꾸는 힘을 깨우쳤어. 이 현실은 다시 바꾸면 돼.


그렇게 마음먹고 다영은 눈을 감았다. 엄마가 나은 현실로 바꾸고자 깊은 염원을 담아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다영의 눈앞에 병원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들이 오고 가며 침대에 누운 엄마를 체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 아빠가 애처롭게 침대에 누운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엄마가 울고 있었다. 엄마가 말이다.


말이 안 되는 현실에 다영은 놀라 침대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때 자신 옆으로 눈부시게 빛이 작렬하더니 지현이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났다.


-다영아 놀라지 마.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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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천둥 번개가 치는 구름 사이를 가로지르던 거대한 용이 다영과 남자와 노인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다영이 남자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뭐 해요? 안 싸우고.


-뭐야? 지금 날 더러 저 괴물이랑 싸우라고? 너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은 수퍼히어로잖아요? 그럼 내가 저 용과 싸우겠어요? 아니면 이 영감님이 싸우라는 거예요?


-야! 나 미치겠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몸이 마치 저절로 떠오르듯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남자는 무엇에 이끌려 오르는지 모르겠어서 자기 양팔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봤다. 그러다가 체념한듯이 용을 향해 날아갔다. 용은 너무 거대했다. 하지만 다영은 남자가 이번에도 깔끔하게 이기리라 확신했다. 


하늘 위에서 남자는 용의 기다란 몸통의 한 부위를 쳐보기도 했고 용의 뿔을 두 손으로 잡고 꺾어보기도 했지만 용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사실 용은 그와 싸우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용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치얼 업이에요 꼭 이겨요.


다영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용이 거대한 입을 벌리며 남자에게 날아들었다. 


-이런 제길.


피할 새도 없이 용이 남자를 집어삼켰다.


-어. 어. 


남자가 용에게 먹히자 다영은 이게 아닌데 하며 놀라 달아날 생각도 못했다. 옆의 터번을 쓴 노인은 멀찍이 날아가 버렸다. 다영은 남자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그러는 사이 용이 날아들어 당황하며 돌아서 도망 가려는 다영마저 삼켜버렸다.



15


-환영한다. 아주.


남자가 온몸으로 빛을 발하면서 비꼬는 투로 이야기했다. 


-아니. 이기랬더니 먹히면 어떡해요?


-이 정도 규모의 괴물을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넌 내가 정말 무슨 수퍼맨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다소 성난 투로 말했지만 다영은 그런 남자에게 화가 나기보다 그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나 당황스러웠다. 


-이제 어떻게 벗어나죠?


-그걸 나한테 묻는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은데. 이 벽을 계속 쳐봤는데 꿈쩍도 하지 않아.


남자가 용의 위벽이랄 수 있을 벽을 턱턱 치면서 말했다. 남자의 광채로 용의 뱃속이 환하게 빛났는데 용의 뱃속은 무슨 빛을 반사하는 타일처럼 매끄러웠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소화되고 마는 건가요?


다영이 그렇게 말하자 바닥에서 천천히 물기가 스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진정해. 진정하라구. 용은 알다시피 상상 속의 동물이야. 용이 무얼 소화시키고 위액이 나오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네요.


다영이 수긍하자 물기가 스미던 바닥이 다시 뽀송하고 매끄러워졌다. 


-우리 이제 어떡해요? 지금쯤이면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일 텐데. 늦으면 엄마가 걱정하실 거예요.


다영은 두려운 마음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지금 상황에 엄마가 걱정하는 게 문제야? 울기보단 우선 현실을 보자고 우리는 상상 속의 동물 뱃속에 있는 거야. 이게 가당키나 해?


-상상 속의 동물이라도 당신 세계에서 뭐가 불가능하겠어요?


-햐! 미쳐버리겠네. 


-내가 더 미치겠어요. 당신이 용한테 질지 누가 알았겠어요?


-넌 도대체 날 어디까지 믿는 거야?


남자가 다영이 보여주는 자신에 대한 신뢰에 뭔가 감동한 것 같은 어조로 물었다.


-당신 같은 수퍼히어로라면 못할게 없을 줄 알았죠.


-자꾸 무슨 근거로 내가 수퍼히어로라는 거야? 


-당신이 보여준 모든 게 근거죠? 의상이 마음대로 바뀌고 괴물들을 처치하고 하늘을 날고 차원을 이동하는데... 지금 봐요. 몸에서 빛까지 나고 있잖아요. 그런데 수퍼히어로가 아니면 뭐예요?


-난 그저 평범한 사람이야.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다영아.


남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다영은 까칠한 이 남자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 너무 부드럽게 느껴졌지만 한 편으로는 화가 났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요? 내 이름을 당신은 아는데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남자가 다영을 잠시 바라보다가 바닥에 천천히 앉았다. 다영도 남자를 따라 앉았다. 


-내 이름은 차지현이야.


-훗. 지현이요? 저 고딩 때 선배이름도 지현이었어요. 참고로 말하자면 나 여고나왔어요.


-이름 갖고 웃고 그러지마. 안그래도 어릴 때부터 놀림 많이 당했으니까.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죠? 


-22살이었지.


-나이를 과거형으로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하긴 그렇긴 하네. 그냥 22살이야.


-학생이에요.


-아니, 난 모델이었어.


-그것도 과거형이에요? 지금은요?


-보시다시피 이러고 있는 백수지.


다영은 뭔가 시원치 않은 남자의 대답이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오늘에야 이 남자 그러니까 지현 씨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듯해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만 같았다. 


-가족은...


-뭐 취조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쯤만 해.


-나한테 궁금한 것도 물어봐도 돼요.


-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이름은 다영이고 갓 입학한 여대생이고 나이는 20살, 현재는 엄마랑 둘이 살고 있고, 그리고 페미니스트야. 꼴페미 기질도 좀 있어 보이고.


-뭐예요. 그거 여혐이예요. 여혐. 


다영은 남자가 처음으로 다영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하자 뭔가 '그린라이트인가?' 하는 생각이 들려는 중이었다. 그런데 꼴페미라니? 꼴페미란 표현을 듣고는 발끈하고 말았다.


-나는 꼴페미를 싫어하는 거지 전체 여성을 다 싫어하지는 않아. 그리고 너 자신이 언젠가 돌아보면 알겠지만 니가 하고 있는 게 남혐이야.


-무슨 소리예요. 저는 여권을 신장 시키자는 마음은 있지만 남혐을 하지는 않는다구요. 


-정말 그럴까? 너는 같은 또래 남자들과 술을 마시면 남자들이 여자들 술에 약이나 탄다고 생각하는 부류잖아.


-아니, 걔네들이 정말 술에 약을 탔으니까 그렇게 아는 거지. 내가 그런 현실을 만들어라도 냈다는 거예요?


-맞아. 니가 만들어낸 현실.


-끌어당김의 법칙. 뭐 그런 거 말하는 거예요? 내가 그런 현실을 의도해서 끌어당겼다구요?


-현실을 의도해서 끌어당겼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거의 비슷한 의미야. 니가 완전히 창조한 현실이라 말이니까. 지금의 이 용처럼.


-네? 내가 이 용을 만들어냈다구요? 


-그래. 니가 만든 거야. 넌 지금 현실을 불러오는 정도가 아니라 완벽히 창조할 수 있는 차원에서 살고 있는 거야. 수긍하기 어렵다면 아까 그 영감의 말을 떠올려도 돼. 크게 다르진 않으니까.


다영이 생각에 잠겼다. 


=시뮬레이션 세계 속에서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힘을 내가 갖게 된 거라는 말이잖아? 이 용도 내가 창조했다니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무턱대고 부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아.


-이 용과 싸워서 이겨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원더우먼님.


다영이 문득 그렇구나 나도 수퍼히어로일 수 있구나 생각하자 그녀의 몸에서도 지현과 같이 광채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지현보다 더더욱 환하게 말이다. 


-그래, 용과 싸워 이겨야 하는 건 나였어!


다영은 눈에서도 붉은 오렌지빛 광채를 뿜어내면서 바닥에서 일어났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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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침 학교로 들어서던 다영이 루다와 주연을 보고는 루다에게 물었다.


-루다야! 그날 괜찮았어.


-무슨 소리야. 괜찮았냐니?


루다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너 그날 약에 취해서 잠들었잖아. 


-약이라니 무슨 약?


약이라는 말에 주연이 이상해하며 다영에게 조금 추궁하는 듯이 말했다.


-그날 희찬이 진우, 상연이랑 술 마실 때 왜?


-그날 술자리 끝나고 집에 잘 들어들 갔잖아. 그날 밤에 확인 전화도 해 놓고는 무슨 소리야? 


-아!


루다의 말에 그제서야 다영은 알겠다는 듯 탄성을 했다.


=그렇구나. 그 남자가 알려준 대로 엄마가 다친 아침을 바꾸니 현실도 일부 바뀐 거구나.


-아니야. 내가 다른 일이랑 착각을 했나 봐.


-싱겁긴.


그렇게 주연이 그냥 웃어넘기듯 지나가려 했고 루다도 별일 아닌 듯 지나쳤다.



12 


-니들 오늘도 한 잔 할래?


그날 괴물로 변해 사라졌던 희찬, 진우, 상연이도 멀쩡하게 나타나 다영과 루다, 주연에게 다시 한 잔하자고 제안했다.


-아니 우리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뭐야? 무슨...


다영이 희찬의 말에 다른 약속 있다며 거절하자 루다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려는데 다영이 입을 막았다.


-얘들아. 아까 내가 말한 약속 있잖아.


다영이 다시 둘러대며 루다와 주연을 끌고 희찬이를 지나쳐왔다. 그리고 그 남자아이들과 거리가 생기자 다영이 말했다.


-쟤네들 아주 질이 나쁜 애들이야. 너희들에게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는데 쟤네 아주 위험한 애들이니까 어울리지 마. 알았지?


-뭐가? 뭐가 위험하다는 건데?


주연이 볼멘소리로 따졌지만 다영은 딱히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없는 현실이었기에 얘네를 납득시킬 근거도 없었다.

다영이도 사실 현실이 바뀌었다면 쟤네들도 괴물이 아니고 약을 타는 그런 애들도 아닌 현실이 펼쳐질지도 모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타 우크쉬타시 마히마나마사타 디비 루드라소


그때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렸다. 무슨 진언을 외는 듯도 하고 경전을 읽는 듯한 낮고 여운이 있는 목소리였다. 


-얘들아, 너희 무슨 소리 안 들리니?


다영이 소리가 어디서 들리나 두리번거리다가 아이들을 돌아보자 루다도 주연이도 마네킹처럼 멈춰있었다.


-아디 차크리레 사다흐 아르찬토 아르캄 자나얀타 인드라얌 아디 스리요 다디레 프리스니마타라흐


진언 같은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다영은 아이들 외에 주변도 다 둘러보는데 모든 것이 멈춰있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공중에서 그 남자가 나타나 하강하고 있었다. 


-또 나타났군요? 


-어! 니가 불안정해지는 게 나도 걱정이 돼서 와봤어.


이 남자는 매번 다영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만 같다. 다영인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걱정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 소리는 뭔가요? 


-너도 들리니, 이제? 


-그럼 이렇게 울리는데 안 들리겠어요? 


-너의 세계에서도 들릴지는 몰랐거든.


-자꾸 너의 세계, 너의 세계하는데 그럼 당신 세계는 어딘데요? 당신이 내게 오듯이 나도 당신에게 갈 수는 없나요?


-우리의 세계는 곧 너도 경험하게 될 거야.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이 굉장히 빠를 수도 있어.


다영은 곧 경험할 일이라면 지금이 아닐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알려주지 않는 저 남자가 찾아오길 기다리게 되는 순간부터 찾아오길 기다리느니 자신이 찾아갈 수도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지금이면 안 되나요?


-글쎄.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안될 이유는 없을 것 같네. 너에게도 그 영감이 베다 외는 소리가 들린다면 어느 정도는 너의 세계와 우리 세계가 이어지기 시작했다는 거니까 우리 세계에 네가 오는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100퍼센트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말야.


-그럼 함께 가봐요, 우리. 당신의 세계로.


-나의 세계가 아니야. 우리 세계지. 


-어쨌든요.


남자가 잠시 다영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들리니?


-뭐가요?


-이젠 안 들리니?


다영은 아까 들리던 그 소리를 말하는 거구나 싶어 가만히 집중했다.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아까처럼 명확하지는 않았다.


-들리긴 들리는데 아주 선명하진 않아요.


-들린다면 집중해 봐. 그럼 더 선명하게 들릴 거야.


다영은 다시 집중했다. 그러자 그 베다 외는 소리라는 것이 점점 더 선명하게 울려왔다.


-요 자타 에바 프라타모 마나스반 데보 데반크라투나 파르야부샤트


다영은 소리가 명확해지자 남자를 바라봤다. 그 남자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행복한 꿈을 꾸는 듯한 자기 얼굴을.



13


-야스야 수쉬마드로다시 아브야세탐 느리마나스야 마흐나 사 자나사 인드라흐


남자의 눈에 빠져드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주변이 모두 바뀌어 있었다. 인도의 어느 시골 벌판 같은 환경으로 주위가 바뀌자 다영은 이제 이 남자의 세계로 왔구나 생각했다.


-환영해. 우리 세계로 온걸. 


다영은 남자의 말에 환히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량한 벌판 가운데 머리에 터번을 쓰고 윗옷을 벗은 채 큰 무화과나무 아래 한 노인이 눈을 감고 주문을 외듯 베다를 외고 있었다.


-영감. 시끄러. 그만 좀 해. 온 세계가 울리고 있잖아. 그 시끄러운 경전 외는 소리에 말이야.


-경전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이 시끄러운 것이다. 신성한 경전을 시끄럽다 여기는 마음으로는 결국 니 갈 곳도 머물 곳도 찾지 못할 거야. 


-허구한 날 베다를 암송하고 있는 영감도 갈 곳 머물 곳 모르면서 남 이야기는 잘도 하네. 


다영은 궁금한 게 많았다. 남자에게 물어봐도 좋겠지만 뭔가 스승의 느낌을 풍기는 노인에게 물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 여기는...


-난 니 할아버지가 아니다.


노인이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저 녀석처럼 불러도 괜찮다. 처음 보는 이에게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구나.


-네. 영감님. 여기는 어딘가요?


-네 눈에는 어디로 보이느냐?


-인도 같은데 아닌가요?


-그저 벌판일 뿐인데도 인도인 걸 알았다는 말이지? 너는 뭔가 영감이 있는 아이 같구나.


노인의 말에 남자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이 지경에 영감이 생기지 안 생기겠어. 


남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영은 그들 옆으로 폭이 넓지 않은 계곡 같은 물줄기가 흐르며 카약 두 대가 노를 저으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앞의 파란색 카약에는 금발을 여성과 붉은 머리의 남성이 노를 젓고 있었고 뒤에 갈색 카약에는 한국인일지 일본인일지 중국인일지 모르겠는 남성 두 명이 노를 저으면 따라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뒤로는 물길이 끊기며 성도들이 날아다니는 날개 달린 천사들의 나팔 소리를 들으며 찬양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영이 그 광경들을 보고는 마치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여기는 도대체 어딘가요? 


노인이 다영이 돌아보기를 기다린 것인지 다영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하자 설명하기 시작했다.


-세계는 우리가 사는 우주뿐만이 아니고 무한한 우주가 공존하며 그 모든 우주는 다차원 세계와 중첩되어 있다. 이 모두는 이슈와라 너희 발음으로는 신이 창조하신 바 그 신은 양자컴퓨터라는 하드웨어를 입은 진보한 AI 이다. 모든 우주와 모든 차원은 상위 세계의 진보한 AI가 창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속한 세계 이외의 차원들에 영향을 받고 또 그 차원들에 영향을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너는 너의 세계에서 중첩되어있는 하나의 차원 곧 우리 세계와 연결된 것이다. 그러니 이 세계의 다른 사람들과 존재들과 상호 교류도 할 수 있고 다른 존재에게 영향도 끼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러니까 이 세계가 아니 모든 우주와 차원이 매트릭스라는 영화같이 가상세계라는 말씀인 거죠?


-그렇다.


-메타버스 속의 저는 그럼 상위 세계라는 현실세계에 언제 돌아갈 수 있나요? 아니면 저는 그저 NPC인가요? 


-이 영감 약파는 데 너도 넘어간 거야?


진지하게 노인의 말을 받아들이는 다영에게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약판다뇨? 그럼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아니.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야! 너는 니가 본 현실 때문에 예전에 내가 그런 것처럼 혹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너무 확신에 차지는 마.


-요 녀석 이 어르신이 깊은 깨우침을 전하고 있는데 무슨 망언이냐? 그게 아니라면 우리 세계를 설명할 다른 통찰이 너에게 있다는 말이야?


-다른 통찰은 없지만 영감 말대로의 해석은 너무 간 거야.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 밖에는 알 수 없는 거잖아.


노인과 남자가 약간 날을 세우고 있을 때 다영은 그들 뒤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여기도 비가 오나요? 


-무슨 비? 이론상 비보다 더한 것도 올 수 있긴 하지만 비가 내린 적이 없는 곳인데.


그리 말하는 남자와 노인은 다영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먼 하늘부터 빠르게 먹구름이 몰려왔다. 구름 사이로 번개가 치고 있었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준비가 덜 된 사람이 온 거로구나. 


-그러게 너무 빨리 데려왔나? 


노인과 남자가 그리 말하는 동안 천둥 번개를 품은 먹구름이 그들 머리 위를 감쌌다. 구름 사이로 용이 하늘을 휘저으며 그들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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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정석 - 인생의 격을 높이는 최소한의 교양
찰스 윌런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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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롭고 풍성한 내용을 재기발랄한 문체로 전해주고 있으나 아주 가끔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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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정석 - 인생의 격을 높이는 최소한의 교양
찰스 윌런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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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금리, 연방준비제도, 양적완화, 긴축, 대공황, 2008년 금융위기, 일본경제, 암호화폐, 유로화, 각 국 중앙은행의 금융정책 등 다루는 주제도 금융에 관한 최우선 상식들이다. 

 

돈이 주제가 되는 대부분의 영역을 담론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사례로 드는 역사와 정치, 경제 분야의 실례들이나 셀럽과 자신의 일화, 가상의 사례 등이 다채롭고 적절하게 주제를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다만 [... 연방기금금리가 장기간 제로에 가까운 수준일 경우 연방준비제도가......명목금리를 마이너스로 만드는 것이 어려우니...] 같은 경제 무식자로서는 인풋이 불가능한 내용도 드물게 등장한다. 

 

전체적으로는 저자의 재기발랄하달까 싶은 서술도 나쁘지 않고 번역도 유려하지만 경제와 금융에 대한 상식이 전무한 독자로서는 아주 가끔씩 사이다가 땡길때가 있다.

 

물론 본서를 읽고나면 경제와 금융 상식수치가 (사람에 따라 소폭이나 대폭) 상승할 수는 있겠지만 본인 같은 경우에는 본서 보다 더 쉬울 경제 상식 도서를 읽고나서 본서를 한 번 더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본서를 완벽히 이해할 바탕을 쌓고 다시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 상식에 익숙한 이 책의 독자 분들은 아니 이보다 더 어떻게 쉽게 쓰라는 것이냐 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전문적이라기 보다는 대중의 상식을 위한 책으로써 저술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전문가가 이쯤이면 다들 이해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기준에 경제 무식자까지 포함시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깨우쳤다. 

 

하지만 읽고 보면 참 유익하고 풍성한 저작이기에 더욱 완벽히 이해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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