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를 위한 싸움 사전 - 전략, 심리, 무기, 부상
카를라 호치 지음, 조윤진 옮김 / 다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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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장면 묘사와 부상의 묘사가 세부적으로 그려져 있을 책이리라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약간 다른 책이었다. 장면 묘사가 실례로 전달되기보다는 싸움 장면을 그리려 할 때 고려되어야 할 다양한 사실들의 전달에 치중한 책이다.

 

이 책의 작가는 격투가로서 다양한 격투 기술을 익히고 작가이기에 여러 무기의 체계와 부상 사례를 수집한 여성이다. 그녀는 여러 격투기술과 무기술을 문자로 전달하며 글쓰는 사람들이 장면 묘사에서 어떻게 현실성 있는 장면을 그려낼지 가늠하도록 안배하고 있으며, 맨손과 무기 등을 통한 부상 사례도 현실적인 사례들을 수록하고 있다. 물론 출혈 장면에서 부위별 출혈의 다양한 사례를 문장으로 접하기를 바란 분들에게는 다소의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책인 것도 분명하다. 독물이나 가스라이팅 등의 사례는 이 책에서 기대한 범위를 벗어난 경우들인데도 각 장을 할애하고 있다.

 

이미 다른 텍스트들을 통해 전투와 부상에 대한 각 사례들을 익히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실 텐데 종합해보는 의의도 있을 것 같고 이 책을 통해 기본을 알고 다채로운 텍스트로 세부 사항을 구체적으로 알아간다 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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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멸종 거꾸로 읽는 지구의 역사


왜 주제가 멸종인 걸까?


저자는 멸종이라는 주제로 한국적인 그리고 저자만의 스타일로 빅히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왜 멸종이란 주제여야 했을까 싶기도 했는데 [잔혹한 진화론]에서 저자 사라시나 이사오 님이 죽음이라는 주제로 진화론의 이야기를 펼치며 누구에게나 명백한 현실일 주제로 진화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듯 본서의 저자 이정모 님도 멸종이라는 강렬한 주제로 빅히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것이 대중에게 빅히스토리의 의의의 하나를 선명히 전할 수 있다고 믿어서인 듯했다. 저자가 전하는 멸종의 의의는 한 종의 멸종이 다른 종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순환으로서 바라보며 지구 내 생명체의 역사 전체로 크고 넓게 시야를 확장하게 한다.


기발하고 재치 있는 해설


저자는 가상의 미래 2150년 인류 멸망 이후에서 시작해 2050년 화성에 테라포밍을 시도하는 있을 법한 가정으로 환경에 적응을 너머 변화시키며 개척하려는 과정에서부터 서술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부터 환경의 변화가 생물종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2024년 현재 부빙이 사라져가는 이야기로 생물종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어려움을 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작은 인공지능 그리고 화성 탐사로봇 그리고 범고래와 펭귄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다. 점차 시대를 거슬러 오르며 네안데르탈인, 공룡을 거쳐 끝내는 바다와 달의 대화에 이른다. 이들이 각자가 그 시대의 주역으로 환경의 변화와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 도태되어 결국 멸종에 이르렀음을 서술하고 새로운 종들의 탄생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 탄생의 비밀까지 재치 있고 기발한 서술로 전하고 있다.

저자는 시대를 역순으로 거슬러 오르며 각 진화의 정점에서 하나의 생물종이 멸종해 가는 이야기로 빅히스토리를 쌓아나간 것이다.


다만 과하다고 여겨진 것은...


저자는 여러 박물관장을 거치고 과학기술 훈장 진보장을 받은 인물로서 대중에게 과학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전해온 인물이다. 빅히스토리를 그리며 환경변화가 생물종의 멸종을 불러온 과정과 환경에 적응하는 것의 어려움을 직시하신 분이다 보니 현재의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부차적인 효과도 저술에서 노리신 것 같다. 다만 과하다고 여겨진 것은 전 세계 몇천 명에 이르는 과학자들은 지금도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고 그들의 저작을 읽어보면 현재의 기후위기가 근거가 조작되고 의도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갖게 된다. 그런데도 그러한 과정에서 현재의 환경문제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관점만으로 저술의 배경을 삼은 것은 과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히스토리 속에서 환경이란 생물종에게 지대한 영향을 행사해왔기에 환경을 우려하는 시선이 그릇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빅히스토리를 국내 저술로 만나본다는 의의


본서의 소개에서 이정모 관장님을 한국의 빌 브라이슨이라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런 소개가 전혀 과찬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필력이라는 것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소설보다 재미있고 다큐보다 감동적이다!”라는 책 소개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 정도 필력은 타고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까지 하다. 물론 유익하지만 지루할 수도 있을 자연사를 어떻게 독자들에게 깊은 감상으로 남길 수 있을까 하는 저자의 고심도 깊게 느껴지는 책이다. 빅히스토리를 한국인 저자의 책으로 만나볼 기회 그리고 자연사를 지루하지 않게 기발하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들어볼 기회를 많은 분들께서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찬란한멸종 #이정모 #다산북스 #도서협찬 #빅히스토리 #자연사 #진화 #멸종



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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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문명과 예수 신화 - 신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여 죽음에서 해방되는 이야기
이원구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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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문명을 거론하고 있듯 비단 오리엔트 지역의 신화뿐만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도 언급된다. 예수 신화라고 했듯이 히브리 문화가 받은 영향에 대해서는 약식으로 짧게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인 면을 제외하고는 신화에 비중이 높다. 전작인 [수메르 문명과 히브리 신화]의 연장선에 있는 저작이라고 저자가 앞서 밝히고 있기도 해서 전작을 통해 수메르의 역사와 신화를 잘 알고 있다면 훨씬 더 이해가 용이했을 것 같다는 감상이 들었다. 본인도 전작은 읽어 보지 못하고 본서부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이해에 큰 장애는 되지 않지만 전작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수메르의 신화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칼데아, 아카드, 페르시아 등등 메소포타미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으며 각국에서 신앙하는 신에게 더욱 신화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랄까 비중이 높아지거나 각국에 익숙한 신과 합일하던가 각국에 익숙한 신 또는 여신의 이야기로 변용되던가 하는 모습들이 보이며 신화를 통해 하나의 문명권으로 비치기까지 한다. 그리고 수메르 신화에서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신화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만 한정되지 않고 이집트 신화, 그리스와 로마 신화로도 녹아든다. 기원전 2천 몇백 년에 이르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지역의 신화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졌으며 전파되었다. 이런 영향을 히브리 신화라고 받지 않을 수 없었고 구약에서 드러난 유일신의 모습과 행태는 그 영향을 벗어나지 않는다. 예수 신화도 민희식 님의 [성서의 뿌리] 시리즈나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의 [예수는 신화다] 같은 저작들에서 이미 헬레니즘 문화가 융성한 이후 불교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유럽까지 확산한 이후 형성된 예수 신화가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본서에서는 더욱 확연히 드러내 주는 것 같았다.

 

4부와 5부는 구약과 신약이 얼마나 그 이전 신화들에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장들이 이어지고 영지주의와 정통 기독교가 대립하고 정통 기독교 내에서의 분열과 숙청 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예수와 그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일종 비유라고 받아들이던 영지주의 교파들과 정통 기독교 내에서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던 종파들의 사례를 읽으며 과연 현재의 기독교는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저자의 말마따나 사도들의 시대, 베드로의 시절부터 정치적인 역량만이 강화된 종교가 아닌가 하는 감상도 들었다.

 

본서는 신화가 확산하며 서로 영향을 주면서 전파되어가는 과정과 유대교 기독교가 다른 지역의 이전 신화들로부터 받은 영향을 충분히 생각해 보게 하는 내용이다. 저자분이 문학 전공이면서 중동지역 신화를 연구하시는 분이라 상당히 몰입감 있게 저술된 저작이다. 오리엔트 지역의 역사와 신화가 궁금해서 펼친다면 더 많은 상식과 더 많은 독서열을 갖게 하는 책인 걸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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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은 없다 - 중동의 불씨
카나드연구회 지음 / 지식과감성#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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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다소의 오해로 접하게 되었다. 유일신 자체를 부정하고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을 이성으로 타파하는 책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유대교, 기독교, 이슴람교가 믿는 신이 유일신이 아니라는 데서 이성적 사유의 단계를 그친 책이다. 저자는 기독교가 갖는 논리적 모순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전면 부정하기보다 기독교가 믿는 신은 유일신이 아니며 악령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와 유사한 주장은 [성서의 뿌리] 시리즈를 통해 민희식 님이 거듭 야훼는 악마다라고 주장하던 것에서도 보였다. 이런 주장들에는 분명 그들 나름의 근거는 있지만 기독교 측에서도 반론의 여지는 충분하다. ‘상위 의식의 존재, 초월자의 계획을 우리의 이성만으로 가늠할 수 있겠느냐고 반론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불완전해 보이는 것도 초월자의 완전한 계획의 과도기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라는 반론은 충분히 수긍의 여지가 있는 반론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도 목표 완수를 위한 단계 중 과도기의 하나에서는 불완전해 보이지만 끝내 완벽히 목표를 완수하는 경우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저자의 저작을 읽으며 그간 내가 품어왔던 의문과 닿는 대목들도 있고 미쳐 사려하지 못했던 대목들도 있었기에 그에 대해 리뷰해 보고자 한다.

 

저자는 [증거 1]이라는 장에서 [우상 숭배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데 완전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숭배따위에 연연해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숭배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기록한다며 그 자체에서 모순성이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이로 해서 저자가 야훼는 불완전한 존재로 지역신이며 전쟁신일 뿐이며 인간을 자신의 영예와 유희를 목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선민이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했다는 자체도 보편적인 사랑 창조주로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가져야 하는 존재이면서도 차별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는 비판도 하고 있다. 그렇기에 인류 전체의 창조주가 아니라 지역신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오랜 역사를 떠돌며 버림받았다. 애초에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면 왜 하나님을 버릴 민족을 선택했으며 그런 불완전함을 신적 능력으로 완전하게 바꿔놓을 수 없냐며 이는 기독교의 신이 불완전하고 인간으로부터 추앙만 받고자 하는 욕심만 내세우는 악령이기 때문이란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증거 2 원죄론의 허구성]을 보면 아비는 그 자식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으며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24:16의 말씀을 근거로 원죄라는 것이 이어져 왔다는 데 대하여 이견을 제시한다. 저자는 원래 죄라는 것은 사회공동체에서 규제적인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창조에 따른 구성적인 원죄는 성립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원죄론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나로서도 의문이었다가 아직 기독교인이던 시절에 나름의 답을 얻었는데 간단 명료히 저의만 이야기하자면 인간이 원죄를 지었다며 하나님으로부터 낙원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인간 문명의 모든 바가 발전해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볼 때 모순적인 원죄론이지만 죄를 지었다는 처벌에서부터 인류 문명의 시작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인간의 눈으로 불완전해 보이는 것이라도 완전한 계획의 일부일 수 있다는 논리에 가닿았다. 원죄론이 없다고 나는 믿기에 예수님의 삶과 죽음도 구원의 측면이 아니라 아담 카드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완전한 인간의 역량을 다 구현해낸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능력과 한계를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믿었다.-

어찌 되었든 저자는 원죄론을 BC 6~7세기 오르페우스교에서 유래한 것을 유대민족과 기독교가 받아들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전면 부정하고 있다.

 

[증거3 구원론의 허구성]을 보면 이미 원죄론을 부정하고 있는 관계로 당연히 원죄로부터의 구원인 기독교의 구원론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가 대속하는 죽음을 맞이했다지만 그의 죽음 이후 인간이 낙원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죄에서 벗어났다고 할만한 어떤 특이성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믿음이라는 자충수를 두어 예수의 구원 능력에 한계만을 보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라며 하나님과 같다는 예수가 구원 능력에 한계를 갖는다는 것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에서 말하는 자력타력이라는 개념처럼 상위 존재의 능력에 수혜를 받는다 해도 자신의 노력도 더해져 자유의지가 영향력을 얼마간 행사하는 것이 인간의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은가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저자처럼 기독교 논리를 따라가면서 비판하는 바와 다름없는 기독교적 논리 수긍이라고 생각되지만 말이다.

 

[증거 5 천국의 허구성] 저자는 낮은 단계의 인간 세상을 만들고 높은 단계의 천국을 만들어 낮은 단계에서 무언가를 완수해야만 일부만이 천국에 간다는 기독교 논리에 이의를 제기한다. 보편성이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완전하게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을 완전한 존재로 변모시키는 것도 아니고 차별적인 구제를 하는 데 대하여 인류 전체를 창조했다는 하나님이 보편성을 보이지 않는다며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종말도 심판도 없다고 주장한다.

 

[증거 6 하나님의 실수와 예수의 한계]에서는 이미 원죄론의 허구성에 대하여 저자가 주장하며 펼친 인간의 원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죄라는 논리를 펼친다. 예수의 사랑도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 대한 차별적인 사랑이라고 거짓 사랑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신의 상이 배치되는 것을 근거로 세계복음화의 모순으로 지적한다. 구약을 근거하자면 예수는 이단의 왕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증거 7][증거 8]은 기독교의 죄악사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성령과 은혜가 하나의 미끼로서 하나님과 예수에게 영광을 돌리고 인간을 가지고 노는 미끼 그 이상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기독교와 일신교 전체에 대한 반론의 여지가 상당히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도 전반적인 기독교 논리를 룰로 인정하며 비판하는 것으로 놀이에 룰이 필요하듯 놀이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기독교의 믿음 놀이에 반대편에 있는 저자의 반론 놀이라고 할까?

 

신이 없다는 주장도 아니고 신앙에 대한 논리적 타파도 아니라 기독교 논리를 따라 반론하며 하나님이 아니라 악령이고 잡신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정도이다. 이 책은 아마 종교를 전면 비판하는 분들이 선택하기에도 애매하고 기독교인들이 종교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리 전반을 알고 싶다는 취지에서 선택하기에도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다. 기독교 비판서 전반에 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읽어 보실만 할지 모르겠다.

 

지식과감성#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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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소득 시대 부자들의 정체 - 우리는 왜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가?
앤드류 세이어 지음, 전강수 옮김 / 여문책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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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를 직역한 제목이 부제로 한국어 제목 아래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우리는 왜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가] 부자들의 어떤 면 때문에 우리가 부자들을 감당할 수 없는지가 상세히 제시되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전에 저자의 부와 경제에 대한 정의들을 먼저 알아두는 게 전체적으로 독서를 잇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는 번다는 개념을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제공함으로써 보상을 받는 것으로 보는데 증여나 상속을 통해 부를 얻고 이를 투자하는 극부층은 버는 것이 아니라 불로소득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투자도 사회적 인프라, 교육, 복지 등 미래에 투자하는 것과 사익추구를 위해 금융투자를 하는 투자는 투기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불로소득도 복지 등을 통한 정당한 불로소득과 투기적인 추출하는 불로소득을 각각 정의한다. 극부층의 추출하는 불로소득을 경계하며 비판하는 내용이 본서의 축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재난과 팬데믹 등의 재앙적인 상황에서도 부자들의 부는 극단적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이는 상속과 증여라는 방식으로 전승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상속과 증여를 통해 쌓은 부로 극부층이 어떻게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해가는지가 본서의 주요내용이다.

 

금융가들은 대출이자를 납부하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이자를 높여 받고 부유층일수록 이자를 낮게 받는다. 나로서는 니 담보 내놔라라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금융가들이 신용파생상품 등을 제작해 경제적 재난을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고객이던 서민들의 담보를 거의 수탈해 간다거나 하는 상황 등 거대 규모의 경제난을 일으켜도 이들은 법적 처벌을 전혀 받지 않는다. 서민이 소액을 훔쳤을 때는 벌금과 처벌 수위가 상당한데도 금융가들이 수탈을 할 때는 전혀 법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걸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이들이 마약상들의 자금을 세탁해주고도 처벌받은 사례는 없다고 한다.

 

주식투자에서는 이들은 내부자 거래와 시장 조작 등으로 얼마든지 부를 창출하며 고용주로서의 이들은 고용의 불평등을 조장해내 인턴제도와 비정규직 등의 업무 방식을 일반화해 쓰고 버리는 방식으로 정규직 임금을 주지 않으며 차별적 임금으로 사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자본을 투자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디어 발상, 기획, 설계, 제작, 마케팅 그 외 모든 분야에서 활약하는 근로자들 보다 초월적인 연봉과 인센티브 그리고 주가 상승으로 인한 이익을 보는 것이 상당히 불합리한 구조이다. 게다가 대다수의 일반인들도 이미 알다시피 이 극부층 중 CEO 역할을 맡는 이들은 회사가 망해도 인센티브를 받는다. 애초에 회사를 제대로 운영하는 게 의도가 아니라 여러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주주들이 인수 합병하는 회사의 주가가 상승해 준 데 대해 인센티브를 지불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극부층이 무서운 것은 그들이 원칙을 창조하는 집단이라는 데 있다. 다보스 포럼 등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그들의 원칙을 세계적 원칙으로 만들어 간다. 게다가 각국의 정치구조와 국제기구 등에 로비나 후원금 등을 통해 또 그들 내에서는 하위층일 인물들을 요직에 배치해 법과 제도 자체를 극부층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고 있다.

 

브레턴우즈 체제까지는 경제적 환경이 대중 다수에게 유익한 배경으로서 작용했는데 이후 경제적 환경은 극도로 악화되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 구제 금융의 지원을 받거나 세계화, 자유화에 동참한 나라들은 민영화와 규제철폐, 노동 보호 철폐(노동환경의 유연성이라며) 등을 통해 대중의 안정을 파괴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국제기구든 중앙정부의 제도든 극부층에게 유리한 지경으로 제도를 완비해 나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들은 법과 제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악용하거나 새로이 구성하여 자신들의 부가 더욱 공고히 해지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선가라던가 기부자라는 이름으로 대중적인 호응까지 얻고 있다. 하지만 빌 게이츠의 경우나 워런 버핏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들의 자선 사업은 재단을 만들어 그 돈으로 투자하고 사익과 이윤을 추구하는 하나의 사업 시스템이다. 게이츠 재단이 환경문제를 내세우며 농업 부분을 장악하고 팬데믹을 우려하며 백신개발과 생산에 투자해 막대한 부를 추출한 것을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저자는 마지막 결론의 장 직전의 장에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언급하며 이에 대해 대응하며 경제인들의 부분별한 생산을 제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로서는 이도 해결안이 아니라고 보였다. 종말론적 환경주의 연구에 대대적으로 후원하는 것도 초극부층들이며 여러 미래 예측서들에서 언급되듯이 탄소 저감과 친환경 사업에 투자되어 신개발되었거나 개발 완료 직전 단계에 있는 기계와 시스템들의 수가 수백에서 수천에 이른다. 이들은 새로운 부의 창출을 위해 대대적인 혁신을 기획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적 파괴란 개념으로 발전을 거듭해온 그들은 대대적인 혁신을 위해 거대 규모의 파괴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공유 경제라는 개념을 들어 개선안을 이야기하기도 했으나 저자가 말하는 토지에 더해 지적 재산권까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지대를 공유화한다던가 해도 대대적으로 실업자가 양산될 AI와 로봇의 시대에 답이 되기는 부족할 것 같다. 극부층은 그들끼리 생산하고 판매하고 소비하는 완벽한 그들만의 세계를 갖게 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나 싶다. 다수의 대중은 초대량 실업자가 되어 그들에게 부담해야 할 짐으로 전락하고 말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며 세계는 원래부터가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지만 그걸 벗어날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는 감상이 무엇보다 크게 남았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관점을 대중화해서 대중의 성향이나 심리까지 제어하고 있는 그들을 볼 때 대중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게임을 전환할 가능성은 결코 없어 보인다. 이미 끝난 게임이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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