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다중인격 - 내 안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하는 새로운 자아 관리법
다사카 히로시 지음, 김윤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사람은 누구나 다중인격이며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논리다. 그리고 어느 장르던 능력있는 리더들은 모두 그 다중인격을 상황과 장소에 맞게 잘 교체하여 적절한 인격으로 해당 업무를 장악해 왔다는 것 역시 저자의 주장이다. 능력이라는 것은 결국 업무와 상황에 맞는 성향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구사할 수 있느냐이기에 능력이라는 것은 결국 인성이며 인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능력있다는 것은 결국 인격이 남다름을 이야기한다. 인격이 남다르다는 것은 그 인격을 상황에 맞게 구사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황에 맞는 인격으로 다양한 인격을 교체할 수 있는 것이 능력있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의 논리다. 


나 역시 다양한 페르소나 즉,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어린시절 부터 절실히 실감했다. 8살 부터는 전학을 다닐 때 마다 다른 성격의 모습 다른 속성의 나를 연기하며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남과 나를 구분짓는 나만의 개성이란 것이 무엇일까?" 의문을 가졌었다. 아버지를 보며 평상시 실제 나를 대할 때와 타인 앞에서만 자식을 위하는 선한 아버지의 가면을 쓸 때의 그를 보며 인간은 연기를 하며 사는 것이구나 하는 것도 명확히 느꼈었다. 그래서 5살 부터 간헐적으로나마 아버지를 변화시키려 노력했다. 그가 타인 앞에서 보이는 아버지상과 보는 눈이 없는 일상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의 괴리를 줄이려고 노력한거다. 결국 9살이 다 지나갈 때 쯤에야 사람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었다. 다른 이들에겐 지가 남다르다고 말하고 싶은건가 싶겠지만 나에겐 생존이 달려있던 문제였다. 


여하튼 인간은 보는 눈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다르며 자기 이익과 손해 앞에서 달라지고 힘 있는 자를 대할 때와 지가 힘 있는 자일 때가 다르다. 원수 대할 때와 연인을 대할 때가 같다면 보디사트바이거나 미친놈이거나 둘 중 하나인 걸테고... 이건 기저귀도 떼기 전부터 7살 중반 까지를 거치며 이미 충분히 깨우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어쨋건 저자는 다중인격을 키우고 때에 맞게 교체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의 척도이니 다중인격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다. 정신병리로서의 다중인격은 인격이 수시로 교체되는데도 인격만 교체되면 인격이 교체되었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자신이 말하는 다중인격은 정신병리로서의 다중인격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이다. 


저자는 다중인격은 양성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어느 장에서는 에고 매니지먼트라고 표현했다. 숨어있는 재능의 발견과 계발을 위해 인격양성과 교체를 원활히 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건 특정인격, 기존에 고착 되어있는 페르소나에 갇혀서 다른 인격으로 전환을 못하는 경우라고 한다. 이것을 저자는 '단단한 페르소나', '완고한 인격'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성향이 우리의 가능성을 억압하고 방해하고 있다고 한다. 특정 페르소나가 장악하면 다른 인격들은 심층의식 속으로 억압되어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억압된 인격을 기반으로 하는 숨겨진 다른 가능성을 찾아낼 수 없게 되는 거라고 말이다.


저자는 이 인격 억압의 원인을 부메랑 효과와 자기한정에 있다고 말한다. 부메랑 효과에 대해서는 전기의 플러스(+) 전하, 마이너스(-) 전하를 예로 들며 이 두 전하는 동시에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긍정적 상념을 강화하려 하면 부정적 상념도 그만큼 커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표면의식의 긍정화하려는 노력이 심층의식에 부정적 상념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긍정적 암시를 강화할 수록 부메랑 효과가 커진다는 말이다. 자기계발을 위한 암시가 자기한정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최면에 대한 책 두어권만 읽어본 사람이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게다가 저자는 부메랑 효과를 완화하는 방법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렇다면 저자의 말이 오히려 대중들에게 모든 경우의 긍정적 사고가 역효과만을 가져오고 부정적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세뇌하는 암시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으로 하는 부정적 말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세계를 분절화하는 두려움이라고 말이다. 두명이 있는데 한명의 특정 장점을 칭찬하면 다른 한명은 칭찬 받은 이의 그 특정 장점이 없는 인간이라는 자기선언을 하게 되며 그로 인해 심층의식에 해당 분야에 대한 계발 가능성이 차단 당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무의식적 생각으로 자기를 한정짓지 않도록 주의하고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심층의식에 악영향을 행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암시에서든 부메랑 효과를 완화하려면 자신이 납득할만한 전제가 담긴 암시면 된다. 예를 들어 육상선수라면 그저 "난 나날이 빨라지고 있다"고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근육이 반복되는 운동으로 숙련되며 기록갱신 되는 것, 자신이 컨디션 조절을 위해 섭취하는 먹거리 중 다른 선수들과는 차별화된 무언가를 떠올리며 암시한다면 낫다는 것이다. (뭐, 자세한건 어느 최면에 대한 책이던 참고하시길...)-


저자는 자신이 전하는 다중인격 관리, 즉 에고 매니지먼트를 위해서는 3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허나 그전에 내 안에는 모든 인격이 숨어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단다. (부메랑 효과에 대해 언급하고선 다시 확신을 논하고 있으니 분명히 다중인격에 관한 도서가 맞긴 맞나 보다ㅡ,ㅡ;) 그것이야말로 내 안에는 모든 가능성과 재능이 숨겨져 있다는 확신이라고 말이다. 


다중인격관리 3가지 방법은 표층인격, 심층인격, 억압인격... 이 세 인격을 관리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각기 다시 여러 방법으로 나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관찰, 인식, 창조/강화, 모방, 융합, 체험, 관조'  이렇게 7 조합이면 정리 끝날 것 같다.


감상을 좀더 더하자면 저자가 말하는 다중인격이라는 것은 저자 말 마따나 누구나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연출하며 살아가는 것이란 거다. 자신이 연기전공이라거나 연기전공인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이 있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주위에서 끊임없이 목격하는 흔하디 흔한 경우다. 다만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느냐 의식적으로 연출할 수 있느냐의 차이이다. 어떻든 의식적으로 연출할 수 있다면 의도에 따라 다양한 이점이 있을 것이다. 저자 말대로 자신의 재능을 발굴하고 육성할 수도 있고 타인을 이해 할 수도 타인에게서 배울 수도 있다. 그럼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폭넓어질 수도 있고 인격을 교체하고 그런 자신과 타인을 조용히 바라보며 자기를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며 생과 세상을 관조하는 폭넓은 시야와 인격을 함양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종래엔 아래 '인상깊은 대목들'에 올렸듯 사상이 깊은, 인간상과 인간성을 기를 수 있으며 자기가 중심인 소아小我에서 이기성과 이타성을 중재해 함께 더불어 아우러져 살아나가는 대아大我로 진화 할지 모른다. 재능을 키우려 다중인격을 연출하려던 이들이 결국엔 붓다께서 이상적이면서도 당연한 인간상으로 말씀하신 보디사트바가 될지 모르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인간으로 성장할런지 모른다는 말이다. 


-몇마디 더 하자면 보디사트바는 대승 불교에서 자비를 실천하려 불성(佛性 , 깨달음)을 이룬 분께서 자신의 레벨을 낮추어 존재하는 것 즉, 중생과 세상에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존재적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도 결국은 실천적 사랑을 이르는 것이다. 사랑은 실천이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가 깡패를 만났거나 궁핍에 처했거나 병들어 괴로워 하고 있을 때 도움도 위안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두고 사랑이라 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저 마음으로만 느낀다고 사랑이라 한다면 그건 위선과 가식과 다를 바 없는 오염된 사랑이다. 그렇게 사랑이 바이러스에 물들어 버렸다면 백신이 필요하다. 그 백신... 아파도 견뎌라. 동양의 '효(孝)'도 개역개정판 성경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마 5:7> 라고 언급되며 등장하는 '긍휼' 이란 어휘도 모두 실천을 동반할 때 의미가 성립되는 어휘이다. '효' 는 부모님에 대한 공경과 사랑이 어떻게 실천될 때 그리 불리울 수 있는지 유교 입문서들 전반에 거듭 설명되어 있다. 또 '긍휼'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이라 해설하고 있다. '불쌍히 여기는' 감정을 느끼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보아 준다'는 실천이 동반할 때 비로소 '긍휼'인 것이다.


말씀과 인식과 감동은 결국 실천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말씀이 내면에서 빛나려면 인식하고 감동했다며 그래서 난 거듭났다고 주위에 떠들고만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실천 할 때에야 비로소 당신은 '빛의 아들' 인 것이다. 실천 없는 사랑은 어두움을 밤이라 하듯 그 밤에 여명이 깃들락 말락 한 것일 뿐이다. 실천해야 여명을 보고 빛이 가득한 낮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실천이 세상에 여명을 불러오고 낮을 맞이하게 한다. 잊어선 안된다. '너희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잊고서 영생만을 외치는 이들, 예수님 이름만 외치고 있으면 거듭 난 것이라는 이들은 어두움 속에서 헤메이는 것이고 이슬을 먹은 독사가 되어가면서도 모르는 것이다.- 


역시 개인의 진화(evolution)와 세계의 혁명(revolution)은 따로 떼어놓고 바라볼 수 없는 문제다. 인간은 개인적 성장과 성취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성향만을 주목하고 있다. 그 이기성을 육성하기만을 좋아라 하면서 그런 자신으로 인해 타인들이 피해를 보거나 자신과 상관 없는 이들의 고통은 외면하고 방치하며 살아가려 한다고 한탄만 하고 인류를 포기 할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중인격』의 저자와 같이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이로운 과정을 제시하여 그것이 결국은 인격을 함양해서 이타성을 일깨우도록 하면 된다. 그렇게 내면에 잠들어 있던 사랑이 깨어나 제 역할을 하며 살아가도록 방편을 제시해 주면 될 일이다. 그래,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쓸 단위였다.



§ 인상 깊은 대목들


-사상이란 현실의 삶 속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조직 속에서, 사회 속에서 그것을 살리기 위해 눈앞의 현실과 온몸으로 부딪쳐 싸웠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사상이 되고 진정한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 깊이 있는 사상을 가진 인물은 개인, 대인관계, 조직, 사회, 지구라는 다양한 수준의 사상을 살아가는 동시에 그 사상의 수준에 맞는 다양한 수준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진정 깊은 사상을 가진 사람 역시 다중인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숨겨진 가능성을 찾고 싶다면 먼저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 풍부한 인간상과 인간성이 들어있는지 먼저 체크하고, 이를 길러야 합니다.


-소아小我에서 대아大我로... 대아大我는 무아無我의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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