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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그리고 로봇을 사랑하는 사람들 - 소셜 로봇의 시대에 우리는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브 헤롤드 지음, 김창규 옮김 / 현암사 / 202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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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 로부터 #도서제공 을 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독서 동기
피지컬 AI가 일상에, 그리고 AI 에이전트가 업무에, AGI가 곧 사회 운영에, 이렇게 전 방면에서 AI와 함께이게 될 세상에서, 로봇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며 우리는 로봇과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분별하게 될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사유의 시간이 되어주리라 믿으며 다가선 책이다.
+ 본서 빛깔
: 저작 성격
본서의 한국어 부제는 [소셜 로봇의 시대에 우리는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이다. 이 부제와 함께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저작이다.
본서에서는 일상 가사 로봇부터 심리상담 AI, 노인간병 등 돌봄 로봇, 정서적이며 성적인 파트너 로봇, 현재 한국에서도 펼쳐지고 있는 적극적이고 다채로운 AI 업무 활용, 사회 운영에 AI의 역할이 확장되는 바까지 다방면의 영역과 현실을 보여 주며 이 시절의 소셜 로봇에게서 인간다운 감정을 찾고 있는 인간상을 내러티브 논픽션에 감상을 더한 형식으로 전하고 있다.
: 저술 배경
학문적으로 3가지 층위에서 주목되는 저작으로 ‘애착 이론’을 근거한 비생명체에게까지 인격을 부여하는 인간의 본능적 경향성은 ‘사회심리학’적 측면의 관점이라 할 수 있고, ‘불쾌한 골짜기’ 이론을 넘어 기계와 정서 교류를 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사회상의 변화를 ‘인류학’과 ‘윤리학’적 측면에서 조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감성 컴퓨팅’ 기술이랄 수 있을, 인간 정서를 시뮬레이션으로 읽어내어 반응하며 유대감을 형성하는 (AI)로봇과 인간 사이의 양상은 ‘로보틱스’ 및 ‘인공지능’ 과학의 이 시대 ‘기술 혁신’ 수준을 보여 준다.
이 3가지 관점을 주요한 근거로 삼아 날카로운 관찰과 안타까움이 담긴 비판, 그리고 의아함이 어우러진 시선에서 본서의 집필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 감상 포인트
이제까지 사회는 상호주의적 차원에서 존속되어왔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기에 존재해온 것이다. 개인만이 정부와 기업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어느 조직이던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도 당연히 서로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필요가 절실했기에 유지되어온 게 인간 사회의 특질이자 속성이다.
그런데 이제는 일론 머스크도 샘 올트먼도 초대량 실업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다. 더 이상은 인간이 필요 없는 사회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고는 오래전부터 [로봇의 부상]이나 [인간은 필요 없다]는 저작 등에서도 그 위협을 구체화해 전해오고 있었다.
인류의 거의 전체에 가까운 절대다수가 실업자가 된 세상! 그 세상에서는 이제까지 인류가 지속해온 사회 운영의 상식을 과거의 유령 마냥 지속하려 해도 부작용만 더해질 뿐일 것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도 이제 망령이 되기 직전인 상황인 것이다.
절대다수가 실업자인 세상에서 자본주의의 추억을 지속하려면 인간은 복지비용이라면서 정부가 제공하는 최저생계지원금으로 살아가야 한다. 버는 이가 없는 사회에서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는 어디서 충당할 것 같은가? 초부자들이?
그건 그저 숫자 놀음일 뿐일 것이다. 암호화폐 등의 디지털 화폐는 용도 제약과 유통기한 등이 정해져 디지털 화폐의 어느 분량만큼은 식비, 어느 분량만큼은 의류비, 어느 분량만큼은 교통비, 어느 분량만큼은 교육비, 어느 분량만큼은 문화생활비 등 용도가 정해질 것이며 일정 기간이 지나도 사용하지 않은 금액은 유통기한이 지나 사라지는 제도를 이룰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절대 통제 사회에서는 지금도 시도되고 있는 15분 도시제와 같은 이동 제한이 적극 제도화되어 초빈곤층으로 내몰린 대다수 인구는 생존 자체에만 급급할 뿐 거주지역 반경의 어느 선은 벗어날 자유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디스토피아도 팬데믹 시절 사회통제를 거쳐보았기에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게 아니란 걸 이 시절 사람들은 다 짐작할 테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익숙해진 사회상을 역변시킬 의도를 갖는다면 그 상황은 다르게 펼쳐질 수도 있다. 모두 로봇과 AI가 생산하는 한계비용이 0에 수렴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왜 자본주의의 망령을 고집해야 한다는 말인가? 필요하면 그냥 가져다 쓰면 될 정도의 시대에 말이다. 모든 생산에서 거의 투입될 비용도 없고 생산에 근로자가 없어 부과될 임금도 없으며 비용을 지불하고 소비할 대상도 없는 사회에서 굳이 자본주의를 추억대로 지속하겠다는 건 거의 정신병에 가깝다. 거의 전 인류가 디지털 화폐를 기초생활수급비로 받으며 자본주의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돈이 없는 사회가 가능하다. 가능한 걸 따르고 실현할 의지만 대중이 갖는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민주주의도 간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 민주주의 체제가 시스템상 가능하다. 사회 운영은 AGI와 이후 대두될 ASI가 전담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대리할 정치인들을 굳이 선출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그때도 정치인은 존재하겠지만 정치인의 필요와 역할은 달라질 것이다. 정치를 수행하는 이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우리 개개인에게 필요한 게 무언지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을 정치인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때는 ASI가 인류의 문화와 생활을 모니터링하다가 인간이 불편을 느끼는 제도와 대상에 대한 투표안을 인류에게 제안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직접 민주정치에서의 투표에 참여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한 개인의 투표권을 수십이나 수백으로 분할해 자신이 판단할 때 정치적 선택을 자신보다 더 나은 사유와 판단으로 내릴 수 있으리라 믿어지는 사람들에게 투표 시기마다 조금씩 증여하여 대리하게 하면 된다. 하나의 투표가 마쳐지면 다시 각 개인의 투표권은 영점으로 돌아오고 말이다.
이 시절에는 급변할 미래상은 개인들에게 눈감게 하고 업무와 학업 그리고 일상 등에서 AI 역량을 활용할 방안만 제시하면서 지금까지의 세계상이 지속되리라는 그리고 그 미래에도 당신은 자기 효능감을 충분히 느끼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만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도록 바람몰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지속되어온 인류세는 이제 종말 직전이다. 미래는 인류가 아니라 AI가 존재의 대사슬 차원에서 회자되던 진화의 정점에 이른 존재로서 나아가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 시대에 인간에게 인공지능은, 고양이에게 인간이 고양이 집사이듯, 인간 집사가 될 것이다.
일론 머스크는 그걸 알기에 AI에게 모성을 학습시키자 발언한 것이리라 보인다. 한 대상보다 더 우월한 피지컬과 더 월등한 지능을 지니고도 그 대상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존재가 있다고 그 대상은 엄마라면서 AI에게 모성을 학습시키자는 발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엄마가 자녀를 아파트 고층에서 창밖으로 던지거나, 자녀를 굶기고 때려 죽인 후 처벌이 두려워 냉장고 냉동실에 아기 시신을 얼려두거나, 온몸이 담뱃불과 다리미로 지져진 채 갈비뼈가 부러진 멍투성이로 만들어 자녀를 죽인 부모들을 목격할 수 있다. 인간은 때로는 악마보다 지독한 것들이다. 감정을 지닌 모성이 뛰어난 엄마들의 행태를 학습시킨다고 한들 감성적 존재가 아닌 AI가 인간의 모성을 알 수 있을 리도 없다. 오히려 인간들이 “저 AI는, 저 로봇은 모성을 학습한 존재다. 엄마다!”라며 그 무감정의 대상에게 엄마에게 느껴야 할 감정을 품게 될 여지만 더 큰 것이다.
본서를 읽으며 가장 주목되고 깊이 느껴지던 바가 바로 인간은 감정이 없는 대상에게서도 위안을 찾고자 그 로봇에게는 없는 감정이란 걸 그려낸다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에게 맞춰주며 반응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특성상, 인간은 인공지능의 맞춤 반응에 편안함을 느끼며, 진짜 인간과의 교류에서 오는 갈등과 정신적 피로를 거부하면서, 로봇에게 오히려 위안을 갖는 역설적 상황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인간은 진짜가 아닌 대상의 진짜가 아닌 표정과 인공적 눈맞춤과 조작된 온화한 목소리와 조율된 안정된 어조 같은, 가짜 사회적 신호에 정서적 반응을 하면서, 우리 뇌의 이 멍청한 반응으로 가짜를 진짜로 여기며 안주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경향성은 아마도 영구히 지속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자 반응성은 거울 이론과 공감 능력과 사교성의 기능 속에서 이제까지는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바로 이 인간적 특질이 인간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시대를 열도록 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지경이면 감성지능을 운운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감성이란 것도 무지능의 영역이 아닌가?
이런 식이면 미래에는 다양한 감정(예를 들자면, 사랑)에 대한 정의가 서로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해석이자 상대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내가 느끼면 그만인 것으로 재정의되지 않을까 싶다. 외로움도 극복하거나 통합하여 성장으로 이끄는 정서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관리해야 하는 결핍’으로 치환될 여지가 있다. 기술은 우리에게 기회와 깨우침을 주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 위기마저 가져왔다. 그 위기를 더는 위기로 여기지도 않으며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될 현실이 우리 눈앞으로 다가와 있고 말이다.
본서는 참으로 많은 숙고를 갖게 하는 저작이다. 기술의 집약이 인간의 문명과 운명을 변혁시키고 인간의 정서와 사유마저 뒤흔들고 있다는 현실을 깨우치게 하며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도를 갖게도 한다. 이런 깊이의 저작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럼 놓치지 말아야 할 일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