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바이러스 - 우리는 왜 적대적 인간이 되는가, 카를 융이 묻고 43명의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저널리스트가 답하다
코니 츠웨이그.제러마이아 에이브럼스 지음, 김현철 옮김 / 용감한까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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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까치 출판사로부터 #도서지원 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독서 동기

 

인간을 본능과 이성과 비판자 그리고 무의식의 격돌에 장으로, 무의식은 본능의 시발로 인식했던 프로이트와, 인간의 무의식이 신의 경계 안으로 인도한다고 믿었던 칼 융은 접근방식도 인간에 대한 이해도 달랐던 것 같다. 신의 경계로 향하는 인간의 어두운 면모가 응축된 그림자라는 걸, 그리고 배격하는 게 아니라 통합해야 하는 것으로 본 칼 융의 이해는 결국 나 다운 나는 갈등하고 격돌하고 파괴하는 전투가 아니라 이해하고 수용하는 사랑의 길을 통한 여정으로 가닿는다는 감상을 준다. 나 다운 나로 성장케 해줄 책이라는 미더움에 조용히 다가섰다.

 

+ 본서 빛깔

 

그림자는 우리의 페르소나를 구성하는데 저항으로 다가와 내면에 밀어 둔 또 다른 나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저항은 사회나 가족에 일원이기를 원하는 우리가 스스로를 길들이도록 허용해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을 억압하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우리는 우리의 그 그림자라는 부정성을 외부에 투사한다. 타자에게서 그런 부정성을 보며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위안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다.

 

본서의 저자는 둘로 기록되고 있지만 칼 융을 포함해 45명 가량의 저자들이 함께 수록한 내용의 책이다.

 

1부에서는 그림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그림자의 정의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앞서 말한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결국 인식하게 만드는 투사라는 것에 대해 어느 저자는 투사가 없다면 우리는 세상과 연결될 수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적어도 개인의 그림자, 공동체의 그림자, 그리고 국가의 그림자가 있어서일 것이다.

 

어느 저자는 잘못된 페르소나가 사라짐과 동시에 그림자가 통합된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잘못되었다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에 저자가 부정적 그림자를 논할 때 부정적 특징에 자신을 동일시해 긍정적 특징을 억압할 때 긍정적 그림자가 나타난다.”고 정리해주는 저자도 있다.

 

잘못된 페르소나”, “부정적 특징등 잘못되고 부정적이라고 말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분석심리학은 주로 영성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심리학인 까닭에 사회적인 긍정과 부정의 정의에 따르는 게 아닌가 싶다. 폭력성과 성애, 기만, 유치함 등 사회화의 요소로 불리하거나 권장 사항이 되지 못하는 기준을 따르는 경우, 잘못되고 부정적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폭력성이 복싱과 UFC, 주짓수 등 격투기 종목을 낳고 유머도 낳았으며 자신의 성애를 드러내는 AV 배우들이 저열하기만 하다는 시각은 이 시대엔 없으리라 생각된다. 자신의 욕동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며 물씬 드러내어도 문제없는 시대가 되었다. 사기꾼이 주역인 드라마나 영화도 많으며 오히려 사기 기질을 보이던 이성에게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고 그녀와 같이 사기꾼적인 거짓을 말하며 고백하던 영화도 있다. 이 시대엔 키덜트라고 해서 피규어 등 어린 시절에 놓친 자신만의 낭만을 찾는 것도 부정되지 않는다.

 

이후 9부까지에 이르며 본서의 이곳저곳에서 투사와 억압이 그림자를 문제로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투사 없는 다가섬은 불가능하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 상대에게 이를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억압도 지나치면 문제지만 적절한 억압은 절제로 수긍되고 절제 없는 무분별한 페르소나의 교차는 가정 파괴의 주제를 부모나 자신이게 만든다. 안정된 사회는 적절한 억압과 자유가 균등하게 분포하며 순조롭게 교차할 때 오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타자에게 투사하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바로 인식하여 상대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줄이는 데 주목해야 한다. 본서에서는 자녀와 형제, 가족에게 대한 투사를 논하기도 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사랑받고자 그림자를 억압하며 스스로를 나쁜 아이로 인식하게 하는 것도 부모의 사랑에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제자매는 우리에게 애정과 동경의 대상이면서 결코 닮지 않고 싶은 마녀이기도 하다. 저자 가운데 한 명은 자매란 내게 가장 되고 싶지만 될 수 없는’, 그와 동시에 되지 않나 다행이지만 될까 봐 두려운존재다.”라고 정의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회와 제도 차원에서라면 어느 저자가 정의한 선함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건 선이 악에 대항해 승리할 때가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악을 누르고 승리한다라는 형태로 표현되지 않게 될 때일 것이다.”라는 문장이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악은 어쩌면 선을 창조하기 위한 선의 희생자가 아닌가 싶다. 범죄와 범죄자란 선한 이들이 선하다는 자신들을 위해 만드는 선한 세상을 위한 희생양이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림자는 막연히 부정하고 억압할 대상이 아니라 수용하고 통합해야 하는 대상이다. 물론 그에는 섬세한 주의와 적절한 절제가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의식적으로 갈망하고, 좋아하며, 느끼고, 원하며, 의도하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늘 주의하여 의식적으로 우리 내면에 반대되는 것들과 접촉해 이들을 표현 실행하며 결국 다시 소유해야 한다. “우리가 이들을 소유하지 못하면 반대로 이들이 우리를 소유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조던 피터슨의 말처럼 괴물이 되지 못하는 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외부에서만 괴물을 보며 내면의 괴물을 회피할 때 우리는 자신이 영웅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와 친구가 되어야 자기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도 있고, “그림자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끔찍한 존재인 동시에 구원할 수도 있는 고통받는 구원자이기도 하다.”고 정의한 대목도 도입부에 등장한다.

 

나는 말할 수도 없는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인간에 대한 한없는 실망을 경험하며 인간은 악마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중은 이 억울함의 진면목을 결코 모를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익숙한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상식이 답이라 여길 것이다. 제도와 공권력과 그들이 부여한 억지 삶이 한 사람의 생을 이런 억울함으로 물들였다는 걸 그리고 물들이고 있다는 걸 가늠해 보려 하기보다 그저 너 하나가 악마면 된다고 단정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랜 세월이 흘러 공간에서 데이터를 읽어낼 기술이 완성되어야 비로소 이 억울함이 풀리겠지만 나는 사람이 악마라는 나의 판단이 그림자를 투사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 억울함이 극한으로 몰리는 순간까지도 나는 내게 행하는 악들을 그저 감내만 했을 뿐 사람 자체를 악마로 보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들은 누군가가 감내한 모든 일들을 그저 한 사람의 내면이 그려낸 그림자의 투사로 해석할 뿐일 것이다. 그게 전문가의 함정인 것을... 오랜 세월이 흘러 공간에서 데이터를 읽게 될 때 누군가의 삶에 대한 재정의는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 싶다. 이 한 세상이 모두 억울함으로 물들다 그 세월에는 예전에 끝난 사람에게 말이다.

 

인간이 악마인 이유는 그것이 부정성의 투사이기 때문인 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 누군가의 삶이 역으로 선으로서 빛나기 때문인 것이리라.

 

저자는 개성화에 대해 자기만의 시를 써라라고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삶이란 결국 다수가 모르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시를 쓰시는 것이란 걸 깨닫게 된다. 먼 곳에서 보면 그로테스크하겠으나 세월이 흘러 돌아보는 이 공간 속 새겨진 데이터는 그 시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신 잔잔한 가운데 퍼진 격동이며 차가운 가운데 끓어오른 뜨거움인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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