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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그니티 플랜 - 우리는 어떻게 나쁜 세상과 싸우는가
양정훈 지음 / 수오서재 / 2025년 11월
평점 :
#디그니티플랜 #양정훈 #수오서재 #인권교육서 #인권기본서 #요조앤서평단
♥ 요조앤 @yozo_anne 이 모집한 서평단에 선정되어
수오서재 @suobooks 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본서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은 내일 자신의 새끼손가락이 잘리게 돼 있다면 오늘 잠을 못 자겠지만 지진으로 어느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에는 동요 없이 곤히 잘 수 있다”
글쎄,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무리 빅뱅 이론과 양자역학을 적용해 ‘한순간 같이 생성된 두 광자 사이에 양자얽힘이 작용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둘은 동시에 똑같이 반응한다’는 양자얽힘(양자중첩) 현상을 빅뱅 시 “우주 만물은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동시에 생성된 물질을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양자얽힘 현상과 같이 우주의 모두가 얽혀서 동시에 함께 울고 웃는다”고 말한들, 우리는 이러한 진제의 세계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고 각자 살아가는 거라는 속제를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인간의 본능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고 자신의 생존에 그리고 자신의 영속성에 무엇보다 가장 절실하게 반응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시대의 우리는 시대가 주는 공허함으로 인해 “무언가 정의와 진리가 드러날 순간은 없을까?” 기대하게 되고, 그런 까닭에 ‘사회정의에 눈뜨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차별철폐 주의’나 ‘소수자 우대’, ‘다양성 존중’과 같은 ‘Woke’와 ‘정치적 올바름’이 대세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반대쪽에서는 Woke나 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한 이들이 상대방은 무조건 ‘절대악’으로 치부하거나 이해력이 딸리는 ‘지적으로 열등한 자’로 몰아가는데 반발해 갈등과 충돌이 빚어지고 있기도 하다. 누군가가 지키고 싶어 하는 규범과 전통을 존중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사회적 울음을 감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시작이 있지 않겠는가”하는 물음에는 응당한 답이 분명히 있지 않나 싶다. 이 말은 귀족 노조를 포장하거나, 먹고 살자는 사람들의 출근길을 방해하는 장애인들의 강경 시위를 비호하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너와 나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의 구성원인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길을 찾자는 말이며, 이미 쓰러진 채 시작하며 일어서서 나아가려는 데에도 일어서기도 쉽지 않은 세상을 바꿔보자는 바람일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일어서고 나아가려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들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러한 노력과 반응이 어떠하며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인권을 그저 천부적인 것이니 지키면 되는 거라는 식의 말은 하지 않는다. 사실 존중하지 않는 사회, 존중의 필요성을 모르는 사회, 존중하는 법을 모르는 사회에서는 존엄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살인과 강간, 폭력 등 범죄가 난무하고 약자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약자가 찾을 수 있는 존엄이란 없다. 짓밟힌 채 썩은 표정으로 일어서서 “나는 존엄하다”고 외친들 거기서 ‘지켜진 존엄과 지킬 존엄’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것이 개인의 무력함만을 탓하며 “네가 돈도 권력도 빽도 없이 태어나 그런 걸 갖추지도 못한 생을 살았으니 네 탓이다”라고 하고 말 문제도 아닐 것이다. 당연히 존엄을 지키는 일에는 공권력이 개입해야 하고 사회적 정의가 역할을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저자는 ‘국가의 책무성’부터 언급하고 있다. 국가란 원래 국민을 수호하고 서로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시선을 두어야 하는 곳은 어디부터일까? 우리는 아마도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정의부터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적 약자’란 “사회적으로 불리한 상황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고 저자는 정의해준다. ‘소수자’란 “사회구조가 갖는 모순과 불평등 때문에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거나 제한적으로 누리는 집단 속 구성원을 일컫는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불리한 상황과 위치에 있으며 모순과 불평등 때문에 불이익과 피해를 입는 집단이나 그 구성원이 약자이며 소수자”라는 것이다.
비장애인이거나 살만한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은 우리와는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시절에 누구나 인식하지는 못한다 해도 다들 “불리하고 모순되고 불평등한 상황”에 놓여있다. 자본주의와 함께 전파된 “능력주의,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라는 관념들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능력있는 놈, 이긴 놈이 다 갖는 게 타당하고, 강한 놈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약자는 밥이 되고 강자가 잡아먹는 건 순리”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간혹 “기업과 부자가 돈을 벌면 낙수 효과로 하위계층에게도 유익하다”며 자위한다. 그런 자위는 마스터베이션보다도 못한데도 말이다. 세상의 이치와 돈의 흐름을 알고 보면 “돈은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돈은 위로 흐른다. 그리고 가진 자가 더욱 갖게 되는 구조로 이루어진 게 세상이다.” 능력주의 세상이라면서 능력대로만 운영되지 않는 세상이고, 가진 자들은 사회적 기준과 규정 곧, 법을 만드는 이들에게 후원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 기준과 원칙을 창조할 수 있는 이들이다.
토마 피케티를 위시한 많은 경제학자와 사회학자, 사상가들이 다양한 저작에서 이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사회는 이미 “모순”되어 있으며, 구조 자체가 다수에게 “불리”하고, 이 모든 건 “불평등” 속에서 이루어져 “더한 불평등”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대중이 이미 “사회적 약자”인 것이다. 이런 속에서도 우리는 다른 약자들을 외면하고 냉대할 수 있겠는가? 근본적으로 같은 처지에서 우리보다 더 약자이니 너희는 외면당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저자가 한 많은 이야기 가운데 ‘비가시성’에 대한 대목이 와닿았다. 우리는 약자와 소수자들은 보지 못하거나 못 본 척한다. 그들은 우리 눈에 좀처럼 띄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보지 못해서이기도,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 스스로 숨어있기만 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해법은, 여러 이야기가 향하는 바는, 사회적 논의와 공공의 관심이 되기도 하겠으나, 달리 집단의 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집단적 정체성을 단단히 하며 커뮤니티 등의 집단을 강화하는 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자기 범주화를 통해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여 사회적 배대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이다. 이 말은 자기를 끼리 모여 자기 집단에서 결속하고 연결감을 느끼며 자기 집단 내에서 역할을 다하라는 말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과 하나가 되라는 말이다. 세상이라는 집단 속에서 우리 모두가 구성원이라는 의식을 가지며 자신을 서로를 대하라는 말이다. 서로 “너는 나와 다르다”며 “낙인”을 찍고 “배제”하지 말고 어우러져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시대가 나아져 인권을 소리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서양 문명이 득세하며 인권과 복지는 하향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의 기록을 보면 관노비에 대한 출산휴가가 이 시대와 비교할 때 놀라운 수준이었다. 산모에게는 130일의 휴가를 주었고 그녀의 배우자에게는 그 산모를 보살피라고 30일의 휴가를 주었다. 그것도 유급 휴가로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의창이 있어 흉년이나 재난 시기에 빈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었고,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혜민국(혜민서)에서는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며 의약품과 의복을 제공했다. 제생원(활인서)에서는 전염병 환자와 빈민 환자를 치료하고 구호했다. 소외계층에 대한 복지로는 환과고독 구휼이라 해서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등 의지할 바 없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구했고, 장애인 복지로는 패질자 구휼이라고 해서 장애인을 먼저 구휼하고 이들이 죄를 지어도 관대하게 처벌했다. 그리고 시각 장애인들의 취업을 위한 명통사 등의 기관과 단체를 마련해 이들의 자립을 도왔다고 한다.
이 시절의 우리는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를 위시한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 논리에 빠져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생각이 당연하다 여기며 살고 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반투어에서 유래한 “우분투”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결국 우리가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분별을 망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분별 망상으로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없다면 나도 없다는 게 사실이란 걸 뼈저리게 느끼는 것도 사람의 삶이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 세상이라면 우리는 함께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함께 서로를 지키며 살아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