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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 행복한 삶을 위한 마음공부
지나 서미나라 지음, 강태헌 옮김 / 파피에(딱정벌레) / 2020년 11월
평점 :
내가 어린 시절에는 에드거 케이시는 예언자로 더 유명했다. 하지만 본서에서는 에드거 케이시의 남다른 면을 케이시 리딩이라 말하며 그걸 피지컬 리딩과 라이프 리딩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니까 에드거 케이시는 예언 외에도 피지컬 리딩이라고 해서 다른 이의 병을 읽어 내고 치료법을 알려주는 일도 했으며, 라이프 리딩이라고 해서 다른 이의 사회적 문제와 심리적 문제, 육체적 문제를 전생부터의 풀어지지 않은 과제가 있어서 그렇다며 해결책을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케이시 리딩 가운데 라이프 리딩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에드거 케이시는 19세기 후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부가 되지 않으려 도시로 나갔으나 뚜렷이 진가를 보일 만할 일을 찾지 못하다가 성대의 이상으로 강제적으로 묵언을 하게 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20세기 초 그가 아직 젊은 시절이던 당시 최면술이 유행하던 때였던 것 같다. 그의 성대 문제가 의학으로는 치료되지 못하자 그의 주변에서 최면을 통해 치료해 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고 최면 상태에서 케이시 스스로 치료법을 찾도록 유도하여 그 치료법대로 행해 케이시의 성대 문제는 바로 해결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케이시에게 최면을 걸었던 사람이 케이시에게 자신의 병도 케이시의 최면에 의지해 보겠다고 했고 케이시가 그에 응하면서부터 케이시의 타인에 대한 피지컬 리딩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피지컬 리딩으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치유를 찾던 가운데 우연히 누군가의 라이프 리딩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케이시에게 질병만이 아닌 여러 사안에 대한 라이프 리딩 의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소개이다. 저자는 주로 라이프 리딩에 대해 이야기하며 본서에서는 라이프 리딩과 함께 전해진 피지컬 리딩이 약간 더해졌을 뿐 케이시의 예언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본서는 케이시의 라이프 리딩 사례들로 시작해 힌두교, 불교, 기독교 경전을 근거해 윤회론에 대한 타당성을 담론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케이시의 라이프 리딩들을 근거해 보편적인 삶의 의미 찾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이 저작의 차별화된 의의가 아닌가 싶다.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삶의 전반적인 주제들을 아우르는 의미를 찾고자 시도하고 있다. 저자도 여느 종교인들이나 심령학 이론가들처럼 삶은 성장과 성숙을 위한 교육의 장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관계적 문제, 심리적 문제, 육체적 문제 등 개인의 내재적 문제부터 살아가며 찾아오는 많은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카르마가 원인이고 이런 문제들을 갖게 된 원인과 해결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숙에 이르고 영적 인식의 도야를 가져오기 때문으로 가르치려 하고 있다.
~ 이 다음 부터는 나의 감상과 독자적인 견해만 담긴 장이니 읽지 않으셔도 된다.
아마도 이런 인식은 사람에게 통제권이나 해결해야 할 여지가 자신에게 있다는 인식을 주기에 심리적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을 것이다. 자기가 역할을 함으로써 해결된다거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 주어지는 문제들이라는 인식은 안도감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의혹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 전생의 내가 행한 일로 현생의 내가 받는 결과라는 밈이 과연 통제권이 나에게만 있다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한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세계대전을 비롯한 인류적 차원의 커다란 문제들에 개입할 여지가 있는 개인이 몇이나 될까, 팬데믹을 야기한 상황도 대부분의 개인은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분명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며 더 생각해 보면 개인의 인생에서도 자기 유년 시절을 가꾼 원인과 자신의 가치관 정립에 유년기가 차지하는 사안들에 자신은 반응 정도의 개입만 할 수 있었을 뿐이지 않은가.
그러니 인간이 윤회를 믿는 자체가 자신의 무력함을 회피하고 스스로를 기만하여 그 무력함을 자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로서는 인간이 태어나고 존재하는 이유는 성장이나 성숙이 아니라 삶의 긍정성과 부정성 둘 다나 어느 한 면을 통해 생을 살아내면서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성경에서는 창조주가 태초에 피조물들을 만드는 순간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반복된다. 창조도 피조물의 존재 자체도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즐거움 자체를 위한 것인지 어찌 아는가. 어떤 장대한 목적보다 즐거움과 재미가 존재의 의의 자체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극도의 서스펜스나 공포 영화 또는 극단적으로 슬픈 영화를 보고 나서도 감흥이 컸다면 한국 사람이라면 ‘진짜 재밌었어’라고 말하기 마련인 것처럼, 극단적으로 괴로움이 가득한 삶에서도 우리는 그 삶을 연기하며 스스로의 관객이 되어 감동받고 또한 창조주를 감동시키기 위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삶이라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어쩌면 삶이나 인간의 역사가 어떠한 성숙과 교육의 장이거나 거대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즐기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 여기서부터는 이 책의 내용과 별개의 사적인 견해이자 이론이니 읽지 않으셔도 된다. 윤회에 대한 나의 입장은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윤회는 없다는 것이다. 우주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는 온 우주의 공간에 데이터로 저장되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최면 등을 통해 전생이라고 자각하는 것은 이러한 공간 자체에 입력된 데이터에 접속됨으로써 자신의 전생이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대부분이 경험해봤을 예를 들자면 누구나 꿈속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진짜라고 믿고 실제 자신의 현실과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깊은 꿈을 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 공간에 입력된 데이터에 접속하며 실제 자신의 전생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나의 짐작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환생은 한다지만 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 그러니까 인종, 성별, 키와 체격, 목소리 등의 피지컬적인 특징, 지능, 감성, 사교성, 일에 대한 적응력과 효율성, 야심과 유유자적의 정도 등등의 속성들이 각기의 수준으로 조합되어 우리의 개성을 이루지만 죽고 다시 태어날 때는 이것들이 각기 분해되어 다른 이들의 그것과 다른 이들에게는 나의 그것들이 각각 다양하게 조합되어 각각의 개인을 이룬다면 이는 윤회하면서도 윤회의 주체를 뚜렷이 규정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된다. 이 경우는 붓다께서 무아론을 주장하신 근거가 이런 경우이기 때문이기에 그러셨던 것은 아닐까 짐작되기도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나는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주의이다. 이것도 무아론의 나라고 할만한 속성을 찾을 수 없다는 붓다의 말씀을 대입해 생각해 본 것인데 우리의 속성을 이룬다는 내가 위에서 말한 요소들을 다른 이들과 재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속성을 이루는 요소들이 차크라의 각성 정도에 따라 각 차크라가 지닌 속성들의 수준에 편차가 생기며 전생과는 다른 나라는 속성들로 조율되지 않는가 하는 짐작이었다.
만약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서 거듭 태어나는 것이라면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잊는다는 건 부적절하고 비실용적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과거를 잊고 한 생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나로서는 그래서 인간이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 존재하고 환생한다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데 만약 성숙과 성장이 인생의 목적이 맞다면 다양한 양식으로 삶을 경험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고 전생을 기억하면서 내적 특질을 재조율해 가며 환생하는 것도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 내가 든 세 가지 경우 중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양식으로 환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세팅된 게 아니라 미지의 무언가가 인간의 표면 의식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게는 하지만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다는 가정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앞서 말한 첫 번째의 경우가 아니면 인간이 최면을 통해 자신의 전생을 회상할 수 있는 이유로 적절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모든 건 가정이지만 이 안에 맞는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