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세습 -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지음, 서정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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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의 문제점을 알아가기 위한 저작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까지 3권째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스티븐 J. 맥나미와 로버트 K. 밀러 주니어의 [능력주의는 허구다]와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이후 저술된 저작으로, 집필 기간만 20년에 이른다는 책이며 도서 표지에도 있듯이 상당히 논쟁적인 저작이다.

 

저자 자신이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능력주의가 문제라는 결론인 이 책을 집필하는 데 상당한 자기 성찰과 자기비판이 뒤따르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사회적인 허상이라거나 가진 자들의 자기 합리화라는 비판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역량과 기량에 따른 보상이란 게 능력주의의 미화라며, 사회적 이점을 독점하고 있고 그 독점적인 이점 역시 세습된다고 볼 수도 있으며, 사회적 기준 자체가 엘리트에게 유리하게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엘리트들 자신이 자기에게 유리한 기준을 사회적으로 정립해 나갈 수 있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또 능력주의 사회가 격차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중위소득 계층의 존폐에 위협적인 상황을 가져오고 있다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본서가 엘리트 계층의 노력과 업무를 과소평가하거나 깎아내리는 주장을 하고 있지는 않다. 엘리트 계층의 수입과 중산층과 하위 소득 계층의 격차가 세월을 지나며 더욱 덕 현격하게 커지는 것은 사실이고 노동자가 회사 간부로 승진한다거나 할 가능성이 원천 차단된 것도 사실이지만, 일반 노동자의 업무량과 업무 시간이 줄어들 때 엘리트층의 업무량과 업무 시간은 과도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 내의 제도적인 엘리트 옹호 양상이 [능력주의는 허구다]라는 저서에서는 동문 자녀 특례입학(Legacy admission) 등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본서에서 사회가 능력주의 중심이 되며 엘리트 계층이 자녀의 교육에 절대적인 관심과 열정을 기울여 엘리트 계층의 교육 양상과 하위 소득 계층의 교육 양상이 현격한 격차를 보이고 있으며, 상위 학업 성취를 보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특혜들은 이미 극부층인 엘리트 계층이 선점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엘리트 교육을 받는 이들이 진학하는 학교들에 하위 소득 계층 자녀들이 비집고 들 틈은 전혀 없다는 걸 통계로서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노동자 계층의 아들들이 서울대 입학한 사례나 학생 당사자가 막노동을 하면서 공부해 서울대에 진학한 사례 등을 들며 능력만 있으면 성취는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데 이런 비슷한 사례가 미국에서도 있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능력주의의 이상을 보여주는 사례가 어느 정도의 확률이냐는 문제일 것이다. 헐리우드 스타들이 자신은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그걸 이겨내고 이렇게 부자가 되었다며 능력만 있으면 성공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의 삶이 열등한 것이 되어버린다면 이건 엄연한 구조적 모순이다. 이 구조적 모순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능력주의 사회와 기술 발전이 어우러져 엘리트층이 갖추어야 할 기준 역량은 증가하고 중위층의 업무는 기술로 대체 가능한 과정을 밟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중위층의 위기가 타파하기 어려운 시점에 이를 것이라는 게 저자의 예견이기도 하고 현재도 그러한 상황이라고 한다. 경제적으로 엘리트층이 주요 거주지역의 부동산가와 그들의 수입, 그들의 자녀 교육 과정에서의 비용과 자녀들의 성과 그리고 그들이 보는 사회적 이점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준 등 능력주의 사회에서 엘리트층이 보이는 노력과 그들이 이루어낸 기량으로 인한 타 계층과의 격차는 이제까지 능력주의 사회니까 당연하다는 반응들이었다. 그러나 이 격차는 세습되는 과정을 따르며 불평등과 재분배에 대한 필요로 중요도가 옮겨가고 있다. 마이클 샌델의 저작에서도 보이듯이 이는 극부층과 하위 소득 계층의 정치적 충돌 양상으로 번져가고 있다. 박탈감을 느끼는 하위 소득 계층이 트럼프와 공화당을 지지하며 갈등 양상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샌델 씨의 직언이다. 본서에서는 엘리트층이 민주당을 지지하고는 있으나 재분배 문제에 있어서는 효율을 저하시킨다는 관점이라고 한다.

 

더욱이 본서에서는 엘리트층과 그 이외 계층의 격차는 비단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자기들에게 이로운 기준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느냐)만이 아니라 수명에까지 관계되고 있었다. 엘리트층의 사망률이 하강하고 기대 수명이 상승하고 있을 때 중위 소득 계층과 하위 소득 계층의 사망률은 상승하고 기대 수명은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층적으로 상위 2%의 아이들이 친부모의 품에 살 때, 하위 계층으로 내려갈수록 대부분이 재혼 가정에서 살고 그보다 아래는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랄 확률이 극단적으로 높아졌다. 엘리트 계층은 태어나면서부터 안정된 배경과 교육환경이 뒤따르고 아주 높은 확률의 성취와 생존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죽는 날까지 그러한 배경이 지속될 가능성 또한 높고 질병에 걸릴 가능성 또한 적으며 게다가 장수까지 하다 가는 것이다.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 다른 운명이 탄생부터 정해진다는 것이 능력주의의 폐해가 되어버린 것이다. 계층 간의 격돌이 예비되어 있는 것은 능력주의 사회의 운명일 것이고 말이다.

 

저자는 나름의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엘리트 교육에서의 포용성, 그리고 재분배를 들고 있다. 본서에서 저자가 지적했듯 부자의 세율이 낮아지고 누진세가 사라져버린 세상을 가져온 것은 엘리트층이 후원하는 정치가들이다. 이런 세계에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 한 명이 나서서 변화를 요구한다고 변화가 찾아올까 싶다. 엘리트들 모두가 저자의 관점에 동조하던가 아니라면 사회적 권리를 주도하는 게 피라미드 최하위의 다수 계층이 되던가 하는 경우의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둘 다 가능성은 거의 없고 사회의 변혁은 더욱 초극부층의 손길이 닿는 데로 그들 자신을 위한 황금으로 변해갈 일만 남아 보이지만 말이다.

 

마이클 영의 [능력주의의 부상]이란 과학소설이 가장 먼저 현실화된 사례이고 현재라면 이제 초입으로 들어선 [1984]는 근미래에 완전한 현실화가 될 것이고 [멋진 신세계]도 유전자 기술이 완비된 이제 현실화를 앞두고 있다. 과학소설은 모두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화되지 않나 싶다. 이런 현실을 바꿔 놓는 미래를 담은 이야기는 없는지 모르겠다. 이런 소설 속에 살고 있다니 참 낙담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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