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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는 허구다 - 21세기에 능력주의는 어떻게 오작동되고 있는가
스티븐 J. 맥나미.로버트 K. 밀러 주니어 지음, 김현정 옮김 / 사이 / 2015년 11월
평점 :
본서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과 함께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인데 같이 대여한 책으로 [엘리트 세습]도 있다. 능력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며 이 사안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선택하게 되었다. [능력주의는 허구다]라는 본서는 정치철학적인 [공정하다는 착각]보다는 일상에서 겪는 몸에 와닿는 실제 사례들을 근거로 철학적인 사유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이 지적으로 다가서도록 했다면 본서는 술자리에서 쌍욕하며 세계 비판하는 느낌이 다소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의 과연 이 세계의 능력주의란 게 공정하게 작용하고 있느냐는 접근보다, 본서와 같은 ‘세계는 차별적인 곳이구나’라는 감상이 좀 더 피부에 와닿고 실제적이지 않나 싶다. 저자가 이 세계를 능력주의라고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태생적인 특권과 계층이라는 출신 성분에 따른 특혜들이 만연하는 곳으로 특정 계층의 자녀이기에 갖는 환경적인 특혜, 교육 기회와 수준의 차이, 저자가 말하는 사회적 자본(인맥), 문화적 자본(어느 계층이며 어디 소속이냐 또 무슨 자격을 갖추었느냐에서 오는 이점)이 더해지며 출발선이 같을 수 없는 사회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솔찮게 들리는 대통령 사위의 취업 특혜와 모 정치인 자녀의 부정 입학, 또 다른 정치인 자녀의 취업 특혜 등의 사례 등 우리는 이 사회가 운영되는 방식이 능력주의를 겉으로만 내세우며 대중을 속이고 있는 구조일 뿐이란 것을 직시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미국과 같은 동문 자녀 특례 입학 같은 제도(Legacy admission은 점수로 환산할 때 1600점이 만점인 SAT에서 무려 160점의 이점을 본다고 한다. 오바마 정부 시절의 저작인 본서의 저자와 같은 이들의 문제 제기들이 있으며 현재에는 SAT 점수 반영이 적어졌다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아직도 이런 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와 기부 입학제도가 국내에는 없다고는 하지만 취지가 좋은 특례 입학 제도가 한국 사회에서도 능력주의를 냉소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보훈 특혜 같은 건 납득가지만 민주유공자 특혜라며 운동권 정치인들 자녀들에 대한 특혜는 과연 국민 가운데 몇 퍼센트나 공감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 외국인 자녀 특혜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귀화 외국인들이 저소득층도 아니며 외국인 자녀 특혜에는 불법 체류자의 자녀도 포함된다. 이런 제도들은 직설적으로 말해 역차별이지 절대 공정이라고 볼 수 없는 제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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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차별을 이야기했으니 잠시 본서의 논지에서 벗어나 이야기하자면 외국인 의료보험 특혜 같은 것들로 한해 대부분의 의료보험비가 의국인 그 중 특히나 중국인들에게 대거 쓰이고 있다. 중국인 255만 명이 한국 건강 보험을 이용해, 지난해 지출된 외국인 건보 지출액 1조 7206억 중에서 중국인에게 지출된 비용만 1조 1809억이라고 한다. 과연 이러한 혜택을 한국은 중국을 비롯한 타국가에서 받고 있는가 말이다. 외국인에 대한 혜택은 상호주의에 입각해 우리 국민이 타국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을 해당 국가의 국민에게만 부여하면 되지 않겠나? 외국인 투표도 마찬가지다. 이것 역시 상호주의에 입각해서만 한다고 해도 문제가 적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한국의 합계 출산률과 인구감소 문제를 외국인 유입과 이민자로 풀어나가려고 하고 있다. 한국의 인구 감소분을 감안할 때 해마다 한해 30만 명씩의 외국인을 유입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그들의 대응안이다. 미친 작자들이다. 앞으로 점진적으로 인공지능과 로봇을 상용화하며 초대량 실업자가 증가 추세일 것이고 이건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답이 될 수 없는 상황을 불러올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라는 것도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할 텐데 새로운 업무에 특정 시한의 적응 기간이 필요한 인간과는 달리 인공지능은 단 몇십 초에서 몇 분 만에 숙련 근로자의 업무능력을 보이며 비교 불가의 업무량을 소화할 테니 일자리 창출이라는 것으로는 답이 없다는 말이다. 대부분에 사람이 잉여인간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초극부층이 잉여인간이 된 대다수의 국민을 부담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대중은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던 것들을 과거와 같이 누리며 살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 시대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세계가 전쟁과 질병이 만연되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다. 인구의 절대적인 소멸을 단계적으로 유도하는 것이 특권층의 부담을 감소하는 게 될 테니까 말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가진자들이 자신들 사이에서만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대다수의 대중에게는 사회주의적 상황을 강요하는 시대가 될 수밖에 없다. 생각을 아무리 해 봐도 다른 대안적 세계 상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앞두고 외국인의 대거 유입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한다? 그건 미친 짓이다. 외국인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된 프랑스의 경우 특정 지역의 교도소 수감자 중 이민자와 이민자 2세가 70%를 넘는 경우가 있고, 복지 국가이며 안정적인 치안과 환경을 자랑하던 스웨덴은 강간 천국, 범죄 온상이 되었다. 외국인 유입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별문제 없을지 몰라도 유입된 외국인이 취업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을 때는 그들 문화 자체가 우리와 다른 국가에서 온 외국인들이라면(이를테면 여성인권이란 없고 남자라면 여자를 강간할 수도 있다는 통념을 가진 국가의 사람들, 그리고 종교적 저항을 위해 폭력과 성전이 당연한 국가의 사람들인 경우) 그들이 범죄화되는 건 시간문제란 걸 유럽의 현재가 증언해 주는 것이다. 모든 외국인을 범죄자 취급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이미 유럽의 사례를 직시할 수 있으며 그 사례를 교훈 삼을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말이다. 인구감소에 대한 대응은 무대책이 대응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인구가 적을수록 대중에게 유익한 국가로 인식될 것이다. 이민자 유입은 뇌가 없어야 가능할 대응안이라는 말이다. 이민자와 이민자 2세까지 내국인과 경쟁하게 만드는 정책은 살아갈 여유를 잠시 남겨둔 (리뷰어인 나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너무도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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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사회라고 하면서도 출생에 따른 차이와 사회적 문화적 자본(인맥, 학맥, 출신, 인종, 외모) 등이 능력보다 앞서는 것은 미국은 이미 말한 동문 자녀 특례 입학 Legacy admission 외에도 추천인 제도가 있어서 더 부각되는 면이 있을 것이다. 대학 입학부터 취업이나 이직에서도 추천인이 있어야 하는 미국의 제도적 특성이 더 이런 차별을 부각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우리나라 역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취업에서 자신이 가족(출신)이나 인맥이나 학맥을 통한 특혜를 볼 수 있는데 뿌리치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래서 더 정치인들과 특권층 자녀들의 부정 입학이나 비리 취업을 용인하는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이러한 차별의 여지를 계층과 성별과 인종에서도 그러하다며 지적하고 있는데 본서를 읽으며 우리가 능력주의 사회라고 믿던 사회는 허상이었구나 하는 감상만이 들 뿐이었다. 거의 10년 전 저작이라 10년 사이의 변화가 물론 있겠지만 아직도 남성과 여성이 선호되는 일자리는 분명 다를 것이고 인종에 대한 선입견이 각 인종인 당사자에게 득이 되거나 불이익이 되는 상황들이 즐비할 것이다. 인종 차별에서 예외적인 것 같은 한국이지만 이제 해마다 30만 명의 외국인들 유입을 앞둔 상황에서 인종 차별 문제가 불거질 내일은 자명하지 않은가 싶다. 사회가 더 나아지기 위해 변화의 계기와 과정이 필요할 텐데 딱 부러진 대응안이 나와주는 날은 아직 요원하지 않은가 싶다.
저자의 시선은 능력주의라는 허구를 비판하는 데 차별과 불공정에서 시작해 불평등으로 이르는데 결국에 저자의 주장은 불평등을 타파하는 데 누진세가 역할을 할 것이라고 귀결한다. 출발선이 다른 데 대한 대안으로 지대한 누진세로 출발선의 차를 대폭 줄이자는 주장이 아닌가 싶다. 상속세와 증여세 등에서만 이런 조항이 붙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된다. 세금 추징에서도 현재 부자일수록 과한 세금을 납부한다는 인식이지만, 상위 계층이 누리고 얻는 이익을 고려한다면, 세금의 퍼센티지에서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사실 부유층의 자녀들은 그들이 살아오며 남다르게 누릴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누리고 살아왔다. 미성년자 보유자산을 보아도 알 수 있고 그들에게 들어가는 생활비와 교육비, 문화생활비 등을 따져본다면 이미 서민층의 자녀들은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출발선이 달랐고 어쩌면 출발선만 다르면 다행인 것이다. 이들이 사회의 출발선을 만드는 사람들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룰을 만들고 게임 자체를 운영하는 사람들로 살아가는 이들과 대부분에 사람들의 차이는 누구의 자녀인가 하는 것이 가장 우선한다. 우리 사회를 능력주의 사회로 보고자 한다면 진짜 절대적인 능력주의 사회로 만들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면 출발선을 그들이 만들게 두어선 안되는 것이다. 출발선을 긋고 있는 그들을 강제로라도 출발선에 세워야 한다. 부가 절대 세습되게 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마도 부가 세습되어온 그 결론을 이번 세대들은 자신의 생애의 중반에 이르기도 전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 대중이 지금보다는 먼저 관심을 갖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결론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깊이 든다. 끝난 경기에 아쉬움이 남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