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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시장 - 생명공학시대 인체조직의 상품화를 파헤친다
로리 앤드루스.도로시 넬킨 지음, 김명진.김병수 옮김 / 궁리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본문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의 주제에 대한 다소의 오해가 있었다. 제3 국가부터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범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장기매매에 관한 내용이기만 한 줄 알고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깨달았다. 단지 장기밀매의 현실만을 고발하는 책이 아니라, 자기 신체와 유전자에 대한 권리에 관한 책이란 것임을 말이다. 이건 비단 프라이버시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인권과 주권, 자기 자신에 대한 권한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본서는 서문부터 병원에 방문해 검진을 받고 나서 의사의 권유로 주기적인 검진을 받게 된 인물이, (자신도 모르는 자기 인체의 화학물질이 남다르다는 이유로) 주기적으로 인체에서 채취한 물질들을 동의없이 실험에 이용당하고, 결국 생명공학회사에서 그의 몸에서 생성되는 물질에 특허권까지 취득한 것을 알게 되어, 소송을 진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소송은 어떤 결과에 닿았을 것 같은가? 법원은 그의 동의 없이 인체 생성물질을 채취한 것은 부주의했으나, 그의 인체에서 생성된 물질에 특허를 받고 수익을 남기고 있는 의사와 연구자와 생명공학회사(제약사)에게, 그의 인체 생성물질에 대한 권리가 귀속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임신을 기대하는 여성에게 배란촉진제를 주입하고, 생성된 여러 난자 중 일부는 해당 여성에게 착상했으나, 여성은 임신에 실패했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해당 여성의 동의 없이 그 여성의 난자를 다른 여성들에게 착상하여, 다른 여성이 임신하게 되었고, 난자를 도둑맞은 이 여성은 사실을 모른 채 8년을 보내고서야, 자신의 난자로 아이가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앓는 질환들의 유전적 변이에도 각각을 선점하는 회사에게 특허권을 주어 뇌 질환, 간 질환, 신장질환 등에 각기 다른 회사가 특허권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유전적 질환들 외에도 천식 같은 일반적인 질환에까지 특허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런 특허권을 취득하기 위한 연구들에 자신의 유전자가 이용당한 것을 해당 질환에 관한 연구 대상이 된 개인들은 모르고 있다.
우리 인체에 대한 권리, 우리 자신의 유전자에 대한 주권이 전혀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체의 주권에 대한 쟁점으로 법적 논의가 있으면 과학자들은 인류의 미래와 의학 발전의 가능성이 차단당한다며 반발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올리는 막대한 수익을 생각할 때 이것이 과연 인류의 미래를 위해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건가 의문이 남기만 한다. 사실 예전에도 논의되었다는 유전자에 대한 저작권 인정을 하고서 연구를 지속한다고 해도, 인류의 미래나 의학 발전에 전혀 저해될 소지는 없다. 일부 희귀 난치병 치료제의 가격이 20억~30억이라는 기사도 있었는데, 인간이 자신의 인체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 순수하게 인류의 미래와 의학 발전만의 문제가 아닌 건 아닐까 의심한다고 해서 모난 시각만은 아니란 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어, 극부 중에서도 초극부층의 부만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존속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정상적인 자본주의의 시각이라면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하는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퇴색되었다고는 하지만 공정한 발전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또 한 국가에서 내재한 자원을 다른 국가에서 자신들에게만 기술력이 있다는 이유로 아무런 비용지불 없이 강제로 채취해 간다면, 분명 이건 국제적인 지탄과 분쟁을 불러오고 국제 재판소에 국제적 소송으로 비화하거나 전쟁의 빌미마저 될 수 있을 사안이다. 그에 근거해 다음 예를 보자면 (우리는 우리의 2차적인 자원인 작곡이나 문학 또는 미술 창작 등에 대해 지적 재산권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우리의 유전자 체계는 우리 자신의 가장 1차적인 자원인 것이 분명하고, 이는 어느 각도의 시각으로 본다 해도 분명 보호받아야 할 개인의 주권이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마땅히 주장해야 하고 보호 받아야 할 우리의 주권을 침탈당하고도, 거대 제약사의 특허권 주장에 주저앉고 말아야 하는가? 참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17, 18세기와 19세기에는 의학 발전을 위해서나 과학자들의 실험을 위해 또 미술가들의 인체 연구를 위해 시신이 매매되어 해부되고 난자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족이 없는 부랑자들은 자신의 인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기회도 없이 사망과 동시에 시신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저자는 1998년 있었다는 독일의 인체 해부 전시전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전시전을 개최한 인물에게 시신에 대한 권리가 누구에게 있냐고 묻자, 플라스티네이션을 시작해 인체를 설정한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서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21세기의 중국에서도 인체 해부 전시회는 열렸었고, 유투브에 의하면 이때의 시신에 대한 음모론에 가까운 괴담이 돌고 있기도 하다. 과연 17세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친지의 권리에 발전이 없었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본서에서는 이런 우리 자신에 대한 권리를 이야기하며, 사망자의 뇌하수체에서 채취한 배란촉진제를 주입받고 유전적 질환에 걸려 일부는 사망하기까지 한 사례, 인공수정을 하며 의사로부터 정자 세척이란 것에 동의하냐는 질문에 대답했다가, 타인의 혈액으로 그녀 남편의 정자를 세척해 그녀의 난자에 수정해 착상되는 과정에서 간염에 걸린 여성의 사례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의학적으로 충분한 고지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인체에 일어나는 일들에 거의 배제되다시피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아기들의 탯줄이, 사산한 아기가, 사망자의 인체 일부가, 동의 없이 누구나의 세포 일부가 연구 실험에 쓰이고 그에서 제약으로 탈바꿈되어 매매되는 현실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시신을 매매하던 17세기부터 인체와 유전자 체계가 거래되고 있는 현재까지의 모습이 그다지 변화가 없어 보인다. 인류는 과연 발전하여 온 것인가 의심이 들 뿐이다.
이제 기술 위주의 세계상에 접어들어 뇌에 칩을 심어 외부에 대상들을 제어하고 기억과 사유의 일부를 클라우드 서비스나 데이터 전송 등의 기술을 기반으로 외부 컴퓨터와 AI에 도움을 받는 시대가 코앞이라고 한다. 하지만 왜 BCI 기술이 인간이 컴퓨터를 제어하기만 하고, 역으로 AI가 인간을 제어하는 방식으로 쓰일 거라고는 우려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이미 기술은 인간의 생각을 AI가 읽고 해석하고 문자와 영상으로 제시할 수도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각 기지국에서 전파되는 주파수 대역들을 이용해 낱낱의 사람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까지 파악 가능한 시대이기도 하고 말이다. 넛지 같은 행동경제학이나 콜드리딩이나 다크아트 같은 최면과 사회공학 데이터까지 접근 가능한 AI가 향후 발전한다면 인간에게 어떠한 미래가 펼쳐질지는 충분히 예견 가능한 경우의 수가 아닌가?
그래서 더욱 일부 식자층은 발전한 AGI가 범죄국가에서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해 해당하는 사안이 있는 국가에 대한 침공과 지도부 교체가 가능한 강력한 권한이 있는 제도를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세계미래보고서 2024-2034]에서 인터뷰에 참여한 전직 OECD 관계자) 벤 괴르첼은 [1984]와 같은 파시스트 체제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이 역시 [세계미래보고서 2024-2034]에서의 발언)
기후위기설이라는 종말론적 환경주의로 각국과 각국의 국민에게 불안을 조장하며, 통제사회에 접어 들어가는 형국에서, 이젠 AI의 발전으로 위협과 불안 심리를 갖는 대중의 심리를 이용해, 대놓고 통제사회, 전체주의 사회로 나아가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가 정점으로 흐르기 위해 대중이 희생되고 노예가 되던 과정은 멈춘 적이 없다. 이제는 그 과정이 정점으로 향하며 인권이랄까 자기 주권에 대한 그리고 자유에 대한 파국에 다다라가는 것이다. 그저 약간의 편리와 배부름에 만족하며 대중은 그에 대해 고려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본서에서 이야기하는 인체에 대한 주권이란 것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권리인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걸 제한받고 침탈당하면서도 얼마나 손쉽게 순응하고 살아왔는지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보며 거의 모든 시대에 다르지 않은 양상이 이어져 왔다는 걸 직시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저항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생각이 다를 것이다. 속아서도, 무턱대고 순응하는 데 익숙해져서도 아니라, 아마도 다수에 위정자들은 그들의 이익과 합치되는 바가 있어서이지 않을까?
미래를 보면 암담한데 현실을 봐도 그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 참 막막할 뿐이다. 그래도 현실을 역사를 더더욱 알아야 할 일이기에 본서를 권하고 싶다. 품절 내지는 절판된 책이지만 도서관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