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가파른 암벽을 지은이 앞서고 재혁이 뒤따르며 오르고 있다. 대인 구조용 보조 수트나 강화 의체보다도 성능이 뛰어난 지은의 메탈 바디와는 다르게 재혁은 의체나 강화 의족이나 강화 의수를 한 사이보그도 아니기에 보조 수트도 하지 않은 채 암벽을 오르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실내 암벽이 아닌 첫 암벽등반 코스로 도봉산 선인봉을 선택했다. 


-헉!


-재혁아!


정상을 얼마 앞두지 않고 재혁이 절벽 아래로 미끄러졌다. 지은이 재혁을 향해 몸을 날려 그의 손을 왼손으로 잡고는 다시 암벽에 오른손 손가락과 발을 찔러 넣었다. 메탈 바디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5


재혁과 지은이는 산 정상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천연 과일 원료로 제조된 음료를 고전 머그잔으로 마시고 있다. 


-재혁아! 난 니가 좋아하는 걸 이젠 모두 파악한 것 같아!


-그래? 13주도 안돼서 벌써..


-넌 하나같이 고전적인 걸 좋아해. 문자 정보를 선호해서 말도 안 되게 박물관에나 있을 책이란 걸 수집하기도 하고. 음악도 20세기, 21세기 Kpop이라는 고전음악을 고집하지. 집에서도 아직 21세기 한반도가 남북국으로 나뉘어 있을 때에나 존재했을 고전 의상들을 복제한 옷을 입기도 해. 음식도 천연만을 고집해서 인체에 최적화된 영양소들이 배합된 합성 제품엔 손도 안 대지... 사실 넌 좀 구시대적인 감성을 지녔어. 너랑 본 고전 영상에서 그런 경우를 구닥다리라고 했어...


-감사합니다. 지은 샘. 내가 아는 표현은 그거보다 쫌더 쎈건데 구닥다리로 순화해 줘서.


-니가 뭘 생각했을지 알아!.. 니 생각이 맞아. 너 좀 꼰대야.


꼰대라는 표현을 듣자 재혁은 당황스러웠다. 네오 아마토르는 최첨단 AI로 가동된다. 때문에 현재의 연인이... 그러니까 설정자인 구매자가 싫어서 스스로 GOA 본사로 찾아가 폐기되기를 자처한 네오 아마토르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네오 아마토르에 관심이 많은 이들 사이에 도는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재혁은 그게 그저 찌라시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갑자기 지은이가 자신에게 꼰대라는 심각히 부정적인 표현으로 인식되는 고전어를 사용하니까 지은이가 자신을 떠나면 어쩔까 하는 극단적인 두려움이 밀려왔다.


-지은아! 그래서 내가... 싫어졌니?


-그런 게 아니야. 난 너의 모든 점이 좋아.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너만의 개성이 날 길들였기 때문에..


-길들여...


지은이 AI 초기 개발자들이 머신러닝이라고 부르던 자기 학습 과정을 길인다고 표현하는 것에 재혁은 다시 한번 슬픔이 아리는 듯했다. 


=지은인 내가 그녀를 짐승처럼 사육한다고 느끼는 걸까? 아니 인식하는 걸까?


-뭐? 그런 벌레 씹은 표정이야. 재혁이 니가 읽던 책 [어린 왕자]에도 나오는 표현이잖아. 서로는 서로를 길들이는 거야. 사랑하게 되는 순간부터...


-어? 아! 그래 그 고전에서 그런 표현이 있었지.


재혁은 상당히 다행스러웠고 '사랑하게 되는 순간부터'라는 지은이의 말에서 설렘을 느꼈다. 잠시 사이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향한 것만 같았다. 지은은 표정이 일순간에 밝아진 재혁을 보고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래서 두려워진 거야.


-두려워졌다고 뭐가?


-너처럼 고전적인 걸 좋아하는 인간들은 가정을 이루고 싶어 한다는 자료를 검색했어. 


-그게 뭐 어때서 우리가 가정을 이룰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고전주의자들은 자녀를 설계하지 않고 자연 수태를 선호한다는 정보도 읽었거든.


재혁도 일순간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재혁은 정말 유전자 설계로 생산한 아이나 네오 파밀리아가 제안하는 로봇아이를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야. 나 네오 파밀리아도 괜찮아.


-거짓말하지 마. 난 정말 언젠가 너에게 버림받을 거라는 게 너무 두려워..


-그런 말이 어딨어. 내게 연인은 너뿐이고. 지금 이 세상에 내게 가족 같은 이들이라고는 너와 세미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재혁은 잠시 지은을 바라보다 산 아래 풍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지은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런 재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6


재혁과 지은은 그날의 무거움은 잊고 언제나처럼 서로에게 빠져 보냈다. 재혁은 AI 운영프로그램인 세미가 제공하는 루틴이 뻔한 일상 정보와는 다른 선택들로 보내길 좋아했다. 하지만 지은이 인식하는 바로는 그런 재혁에게도 뻔한 일상 루틴들이 보였다. 그 중 제일 지은을 경고 모드로 전환할 뻔하게 하는 것이 이런 날이었다. 자신에게는 거주 공간에 가만있으라며 재혁이 의체 판매대와 의체 시술처로 가는 날은 많았지만 그게 이런 사람들 때문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글쎄, 이젠 이자가 구형 의체로는 감당이 안 될 거라니까.


-이게 어떻게 구형이야. 가장 선호도가 높은 의체인데.


그때 그 침입자들이 다시 찾아왔다. 인기 의체로 코인 이체를 대신하려는 재혁에게 의안의 남자가 괜한 딴지를 걸었고 재혁은 조금 성난듯 보였다.


-저 I-516, 13버전 업 강화 의체면 우리가 빚도 탕감해 주고 서비스로 메타버스에 지리는 데 평생 무료 이용권도 준다니까. 하긴 넌 저 네오 아마토르가 있어서 그런 건 필요 없는 건가?


지은을 보며 저열한 표정으로 내뱉는 그의 말에 재혁은 이성을 상실할 것 같았지만 눌러 참으며 말했다.


-주말에 니들이 말한 최신형 의체 시술받으러 오는 고객이 있어. 시술과 함께 코인 바로 이체해줄게!



7


지은이가 함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란히 길을 걷고 있던 재혁의 팔을 쳐서 재혁의 얼굴에 아이스크림이 묻게 했다.


-지은아! 이런 짓은 어디서 배웠니?


-너랑 같이 본 20세기 고전 영상에서 이러면 연인들이 마주 보고 웃고 그러던데..


재혁도 지은이와 함께 웃으면서 얼굴에 묻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닦아냈다. 그때 대형 의체 판매대에서 나오던 여성 한명이 강화 의수인듯한 자신의 오른 팔을 치켜 들며 소리를 쳤다.


-아!아! 누가 좀 도와주세요.


재혁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지은에게 자신의 아이스크림 마저 건네고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팔을 잡고 전류 차단 버튼을 찾던 재혁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거 강화 의수가 아니군요. 


그녀의 오른손에 낀 장치에 엄지손톱을 위로 들어 올리고는 칩을 해체하자 소리를 지르던 여성이 진정이 된 듯 말했다.


-고마워요. 강화 장갑이 이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어요.


-인기 상품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걸 왜 착용하셨나요?


무례한 질문은 아닐지 몰라도 선뜻 말하기엔 부적절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는데도 재혁은 자기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동생이 사고로 의체를 하게 됐는데 도대체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지 않아서 신경망과 불완전 연결된다는 구형 강화 장갑을 착용해 본 거예요. 이거 사람 잡겠는데 의체는 과연 안전한 건가요?


-의체를 많은 분들이 시술받지만 의체 시술 후 사고 경우의 수는 6,153,991분의 1도 안돼요. 대체로 안심하셔도 될만한 정도에요. 오히려 이런 구형 신경망 연결 강화 장갑이 더 위험하죠. 


-그래도 이런 일을 겪고 보니 동생이 더 걱정되네요.


-의체 제작 기술과 이식 시술법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고 신형 업그레이드 의체도 13달 주기로 생산되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의체를 하지 않은 사람들의 자살 건 수에 비교하면 의체 사고는 전무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자살 사례를 이야기하는 게 지금 상황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 제가 실수했습니다. 그저 의체가 안전하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던 거였어요.


재혁이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사과를 하자 그런 재혁을 보고 그녀가 말했다. 


-뭐 하시는 분이에요?


-저는 드래건 마운틴이라는 의체 판매 시술처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체 전문가 시군요. 그거 의학과 공학을 다 수료해야 할 수 있다던데...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들으면 비꼬는 것 같은 말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전혀 그런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의체에 대해 더 알고 싶은데 다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그건 검색만 해보시거나 메타버스에서 가상 경험을 해보셔도...


-아뇨. 전문가에게 꼭 필요한 정보만 제대로 들어보고 싶어서요. 실감 나게.


실감 난다는 표현은 고전어인데다 일상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사장되다시피한 표현이다. 그런데 재혁은 문득 그 말 한 마디에 그녀에게 어떠한 연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여성이 재혁의 수트 센서에 연락처와 신상정보 일부가 인식되도록 자신의 수트 소매를 재혁의 수트 아래 팔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전 승완이에요. 시간 나실 때 연락 주세요. 휴가 기간이라 언제든 괜찮아요.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든 채 그들에게 다가서다 멀찍이 서서 지켜보고 있는 지은의 존재를 재혁은 잠시 잊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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