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 호스피스 의사가 먼저 떠난 이들에게 받은 인생 수업
김여환 지음 / 청림출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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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승우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울게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기억이다.

 

이 문장을 읽고는 급히 펜과 노트를 찾아 메모해두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그를 잃는다는 것이라기 보다 그와 함께했던 기억들로 쌓인 자신의 삶의 일부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일부를 잃음으로써 허망함을 느끼고 위태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허망함과 위태함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데 두려움을 느낍니다. 어떻게든 그를 살려보고자 전국에 있는 좋다는 병원은 모조리 찾아다니고, 좋다는 약은 다 해먹이고…. 하지만 그 어떤 위대한 의사에게 치료받고, 명약을 복용한다 한들 죽음은, 쓸데없는 수고라고 비웃듯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작별인사도 미처 하지 못하고 그를 보내야 할 때가 언제든 찾아오고, 사별과 함께 두려워하던 허망함과 위태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되려 즐겁도록 만들어 주고, 남은 이들의 허망함과 위태함이 덜 하도록 보살펴 주는 곳이 바로 호스피스 병동입니다. 오랜 투병과 고통을 겪고 이제는 인간답게 살아보고자 찾아온 말기 암 환자들과 그런 그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힘을 기꺼이 내어주는 봉사자들과 의사들, 따뜻한 말과 마음이 오가며 호스피스 병동에는 다른 곳에서는 느끼기 힘든 온기가 감돕니다. 생의 끝, 밑이 보이지 않는 절벽에 서서 그들은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편해진다고 합니다. 평생 죽음을 연구했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에 따르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는 '부정-분노-타협-절망(우울)-수용'이라고 합니다. 즉, 부정과 분노와 절망의 부정적인 단계들만 거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활짝 웃으며 떠날 수 있는 '수용' 단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수용 단계에 이르는 며칠 동안은 환자와 가족들 모두 힘들어 한다고 합니다.

 

금자 할머니는 평생을 남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평생을 주고도 모자라 늘그막에 아프면서까지 베풀고 싶어하시는 인자하고,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주저하며 가족들이 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렸을 때도 가족을 걱정하며 위로해주시던 착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연 금자 할머니가 변했습니다. 생전 하신 적이 없는 욕을 자신의 남동생에게 퍼붓질 않나, 식사가 5분이라도 늦으면 벼락같이 호통을 치셨습니다. 평소의 인자하던 금자 할머니가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은 그런 모습에 놀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얼마 정도 금자 할머니를 마음으로 걱정하며 대해주었더니 다시 인자하던 금자 할머니로 돌아왔습니다. 맞아요, 할머니. 금자 할머니는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지나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 하필 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주위의 모든 것이 싫어시고 짜증스러워 지는 단계지요. 한평생 억눌러온 한(恨)과 고통을 마음껏 표출하는 단계인 것입니다. 늘 남에게 양보하고 인내하며 살아오면서 금자 할머니의 마음에는 자그마한 상처들이 모여 커다란 덩어리를 만들었겠지요. 부정과 분노와 타협과 절망의 단계를 거치며 이 덩어리들을 하나하나 해체해 나가는 것입니다. 상처들을 표출하고, 덩어리를 해체하고 나서야 '수용'의 단계에 이르러 편안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욕하는 환자가 좋다. 화는 울거나 웃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찾아오는 분노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평생 동안 가슴 밑바닥에 축적된 슬프고 시리고 아픈 상처들, 옹이로 박인 그것들은 분노의 시간을 거치고 나서야 풀리고 사라질 수 있다. (113)

 

금자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 폐암 말기이셨던 당신께서는 투병 생활 끝에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셨지요. 당신께서는 자신의 병을 아시고 부터 얼마 간 많이 예민해지시고 짜증을 부리셨습니다. 그때 저는 덩달아 화를 내었습니다. 이 책을 조금 일찍 읽었더라면 할머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내가 화를 내지 않고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의 마음의 일들을 들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후회가 밀려옵니다.

 

언젠가 당신의 약봉지를 보다가 '마약'이라고 써진 글자를 보며 깜짝 놀라 질문을 했던 적이 있지요. 마약을 왜 드시느냐고, 마약을 약으로 드시는 것이냐고. 당신께서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해답을 또 이 책을 읽으며 찾았습니다. 당신께서 드셨던 약은 바로 '모르핀'이겠지요. 암 환자에게는 암성 통증이 따른다고 합니다. 1에서 10까지 단계가 나뉘는데 어떤 단계는 버티기 힘든 통증은 맞겠지요. 이 암성통증을 이기는 데는 모르핀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할머니께서는 폐암이셨으니 숨 쉬는데 고통이 따랐을 것입니다. 매일 밤마다 기침을 하는 당신을 보며 왜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과연 못했을까요, 안 한 것일 겁니다. 심지어는 짜증마저 부렸습니다. 조용히 좀 하시라고……. 당신의 고통을 모르고 내뱉었던 말입니다. 우리의 말에 얼마나 상처받으셨을까, 당신은.

 

이 책을 읽으며 말기 암 환자들, 아니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모르핀'도 호스피스도, 항암 치료도, 명약 투여도 아닌 가족들의 사랑과 관심이라고 느꼈습니다. 명희 아주머니는 땅값이 올라 졸부가 되어 돈이 많았지만 그 행복을 누릴 새도 없이 암에 걸렸습니다. 항암 치료로 머리가 다 빠진 채로 호스피스 병동에 나타난 그녀는 매우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습니다. 통증으로 아파하는, 죽을 날이 멀지 않은 그녀를 앞에 두고 가족들은 허구한 날 싸웠습니다. 주된 내용은 유산 문제였습니다. 명희 아주머니의 돈을 더 많이 물려받기 위해서 가족들은 싸우고, 소리 지르고, 머리채를 잡았습니다. 그것도 아주머니 앞에서요. 아주머니는 그런 싸움 장면을 앞에 두고 늘 고개를 숙이고 계셨습니다. 그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이 부끄럽고,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하루는 아주머니의 남편이 찾아왔습니다. 또 싸웠습니다. 이제는 싸우다 말고 아주머니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당신이 잘못 키워서 애가 저 모양이잖아!" ……. 할 말을 잃었습니다. 과연 사람이라면 죽어가는 자를 앞에 두고 저주하는 욕설을 퍼붓고, 싸우고, 화를 낼 수가 있을까요. 그것도 자신이 가장 사랑해서 결혼한 여자이자, 자신들을 낳아주고 헌신하여 키워준 엄마입니다. 명희 아주머니는 가족들의 무관심과 무시와 멸시 속에서 죽어갔습니다. 얼마나 불행하고도 슬프고도 안타까운 죽음입니까.

 

삶은 힘들고 암과 함께 가는 삶은 더 힘들다.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난 말 한 마디, 따뜻한 스킨십이 환자의 절망감과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외로움을 치유해야 한다. (189)

 

평생 힘들었던 삶, 마지막 길마저도 힘들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할머니, 저는 늘 후회하고, 죄송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당신의 고통 한 번 헤아려 드리지 못한 것, 손을 뻗으셨을 때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드리지 못한 것, 축복의 기도 한 번 올려드리지 못한 것, 셀 수 없는 많은 후회와 죄송함이 밀려옵니다. 저도 이 죄송한 마음을 담아 언젠가는 호스피스 봉사를 해보고 싶습니다.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저와의 약속이지만 이 죄송함을 가지고 있는 한,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죽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요.

 

 

 

(+) 청림출판에서 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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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07-14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차분하게 아주 잘 읽었어요. 뭐라고 좀 댓글을 달아야겠는데, 그냥 잘 읽었다고만 말하고 가려다가,,,
일단, 소이진님은 너무 어렸을거에요. 가끔씩 그렇게 할머니 한 번씩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안녕요.

p.s. 이승우 작가 리뷰라고 처음에 생각했어요. -- 오늘 알라딘 서재가 엄청 조용해요???

이진 2012-07-15 12:38   좋아요 0 | URL
이런 글은 댓글 달지 말라고 쓰는 글이잖아요? ㅎㅎㅎㅎ
막 진지하고, 슬프고 이런 글... ㅋㅋㅋㅋ
진지해서 댓글 달면 안 될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을 제가 아이님하고 댈러웨이님한테 받잖아요.
두 분 글이 너무 진지하고 수준 높아서.. 막 ㅋㅋㅋㅋㅋ

주말되면 알라딘 축축 가라앉아요. 이상하죠?
알라딘이 학교나 회사하고 비슷한가봐요.
주말에는 안 해야할 거 같고 ㅋㅋ

cyrus 2012-07-1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진님이 인용한 첫 문장, 저도 보는 순간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어쩌면 인간이 타인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곁에 있던 타인이 남기고 간 상실감으로 비롯된 허무함이 아니라 예전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낀 행복했던 경험과 기억들이 다시 재현될 수 없다는,, 아쉬움에 대한 슬픔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사실 지금도 죽음에 대해서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냥 단순히 인간의 영이 육신을 남긴 채 이승을 떠난다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어렸을 때 친할아버지랑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시간은 기억하고 있지만 여전히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실감나게 반응한 적도 없고요. 그래서 막상 지금 곁에 있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죽는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정서적으로 큰 상심의 고통을 겪지 않을까 저 스스로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이진 2012-07-15 12:52   좋아요 0 | URL
이승우의 책을 읽다보면 저런 문장들이 무더기로 쏟아집니다. 저는 밀려오는 감동과 명문장들에 어쩔 줄 몰라하며 펜과 메모지를 들지요. 생각이 많아지게 만드는 작가입니다. 그가 떠나고 눈물이 날 때는 그가 추억될 때 잖아요. 그가 옆에 없다는 사실이 슬픈게 아니라, 맞아요, 그로 인해 다시 웃을 수 없고 그가 빠져나간 기억이 허망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죽음은 아직 확실히 모르고 있달까. 죽음은 아직 막연하고 어렵게만 다가오고 있어요. 죽음을 완벽히 이해하는 날이 곧 왔으면 좋겠네요. 좋겠어요. 저는 중학교부터 벌써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두 번이나 겪었어요. 죽음에는 면역이 생겼어요.

2012-07-15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5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7-1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글이 참 좋아요.
할머니가 저 세상에서 마음으로 읽으실 것 같아요.

이진 2012-07-15 12:44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푹 빠져서 글 써봤어요.
리뷰도 오랜만이구요. 은희경의 소설도 써야하는데 말이죠.

그러시겠죠...?
프레이야님 감사합니다 ㅎㅎ

마태우스 2012-07-1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리도 멋진 글을 쓸 수 있죠? 대단하삼. 슬프게 하는 건 기억이라는 대목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벤지란 강아지가 죽고난 뒤 한동안 벤지가 좋아하던 KFC에 가지 못했고, 벤지가 즐겨먹던 흰우유를 못마셨답니다. 그거 보면 벤지가 즐겁게 먹던 기억이 떠올라서요. 글고보니 저희 할머니도 요양원에 계시네요.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차 잊혀져서,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고 있는 듯해서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요.

비로그인 2012-07-15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가요, 소이진님. (마치 우연히 처음 들른 것처럼-)
한 마디로 끝내려고 했는데... 글 정말 마음에 드네요. 여기서 줄일게요.

jo 2012-07-16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할머니는 아니고 증조 할머니께서 치매에 걸리셨어요. 심하진 않고요. 약을 매일 복용하셔야 해요. 이 글을 읽으면서 가까이 살면서도 공부한답시고 1달에 1번도 뵈러 가지 않는 제가 떠오르네요. 용돈 주실때만 좋아라 했던 제가 부끄럽네요. 진짜 있을때 잘해야 하는데.. 내일 찾아뵈러 가야겠습니다. 근데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부럽습니다.ㅋ.
 
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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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의 연정과 사랑

 

 

 

 

  얼마 전까지 정은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해를 품는 달>이 크게 화제를 이끌어내며 방영되었다. 가상 조선시대에 살았던 세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다룬 책이자, 드라마다. 드라마에는 김수현이 그 역할을 맡았는데 역할에 몰입을 잘하여 드라마 자체가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짜임새있는 연기와 구성을 보여주었다.

 

  세자는 한 눈에 반한 여인을 지극히 사랑하여 그녀가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도, 원인모를 병에 들어 폐빈 되었을 때도, 그녀가 병으로 죽고 난 후에도, 그가 임금이 되어 중전을 거느리게 된 후에도 연심을 그만두지 않았다. 어찌나 그녀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지 그만두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잊지 않으며 살았다. 끝내는 죽었던 세자빈이 살아 돌아와 그의 사랑은 이루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조선의 로맨틱한 세자의 감동적인 러브스토리이다. 나도 <채홍>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내 관심은 오롯이 어서 세자와 세자빈이 재회하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었다. 만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TV를 두들기곤 했다.

 

  그러다 <채홍>을 읽게 되었다. 너무 읽고 싶었던 책을 선물까지 받은 터라 들뜬 마음으로 펼쳐보았다가 덮을 때는 비탄하며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그 여파는 한창 즐겨보고 있던 <해품달>에서 관심을 두는 인물을 바꾸게 했다. 바로 어린 시절에 세자빈과 함께 예동을 지냈던 중전이다. 그녀는 공주의 예동을 지낼 때부터 관심 밖이었다. 세자빈의 오빠를 마음에 품었던 공주는 세자빈 쪽으로 마음이 가기 마련이었고, 왕마저도 지식이 뛰어난 세자빈을 마음에 두었다. 중전은 늘 세자빈과 비교되는 수치를 당해야했고, 주저앉아야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아비는 더욱 독하게 마음을 먹으라며 다그치기만 했다. 성장한 후에도, 죽은 세자빈 대신 들어오게 되었다는 간접적인 이유로 세자에게 미움 받았고, 자신의 아비가 세자빈을 살해하는 것을 주도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으로 매일 밤 떨었다. 세자빈이 살아 돌아와 자신을 해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정신적 이상까지 생겨버렸다. 심지어 합방일이 되면 세자는 언제나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교태전에 걸음하는 것을 피했다. 그녀는 이러한 무관심과 자신을 향한 질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자처해왔다. 하지만 늘 그녀는 외로운 존재였다. 남편에게, 아비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많은 여인이었다.

 

  왜 내가 중전에게 눈길이 가게 되었는가? 바로 <채홍>에도 이와 같은 여인이 다뤄지기 때문이다. 순빈 봉씨. 역사서에 쓰여진대로만 보면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하자 후궁의 회임 소식을 들고 투기를 부리고, 거짓 임신을 고하고, 심지어는 궁녀와 동성애까지 저지른 나쁜 여자다. 김별아는 이런 순빈 봉씨를 어떠한 여자로 다루고 있을까. 또 그녀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순빈 봉씨, 사랑할 수 있는...

 

 

 

 

  순빈 봉씨는 알려진 것이 없는 여자다. 그 칭호 넉자 말고는 이름도 모르고 단지 동성애를 저지르고 폐출 당했다는 기록만이 보인다. 이런 그녀에게 김별아는 난(暖)이라는 예명을 붙여주었고, 친근하게 봉빈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난으로, 봉빈으로 그녀를 표현해야 했을 이유가 무엇일까.

 

  봉빈은 일찍이 어미를 잃고 유모를 한 가족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듬직하게 자란 오라비들 밑에서 담뿍 사랑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컸다. 그녀는 비록 아비뿐인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덕이 높았고 자존감은 하늘을 찔렀다. 수려한 미모는 감히 중국의 천하일색들에 견줄만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오만했다. 간택절차로 궁에 들어 선을 보일 때도 그녀는 고개를 처박고 있는 다른 후보자와 달리 궁안을 둘러보며 느긋이 서있었다. 자기는 타 후보자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자의 총애를 얻기 위해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술법들을 행했던 앞선 세자빈 휘빈 김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비웃음을 치기도 했다.(휘빈은 엄청난 박색이었다! 땅딸만한 키에 답답한 이목구비를 지닌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세자는 더욱 그녀에게 무관심했고 불안해진 휘빈은 민간의 술법을 행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은 부덕한 죄로 쫓겨났고 재간택에 봉빈이 뽑히게 된 것이다.)

 

  어쨌든 난의 오만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외모로 뭇 남성들까지도 홀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봉빈은 그 외모로 세자의 마음까지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은 휘빈과는 전혀 다르기에, 아니 수십배는 더욱 아름답기에 잡지 못하면 이상하리라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웬걸, 세자는 봉빈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되려 미모의 얼굴을 보고는 마음과 눈을 질끈 닫았다. 세자는 여자에게 무심했다.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한 사람의 사랑을 받는것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익숙치 못했다. 특히 세자에게는 오래전부터  미(美)에는 반드시 악이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봉빈의 미는 세자의 마음을 얻는 데 독이 되었을 뿐이었다.

 

  난의 사랑받고픈 마음과 세자의 선입견은 첫날밤부터 격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연(宴)에서 마신 몇 잔의 술을 핑계로 세자가 등을 돌리고 드러 누워버린 것이다. 어느새 그는 코까지 골며 잠들어버렸다. 콧소리가 쌕쌕거리며 고르게 퍼질수록 오라비의 신혼 생활을 엿들어오며, 남과의 접촉을 은밀히 상상하며, 첫날밤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품어오던 난의 억장을 처참히 무너져갔다. 누가 알았을까. 난이 시집간 첫날 밤, 등을 돌린 남편의 뒤에서 스스로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치마를 벗을 줄을. 난은 지독하리만치 잔인한 수치심과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그녀는 겨우 세자빈 따위의 신분으로 장차 성군이 될 인물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아름답게 태어난 걸, 문종의 세자빈으로 간택된 죄, 즉 자신을 탓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순빈 봉씨, 사랑받고픈...

 

 

 

 

  세자는 봉빈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했다. 끝내는 극과 극으로 치달아버렸다. 세자에게 또 다른 후궁이 들어서면서 부터 더 심해졌다. 몇 년동안 갖지 못한 아이를 후궁은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잉태해버렸다. 봉빈은 엄청난 질투심과 분노로 후궁을 괴롭히는 등의 파행을 저질렀다. 태어날 아이와 어미를 저주하며 하루하루 술잔을 비워갔다. 상상임신까지 했다. 하지만 상상임신으로, 그녀는 위로받지 못하고 더욱 악처로 치닫게 되었다.

 

  봉빈은 어느새 술고래가 되어있었다. 자신에 대한 한탄을 담아 한 잔, 세자에 대한 분노를, 사랑을, 그리움을, 외로움을, 질투를, 체념을 담아 열잔, 또 한 잔 마시다 보니 그녀의 옆에는 빈 술병이 산더미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상태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왕 내외는 세자와 세자빈을 단 둘이서만 나가 살도록 명하였다. 너무나도 멀어진 그들의 사이를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서, 상상임신 아니 거짓임신으로 궁내를 휘휘스럽게 했던 세자빈의 면모를 조금이라도 깨끗이 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것으로 더욱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

 

  대체 봉빈은 전생이 어떤 죄를 살았길래 이토록이나 처절하게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을까. 은희경의 <빈처>라는 작품이 있다. 현진건의 <빈처>가 돈의 결핍을 나타낸 것이라면 은희경의 것은 사랑, 즉 애정의 결핍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내의 일기장을 읽으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남편이 등장한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남편이 아닌 아내다. 남편은 아름다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끝내는 얻어냈다. 하지만 이루어진 사랑의 남루한 일상이라고 그랬다. 그는 사랑을 얻었다는 허무감 때문인지 아내에게 무관심했고, 무시했다. 아내를 위할줄 몰랐고 따스한 한 마디 해줄 줄을 몰랐다. 일찍 들어온다고 말해 몸도 좋지 않은 아내를 저녁 차린다고 고생하게 만들어 놓고는 달랑 전화 한통으로 늦는다고 말한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이해해주려고 하지만 쓰러질 듯한, 아려오는 외로움을 느낀다. 이루어진 사랑의 남루한 일생... 이루어진 사랑의 쓴 인생... 사랑의 외로움. 봉빈은 <빈처>의 아내보다도 더한 외로움과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빈처>의 아내는 자신이 원한 결혼을 하기라도 했다. 결혼 전 연애 시절에는 무한 사랑을 받아보기라도 했다. 그런데 봉빈은 뭔가. 원하는 결혼도 아니었고, 세자가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결혼 첫날밤부터 폐빈되기까지 7년 동안을 외톨이로 지냈던 것이다. 술을 벗삼아, 바느질을 남편삼아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다.

 

  그녀가 택한 마지막 탈출구는 궁녀와의 사랑이었다. 동성애, 오직 그 하나만이 봉빈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봉빈을 음녀로, 악녀로 치부하기에 바빴고 결국엔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렀다. 어째서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만들어 놓고는, 그렇게 해 놓고서는 그 고통을 벗어내고자 하면 더욱 더 옥죄이고 결박하는 것일까. 왜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껏 무시해도 되고, 마음껏 쫓아버려도 되고, 마음껏 짓밟아도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여기서 내가 던진 질문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김별아 작가는 이런 순빈 봉씨를 위로하기 위해 난이라는 예명을 지어준 것일까? 여성으로 태어나 망가지고 짓밟힌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순빈 봉씨, 여자로서 패배자...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늘 패배자로 살아야 했다. 늘 남자의 밑에 서있어야 했고, 그들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에서도 패배자였다. 봉빈은 오로지 악녀로만 그려져 있다. 도저히 따뜻한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방탕한 여인. 하지만 어쩌면 김별아 작가가 그려낸 봉빈의 모습보다 훨씬 처참하고 힘든 삶을 살다간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농후하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에게 정절과 여성으로서의 모습은 굉장히 중요했다. 봉빈은 정절을 어긴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악하게 그려질 수 밖에.

 

  말했다시피 조선시대는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요하던 때였다. 그런 시대에 동성애로 퇴출된 여인을 김별아는 왜 끌어온 것일까? 나는 조심스레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 애처로운 그들의 삶'을 그려냈다고 생각해본다. 봉빈은 세자빈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다. 세자빈이라는 지위로서 박생들에게 덕을 보여야 하는 자리였고, 그녀에게는 수많은 격식과 의례와 절차를 지켜야하는 의무가 주어졌다. 봉빈은 좋게 받아드리고자 했다. 하지만 격식과 의례와 절차는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닌 구속과 결박의 의미로 봉빈을 옭아맸다. 마음이 전혀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밤일, 친정과의 교류를 금지하며 세자는 봉빈을 더 깊은 구렁텅이로 잠기도록 했다. 그런데 비단 봉빈만이 이러한 제약과 규율 내에서 악압받으며 살았을까? 물론 아니다.

 

  그러나 무엇으로도 이번 생애 그곳까지 닿을 방도가 없기에 김태감은 무력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에 무력했기에,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 헛힘을 쓰기 시작했다. 입번하러 나서는 길에 트집을 잡아 아내의 귀뺨을 올려붙었다. 쓰러져 울고 있는 아내를 내버려둔 채 나갔다가 출번하면 또 다른 가탈을 부려 아내를 쳤다. 고생중에 마음고생만큼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없으니 금세 아내의 눈빛은 흐려지고 피부는 윤기를 잃었으며 변함없는 산해진미에도 살이 내렷다. 수척해진 아내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으나 김태감은 매타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44p

 

  지인의 친구 분은 배를 타시는데 어렵사리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아내가 집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 이유인 즌슥 아내가 그 분과 밥을 먹다가 생선을 뒤집었는데, 생선을 뒤집는 행동은 배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금기시 되어있던 일이라고 한다.(배가 뒤집힌다나...) 화가 난 남자는 쌍욕을 하며 아내의 귀뺨을 때려버렸다고 한다. 그저, 잘 몰랐을 뿐인데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될 것을 썅년, 이라고 욕까지 하며 때렸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 행동으로 아내는 당장 짐을 싸서 나와버렸다고 한다.

 

  김태감의 아내도 실수를 저질렀다. 내시의 부인으로서 '자른다'는 말을 입에 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여자들은 화를 때며 욕을 하고 때리는 남자를 두고 위의 아내 분처럼 집을 나갈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구속된 그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저 맞고, 맞으며 참아냈으리라.

 

  봉빈에게는 신체적 구속은 없었다. 폭행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아파해야 했다. 그녀 자신으로서 조선 시대에 태어난 것을 아파하고, 역사로서도 아파야했다. 봉빈은 삶의, 속세의 패배자였으며 다시 일어날 수 없게 쓰러져버렸다.

 

 

 

 

     차라리 벚꽃같은 삶이었으면...

 

 

 

 

  엊그제 핀 듯한 벚꽃이 벌써 다 졌다. 날리는 벚잎을 보며 문득 봉빈을 생각했다. 그녀의 삶이 벚꽃같았다면 어땠을까. 벚꽃같이 짧지만 화려한 인생을, 짧지만 강렬한 사랑을 한 번이라도 겪어봤더라면 그녀는 이토록 힘들지 않았을텐데.

 

  봉빈을 역사 속으로, 아니 내 마음속으로 보내며 다시금 생각해본다. 사랑을 구속당했던, 인권을 억압받았던 조선시대의 여성들. 사슬로 감긴 사랑이라는 감정에 목숨을, 인생을 걸고 덤벼들었던 당돌한 여인. 그만큼 아파야했고, 외로워야했고, 슬퍼야했고, 고통받아야했고, 탄식해야했고, 눈물흘려야했고, 피흘려야했던 여인.

 

  가끔씩 <채홍>을 읽지도 않고 저질스러운 작품으로 치부해버리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에게 나는 이제 무조건 책을 내밀며 한 번 읽어보라 권할 것이다. 김별아가 그려낸 하나의 작품안에서 김별아 자신의 호소와, 여성들의 호소와, 그리고 나의 호소를 느껴보라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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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4-15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한테도 얼른 읽어보라고 권해요!! 근데 나는 저질스러운 작품이라 안했음. 누가 저런 말을 해요, 대체!! 전에 그 친구들?

이게 <해품달> 보다 재밌어 보여요. 가만보면 남자들도 안됐지만 역사 속에서 여자들은 정말 많이 희생하잖아요. 다시 태어나서 여자 한 번 돼볼래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리뷰 좋아요^^

이진 2012-04-15 21:00   좋아요 0 | URL
누나, 얼른 읽어보아요! 전에 그친구들... ㅎㅎㅎ 아마 제 친구들 말고도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많을거에요.
<해품달>보다 더 재밌을거에요. 해품달은 로맨스 소설이잖아요. <채홍>은 많은 걸 담고 있단 말이에요. 음... 예전이라면 싫은데 지금이라면 대환영이죠! 안그래도 수다를 무척, 무척, 무척, 무척 좋아하는데 여자로 태어난다면 거리낌 없이 수다에 낄수있잖아요ㅎㅎㅎㅎㅎㅎ

ICE-9 2012-04-1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질이라 칭하는 이들과 달리 채홍의 매력에 빠져버린 동지로서 저는 이 리뷰가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부부관계란 참으로 연약하군요. 생선을 뒤집었다고 헤어지다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남자들의 옹졸함이 일을 더욱 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

이진 2012-04-16 23: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우리는 그렇게 옹졸한 인생을 살지 말아요. 여자를 때리며, 욕하며 살지도 말구요. 이 리뷰 저는 아무리 봐도 너무 막쓴거 같아요. 요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차근차근 정리해서 쓰신 헤르메스님의 리뷰에 비하면 뭐랄까... 아스팔트의 껌이랄까 ㅎㅎㅎㅎ

저는 이 리뷰랑, 히가시노 게이고의 리뷰로 일단 신청은 했어요. 그런데 10기 활동을 너무 안해서 뽑아줄지 안뽑아줄지는 모르겠어요 ㅠㅠㅠ
 
[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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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보칼리즈, Dame Kiri Te Kanawa sings>

 

 

 

 

 

   시리도록 하얀 책장을 넘기며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슴을 쥐어 뜯으며, 가슴을 쥐어 뜯으며 탄식하고 또 탄식할 수 밖에는 없었다. 이런 일을 이제서야 책으로 접하게 된 나에 대한 자책감이 들었고 그에 따라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답답하게 먹먹한 가슴을 어찌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어 힘들었다. 계속 찡하게 아려오는 코끝이 신경쓰였고 뿌옇게 흐려진 눈앞이 거슬렸다. 아, 이 애통함을 어찌 전할 수 있을까.

 

 

   어릴 적 경찰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성실하고도 정의로운 용사였다. 고모부가 경찰이었고 그 분은 언제나 웃으셨다. 늘 착하셨고 듬직했다. 그래서 나의 머릿속엔 경찰은 착하다,는 이미지가 콕 하고 박혀버렸다. 또 중국 여행을 가서 본 제복입은 멋지고 잘생긴 경찰들로 인해 경찰은 멋있다,는 이미지까지도 박혀버렸다. 하지만 착하고 멋있기는 개뿔.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죄 없는 시민을 향해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고, 발로 차고 밟는, 무자비하고 몰상식한 인간들이었다.


 

 

   간이 의무대를 차려놓은 교실은 더 아수라장이었다. 대부분이 이마가 깨진 사람들이었는데도 얌전히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얼굴이 피칠갑이 되어 부어오른 사람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양호한 편이었다. 네댓 사람이 계속 사람들을 들고 들어오는데 사지를 못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나처럼 머리가 조금 깨진 사람들은 의식을 잃고 계속 들려오는 사람들을 먼저 돌보라고 몇 번이나 자기 차례를 양보해야 했다. (중략)

 

   나중엔 정말 응급처치를 해줄 아무런 대안들이 없었다. 의식을 잃은 사람들에게 빨간 소독약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의식을 잃고 실려와 바닥에 동댕이쳐진 환자들은 이미 넘쳐나고......

 

   그런데도 미친 전투경찰들은 바로 문 앞까지 다가왔다. 우리가 있는 교실 복도 창을 모두 깨뜨리며 가장 잔인한 욕설과 인상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경찰이 아니었다. 밖에서 전투경찰들이 던지는 돌을 피하기 우해 우리는 벽 뒤에 숨어 오들오들 떨었다. " 야, 새끼들아. 여긴 환자들 있는 곳이라고...... 사람 죽어가는데 이게 무슨 짓들이야. "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돌아온 대답은 기가 막혔다. " 이 개새끼들 니들 오늘 다 죽었어. " 그들은 환자까지도 다시 짓밟을 태세였다.

p. 168-169

 

 

 

   한국의 현대사를 다룬 영화를, 얼마 전 '부러진 화살'을 보며 경찰과 시민의 대립 장면을 접할 수 있었다. 제복과 방패로 시민 앞을 둘러싼 경찰을 보며 나는 어떤 생각을 하였는가, 하고 되짚어보니 ' 그래, 저건 다 옛날 일일 뿐이지 '하고서는 말했던 것 같다. 제대로 민주주의가 갖춰진 현재, 저런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당연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위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년도는 2006년. 21세기에 한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위 본문을 읽으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대추 초등학교를 지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초등학교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마을을, 아니 자신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자신들의 인권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경찰들과 대항했다. 무장한 경찰들을 보고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들의 자존심. 하지만 자존심만으로 무장경찰을 이길 수는 없었다. 송경동 시인은 머리에 벽돌을 맞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의식을 잃었다.

 

 

   하, 전투경찰. 이토록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 누굴까 하고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한 전투경찰의 일기를 읽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단지 훈련소에서 줄 잘못 섰다는 이유로 전 국민과 고참들에게 욕 먹는 자신에 대해 한탄하고 우리들에게 메세지를 전하는 글이었다. 자신들도 한 부모의 자식들이라고, 우리가 시위를 제지하는 것도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며 정치인을 지키고 싶어 전경이 된 것이 아니라고. 자신들은 그저 사회에서의 치안 업무를 당당히 하기위해 전투 경찰이 된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정치인의 똥개 새끼들...'하는 욕을 들으며 시민들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와 창에 맞는 자신들도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본문을 읽으며 똑같이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정치인의 똥개 새끼들...'하고 욕을 했던 내 모습과 눈물을 흘리며 차갑게 식어버린 도시락을 까먹는 전경들의 모습이 겹쳐지나갔다. 아아, 대체 이 흔들리는 마음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한진중공업에 관한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김진숙'이라는 이름만 알았고, '김여진'이라는 배우가 한진중공업 어쩌고해서 경찰에 불려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김진숙이라는 여성이 크레인에 올라갔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한심하게도 그 크레인이라는 것을 굴삭시 버켓이란 이미지로 떠올리고 있었다. 흙이 잔뜩 굳어있는 버켓에 올라가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크레인이 35m라는 것을 알기에는 오랜시간이 필요했다.

 

 

   언젠가 김진숙님이 크레인에서 내려온 날, 알라딘에는 많은 글들이 게재되었다. 알라딘 입성 초반, 아주 혈기왕성했던 나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그 분의 사진은 관중들을 향해 외치던 멋지고 당당한 흑발의 여성이었는데 알라딘에서 그녀의 모습은 초라한 백발의 여성노동인이었다. 그 충격에 나는 잠깐 "아아, 김진숙 님이 이런 분이셨구나"하고서는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금방 활기찬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김진숙님이 노동인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생각치 못했다. 그냥 인권 단체에서 일하시는 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여성의 몸으로서 남자도 하기 힘든 용접공을 하다니. 왠지 남녀차별의 분위기가 풍기는 생각인줄은 알지만 여성 노동자라니, 나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여성의 몸으로 엄청난 혹사의 일을 견뎌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고있기에 나는 더더욱 그랬다. 여성노동자라니...

 

 

   송경동 시인이 군데군데 뽑아놓은 김진숙님의 <소금꽃나무>라는 책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울컥했다. 이런 끔찍한 생활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써 간접적으로 접하는 나도 이러한 일을 마주하기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직접 겪은 자들은 도대체 어떠한 고통을 품고 있을까. 대체...

 

 

   이소선 어머니가 한동안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있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분이 타계하신 날. 나는 뭐지?하는 마음으로 클릭했다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놀라고, 또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두번 놀랐다. 그리고는 또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며 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에 글을 쓴 송경동 시인에 다시 놀랐다. 그 당시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글귀를 읽으며 이해하지 못했던 때와는 달리 너무나도 어머니의 마음이 잘 이해되었다. 나이에 상관않고 언제나 당당하고 또 씩씩하게 살아오신 어머니. 노동자들을 위해서 싸우셨고, 응원하셨고, 도우신 어머니. 희망버스를 타고 크레인에 가 김진숙을 만나는 것이 유언이었다는 어머니. 비정규직을 철폐하기 위해 한 몸 바치셨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께

  

전태일을 아는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당신은 바늘구멍 같은 어머니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갔기에

불릴 만한 자격이 충분합니다


당신은 가난하고 힘없는 아들을 가둔 벽을 허물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행동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만인을 살리겠다는 아들과의 약속을

‘에미 노릇’으로 지켰습니다

당신에게는 배고픔도 슬픔도 고통도 분노도 외로움도

사랑이었습니다

독재정권의 연행도 구속도 구타도

사랑이었습니다

평화시장을 살리고 유가협을 세우고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힘이었습니다


전태일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를 것입니다


당신은 만인의 해방을 위한 길을

오직 사랑으로 걸어갔기에

영원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맹문재/ 시인, 안양대 교수

 

 

  
   힘든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닫고 알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2년 전부터 알아오던 한 누나가 있다. 그 누나는 해양 대학을 나와 선장일을 하다가 여자의 몸으로 배를 타는 것은 결혼에 좋지못하다고 생각하여 부모님이 있는 시골로 내려와서 살게되었다. 그리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매일 성실하게 살았다. 첫번째 시험은 합격하지 못한 것인지 아무런 말도 없던 것을 보아서는 그랬던 것 같다. 대신 다음 시험을 준비하며 군청의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그 누나의 친구가 농협의 비정규직으로 들어가 정규직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나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 배가 아프다며 웃으며 말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하면 인간 취급도 못받지"하고서는. 그리고 이제야 이 책을 읽고 비정규직의 애통함을 알 수 있었다. 나도 한 번 기회가 된다면 그들의 편에 함께 서서 응원해주고 싶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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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3-02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는 것도 힘들고 느낌을 풀어내기는 더 힘들지요, 그래서 나는 리뷰를 못 썼어요.
하루에 많이 읽을 수 없어, 조금씩 조금씩 심호흡을 해가며 읽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알고 이해하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실천하고 행동하면 좋겠어요. 각자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진 2012-03-02 17:11   좋아요 0 | URL
초반에는 그래도 편한 마음으로 읽었는데 읽어 내려가면 갈수록 가슴을 누군가 콕콕 찌르더군요. 저도 이 느낌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도통 모르겠어서 일단은 생각나는 대로만 썼는데 또 리뷰를 쓰면서도 눈물이 나려고 해서. 정말 저같이 이런데 문외한인 사람들이 비정규직 근로자나 시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었으면 해요^_^

ICE-9 2012-03-04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읽기가 힘들었던 책 가운데 하나였어요. 저려오는 아픔, 무심코 스며드는 눈물 때문에...
어서 빨리 가장 약한 자의 눈물을 먼저 보고 따뜻하게 닦아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진 2012-03-04 22:13   좋아요 0 | URL
헤르메스님이 저의 마음을 참 잘 표현해주셨군요. 저려오는 아픔, 무심코 스며드는 눈물... 읽는내내 한숨밖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발 그런 사회가 속히 오기를...

어머니 2012-03-19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서평을 읽는 동안 가슴이 뭉클하고 눈이 시큼시큼 합니다. 고 이소선 어머니를 다룬 다큐멘터리 <어머니> 블로그입니다. 영화 <어머니>가 곧 4월 5일 개봉합니다. 시간되시면 꼭 관람해주시고 이소선 어머니를 다시 한 번 기억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가 늘 이런 식이라는 걸 너는 알고 있었지? 그는 언제나 우리에게 그의 생각을 침범할 만한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어. 한 번 그에게 머릿속까지 농락당한 후로 그를 읽으며 철저한 그물망을 조금이라도 벌리고자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다 소용없는 짓이었어. 그의 트릭을 알아챘다고 좋아하는 순간부터가 내가 그의 늪에 빠지는 순간이었지.

 

 

 

 

               그의 작품인 [밀실살인게임]을 읽으며 감탄했었어. 미나토 가나에의 처녀작을 읽었을 때도 느끼지 못한 스릴감을,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을 읽었을 때도 느끼지 못한 가슴을 치고가는 엄청난 반전을 그로 인하여 느낄 수 있었지. 그가 사용하는 트릭은 서술트릭이라고 해. 말 그대로 작가가 서술방식으로 독자들을 속이는 트릭인데 이 방식이 어찌나 독특하고 간사한지 나같은 추리 초보라면 생각한번 못해보고 마지막장을 덮어야할테야. 결국에는 그렇게 되었지. 전부터 누누히 말했지만 [밀실살인게임]을 읽다가 책위에 엎드려 울었어. 예전에 도서관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읽다가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서 당황했던 적이있었는데 이때와는 다른 눈물이었어. 나는 그로 인해서 추리소설의 참맛을 알게되었고 또 머릿속에 강풍이 휘몰아친 것 같은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지. 아마 그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을거야. 하지만 그 후로 한 가지 후유증이 생겼어. 어떠한 추리소설을 읽어도 반전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지. 아무리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고 긴박감이 흘러넘치게 진행된다고 해도 끝에 이르러서는 항상 내게 안타까움의 탄식을 흘리게 만들었지. 그래서 한 동안 책에 대한 관심도까지 떨어지게 되었고 책 수집도 접었었지. 곧 오노 후유미라는 작가로 인해 돌아오긴 했지만 이것이 내가 우타노 쇼고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생긴 행복한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게나 애정하고 아끼던 작가였기에 우타노 쇼고의 것들 중 가장 사람들 입에서 오르락거리는 바로 이 책은 아껴두었어. 첫 장을 펼치면 어떤 매혹적인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을까? 그리고 나는 사로잡힐까? 얼마나 매력적인 주인공이 어떤 반전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책장에 고이 모셔진 책등을 볼 때마다 들었지.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 이 즐거움과 설렘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책등만 한참을 바라볼때도 있었어. 그러다가 더 이상 못 참겠다! 하고서는 꺼내서 침대위로 던져두었어. [밀실살인게임]에서의 반전을 기대하고 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밀실살인게임]에서 느꼈던 임팩트가 너무도 컸기에 이 작품에도 기대를 많이 했어.

 

 

 

 

               내가 생각하는 우타노 쇼고는 완벽한 추리소설작가야. 또 내가 유일하게 읽어본 신본격추리소설의 작가이기도 하지.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문장력이나(문장력은 번역가의 기량이겠지만) 스토리따위의 추리소설에서 불필요한 요소는 바라지 않아. 그저 그가 스토리 흐름을 잘 살리는가, 어떠한 복선을 숨겨놓았는가에 집중에서 읽지. 그래서 이 책도 마음을 푹 내려놓고 읽었는데 왠일로 스토리가 탄탄하면서도 재미있는거야. 조폭이야기에다가 사람들을 속여 먹는 사기조직들의 이야기, 그리고 주인공의 연애사가 적절하게 섞이면서 책 한권을 만들어내. 사실 전혀 이어짐없는 이야기들이 각 챕터별로 연결되어있어. 1챕터에는 주인공이 사건의뢰를 받는 이야기, 2챕터에는 조폭이야기, 이런 식으로 극이 전개되지. 그런데 전혀 위화감이 없어. 다 한 이야기 같아. 이것이 우타노 쇼고라는 작가의 능력일까?

 

 

 

 

               하지만 이번 작품은 너무 산만하다. 그리고 너무 혼란스러워. [밀실살인게임]에서 단 한 문장으로 독자의 마음을 콕하고 찌르는 반전을 보인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아. 이 작품에서도 단 한문장으로 극 전체를 바꾸어버려. 그런데 너무도 터무니 없어. [밀실살인게임]을 읽어본 자라면 서술트릭의 참맛을 알터인데 나는 이 책을 읽고서도 머릿속의 혼돈을 정리하지 못하였지.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는 다시 앞으로 책장을 넘겨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하나하나 따져보고, 의심이 가는 문장이나 대사들을 꼼꼼히 훑었어. 그렇게 오랫동안 고심했음에도 반전이 이해가 가지 않았어. 마지막의 작가으 친절한 해설부분을 읽고서는 무릎이 아스라질 정도로 치며 '아!!'하고 감탄어를 내뱉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 충격의 한 문장을 읽고서는 책을 던져버리고 싶었어. 농락당하고 싶었지만 이렇게까지 농락당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지. 기분이 묘했어. 즐겁기도, 기쁘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지. 책 한 권 읽는 것에 이렇게 머리를 쓰게 만들고 체력을 닳도록 만드는 것도 우타노 쇼고라는 작가의 능력일까?

 

 

 

 

               나는 이제 그의 다른 작품을 읽는 것이 두려워. 또 어떤 이야기로 나를 사로잡을까? 또 어떤 반전으로 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버릴까? 하지만 그런 기대감이 이제는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 같아. 내가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정도의 힘이 나에게는 없는 걸. 하면서 위축된다. 그래도 우타노 쇼고니까, 하면서 읽을 수 있게 만나는 것도 우타노 쇼고라는 작가의 능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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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생각난다, 생각나. [고백]말이지? 내가 그 때 추천해준 책이잖아. 나도 읽으면서 엄청 놀랐었어. 그 때는 항상 최고의 책만 사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서는 책을 골랐거든. 돈이 부족했었으니까. 그 책을 선택한 것은 잘한일이라고 끊임없이 생각했어. 평가를 이곳저곳 다 뒤지면서 골랐거든. 미치오 슈스케의 책도 그렇게 고른거야. 그건 그렇고, 데뷔작이 어쩜 그렇게 대단할 수 있디? 도서관에서 반 정도 읽다가 시간이 다 되어 덮었는데 도저히 그냥 잘 수가 없겠더라. 너는 어땠어? 그래그래, 딱히 어느 한 부분이 엄청나다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냥 대단한 작품이었어. 사회의 문제점을 콕 찝으면서 또 그것을 엄청난 줄거리와 흡입력으로 써내려가다니. 작가가 그 책을 쓰면서 조연들까지도 그, 뭐더라. 아, 그래. 주민등록등본을 작성했다는거 아냐. 어떻게 보면 대단한 작가지. 데뷔작에 공을 들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내가 읽었던 데뷔작들은 약간 실망스러운 면이 많았거든. 그것들에 비하면 이 작가는 데뷔작부터가 벌써 추리소설에 한 획을 그을만한 작품을 써냈으니 너무 기대돼. 맞다, 데뷔작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얼마전에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작 빌려줬지 않았나? 그치, 어땠어? 하하, 나도 솔직히 중간에 읽다가 그만뒀어. 도저히 계속 읽을만한 재미요소가 눈에 보이질 않더라구.

 

 

 

 

               내가 책 사들이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아직 깊이 들어가본 적이 없으니까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만 보고 책을 샀어. 물론 그 둘이 양대산맥인 것은 사실이고 이름만 보고 사서 건진 책도 있으니까 말야. 예를 들어 모방범이라던가? 게다가 보통 추리소설 입문을 일본으로 접할때는 게이고의 소설을 많이 읽잖아? 제일 무난하면서도 잘 읽히고, 또 많으니까. 너도 아마 게이고의 '유성의 인연'으로 추리소설의 길을 걸었었지? 내가 그 책을 읽어보진 않았다만 그 때 너의 흥분은 정말 대단했었어. 반전이 어떻게 그럴수가 있냐면서 호들갑을 떨었었지. 그 때 우리학교, 우리학년에서 아마도 나 혼자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너는 내게 왔었을 거야. 나는 물론 게이고라는 작가를 알고있었고. 내가 그 작가를 처음 접한 작품은 '악의'였어. 나도 그 당시에는 추리 소설에는 초보나 다름 없었고 다양한 이야기를 접해보지 않았었기에 충격이 컸어. 딱히 추리소설만의 반전이나 그런 것보다는 소재에 더욱 놀랐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 상황을 그려내는거야. 지금 생각을 더듬어 보자면 요즘 독하게 이슈가 되고있는 청소년 성폭행이 내용이었던 것 같아. 생각해보면 끔찍했던 이야기지. 그래서 내가 더욱 충격받았기도 했고.

               글 전개 방식도 좋았지. 그 때 내 입장으로는 그냥 좋기만 했어. 그 작가에 대한 무한신뢰에다가 무한기대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었기에 재미없어도 무의식적으로 '재밌다'하고 생각은 했어. 그렇다고 악의가 재미없었다는 건 아냐. 문제는 그 다음 작품이었지. 그 다음 작품이 '동급생'이었는데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충격적이었어. 내가 생각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져버렸기 때문이야. 나는 그가 엄청난 반전의 소유자라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추리소설은 그가 최고라고 생각해왔지. 물론 소문만 듣고 생각한 거였어. 실제로 읽은 책은 한 권 뿐이었는 데다가, 그게 그럭저럭 나를 만족시켜주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반전이 영 별 볼일 없더라구. 허무하기까지 했어. 마치 영화 '언노운'을 보았을 때 처럼. 영화 '언노운'알지? 완전 영화 개봉했을 때 [스포일러를 말하지 말라]하면서 정말, 가히 엄청나다 할 정도로 띄워주었잖아. 나는 거기에 또 반해서 영화를 굳이 찾아보았어. 책을 사려다 사려다 결국 못사서 영화를 봤지. 그런데 결과는? 충격적이었어. 나 오늘 충격적이라는 말을 되게 많이 쓰는데 심적으로 충격이 올 수 밖에 없었지. "이게 반전이야??! 이게 그 띄워주던 그 엄청나고 금밀하다는 그 반전이라고?!"하면서 패닉에 빠질 수 밖에 없었어. 그 정도로 허무하면서도 끔찍한 반전이었지. 또 다른 영화에 비유한다면 반전은 아닐지라도 '미스트'라는 영화의 결말을 보는 것과 비슷했어. 너도 봤었지? 충격적이었잖아. 바로 게이고의 '동급생'도 나에겐 그런 것이었어. 물론 그보다 임팩트는 적었지만. 내가 반전과 결말을 기다리면서 새벽 4시까지 읽어내려갔는데 결말이 허무했으니 정말 때려치워버리고 싶었지. 그렇게 끔찍했다는 건 아냐. 작가 특유의 흡입력은 살아 흘렀으니까 괜찮았지. 내가 그에게 기대했던 기대치가 너무 높았나봐. 게다가 그 때부터 점점 나는 눈을 넓히고 우타노 쇼고라는 작가까지 알게되었어. 우타노 쇼고가 보여주는 반전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나의 이상형이었어. 그의 작품을 읽고는 정말 울었어. 학교 자습시간에 보고 있는데 울어버렸어. 반갑고, 그런 작품을 써준데에 감사했찌. 그 때부터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 책장 구석진 곳으로 숨어들었고.

 

 

 

 

               그렇게 히가시노 게이고를 멀리하다가 문득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작품을 내가 전부터 간과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마침 또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은 그의 것들 중에서도 유독 지루하기로 소문난 것들이었어. 동급생은 언급조차도 되지 않는 작품이었지. 즉 나는 작가의 재미없는 작품만 읽고 그 작가를 평가한 거였어. 최고의 작품이라는 '용의자 x의 헌신'은 읽어보지도 않고 말야. 결국 한 번 읽어보고 결정하자 해서 며칠 전에 중고로 한 권 사들였어. 막상 사고보니까 또 흥분되고 긴장되더라구. 내가 책을 사들이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거리기 시작할 때부터 추리소설이라하면 그 작품이 빠지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까. 내가 그 때 왜 안 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하여튼 그 흥분을 못 이겨서 바로 첫 장을 폈어. 아마도 책 소개가 천재 수학자와 천재 물리학자였나 경찰이었을거야. 그래서 나는 천재 수학자가 살인을 저질렀구나 하고 생각했었어. 3년 동안이나 말이야. 그래서 첫단락을 읽고 있자니 약간 어색하더라구. 그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말야. 오랫동안 뿌리 박힌 나무를 제거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또, 한 가지 더 있었어. 천재 수학자와 천재 물리학자의 뜨겁고 치열한 대결이 시작한다! 하는 문구를 읽고 생각나는게 뭐있어? 나는 수학자가 엄청나게 비열하고 간사하고 나쁜 놈이구나하고 생각했어. 비열하고 간사한 건 상황에 맞지 않는 듯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게 뭔지 알거야, 아마. 그런데 책에서 그는 엄청나게 부드러웠지. 여기서 또 이질감을 느껴버렸어. 책 한 권을 읽는데 이랬던 적은 처음일거야. 역시 책은 딱 보자마자 읽어야지, 이렇게 3년 동안 살까 말까 고민하면 안돼. , 들려주라고?

 

 

 

 

 

 

 

 

 

               일단 이거부터 알아 둬. 이 책이 얼마나 유명하냐, 하니 영화로도 만들어졌어. 책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 성공한 건 거의 없어. 내가 아는 성공작은 해리포터나 도가니, 트와일라잇 정도 뿐이니. 아참 한국으로는 친정엄마도 좋았어. 각설하고 영화는 보진 않았는데 대충 사진을 보다보면 누가누군지는 알잖아? 이 영화는 참 캐스팅을 잘했더라고. 저 검은 티의 여배우는 내가 생각한 책의 주인공과 거의 흡사해. 뒤의 딸도. 아아, 미안해. 내가 소개를 안했구나. 이 책은 이 두여자가 문제야. 전체 스토리가 이 두여자로 인해 쓰여져. 앞의 여자는 야스코이고, 뒤의 여자는 야스코의 딸인 미사토야. 엄청 착하고 평범하게 생겼지? 그런데 이 두여자한테는 문제가 한 가지 있었어. 바로 도미가시 신지라는 야스코의 전 남편이지. 야스코는 현재 아는 분의 도시락가게에서 카운터로 일하고 있지만 전에는 호스트였어. 그것도 꽤 이뻐서 잘나가는 호스트였지. 도미가시는 그 시절에 만난 남자야. 처음에는 사업도 번창했었기에 돈을 잘 썼어. 미모도 훤칠해서 야스코는 아마 한 눈에 반했겠지. 첫눈에 반하지 않았더라도 서서히 그런 기류가 생겼을거야.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했고 미사토를 낳았을거야. 잘 기억이 안나네 미사토의 아빠가 도미가시였나? 아마 그럴거야. 그런데 사업이 망해버린거야. 도미가시는 그때부터 본성이 나왔지. 야스코의 돈을 뜯어다가 도박으로 다 날리고 폭력에 욕설까지, 여자에겐 해서는 안 될짓을 했지. 결국 야스코와 미사토는 도망다녔어. 그러다가 현재 사는 집까지 온거고. 편안하게, 이제는 도미가시의 레이더망에서 벗어났겠지 하고 맘 편히 살아가고 있을 때 도미가시가 다시 나타났어! 끈질기다, 참. 나는 이런 남자가 되지 않아야지. 어우, 이런 남자는 내가 봐도 주먹을 한 대 날리고 싶어. 한 여자의 인생을 그렇게나 망쳐놓고도 또 다시 망치려고 찾아오다니. 도미가시가 변명이라고 댄게 뭔지 알아? " 나 이제 변했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 " 그래놓고서는 제대로 된 직장도 아직 구하지 못한 상태였어. 야스코는 당연히 그를 받아줄 수 없었지. 그렇게 만나자마자 퇴짜를 놓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이쿠야, 이 놈이 집까지 찾아버렸네? 모녀는 궁지에 몰렸어. 아 참, 미안 아직까지는 아냐. 도미가시는 간접적으로 돈을 요구했어. 소파에 앉아서는 다시 합치자는 둥 이상한 소리만 지껄여댔지. 야스코가 십만엔을 꺼내자 그제서야 가려는 듯 일어났어. '나중에 또 올게'라는 무시무시한 한 마디를 남기고서는. 이 말을 듣고서는 못 참았나봐. 미사토는 꽃병을 들고 도미가시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어. 미사토는 야스코의 딸이라고 했지? 배드민턴을 하기 때문에 팔 힘이 좋아. 하지만 그 도발은 도미가시를 미치게 만들었어. 그는 결국에는 꾹꾹 눌러오던 본성을 드러낸거야. 미사토의 목을 졸랐지. (읽은 지 며칠 되서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목을 졸랐다거나 계속 때렸을거야) 그 모습을 보는 야스코는 또 어떻겠니. 도미가시 못지 않게, 아니 더욱 심하게 이성을 잃었을거야. 염치가 없고 뻔뻔한 것도 싫지만 자신의 딸을 죽이려고 하는 모습은 정말 인간말종 이하였지. 결국 그녀는 살인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선택했어. 두 모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살인 말고는 그들이 그에게서 벗어날 방도는 없었으니까. 아아, 교살이었어. 요즘 전기장판 많이 깔잖아? 그 연결선, 그걸 코드라고 하던가? 그걸로 목을 졸랐지. 일본에서는 고타츠. 

 

 

 

 

               자, 이제 전체 스토리를 12장으로 따진다면 1장 온거야. 너무하지? 그냥 소설 한 편 써도 되겠어. 이건 사건의 발단일 뿐이야. 도미가시의 죽음, 야스코 모녀의 살인. 이것으로 소설 한편의 끝이 정해져. 문제는 이 살인에 천재 수학자천재 물리학자가 어디에서 나타나냐 이건데... 내가 또 이야기하는 걸 빼먹었구나. 이러다가 오늘 우리 밤 새야겠어. 할 이야기는 너무 많이 남았고, 이거만 하고 있을 수는 없고. 할 수 없지. 밤 새는 수 밖에.

 

 

 

 

               일단은 천재 수학자 이야기를 먼저 하자고. 천재 물리학자는 어느샌가 나와있기 때문에 딱히 집중해서 안 읽어도 이런 부분은 금방금방 캐치하고 넘어갈 수 있어. 그럼 나는 지금부터는 훅훅 넘어가야겠어. 솔직히 1/12 정도의 내용을 설명하는데 내 목 아프게 오래 떠드는 건 듣는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어. 지금 시간이 12시 반인데 너 안 피곤해? 나는 지금 졸려 죽을 거 같애. 그래도 너가 추리를 아끼고 좋아한다고 하니까 내 목을 쥐어 감싸면서까지 이야기를 멈출 수 가 없겠어. 그래, 시작한김에 끝을 보자. 

 

 

 

 

 

 

 

 

 

               세련되고 젊어 보이는 남자, 즉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남자가 천재 물리학자고 그 앞의 후덕해보이는 사람이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야. 책에서는 살찌고 못생기게 표현되었는데 여기서는 그래도 일본에서는 평타 이상에 속하는 동네 아저씨처럼 나와서 더 보기 편했어. 영화에서까지 뚱뚱하고 기름기 좔좔 흐르게 나오면 이시가미가 너무 불쌍할테니까. 천재 물리학자의 이름은 유가와야. 일단 이름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이시가미가 야스코 모녀의 사건에 관여하게 된 사유를 이야기해줄게. 이시가미는 야스코를 좋아해. 이게 이유야. 아직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 자세히 설명해줄게. 또 다시 말하자면 이시가미는 야스코를 좋아해. 그래서 매일 출근길에 그녀가 일하는 도시락 가게에 들려 도시락을 사가지. 야스코는 눈치채지 못하지만, 도시락 가게의 사장과 그 부인은 눈치를 챈 거 같아. 어느날은 그 손님이 다녀간 직후에 야스코에게 " 그 손님이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 "라고 말해줄 정도였으니 그 눈빛이 짐작이 가겠지? 그렇게 그는 야스코를 좋아하고 신경써왔지. 아마 그녀의 집에서 들리는 소리들도 꽤나 신경쓰고 있었겠지. 그랬으니 야스코 모녀가 도미가시를 죽인 직후에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을 테니. 야스코가 얼렁뚱땅 둘러대자 (그때는 벌써 야스코 모녀가 도미가시의 시체를 고타츠로 말아놓은 상태였어) 일단은 물러갔지만 다시 찾아와서는 무작정 쳐들어 갔지, 그녀의 집으로. 그리곤 직접 목격한 것처럼 살인현장을 하나하나 말하더니 해결책을 생각하기 시작했어. 야스코는 따를 수 밖에 없었지. 자신의 딸이 자수를 엄청나게 반대했기 때문이야. 미사토도 도미가시가 목 졸릴 때 그의 손을 잡고 있었기에, 엄마가 자수를 하면 나도 공범으로 철창행을 가게 된다고 말하며 엄마를 설득했어. 물론 자기보다는 엄마가 걱정됐었겠지. 나중에 천재 물리학자인 유가와를 통해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시가미의 어수룩한 외모 뒤에는 백년, 아니 천년에 한 번 나올만한 두뇌가 회전하고 있는 중이었어. 뭐, 그랬으니 천재 수학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건 당연하겠지. 그 명석한 두뇌로 그는 철저히 야스코를 위한 알리바이, 트릭을 준비했어. 가히 엄청나다고도 말할 수 있지. 어라? 잠깐만,

 

 

 

 

               미안해. 전화가 좀 왔어. 벌써 박완서 작가님의 1주기가 며칠 남지 않았다네. 바로 어제가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꼭 1년이 되던 날이었는데. 마침 또 오디오에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혜진이 부른 '술이야'가 흐른다. 괜히 슬프네. 이 곡은 듣기만 해도 슬픈데 나한테는 한 사건이 연결된 곡이라서 더 마음에 와닿아. 가사를 곱씹어보다보면 어느샌가 가슴이 먹먹하지. 아, 됐고. 다시 책 이야기 들어가자.

 

 

 

 

               곧 야스코에게는 경찰들의 의심공세가 쏟아지기 시작해. 사건이 일어난 밤의 알리바이와 그 증거를 캐내거나 그녀의 얼굴도 유심히 살폈지.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조마조마했어. 야스코가 자칫 잘못해서 당황하는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이시가미가 어떻게 훈련시켰는지 그녀는 무척 담담했어. 책으로 읽기에도 그녀의 표정이 그려지더라고. 도미가시라는 전 남편이야기에 불쾌해하는 그 표정이. 나는 또 걱정했어. 그래도 전 남편인데 이렇게 무덤덤해도 될까. 다행스럽게도 경찰은 그 점을 당연하다는 듯이 넘어갔어. 그것도 '' 남편이기 때문이겠지. 여하튼 이시가미는 참 많은 걸 시켰나봐. 영화관에 라면집, 노래방까지. 야스코 모녀도 참 힘들었겠어. 아마 영화관에서는 영화의 주인공 턱수염 끝자락만 보다가 나왔을 수도 있고 노래방에서는 노래 반주만 세차게 틀어놓고 딸과 함께 앉아 기도를 했을거야.

 

 

 

 

               이시가미는 철저했어. 그것도 엄청나게 치밀했지. 영화의 반권의 은닉 장소까지도 하나하나 명령했어. 또 야스코 집의 고타츠와 자신의 것을 바꾸는가 하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공중전화로 야스코와 소통했지. 그렇게 해서 며칠동안 버티는 것이 성공했어. 그런데 갑자기 이시가미에게 불똥이 튀기 시작했어. 아무리 찾고 찾아도 알리바이가 맞질 않자 경찰들은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눈을 돌리기 시작한거야. 하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따로 있어. 바로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유가와는 이시가미와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어. 그리고 지금은 모교의 교수로 위치해있고 야스코를 담당하는 형사와는 절친한 친구사이지. 아아, 맞다. 야스코 담당 형사도 그 둘과 같은 대학교 출신이야. 담당 형사도 야스코네 집에 탐문 수사를 갔을 때 동기라는 사실을 알기는 했지만 인문계였던 자신은 자연계를 경멸하기에 말을 아꼈었지. 자, 그러면 어떻게 유가와가 이시가미를 의심하기 시작했느냐고 하면 나는 유가와의 빠른 관찰력때문이라고 해야겠어. 그는 유일한 이시가미의 친구야. 그래서 이시가미에 대해 조금은 알고있었지. 소위 말하는 베스트 프렌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가 외모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이시가미가 야스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챘어. 평소 다른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쓰지 않던 그가 야스코의 가게에 가게되자 자신의 스타일을 걱정하는 듯한 말을 내뱉게되지. 일반 사람같았으면 그냥 넘어갔을테지만 유가와는 아니었어. 이상하다는 사실을 바로 캐치하고는 그에대한 의심을 품기시작했어. 그렇게 극 전체의 흐름이 싹 바뀌게 돼.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에서도 주인공의 사소한 의심으로 내용이 달라지게 된 것처럼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작품도 그와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되지.

 

 

 

 

 

               헌신(獻身)     몸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함.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잘못 그림을 그렸던 일이라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너무도 정교해서 마치 수학 공식과도 같다 생각했던 그 그림이 단 한 방울의 먹물로 망가졌을 때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먹물을 감싸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치 못했다. 그 먹물이 언제 그림에 튈지까지 계산하지 못한 나의 착오였다. 일이 틀어진 것은 전부 나의 착오였다. 먹물은 나의 손놀림에 의해서 그림에 튄 것이다.

 

 

 

 

 

 

              그의 작품이 늘 그렇듯 흡입력은 어느 작가의 것보다 뛰어나. 게다가 그의 작품에 비해서 반전도 그럭저럭 읽어줄만해. 나는 사실 감탄하긴했어. 하지만 아직 그에 대한 신뢰가 회복된 건 아냐. 다작(多作)을 하는 것도, 우리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것도 좋아. 작품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아니야. 나는 그저 그의 작품을 읽고 감탄할 만한 장면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소소한 의견을 품고있을 뿐이지. 그래, 그런거. 그래도 이것이 히가시노 게이고만의 매력인걸 어쩌겠어. 무작정 그를 좋아하고 읽는 수밖에.

 

 

 

 

               미안했어. 내가 너무 횡설수설 이야기를 해서. 듣고 나서 더 책에 흥미가 떨어졌지? 누군가가 그러더라. 리뷰는 읽는자로 하여금 책을 읽지 않도록 만들어야한다고. 그렇게 만든거같아서 좋지만 영 찝찝하다. 그래, 이제 헤어지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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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1-27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가... 누구였더라? - 이 글 읽고 문득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내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헷갈려요. 아, 맞아. 신간서평단 도서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벽 거리에서>가 있었구나. 그 책은 개인적으로 별로였는데, 소이진님이 읽으신 이 책은 그래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싶은 책이네요. 저는 이상한 게, 호평이든 악평이든 리뷰를 읽으면 책을 읽지 않고 싶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답니다. 불구경하는 그런 심리일까요? 'ㅁ'

이진 2012-01-27 22:28   좋아요 0 | URL
헤헤 히가시노 게이고는 꽤 유명할 줄 알았는데 수다쟁이님께서 모르신다니 안타까운걸요. 저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은 거의 다 별로에요. 엄청 흥미롭게 읽은 책은 없지요. 이제껏 4권정도를 읽었는데 그 중에서는 이 책이 그나마 나은 것 같아요. 0

버벌 2012-01-27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는 백야행 말고는 마음에 든 게 없었어요. 그 이름을 보고 저도 여러 책을 샀지만. 움 그의 꽤 많은 책을 사서 읽었지만 늘 실망을 해요. ㅎㅎ 늘 실망을 하고 늘 기대를 하고 늘 구입을 하고. 최근엔 뜸해졌지만. (제가 장르문학을 좋아해요)
미미여사와 게이고. 양대산맥 ㅎㅎㅎㅎ 저는 미미여사를 너무 좋아해요. 그녀의 문체가 좋거든요. 그래서 히가시노의 책을 구입을 않으면서도 미미여사는 읽지 않아도 의무적으로 구입을 해요. 그런 작가가 몇분 있어요 ㅎㅎ

이진 2012-01-27 23:12   좋아요 0 | URL
오우, 비벌님 저와 무척이나 비슷한 독서패턴을 지니신 분이로군요. 말하기 전에 일단 들려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저도 장르문학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일단 사들이기 시작한 작가는 읽지 않고, 재미가 없더라도 계속 사요. 실망하고 또 기대하고, 실망하고 또 기대하고.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영 재미가 없는 작가이긴 한가봐요. 제 친구중에도 히가시노 게이고를 참 좋아하다가 데뷔작을 읽고는 영영 떠나버린 친구도 있으니까요. 미미여사는 무척 좋아요. 그저 여성 작가를 편애하는 제 마음일수도 있지만 그냥 좋아요 미미여사는. 읽지 않아도 의무적으로 구입하는 것도 똑같고 말이지요 ㅋㅋㅋ

마녀고양이 2012-01-28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래 헤어지자 안녕 에서 엄청 웃어버린.
너무 이쁘잖아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정말 다양해요. 작품마다 느낌이 다르다니까요.
소이진님, 나중에 흑소소설, 괴소소설, 독소소설도 한번 읽어보셔요...
전 굉장히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예요. 좀 독특하고 기괴하고 뒤통수도 치고. 단편이예요.

X의 헌신도 좋죠..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은 솔직하게, 시간 땜빵으로 엄청 좋아요.
그치 않나요? 전 그의 작품을 거의 30권 이상 읽었지 싶은데. 이사카 고타로도 좋아해요.
물론 온다 리쿠의 열혈 팬이지만, 소이진님은 좋아하지 않으실거 같아서. ^^

이진 2012-01-29 00:35   좋아요 0 | URL
제가썼지만 너무 오글거리는 멘트어요.
흑소, 괴소, 독소는 눈 여겨보던 것들이었는데 당췌 손이 가질않는걸요.
한정된 돈에서 최고의 작품들만 쏙쏙뽑아내야하다보니.. 어쩔수없어요
오오, 시간땜빵용이라는 말이 딱인 것 같아요.
온다리쿠는 사람들 말로는 한 번빠지면 헤어나올수없다며... ㅋㅋ아직 저는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지만요.

노이에자이트 2012-01-29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추리작가일 겁니다.'백야행'은 우리나라에서 영화로 만들었죠.손예진 한석규가 주연인데 이민정이 무술 유단자로 나오더군요.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중 <방황하는 칼날>을 권합니다.흉학한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이 단지 청소년이란 이유로 성인보다 관대한 처벌을 받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하는 아주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입니다.히가시노의 팬들도 걸작이라고 꼽는 소설이라네요.


이진 2012-01-29 21:2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처음에는 히가시노 게이고밖에 몰랐답니다. 재미는 알아주나봐요. 친구들이 "이진아, 이 책읽어봤어? 진짜 재밌더라" 보여주는 책은 전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어요.

<방황하는 칼날>이라. 소년법이라면 일본에서 유명한 작품들에서는 조금씩 섞여있죠. 고백이라는 작품도 소년법에대해 아주 철저하게 다루는터라 정말 심오하게 잘 읽었습니다. 허허, 걸작이라니 한 번 꼭 읽어봐야겠군요. 마침 돈도 쌓였는데 ㅎㅎ

재는재로 2012-01-29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의 전작들 가가형사나갈릴레오 백야행등 초기발매작들은 괜찮은데
요즘 발매되는 백은의 잭이나 새벽거리는 좀 히가시노는 초기작이 더좋다고 생각되네요
흑소,괴소,독소중 그나마 괴소가 낳던데 동화를 재해석한 신데레라를 성공하려고 노력해
성공하는 단순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기회를 만드는 자로 해석한게

이진 2012-01-31 18:49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이에요. 요즘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이 알게모르게 발매가 되더라구요. 하도 많이 쏟아지다보니 사람들이 읽는 맛도 점점 엹어지는 것 같고 관심도 점점 떨어지는 것 같구요.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히가시노게이고의 위치가 약간 내려온 것 같기도 하지 말이어요.

아이리시스 2012-01-3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봤어요. 유명하잖아요. 완성도도 높았고. 영화도 보고팠는데, 소이진님 이 책에 이렇게 소중한 리뷰를^^ 귀여워요. 잘 봤어요^^

이진 2012-01-31 18:50   좋아요 0 | URL
헤헤, 이 책 정말 유명하죠. 저는 그 유명세를 타고 읽었는데 음, 느낌은 반반이어요. 딱히 소중해 보이지는 않는 횡설수설 리뷰이긴 하지만 감사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