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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중간까지 읽었다.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밑동터진 쌀가마니 쌀들처럼 줄줄 흘러나온다. 

그때를 생각한다. 유난이 억세고 지기 싫어했던 이층집 셋째 딸 아이와 그의 막내 남동생. 호호 게임팩을 불면서 종일 슈퍼마리오를 해도 좀처럼 제지하지 않으셨던 그 아이들의 엄마. 자기들끼리는 양보하지 않는 게임턴을 가끔 내게 넘겨줄 때면 게임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게임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거의 매일 놀러갔다. 몇판째의 6-1을 깰 때 쯤이면 정작 그집 아이들은 관심도 없는 공부방 책들을 꺼내 읽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어린이 과학만화 같은 것들. 종래에는 게임보이말고 책들이 갖고 싶었다. 하지만 책은 커녕 준비물 살 돈을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집은 곤궁했다.

그집의 억센 셋째 딸은 동갑내기인 내 동생과 종종 다투었는 데, 얼굴에 손톱자국이라도 나서 올라치면 엄마는 “지는 게 이기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동생이 스물여덟살쯤에 울면서 그랬다. 엄마가 자꾸 지는게 이기는 거라고 해서, 자기 자꾸 지기만 하고 이겨본 적이 없다고. 매번 먼저 사과하고 참고만 살았다고. 

그리고 나는 또 그 때의 엄마가 생각난다. 새학기에 받은 열몇권의 교과서를 낑낑대며 들고 왔고, 엄마가 남산만큼 커다랗게 부른 배를 하고 분홍색 임부복을 입고 학교가 파한 나를 마중나와서, 무거운 새 책들을 들어주었다. 다른 애들은 다 부모님이 데리러 왔는데, 난 집까지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가지? 서럽지 않으려고 씩씩한척 하면서도 몇걸음에 한번씩 쉬면서 하염없어 하는데 엄마가 마법처럼 학교에서 멀지 않은 백화점 앞에 짜잔 하고 나타나줘서, 행복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2학년 때의 나는 정말 외로웠고,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아들을 꼭 낳아야 하는 엄마는 몇년째 항상 배가 불러있었다. 난 동생이 싫다고 그만 낳으면 안되냐고 물어봤었단다. 

3학년 때 부터는 제대로 언니 노릇이 시작되었다. 동생을 학교 안에 있는 유치원에 통학시키는 것까지 내몫이 되었다. 동생이 귀찮고 싫고 미웠다. 특별히 예뻐서 더 그랬다. 청소하러온 고학년 선배들에게 동생이 둘러싸여 예쁘다고 구경당(?)하고 있던 기억이 난다. 데리러온 나한테 언니냐고 물어보았다. 동생이 예쁜 언니는 언제나 곤란하다. 기대치가 있으므로 더 못생기게 느껴진달까. 난 못생겨서 부끄러웠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서 생각하느라 잠마저 달아나더라.

좋아하는 걸 해보지는 않고 구경만 하는 것.
원하는 것을 말하기도 전에 딸려오는 묘한 죄책감.
서럽지않기 위해서 더 씩씩해지기.
초등학교 저학년 때 만들어진 성격은 많은 부분 그대로이다.
외로울 때마다 눈이 시리도록 구경했던 하늘과
외로운데도 귀찮았던 동생들이 생각났다.
유치원이 끝나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나보다 더 방치된 어린 동생의 녹색 유치원복까지 선명하게 기억났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그저 귀찮아 하는 나에게 영문 모를 사과를 하며 같이 가자고 하는 두 걸음 뒤의 동생과 어쩐지 대답하기 싫던 어린 내가.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왜 그때 더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걸까.

열살이 안된 아이에게 사랑과 돌봄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또 생각한다. 나에게 사랑과 돌봄이 충분했다면, 동생이 덜 미웠을 거라고.
그때의 나는 엄마를 너무 사랑했었다. 어쩌면 엄마 자신 보다 더.

어떤 부분에서 세상은 더 나빠져왔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아이들이 주희와 윤희처럼 지금도 어디선가 “가슴이 뻐근할 만큼 고통스러운 즐거움(p.98)”으로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어른이 된다.
가슴 아프게 추억할 수 있는.
미안해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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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8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28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28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28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점심으로 육개장 사발면을 먹고 있다. 한동안 끊었던 농심의 msg가 혀끝에 위장에 착착 감긴다.그제도 저녁에 육개장 사발면을 먹었다. 삼십년째 이보다 더 맛있는 라면은 없는 듯. 부족한 듯한 양이 이 완벽한 맛의 원인인걸까.
_
토요일 밤에 <호랑이보다무서운겨울손님>을 보았고 그 날 이후로 벌써 두개째 사발면을 먹고 있다. 이 고구마 처럼 답답한 영화에서 주인공은 사발면 하나 제대로 먹지를 못한다. (그래서 내가 다 먹어주고 있게 된거야 암..) 볼 때는 답답하기만 했는 데, 보고 나서는 라면처럼 끝맛이 짭조롬하고 여운이 남았다.
_
도망치고만 싶은 직면할 용기가 없는 호랑이 같은 문제들 보다 더 괴기스럽고 무서운 것은 밀려있는 일상이다.
어쩌면 일상에서 일상적으로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문제들이 착착 쌓여 호랑이 급의 공포로 다가오는 것일지도.
_
여하튼 나는 오늘 내로 사십오장의 누끼를 따야한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일상의 작업일정이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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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06-27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육개장 사발면을 최고로 좋아했는데요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보면서 신라면 컵라면으로 갈아탔다가 최근에는 어쩌다 알게 된 오뚜기 참깨라면 컵라면에 푹 빠져서 한동안 그것만 먹고 있는 중입니다.

공쟝쟝 2018-06-27 20:14   좋아요 1 | URL
역시 컵라면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네요 ㅜㅜㅜㅜㅜㅜㅜ 오뚜기 참깨라면... 맛만들어도 맛있을 것 같아요...

북깨비 2018-06-28 17:22   좋아요 1 | URL
얼큰한 컵라면 국물맛에다가 참기름의 고소함을 더 한 맛이에요. 그리고 면이 좀 더 쫀쫀하다고 해야하나. 꼭 컵라면으로 드셔보시길 추천합니다. 봉지라면은 안먹어봐서 맛 보장 못함. ㅎㅎ 아. 스프봉지가 3개에요 (스프, 계란, 참기름). 스프봉지 2갠줄 알고 나머지 하나 넣은 채로 끓는 물 붓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ㅎㅎ 참기름 봉지는 마지막에. 조리법 잘 읽어보시고 맛있게 드세용.

공쟝쟝 2018-07-01 12: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내일 마트를 갑니다 !! ㅋㅋ

서곡 2022-07-01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은근 재미있죠 ㅎ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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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애 페미니즘 책!!!!!너무 좋아하는 책은 너무 좋아서 독후감을 잘 못쓰겠다. 진심 이거 읽고 인생이 바뀜.. 두 번 읽었는데 세번째 읽고도 쓸 수 없겠지..? 그냥.. 너무 좋다.. 좋은 거 말고 설명이 안된다. 동생꺼 빌려읽고, 밑줄을 다그어서 책이 노래졌다. (안돌려주고 있음)개정판으로 예쁜거 나오면 또 사야지.
이 책을 읽고 나는 새벽을 사랑하게 (정확히는 사랑해도 된다고 안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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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8-06-16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옹♡그렇게 말씀하시니 무척이나 읽고싶어지네용
 
누구의 인정도 아닌 -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
이인수.이무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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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이인수&이무석 부자의 인정중독에 관한 심리 처방전.
원인과 진단은 잘 알겠는데 해결은 책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시 실전의 문제랄까. 그래도 책에서 나온 감정일기는 좀 써봐야겠다. 종종 자기분석을 하긴 하지만은.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체크리스트를 체크해보니 여전히 중증 인정중독을 앓고 있었다. 슬픔..그래도 많이나아졌어. 나님아 잘하고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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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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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트인다기보다는, 여성들이 얼마나 공기처럼 타인을 배려하고자 애써왔는지를 -감정노동, 돌봄노동- 뒤집어보는 책. 하나하나 너무너무 디테일하게 열심히 설명하는......
이 책이면..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배려하기위해 듣지않는 이들에게 설명해왔는지, 그게 얼마나 큰 노동이었는지 깨닫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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