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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평점 :
어떤 스타일(!) 이라는 것을 구축한 책이라고 놓고보면 탁월한 구석이 있었다. 시대적 아쉬움이 있어도 볼만한 건 볼만한 거고, 이를테면 영화 <베테랑>은 지금봐도 재밌으니까. 우리는 즈그들끼리 다해먹는 2천년대 중반~2010년대 중반 한국영화를 알탕영화라 부른다. 그리고 소설 <빅슬립>은 알탕물의 시조새급이 되시는 것 같다.
고독한 사립탐정 33세(나이가 귀엽다) 필립 말로. 거친 세상의 자기만의 원칙이 있는 사내. 는 담배도 많이 피우고 근무 중에 위스키도 많이 마셔서 알콜 쩐내 날 것 같은 데, 히스테리에 시달리는 섹쉬한 그녀들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으려하지. 하지만 원칙있는 남자답게 잦은 유혹들을 물리치며ㅋㅋㅋ 의뢰인 스턴우드 장군(한국 영화였다면 그는 박근형 아니면 이경영이다)의 사건을 해결하는 데….
이 책의 해설에서 하루키가 극찬한 문장의 아름다움은 번역본이라 내가 느낄 수가 없고 소설이 주는 분위기 혹은 인물이 주는 호감이라도 있어야 했을텐데… 분위기는 뭐(그렇지만 언제고 여자한테 위로받을 수 있는 도시 남자의 고독한 분위기 따위 내가 알게 뭔가) 그렇다치고 주인공이 느끼해. 흑. 흑. 나도 모르게 계속 이병헌을 상상하며 읽었다. 물론 진짜 친절하게 읽으면 필립말로는 황시목(조승우)과 인데, 황검사야 설정상 감정이라도 없지… 이 남자는. 응, 모르겠어. 그 시절의 윤리가 작동했다고 생각해도 하나도 안멋있어. 사실 소설 중반에 지금으로치면 주인공과 경찰이 불법 촬영물 브로커의 범죄를 덮어주는 셈이었기 때문에 읽지말까 하다가 잠자코 읽음. 욕하려고. 하드 보일드. 하드 보일드. 이런게 하드 보일드란 말이지.
요즘에 챙겨보는 넷플릭스 드라마중 <구경이>가 있는 데, 이영애가 황정민 역할이면 김해숙이 이경영 역할이라고. 성역할만 바꿔치기 했는 데 초 맛집되었다고 극찬하는 걸 누가 공유해줘서 읽고 무릎 탁쳤다. 이 여자들이 다해먹는 탐정 드라마는 싸패범인이 불법촬영물 제작자랑 성매수범 다 죽여버린다. 세상이 좋아져서 내가 이런 드라마도 보는 데, 그리하여 포르노 사진 따위 원본 필름만 제거하면 되던 순진한(?)시대의 쿨내 진동 사립탐정 필립 말로에게 이입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진짜 이게 원본이구나 하고 읽었다. 말로 나오는 다른 거 한 권 정도는 더 볼 수 있는 아량이 남았다. 아, 나는 관대하기도 하지. 아무튼, 맛 보았네. 하드 보일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