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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ㅣ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엄마가 엄마가 보고 싶다면서 울었다. 어찌나 섧게 울던지 엄마가 녹아서 없어질 것 같았다. 그때 내가 엄마를 달랬던가, 그냥 지켜만 봤던가.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기억들을 떠올리면 그걸 하나하나 손가락에 꼽으라면 일곱 개쯤은 엄마가 우는 장면이다. 슬픈 것은 엄마였을 텐데, 정작 나 자신은 슬프지 않았을 텐데, 슬픈 엄마를 바라보는 슬픔은 내가 겪는 슬픔보다 강렬했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했는지, 엄마는 알까. 난 아마 다시는 그런 방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 나의 세계가 작았기에 가능했을 사랑 혹은 나 자신보다 컸던 것 같은 사랑.
“(81) 엄마가 하루 종일 보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저를 불렀는데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목안에 덩어리 같은 게 걸린 것 같았어요. 그런 일이 얼마나 오래 계속됐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가끔은 화장실에 가서 울기도 했어요.”
소설은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던 무렵, 뉴욕의 병실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인 ‘나(루시 바턴)’은 아직 어린 두 딸이 있는 엄마로 맹장 수술로 삼 주째 입원해 있는 상태이다. 오랜 기간 만날 수 없었던 주인공의 엄마가 멀리서 비행기를 타고 병문안에 와서 닷새 동안 딸 곁에 머문다. 썩 다정다감하거나 친하지 않은 모녀 관계였기에 입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했던 ‘서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들을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와중에 주고 받는다. 작은 괄호로 묶은 이유는 이렇게 밖에 표현 못하는 내 조악한 어휘력을 변명하고 싶어서다.
말로 꺼내 놓는 것이 곤란한, 좋기만 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서로를 애틋하게 아끼는 마음을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을 찾고 싶다. 아니다. 그런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 소설 전체가 그 마음에 대한 해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형식을 빌리지 않고서는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어떤 애틋한 마음—‘나’와 엄마 사이의 마음—은 대화 안에서 표현되지 않는다. 말과 말의 사이에, 이야기와 이야기의 사이에, 딸이 삼키는 말과 엄마가 꺼내놓지 못하는 언어 사이에—이것은 그러나 결국 소설이니까— 글과 글의 사이에, 어떤 마음이 작동하고 있다. 잘 보이지 않고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채로, 그리하여 되려 선명한 존재감을 가지지만 정작 형태는 어렴풋한, 표현되지 않는 그런 마음이.
“(68) 하지만 결국 내가 원한 건 다른 것이었다. 내가 원한 건 엄마가 내 삶에 대해 물어봐주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바보같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 나는 불쑥 “엄마, 내가 단편 두 편을 발표했어요”하고 말해버렸다. 엄마는 마치 내가 발가락이 더 생겼다고 말한 것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흘깃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별것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그냥 작은 잡지에 실렸어요.” 그래도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내가 말했다. “베카가 밤새 잠을 안 자요. 엄마한테 물려받았나 봐요. 베카도 쪽잠을 잘지 모르겠네요.” 엄마는 계속 창밖만 내다보았다.”
보통의 사람이 가장 어리광 부리고 싶어지는 순간은 몸이 아플 때이지 않을까. 북적이는 많은 식구들 사이에서 자라온 나 역시 그랬다. 자라며 어쩌다 한 번 앓게 되는 날 “엄마.. 나 아파…”라고 말할 때, 엄마가 이마 위에 손을 얹으며 걱정의 말을 건넬 때, 열에 달뜬 채 혹은 비몽사몽 와중에, 평소라면 없었을 엄마 손길을 느낄 때, 바쁜 엄마의 신경을 앗아가는 것이 못내 미안하면서도, 그 관심이 좋아서 아프다는 핑계로 조금 더 어리광을 부렸다. 아픈 건 싫지만 엄마의 걱정은 좋았다. 엄마를 독차지하는 느낌. 작가는 그런 마음까지 염두에 두고 소설을 설계한 것일까.
“(13) 엄마가 이곳에 와서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애칭으로 나를 부르자 내 몸이 따뜻해지면서 액체로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가 느끼는 모든 긴장감이 예전에는 고체였는데 이제는 아닌 것처럼. 대체로 나는 한밤중에 깨어 자다 깨다를 반복하거나, 유리창 밖 도시 불빛을 바라보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뜨니 엄마가 어제 앉아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표현되지 않은 마음, 혹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부러 표현하지 않는 방식을 취한 어마어마하게 똑똑한 소설이다. 각각 다른 (어쩌면 같은) 이야기들이 마치 뒤섞인 카드처럼 배치되고, 나는 그 모든 잘려나간 이야기들을 이해하지 않으려 애쓰며 읽었다.
“(169)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쓰게 될 거예요. 이야기는 걱정할 게 없어요. 그건 오로지 하나니까요.”
타인의 불가해함에 대한 존중은 (지금의) 나에겐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은 거의 유일한 윤리가 되었다.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138)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이 소설의 구절만큼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59)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책이 좋았다. 나는 진실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작가를 좋아한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뉴햄프셔 주 작은 타운의 쇠락한 사과 과수원에서 자라 뉴햄프셔 주 시골 지역에 대한 글, 열심히 일하고 힘들게 살아가지만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자신의 책에서 조차 진정한 진실은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는 늘 뭔가에서 멀찍이 비켜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말할 수 없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그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가-아-끔 내 영혼 어딘가를 흔들어 놓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소설이 있다. 이 느낌은 소설에서만 가능한 체험이다. 너무 호들갑스러운 평 같아서 쓰기 싫었는 데, 상투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소설을 덮고서 마음이 일렁일렁했다. 작가가 다 쓰지 않은, 부러 감춰놓은, 아주 사적인 이야기. 나역시 글로 옮기지 않을 아주 개인적인 경험과 나만 알 수 있는 감정들. 내 안에 그런 것들이 있었다.어떤 사람에게는 뭐라는 거야? 이렇게 읽힐 소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난 좋았다. 정말 너무 좋았다. 음, 이 책을 이런 식으로 읽고 있는 나 자신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히 이해받은 느낌이 들었다. 소설로 이해받았다고 착각할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좋다. 이런 소설을 만날 수 있어서 좋고, 더는 사람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된 것이 좋다.나 역시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되풀이해 쓰고 있다는 생각이 종종든다. 아니, 다 쓰고 보면 언제나 하나의 이야기였더란다. 그렇더란다.
"곧 괜찮아 질거야." 엄마가 조금 전처럼 수줍지만 다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아무 꿈도 꾸지 않았거든."
- 😔 언제나 많은 꿈을 꾸고 꿈이야기를 자주해주는 울 엄마가 생각난 장면 - P13
지금은 내 인생도 완전히 달라졌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 😔 겨우겨우 그렇게 여기고 있었는 데 이 소설이 막 헤집어버렸다네. - P21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책이 내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도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겠다고! (하지만 그건 나만의 비밀이었다. 남편과 만나면서도 그 얘기를 바로 털어 놓지는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진지하게 여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지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이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혼자 남몰래—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는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건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 제 외로움도 덜어주셨어요. - P34
우리 다섯 식구가 정말로 건강하지 않은 가족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우리의 뿌리가 서로의 가슴을 얼마나 끈질기게 칭칭 감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 칭칭 . 칭칭칭.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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