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들은 웃겠지. 그러나 정작 본인은 웃을 수 없다.
나는 사회과학 서적’만’ 읽는 병을 한 10년 쯤 앓고 있었다... 도저히 문학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자기개발서는 싫어했지만 소설보단 차라리 자기개발서를 수월하게 읽던 시절이었다.
태백산맥, 천명관의 고래와 박민규의 소설 몇 편 빼고 스스로 찾아서 읽은 소설은 딱 한 권 이었다.
장강명의 표백. 이유는 -?!? 청춘들의 ‘자살’이 소재라서. 아, 이유 조차 사회과학스럽지 않은가.
절대적 독서량이 많지 않았지만, 시대를 풍미한 비문학은 대체로 다 읽었던 것같다.
88만원세대, 4천원 인생, 정의란 무엇인가,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 부터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까지.
간절히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이명박그네 시절이었으니까ㅡ라고 핑계대기 전에 지금에와 그 시기 내가 어떤 인간이었을까를 생각하면 ... 별로였다. 으으.
세계는 설명되어야 했고, 이해되어야 했고, 불합리와 부조리는 해결되어야 했다. 선명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혐오가 있었다. 그럼에도 낙관했다. 인간은 바뀌고 사회는 발전한다. 나쁜 놈들을 사회·정치적으로 고립시키면 우리들의 해방은 자연스레온다.
강하고 단단하고 분명한 사람이고 싶었다. 단순해서 뜨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았다.
2.
이상했다. 단단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수록, 기준이 높아질 수록 - 난 자꾸 눈물이 났다. 일종의 자기분열이었지 싶다.
“나는/그 사람은/우리는 ‘왜’ 그럴까?”
이유를 알 수 없으면 답답했다. 노력해도 이해되지 않으면 미웠다. 이해하기위해 너무 많이 노력했으니까.
노력해도 안되는 지점들이 생겨날 때면 머리가 혼란하고 마음이 아팠다. 아프기 싫어 마음의 어떤 부분을 딱딱하게 응고 시켰다. 딱딱해지는 편이 무너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때, 누군가 인간이란 불가해한 존재이며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때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언을 해줬다면 어땠을까.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발버둥치면서 너무 열심히 살았으니까. 원래 사람은 무언가가 너무 중요하면 남의 말은 잘 안듣는 것 같다. '조금은 힘빼고 살아~'류의 말들을 당장 배고프다고 한 숟갈이라도 떠먹으면 와장창 깨질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견고한 것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지지.
깨질 수는 없었으므로 작은 충격도 받고 싶어하지 않던 내가 생각난다. 우는 것도 심리적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퍼석퍼석. 이 악물고 눈물을 참던 시기가 지나갔다. 어느 순간 울지 않기 위해 더 강해지자!! 라는 다짐도 더 이상 못하겠더라. 눈물이 메말랐다고나 할까. 힘이 안났다. 눈물을 안참으니까되려 덜 울게 되었고, 난 못돼(?)졌다.
사회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공허하게 들렸고, ‘내가 대안이 되겠다’는 패기도 사라졌다. 구조 보다 인간 자체가 문제고,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문제고, 곁에 있는 그 사람이 문제이며, 결국에는 내가 문제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 비관하던 시점. 싸늘하게 냉소하던 나.
책을 더는 읽고 싶지 않았다. 이해하기를 멈추었다.
돌이켜보면 그 상태가 우울증 인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차오를 때보다 눈물이 메마른 시간들을 더 무채색으로 기억한다. 아니 사실 기억이 잘 안난다. 그때의 황폐한 나는 건너뛰기로 하자.
다행이도 부서지지 않았고.
읽기를 포함해서 많은 것을 그만두었다.
대부분의 것들을 버리고, 그만두고 난 뒤에야 무채색의 시간에서 나올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가 읽는 것이 그를 구성한다는 어떤 작가의 말은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서른. 다시 조금씩 읽기를 시작했다.
내안에서 무언가가 분명히 바뀌어 있었다. 계급과 정치공학, 선동의 언어로 주를 이루던 책들이 더는 당기지 않았다. 나 자신 또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성마른 존재에서, 흐물흐물하고 축축한 존재로.
3.지금의 나.
낙관은 사라졌고 관계는 아주 조금만 남겼다. 요즘은 예전보다는 눈물을 덜 흘리는 (그래도 절대적 눈물 양은 많음) 비관주의자가 되어, 세계를 대한다.
뜨겁진 않지만 따뜻해지려고 노력한다. 아직 온기가 부족하지만, 부족한 멋이 있다고 생각할 만큼 변했다. 실은 많은 게 변한 것 같은 데, 특히 독서분야가 그렇다.
정치, 경제, 역사, 사회와 관련된 책들을 덮고,심리학, 정신분석에서 페미니즘(여기까지도 비문학계열..쩝..)을 거쳐... 요즘 난 소설을 읽는다. 그리고 가/벼/운 에/세/이도 읽는다!!!!!!!!
비문학 ‘만’ 읽는 병에서 탈.출.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언젠간 '시'도 제대로 읽을 수 있겠지??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몽글몽글 해진다.
4.2018년.
한해 동안 지난 10년간 읽지 않았던 10년 치의 소설을 읽었다. (정확히는 읽을 수 있어졌다.)
분열을 매만질 수 있게 되었다.언제나 상황을 분석ㆍ평가하는 ‘병’이 조금 씩 낫게된 것 같다. ‘모르는 것을 몰라도 된다’ 를 받아들였다. 내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버거워하고 있다는 진실이 그 안에 있더라. 그걸 인정하기 싫어 했으니 소설을 읽지 못했던 거고.
소설은 보여주었다. 잘 짜여지지도 않은 그물(세계)에서 엉켜 펄떡이는 물고기(인간)들을. --사회과학 책들은 우리가 실험을 위해 샘플을 채취하듯(추상화), 정교하게 설계된 진실들의 반영인지도 몰랐다. 현실처럼 잘 꾸며놓은 바다 같은 수조 속 평균적 물고기들 이라고나 할까. 있는 관계들만으로도 너무 복잡했던 20대의 난, 인물을 따라가는 것보다 설명을 따라가는 독서가 덜 버거웠던 것일수도 있겠다-- 소설 속에서 현실에 있다면 상대하기 싫었을 인물을 만나고 읽음으로써 그들을 끝까지 견디고, “옮긴이의 말” 조차 “나는 그녀를 모른다”는 고백들을 보며, 노력해도 모른다면 ‘인정’해야 된다는 걸. 그것들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훼손되지 않는다는 걸 거듭 확인해온 느낌이다.
대체로 내가 올해 만난 문학은 소설이었고 특히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다. 사회과학 책 처럼 선명한 답과 방법은 없었지만, 재밌다/없다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생각꺼리를 안게 되었다.
쌓는 독서가 있고 허무는 독서가 있다고들 한다. 소설 읽기는 허무는 류의 독서였다. 책을 덮고 난 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적어두는 것이 재밌었다. 사회과학 서적만 읽던 시절에 비하면 나는 말랑말랑해졌다고 봐도 좋겠다. 그게 2018년 소설 읽기의 가장 큰 성과다.
사회과학 서적에 비해 소설은 싸다.소설이 싸다는 건 이 죽어가는 출판시장에서 그나마 팔린다는 거다. 팔린다는 것은 누군가는 여전히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고, 보이지 않게 소설을 읽는 독자가 많다는 뜻이겠지?
세상에 ‘문학’이 있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그들이 이 삭막하고 딱딱한 세상에서 어디 한 군데 쯤은 말랑말랑하게 지켜내고 있겠거니 추측하면 감동스러울 지경이다.
올해의 독서 경험을 발판 삼아 내년엔 좀 더 괜찮은 독자가, 덜 편협한 독서가가 되고 싶다.
*
노파심에 덧 붙이기, 이 문학에 대한 찬사는 사회과학에 대한 비아냥 처럼 보일지도.
오해 없길 바란다. 10년만에 문학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포인트. 나는 여전히 문학보다 사회과학을 많이 읽고 즐겨 읽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읽어나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