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단순했다. 붉은 천 서너 장과 나무통 몇개가 서 있고, 동양의 전통타악기 몇 가지가 구석에 놓여있다. 돗자리 위에서 우리가 소리를 하듯이 아프리카 사람들은 저런 양탄자 위에서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하던가.
배우들은 피부색깔도 국적도 제각각이고, 홀로 무대의 배경음을 연주하는 이는 일본인인듯 싶다.
극이 시작된다. 극도 뭐하나 극적인 부분 없이 조용이 흘러간다. 염주알 하나가 어쩌다가 폭탄이 되었는지를 참 조용하고 담담히 보여준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원래 매일 11번 기도를 했더랜다. 그러던 어느날 기도를 주관하는 스승이 늦어 우연히 한번 더 기도문을 외우게 되고 그때부턴 12번 기도를 외웠단다. 숫자를 중요시 하던 부족은 스승이 죽고 나자 11번이냐 12번이냐 논쟁에 휩싸여 서로 싸우고 죽이게 된다. 이 혼란을 프랑스 식민침략자들이 부추기면서 점점 더 확대된다.
이 조그만 부족의 11번이냐 12번이냐 문제는 어찌 해결되었을까? 이 부족의 나이든 스승은 소리높여 상대를 설득하지도, 자신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11번을 이야기 하는 지도자를 찾아가 기도를 한다. 그리고 스스로 11번 기도로 바꾸고, 자신의 가족들에게 쫓겨나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과 함께 피비린내나는 분쟁이 끝난다.
진리는 보름달이다. 우리 모두는 초승달이다. 진리는 누구의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저 한 단면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11번 기도를 한다. 그러나 12번이 틀린 것은 아니다.
화해는 서로의 존재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말고 다른 것도 있음을 조용히 보여줌으로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저 곁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시간을 갖는 것 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상대가 그른 것이 아니기에 이 연극의 스승은 상대의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실천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극의 전개는 경쾌하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천을 삼각형으로 접어 배모양을 만들어 배우를 감싸는 것만으로 배타고 먼길 떠나는 모습을 연출하거나, 8명의 배우가 이런저런 옷을 바꿔 입고 나무 기둥을 여기저기로 옮기는 것만으로 모든 장면과 배역을 소화해 낸다.
타악기와 사람의 웅얼거림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배경음악 역시 인상적이었다.
이 연극의 스승역을 맡은 배우는 팔레스타인 출신이라고 한다. 내 눈에야 거기서 서로 싸우는 사람들의 차이가 11번이냐 12번이냐의 차이만큼 사소해 보이고, 상대가 틀린 것을 아니라는 것도 아마도 서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땅과 돈과 싸움에 흥을 돋구는 거간꾼들이 뒤엉켜져서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 그저 아쉽다.
집에 돌아와서 무슈린의 아기를 뒤적인다. 남을 해한 적이 한번도 없는 데 어느날 모든 것을 잃은 사람, 아무 이유도 모르고 남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았던 사람. 국가, 종교 그 차이가 무엇이었든 그 두사람은 이제 늙고 외롭고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단 둘 뿐이다. 말한마디 나눌 수 없어도 존재만으로 서로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존재인 서로를 왜 우리는 갈라내며 미워하는가.
만원 지하철 내게 땀과 냄새를 풍기는 옆사람도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에게는 지금 이 순간 아니면 이후에라도 소중한 사람이 될 지 모르니 미워하지 말자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그리고, 말 하기보다 남이 가진 진리의 한조각을 더 많이 듣자고도.
소소한 차이가 커다란 학살이 되기도 하고, 나는 이렇게 커다란 작품들을 읽고 일상의 작은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