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 21세기 비판이론
스튜어트 제프리스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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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내가 가장 공감을 가지고 있는 소설 속의 인물은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의 김범우라는 인물이다. 태백산맥은 좌우익의 대립이 극렬했던 해방공간에서 중도적이고 민족적인 시각을 가진 김범우라는 인물의 시각을 통해 좌우익의 극단적인 사상과 그들의 만행을 바라보고 있다. 김범우는 미군 특수 요원이라는 높은 지위로 해방공간에 들어왔지만, 우익들의 지나친 만행과 학살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좌익들의 테러나 여순 반란 사건에도 동조하지 않는다. 그는 좌우익이 함께 사는 이상적인 한반도를 꿈꾼다. 그로 인해서 우익에게는 빨갱이로, 좌익에게는 반동분자로 몰린다.

 

나 역시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이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는 혼란의 시대에 청춘에 이어서 중년까지 보내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 차례씩 광풍이 보는 것 같다. 자신의 논리로 반대편을 짓밟고 자신들의 사상에 온갖 것을 억지로 끼어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한 방향으로만 폭주하는 기관차를 보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나는 그런 극단성과 획일성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지적한다. 그러다 보니 한 쪽 편의 사람들에게는 색깔이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고, 또 다란 편의 사람들에게는 보수적이란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있다. 가장 편하게 세상을 사는 방법은 각 시대의 지배 논리에 철저하게 순응하면 앞장서서 반대자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가장 힘들게 사는 것은 각 시대의 지배 논리 속에 담긴 광기와 폭력을 지적하며 그들이 폭주하며 세상과 사람을 학대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여기 태백산맥의 해방공간보다,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보다, 더 격렬하고 치열했던 시대를 날카로운 사상으로 돌파하려고 몸부림쳤던 사상가들이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프랑크푸랑크 학파의 사상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1920년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의 학 건물에 모여들었던 당대의 학자들을 부르는 말이다. 호크하이머,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마르쿠제, 하버마스, 호테트 등 주로 이어지는 이 사상가들은 2차 세계 대전 전후와 해방 후의 냉전시대, 그리고 흔히 신좌파 운동으로 불리는 1960년대의 극한 혼란을 지나, 신자본주의라고 불리는 현대의 극단적인 자본주의 시대까지 그들의 사상으로 세상의 광기와 폭력과 맞섰다. 주로 유대인들이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들이 주장한 것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시오니즘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이들은 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지배하는 획일적인 사상의 폭력에 맞서 그 폭력의 실체에 대한 냉철한 탐구를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모든 이들에게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지배세력에게서는 유대인이며 사회주의자들이란 비난을 받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변질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책 서론에서도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당대의 가장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카치의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틑 학파가 마르크스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며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분개했다. 철학자 게오그르 루카치는 아도르노와 프팡크푸르트 학파의 소위 '그랜드 호텔 어비스(Grand Hortel Abyss)'라는 곳에 머물렀다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루카치가 이름 붙이 이 아름다운 호텔은 '각 종 편의시설로 가득했지만 허무와 모순, 심연이라는 절벽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이 벼랑 끝에 선 호텔에 묵었던 손님 중에는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염세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가 있었다. 루카치는 소펜하우어의 철학이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을 사색한다고 지적했다. '매일 최상의 만찬을 즐기고 예술 감상을 하면서 틈틈이 심연을 성찰하는 일은 그저 섬세하고 안락한 여가생활을 극대화시켜 줄 뿐이다.'라고 루카치는 비아냥거렸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가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루카치는 주장했다. 쇼펜하우어처럼 벼랑 끝 호텔에 투숙한 새 고객들은 고통에 대한 도착적 쾌락을 즐겼다고 그는 비판했다. 이들의 경우 물론 쾌락의 대상은 호텔 테라스에 앉아 굽어본 저 심연 밑바닥에서 인간 정신을 파괴시키고 있는 독점 자본주의의 거대한 장관이었다. 루카치가 보기에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론과 실천 사이에 반드시 있어야 할 연결고리를 포기해버렸다." (P 24)

 

대부분 부유한 유태인 가정의 자녀들로서 돈벌이를 위해 힘들게 노동을 하거나 치열한 삶의 현장을 경험한 적 없이 부유한 사업가나 부모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으며 사색만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현실에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혁명가들이 보기에는 신선놀음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삶과 사유의 과정은 결코 여유로운 과정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한 사상가의 사상이 이처럼 치열하고 처절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마음이 들 정도로 이들은 사상뿐만 아니라, 삶 역시 치열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것은 1920년대에 왜 독일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의 문제이다. 프로이센 제국의 독일이 일으킨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독일의 후방에서는 노동자들과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킨다. 앞서 일어난 러시아 혁명을 모방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초창기의 뜨거운 열기에 비해 쉽게 사그라들고, 다양한 계급들이 연합된 바이마르 정부를 탄생시킨다. 대부분 아드르노와 벤야민 등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이들은 왜 독일에서는 러시아와 같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해 의문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주목을 했던 것은 루카치로부터 언급된 '포드주의'라는 당대의 새로운 자본주의 형태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론의 생산과 소비, 노동과 자본이라는 비교적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의 포드에 의해서 처음으로 자동차 조립공장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생산의 한 부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대량생산의 문화는 노동자들에게 그들 역시 자본주의의 소비자로서의 한 역할을 감당하게 한다. 그래서 기존의 착취의 개념을 가지던 소비자는 이제는 자신도 소비의 욕망을 가지는 존재로 바뀐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가 주는 무한한 쾌락과 환상의 꿈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쾌락과 환상을 심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예술로 본다. 이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 특히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통렬히 비판했던 이유이다.

 

"조립라인은 생산과정을 가속했지만 노동자는 나약해졌다. 그들은 갈수록 기계의 부품이 되어가고 더 나쁜 경우에는 기계에 의해 대체되어 낡은 것으로 취급을 받게 되었다. 가령 포드의 자동차 공장은 보잘것없는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자동적으로 부품을 찍어낼 수 있는 기계가 비치되어 있었다. 인간은 생산적 목적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런 현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생산적 존재라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 그들이 사용하는 이론과 어휘 일부에 이런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 존재론적인 비극으로 보일지 모른다. '내가 이 일을 다 마치고 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차 한 대씩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포드는 자신의 자동차에게 말했다. 인간은 단지 기계가 되거나 기계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가 되어갔다. 그들의 정체성은 대량생산된 상품들의 수동적 소비를 통해 정의되어 있다." (P 132)

 

"문화의 차원에서 포드주의는 세상을 현대화했다. 대량생산제품은 T 모델뿐 아니라 찰리 채플린 영화도 포함된다. 기계화는 산업화를 혁명화할 뿐 아니라 예술을 산업화해서 생상과 분배의 가능성을 가속화하고 새로운 예술형식 - 영화와 사진 - 을 가능하게 만들고 예술형식의 - 소설, 회와, 연극 - 활기를 없앤다. 속도, 경제, 찰나의 순간 그리고 오락은 대량생산 문화의 특징이다. - 중략- 베버의 자본이라는 철의 교도소는 일하는 시간 동안 인간을 억눌러 왔다. 이제 문화산업이 여가시간에도 인간을 억압한다. 그들은 생산적 존재에서 소비자로, 창조적 활기로 넘치는 인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꿈으로부터 모든 똑같은 것을 보고 낄낄거리는 무감각한 영화 관객으로 바꾸어버렸다." (P 132-3)

 

이 책은 초반부터 벤야민의 '구운 사과 향기에 대한 기억'과 '카이저 파노라마'라는 미래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장치 등을 언급하면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싸우려고 했던 대상이 단순히 자본주의가 아닌, 그 자본주의 뒤에서 인간에게 환상을 심어주며 인간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아닌, 단지 욕망하는 존재라 바꾸려 하는 거대한 힘이었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노동자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가치와 대항하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은 1930년대 1940년대를 지나면서 그 사상이 바뀐다. 바로 히틀러와 나치의 등장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히틀러와 나치에 열광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하거나 학살하기 시작한다. 대부분 유대인이었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제 새로운 질문에 직면한다. 왜 독일인들은 히틀러와 나치에 열광할까? 1940년대에 이르러서 아도르노와 벤야민 등은 자본주의의 횡포 대신 나치나 파시즘적인 야만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야만에 동조하는 대중들의 심리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된 사상인 '비판이론'이 정립되게 된다.

 

"아도르노는 호르크하머에게 이렇게 쓴다. '내 생각에 우리가 관례적으로 프롤레타리아와 연결해서 생각했던 그 모든 고통이 아주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유대인에게 집중적으로 전이되고 있는 것 같다네. 비판이론을 낳게 한 결정적인 순간이었고 사회 연구소의 토대이자 공식적인 목적인 되어준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이 이제는 학파의 관심 대상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1947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반유대주의에 관한 마지막 장이 추가되었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은 프롤레타리아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 책의 목적은 '왜 인류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인 존재 상황으로 진입하는 대신 새로운 종류의 야만 시대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P 307)

 

이 연구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는 인류 역사를 아우르는 그 야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역사철학테제]나 미완성이지만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대작을 준비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나치를 피해 스페인 국경을 넘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자살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주로 미국에 피해있던 이들은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보고 경악한다. 그들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중문화와 개인주의에 강력한 반감을 느낀다. 이를 계기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더욱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목표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뒤에 숨어 있는 폭력성과 야만성을 연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런 사상은 하버마스 등에 의해 이어진다.

 

이렇게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시대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의 광기와 그 사상에 열광하는 대중들의 뒤에 있는 인간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항상 사람들의 돌팔매를 맞았다. 독일에서는 나치 정권 때 마르크스주의자와 유대인으로 공격을 당하고, 프랑스로 망명 와서는 독일인으로 포로수용소에 갇히고, 미국에 건너와서는 지독한 자본주의 체제의 공격을 받다가, 2차 세계 대전 후 독일로 돌아가서는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는 대중들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1960년대의 신좌파 운동이 극렬할 때는 그들로부터 극심한 모욕과 핍박을 당했다. 아도르노는 학생들의 폭력에 반대하다가, 학생들이 강단을 점검하고 그를 조롱하고 모욕을 당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한 일화에 의하며 여학생들이 강단에 올라가 브래지어를 벗고 가슴을 보이며 그를 조롱했다고 한다. 결국 그 충격으로 강의를 관두고 등산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어찌 보면 발터 벤야민의 죽음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왜 아드로는 자신의 사상과 뿌리가 같을 수도 있는 신좌파 운동의 폭력에 그렇게 반대를 했을까? 바로 이 부분에 이 책의 핵심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 책의 서론에서는 이 부분을 언급하며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1969년에 아드로노는 비판적 사유를 통해 히틀러 시대에 창궐했던 권위주의 성격과 그에 따르는 순응주의 정신이 신좌파와 학생운동에서 되살아나 활보하는 양상에 주목했다. 학생운동과 신좌파는 반권위주의적인 듯 행세하지만 자신들이 전복의 목표물로 지목한 억압적 구조를 그대로 복사하고 있었다.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이들은 권위주의적 성격을 보일 가능성이 많다. 그들은 성찰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라고 아드르노는 섰다." (P 27)

 

우리는 흔히 어느 학파나 학자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그 학파나 학자가 주장한 사상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는 그 사상의 내용보다 그 사상을 완성하기까지의 사유의 과정이 중요할 때가 있다. 과연 그 사상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이 왜 그렇게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며, 그 사유의 과정의 핵심을 이 시대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회가 야만과 폭력성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다.

 

이제 이 책에 대한 글을 마치며 조금 위험한 마무리를 하려 한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흔히 보수주의냐 진보주의냐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를 놓고 싸운다. 그런데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의하면 어쩌면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보수주의나 진보주의의 탈을 쓰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려는 야만성과 폭력성이 우리가 바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 순간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은 가면을 바꾸어 쓰고 우리에게 접근한다. 우리가 주목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가면이 아니라, 그 가면 속에 감추어져 있는 바로 그 야만성과 폭력성이다. 아쉽게도 그 야만성과 폭력성이 점점 우리 사회의 곳곳에 퍼져가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에도 우리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을 배우고, 그들의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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