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 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시인은 그의 다른 시를 통해 "사물들은 저마다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라고 적고 있다. 사물이 품고자 하는 원초적 본질과 드러내고자 하는 언어의 본성을 볼 수 있는 이들이 시인이다. 그래서 그들이 들려주는 언어 속에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사물의 신비가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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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인다


- 박노해-


가을이 오면 창 밖에

누군가 서성이는 것만 같다

문을 열고 나가 보면 아무도 없어

그만 방으로 돌아와 나 홀로 서성인다 


가을이 오면 누군가 

나를 따라 서성이는 것만 같다 

책상에 앉아도 무언가 자꾸만 서성이는 것만 같아 

슬며시 돌아보면 아무도 없어 

그만 나도 너를 따라 서성인다 


선듯한 가을바람이 서성이고 

맑아진 가을볕이 서성이고 

흔들리는 들국화가 서성이고 

남몰래 부풀어 오른 씨앗들이 서성이고 

가을편지와 떠나간 사랑과 상처 난 꿈들이 

자꾸만 서성이는 것만 같다 


가을이 오면 지나쳐온 이름들이 

잊히지 않는 그리운 얼굴들이 

자꾸만 내 안에서 서성이는 것만 같다


자꾸만 짧아져 가는 가을은 머지 않아 잊혀진 계절이거나 과거의 전설로 기억되지 않을까. 내가 가을을 서성이는 건지 가을이 내 곁을 서성이는 건지, 가을볕의 바스러짐, 가을바람의 바스락거림, 풀벌레의 속삭임,,, 찰나의 서성거림도 이제는 작별을 고할때이다. 

벌써 어느 지역엔 눈이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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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다


- 이성선-


나뭇잎을 갉아먹던 

벌레가


가지에 걸린 달도

잎으로 잘못 알고

물었다


세상이 고요하다


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가을밤이 고요를 잃어버린지 오래다 . 문명의 불빛에 고요는 길을 잃었다. 그래도 가끔 '사각'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한움큼 베어 물린 가을달이 보이는 날도 있다. 압정처럼 박아 놓은 별의 뒤통수를 보고 돌아오는 길 많이 자란 달의 손톱을 조금 바짝 깍아주었다는 어느 시인의 가을 밤길이 그리워지는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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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의자의 깊이 

                    -심재휘-


지난 여름 

뒷마당의 측백나무 울타리 가에 

깊이를 가진 의자 두 개를 두었더니 

그대가 즐겨 앉고 떠난 한 자리에 

오늘은 가을 저녁 빛이 앉았습니다 

당신 모습만큼만 앉았다 저녁연기처럼 

흩어집니다


아직도 당신이 앉아 있는 저 의자는 

밤낮 빈 의자입니다 

우리가 한 생애 동안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저렇듯 만질 수 없는 의자의 깊이뿐입니다


터질 듯 매달린 가을 열매들 곁에서 

비록 아무도 모르게 식어가는 저 의자이지만 

그 충만한 허공까지도 내 흔쾌히 사랑할 수만 있다면 

서늘한 의자에 그대처럼 앉아보는 나의 오늘이 

이렇게 외롭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손으로 더듬어도 잘 만져지지 않는 것들도 있고, 의자에 내려 앉은 가을 저녁빛처럼 충만한 허공처럼 만져지는 것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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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김영하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다." 라고 말했다. 원래 잘 먹지 않는 음식이긴 했지만 한 편의 시는 그것을 끝내 머릿속에서 살해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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