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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설화

   - 박 규리 -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던 잿빛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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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5-19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전에도 그랬지. 초연한척 하지 말라고...
서러우면 울어! 장삼자락 다 젖도록...

갈대 2004-05-1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연한 척, 무관심한 척 하는 것이 결코 현명하지 않음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갑니다.
퍼갑니다^^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 살에는 

                - 이 외수 -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 살에는
선잠결에 스쳐가는 실낱같은 그리움도
어느새 등널쿨처럼 내 몸을 휘감아서
내 마음을 힘들게 하는 몸살이 되더라

떠나 보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세상은 왜 그리 텅 비어 있었을까
날마다 하늘 가득한 황사바람에

목메이는 울음소리로 가슴 터지도록 불러보고
나는 휴지처럼 부질없이
거리를 떠돌았어

사무치는 외로움도 칼날이었어...

밤이면 일기장에 푸른 잉크로
살아온 날의 숫자만큼
사랑 이라는 단어를 채워넣고

눈시울이 젖은 채로 죽고 싶더라
눈시울이 젖은 채로 죽고 싶더라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 살에는...

================================================================================

지금도 청춘이란 말을 들으면 손톱이 푸르게 물든다.

지금도 청춘이란 말을 내뱉으면 입 안에 푸른 빛의 향기가 난다. 

뺨 위의 눈물 자국마저 투명하여 속이 훤히 들어다보이던

내 나이 스무살과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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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5-1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외수의 글을 많이 좋아하는 자는 아닙니다만....가끔...그의 글 중에...마음에 파고드는 것들을 몇몇 구절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위의 시는 음...피끓는 청춘이란 표현이 무색하리 만치구뇽... 아 근디... 님은...아직 청춘 아니십니까.??..어제도 어그제도 1년전에도 10년전에도...스물살과 같은 마음은 살고 계셨던거 아니었더랬습니까??


제가 최근에 읽게 된..이외수의 다음 시 한 편을 님의 서재에 도배하고 조용히 물러납니다~~!




근심은 알고 나면 허수아비다.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으로 가서 허기를 채우려면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복병들이다.

하지만 어떤 참새라도 그 복병들을 근심할 필요는 없다.

허수아비는 무기력의 표본이다.

망원렌즈가 장착된 최신식 장총을 소지하고 있어도

방아쇠를 당길 능력이 없다.

자기 딴에는 대단히 위협적인 모습으로 눈을 부릅뜬 채

들판을 사수하고 있지만,

유사이래로 허수아비에게 붙잡혀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어버린 참새는 한 마리도 없다.

다만 소심한 참새만이 제풀에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의

심장을 위축시켜 우환을 초래할 뿐이다.

나는 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스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서른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마흔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 때의 근심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지금은 흔적조차도 찾을 길이 없다. 근심에 집착할수록

포박은 강력해지고,

근심에 무심할수록 포박은 허술해진다.

하지만 어떤 포박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1백 퍼센트 소멸해 버린다.

이 세상 시계들이 모조리 작동을 멈춘다 하더라도 시간은 흐른다.

지금 아무리 크나큰 근심이 나를 포박하고 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데 내가 왜 시간이 흐르면 1백 퍼센트 소멸해 버리는

무기력의 표본,

허수아비에 대해 근심하겠는가


--이외수 산문집<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중에서-


미네르바 2004-05-11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푸른 생선처럼 펄떡이던 스무살, 그리고 이십대...
그 스무살을 다시 만나면 난 다르게 살까?

잉크님은 이미 스무살을 살고 계신 듯한데요...^^*

stella.K 2004-05-1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외수의 책 만지작거렸는데.

얼마전에 읽은 그 책이요.

그림 꼭 잉크님 같아서 올렸어요. 빨리 등푸른 생선 잡아 오세요. 어서요~!


호밀밭 2004-05-11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시울이 젖은 채로 죽고 싶더라

이 말 무언가 울림이 있네요. 요즘은 이상하게 감성이 많이 사라진 듯했는데 이외수의 글은 죽은 듯한 감성을 일깨우는 무언가가 있네요.
그런데 전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 나온 이외수의 모습이 조금 생각나네요. 이외수가 영화에 그렇게 출연한 것은 혹시 스무 살 적의 못다 이룬 꿈이 남아서는 아닐까 혼자 생각해 봅니다.

잉크냄새 2004-05-12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등푸른 생선처럼 펄떡이던 스무살은 우리들 모두의 가슴속에 남아있었군요.

갈대 2004-05-12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잠결에 스쳐가는 실낱같은 그리움도
어느새 등널쿨처럼 내 몸을 휘감아서
내 마음을 힘들게 하는 몸살이 되더라

아아...ㅠ_ㅠ

다연엉가 2004-05-12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무살이라 꿈같군요.

비로그인 2004-05-12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 즈음은 빌어먹을이라 했거늘...
우리의 스물은....아...

치유 2004-05-13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푸른 스무살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나이때는 그 나이가 그렇게 좋은 것도 모르고 지나갔것만...
이제 지금의 나이에 더욱 충실하리라~~~~
 

작은 엽서-9 ---기다림

- 김선태 -



어떤 날은 네가 무섭도록 보고팠다
그러나 가장 절실할 때 널 찾지 않기로 했다
그 숱한 그리움으로 수일을 앓고
물빛 투명한 심상으로 너를 떠올릴 때도
못내 널 찾지 않기로 했다
어느 외진 바다 기슭에서
수없이 파도에 씻겨 닳아진 차돌처럼
견고하게 다져진 외로움 그대로
끊어질 듯한 기다림의 목울대 그대로
혼자서 살아가는 날의 그 공허한 행복감
쨍쨍 맑은 어느 날 높고 외딴 봉우리에
흰 한숨처럼 감기는 구름인 듯
사랑이여, 그때 홀연 네가 오려나

================================================================================

당신이여!

내 그리움이 가슴 한켠을 넘쳐흐를때 당신을 만나지 않겠습니다. 맨발로 달려나가 왈칵~ 한번에 내 그리움을 쏟아낸다면 긴 세월 당신을 그리던 내 마음을 보여줄수 없을테니까요.

차라리 공허한 행복일망정 견고하게 다져진 외로움으로 당신을 만난다면 내 그리움을 향기처럼 당신께 묻어나게 해줄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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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08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심스러움....아낌.....의 사랑이 느껴지네요.
시보단 님의 글에서...

갈대 2004-05-08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추억하는 밤입니다...

치유 2004-05-13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인터넷으로 좋은 글만 찾아 보다간 책 읽기 싫어질까 겁이 나네요..
사실 책 한권을 읽기 시작한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진도는 영 안나가고 이렇게 알라딘 마을만 휘젓고 다니고 있으니...
요즘 새삼 좋은 글귀들이 눈에 쏙 쏙 들어오네요...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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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5-0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초연한 척 하지 말고 고민하고 번뇌하자. 다만 내 곁에 다시 돌아올 봄햇살 가득한 공간 하나의 여유만은 남겨두자.
시간이 흐른 어느날 내 옆의 그 공간이 해탈이요 피안인것을 알게 될테니...


박가분아저씨 2004-05-12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번뇌에 초연하면 재미없지요.
숱한 애증에 아프지 않다면 재미 별로 없지요.
더러 우리 인간사 살풋 찌푸린 얼굴로 이겨 나가는 담담함 필요하지요, 애써 견디며 버티는 세월 필요하지요.

치유 2004-05-13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네요..
 


봄비, 그의 이름 같은 
 

                           - 김 승 동 -



저렇게
가슴이 부풀은 가지사이로
촘촘히 내리던 봄비가 있었다
젖은 온돌방 아랫목에서 이불깃을 끌어안고
속으로만 그의 이름을 쓰던...
우산을 쓴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분주함이란 찾아 볼 수 없는
단발머리 같은 봄비가

어차피 당도하지 않을 가슴앓이가
강을 이루고
증류된 생각들이 향기도 없이 빗물에 젖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있었다
며칠 지나면 의례 새싹이 움트고
주책없이 여기저기 철쭉이 몸을 풀던
그 봄

오늘
창 밖 가로수 키가 자라
전깃줄에 매인 물방울에 입맞추며
간간이 나누는 얘기가 봄비일 성싶다
아직도 분주함이 없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비 지나도
내겐 언제나 새순이 움트지 않던
말라 버린 가슴에
이제와 뿌려질 그의 이름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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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4-26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무실 창밖으로 내리는 봄비...
우산이 없어 옷 다 젖게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stella.K 2004-04-26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인상적인데요.^^

겨울 2004-04-26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뿌연 유리 너머로 밖을 본 적이 언제인지 까마득합니다. 이거 배경으로 지정해 볼까요?

잉크냄새 2004-04-27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한잔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시는 님들의 모습이 선합니다.
밖에는 우산없이 뛰어가는 저의 모습이 보이네요.

stella.K 2004-04-27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비 많이 맞으셨겠는데요? 머리는 잘 감으셨는지요? 요즘 같은 산성비 맞으면 머리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죠? 오늘은 좀 쓸쓸하네요. 따끈한 차 한 잔의 여유 잊지마시길...^^

치유 2004-05-13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비 내리는날 맨발로 걸어보셨나요??
으~~~~~~~~~!
헤즐넛 한잔에 마음 녹이고 그 감미로운 향기로 샤워하고..
맨발에 뽀시시 하얀 양말 신어줘야 할것 같은 봄비...
봄비..
그대는 왜 그리 더디 더디 오시는지....
오실적 마다 나는 활짝 활짝 피어나는것을!고로 나는 배꽃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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