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 정현종 -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

문득 인간은 과거의 어느 한 트라우마에 고착되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신공장 이전후
한시간의 출퇴근 버스속에서 상념에 잠기다 보면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 머무르는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곤 한다. 이제는 잊혀진 기억이라 생각했는데,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비 개인 저녁 나절의 국밥집, 그저 허기진 배를 뜨끈한 국물로 채웠다는 원초적인 포만감
만으로도 쉽사리 놓고 오던 우산같은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퇴근버스의 차창밖 풍경.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2-29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9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털짱 2008-03-0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을 많이 그리워하던 살청님께서 가장 좋아하시겠군요.
살청님은 서재를 잠시 닫으신다고 하시던데.
다시 뵐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

잉크냄새 2008-03-03 13:25   좋아요 0 | URL
저도 다시 뵈어서 기쁘네요. 이제 자주 인사드리죠.

2008-03-02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03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8-03-06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초적인 포만감만으로 쉽사리 뭔가를 두고 나오던 저도 많이 공감요~

춤추는인생. 2008-03-0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깜박 나를 잊고 출근버스에 올랐다
어리둥절해진 몸은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문 밀치고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챙겨가지 못한 나를 찾아보았다
화장실과 장롱 안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집안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몇 장의 팬티와 옷가지가
가방 가득 들어 있는 걸로 봐서 나는
그새 어디인가로 황급히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쉬고 싶어하던 나에게
잠시 미안한 생각이 앞섰지만
몸은 지각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점심엔 짜장면을 먹다 남겼고
오후엔 잠이 몰려와 자울자울 졸았다
퇴근할 무렵 비가 내렸다
내가 없는 몸은 우산을 찾지 않았고
순대국밥집에 들러 소주를 들이켰다
서너 잔의 술에도 내가 없는 몸은
너무 가벼워서인지 무거워서인지
자꾸 균형을 잃었다 금연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을 것 같은 몸은
마구 담배를 피워댔다 유리창엔 얼핏
비친 몸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옆에 앉은 손님이 말을 건네 왔지만
내가 없었으므로 몸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산 없이 젖은 귀가를 하려 했을 때
어딘가로 뛰쳐나간 내가 막막하게 그리웠다

페이퍼를 읽다보니 다시 생각났어요. 박성우의 <건망증>이.
덕분에 저도 고즈넉한 이밤에 가만가만 읇어보고가요.




잉크냄새 2008-03-10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 오랫만이네요. 뭔가를 쉽사리 놓고 오시나봐요.ㅎㅎ

춤인생님 / 이 시 언젠가 저에게 선물하셨던 시인데, 다시 읽어도 맘에 와 닿네요. 어딘가로 뛰쳐나간 내가 막막하게 그리운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나봐요.
 

여전히 남아있는 야생의 습관

-이병률-


서너 달에 한번쯤 거처를 옮겼다가 되돌아오는 습관을 버거워 하면 안된다

서너 달에 한번쯤, 한 세 시간쯤 시간을 내어 버스틀 타고 시흥이나 의정부 같은 곳으로 짬뽕 한 그릇 먹으러 가는 시간을 미루면 안된다

죽을 것 같은 세 시간쯤을 잘라낸 시간의 뭉치에다 자신의 끝을 찢어 묶어 두려면 한 대접의 붉은 물을 흘려야 하는 모른 체 하면 안된다

자신이 먹는 것이 짬뽕이 아니라 몰입이라는 사실도, 짬뽕 한 그릇으로 배를 부르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을 타이르는 중이라는 사실 까지도

------------------------------------------------------------------


(궤도차, 엄청나게 느리다. 자전거에 따라 잡히기도 한다.)

문득 그런 날이 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풍경들이 외면하여 내가 없는 풍경이 더 자연스레 느껴지는 날, 나 혼자 퉁 하고 튕겨져 나와 기를 쓰고 되돌아가려해도 유화위의 빗방울처럼 또르르르 굴러 떨어지는 날, 그런 날은 버스 맨 뒷좌석에 올라 종점에서 종점까지 아무말없이 타고 다니곤 하였다. 20대 초반을 관통한 율도에서 구월동까지 인천시내를 에둘러 지나가던 41번 버스는 아마도 가장 긴 노선이었던것 같다. 차장을 따라 흐르는 빗물이 기어이 버스안 풍경이 되지 못하고 사라지는것 같아 바짝 타오르는 입술을 축이며 생담배를 물곤 하였다. 주머니속에 토큰 2개만 짤랑거리던 시절이라 뜨거운 짬뽕 국물 한번 넘기지 못하였지만 가슴속에 뜨거운 무엇이 흐르기는 마찬가지더라.

이곳 풍경이 낯설어지던 날, 오토바이 속도만큼의 궤도차를 타고 그냥 흘러가본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07-12-27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떠오르는 90년대 초반 41번 버스 노선
율도-거북시장-영창악기-송림동 달동네-배다리-미림극장-동인천-애관극장-강원연탄-옐로하우스-도로위 화물열차-분수대-용현동 물텅범 거리-독쟁이 고개-......-구월동
하차 지점이 거의 독쟁이 고개라 가끔 타고 다니던 그 뒷노선은 떠오르지 않는다. 여우님이 채워주실라나.^^

Mephistopheles 2007-12-27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리도 서정적인 페이퍼에 저는 제목만 보고 표효하는 회색늑대를 생각해버렸어요.^^

잉크냄새 2007-12-27 18:33   좋아요 0 | URL
메차장님, 전 노상방뇨를 생각해버렸어요.^^

춤추는인생. 2007-12-27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좋아하는 시가 이곳에 걸려있네요. 박성우의 `건망증`이 다시금 생각나면서. 종점에서 종점까지라니 오늘 제마음이 그러했나봐요. 지하철 3호선의 끝과 끝을 달리는동안 비록 차창밖은 암흑이였으나. 뚫어지게 창밖을 바라 보고왔거든요.
풋~ 저는 짬뽕국물이 아니라. 우동국물이요. 이상하게 일산가면 김훈의 단편 `배웅`이 생각나. 뜨거운 우동 국물을 들이키고 왔더랬지요.^^

잉크냄새 2007-12-27 22:00   좋아요 0 | URL
<건망증> <여전히 남아있는 야생의 습관> 두편의 시 모두 님이 알려주신 시인인걸요. 가끔 그런 날이 있어요. 아무 생각없이 하염없이 차창밖을 바라보게 되는날,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낯설고 그립다가 어느덧 흘러가고.
짬뽕국물이든 우동국물이든 뜨거운 국물을 울컥울컥 들이키고 싶은 날이 있어요.

파란여우 2007-12-2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 녜, 왔습니다.^^
41번 버스 잇기놀입니까?..
독쟁이 다음, 용일사거리, 용일사거리 다음에 신기촌, 신기촌 다음에 인고앞,
인고 다음 석바위, 석바위 다음에 간석동, 시청후문...지금은 어찌 변했는지 몰라염.
나 지난번 고향 갔을 때 배다리하고 동인천에서만 놀다 와서.
다음에는 독쟁이 추억좀 얘기 해줘요.
버스 정거장 앞 오락실, 소주를 샀던 작은 수퍼, 굴다리, 순대집, 성당...
그리고 학교 후문에 이르기까지. 혹시나 인경호에 빠진 괴담은 없으셔요? 흐흐
난 저 근처에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길목마다 널려 있다우,
우쒸, 오늘은 술좀 마셔야겠다.

잉크냄새 2007-12-28 09:45   좋아요 0 | URL
역시나 여우님이 알려주시리라 믿었어요.
독쟁이 고개는 안가본지 10년이 다 되어가네요. 여우님 말씀처럼 오락실-곱창골목-굴다리-야구장-인하극장-내리막길을 달려 겨우 수업시간에 맞춰 공대계단을 올라가던 시절이 아스라히 떠오릅니다.
인경호에는 빠지지 않았지만, 정자에서 드렁큰 패밀리 술파티 열고, 독쟁이 고개에서 곱창에 빠져 살던 이야기는 언젠가 한번 풀어보지요.ㅎㅎ
팔 관리 잘하시고 또 뵙지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12-3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버스 타고 아무 생각없이 종점까지 가기,를 한 오백 번쯤 해봐야지 생각하고선
해본 적이 없네요.
봄이 오면, 한 번 해볼래요.
겨울엔, 내렸을 때의 그 한기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잉크냄새 2008-01-04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님 / 오백번이면 짬뽕도 오백 그릇? 단무지는 천 그릇? ㅎㅎ

살청님 / 살청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08-01-07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7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9 0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9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9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9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
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
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
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
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
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
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삶의 원심력이 작용하는 거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명왕성에 다가가지 못하고 지구만큼의 삶의 궤도를
빙빙 돌 뿐이다. 생성과 소멸이 찰나인 별똥별에게
그저 성호를 하나 긋는 것으로 이탈한 자의 자유로움에
경의를 보내며 언제가 소멸한 나의 삶의 궤적을 그냥
흘낏 느껴본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10-22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9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7-10-2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자의 삶의 궤도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궤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할 때면 다가오는 시간이 두렵기만 했어요. 반복되는 것이 두렵다는 것보다는 고착되는 나의 모습이 두려운 것이였죠. 고착이라는 것은 내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고, 더 이상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니깐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해요. 궤도가 변하지 않더라도, 내 자신의 모습을 수용하거나 반성하는 시간을 통해서 궤도안에서도 다른 모습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궤도를 벗어난 것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조금 엉뚱한 이야기지만, 요즘은 그것에 만족하면서 보낸답니다. 삶의 궤도보다는 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제 생각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요. 참... 신기하더라구요. :)

2007-10-25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9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7-10-2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위에 남긴 글.. 다시 읽어보니, 완전 횡설수설이네요 ㅋㅋㅋ 비몽사몽한 상태에 읽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_-;; 요즘은 쓰는 글도, 읽는 글도.. 이상하게 와닿지 않네요. 잉크님, 문득 안부.. 인사 드리러 왔어요.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말이죠.. 이런 날이 있다는게 신기해서.. 알려드리러 왔어요. 저 아무래도 상태가 별로 안좋은 것 같아요 ㅋ
그래보이죠? ㅠ_ㅠ 아흐.. 어쨌든, 날이 너무 추워지고 있네요. 감기조심하세용!

잉크냄새 2007-10-2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님 댓글 2건 합쳐서 / 미지의 대상이 갖는 보편적인 이미지는 막연한 두려움과 동경인것 같아요. 한살 두살 나이를 먹을수록 그 무게중심이 동경에서 두려움으로 옮겨가나 봅니다. 원심력을 벗어나 삶의 궤도를 이탈하는것 또한 이제는 동경보다는 두려움의 이미지가 커지는 거겠지요. 그 궤도안에서 삶의 모습의 변화를 통하여 느끼는 작은 이탈, 그것이 현실적인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이탈한 자유로움일수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주무시다 인사하러 오시다니 이거 황공무지로소이다.^^

가시장미 2007-11-01 11:59   좋아요 0 | URL
으흐흐 역시! '궤도안에서 삶의 모습의 변화를 통하여 느끼는 작은 이탈, 그것이 현실적인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이탈한 자유로움이라...'
제가 남기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깔끔하게 정리해주시는 센스!! ㅋㅋ 아무래도 잉크님께 첨삭지도 받아야 할까봅니다. ㅋㅋㅋ
잉크님 오늘 너무 추워요. 얼어죽을 것 같아서 회사에도 담요를 갖다 놓았는데, 얼어죽지는 않았어요. 저 살아있어요! -_-)/ (누가 뭐래?ㅋ)
감기조심하세요~~~~!!!! (약 광고 같죠?ㅋ)

잉크유령 IN CHINA 2007-11-05 16:4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거, 중국에서 이상하게도 로그인이 되지 않네요. 제 서재에 제가 유령으로 나타나야 하다니...제 글에 장미님이 첨삭지도를 해주고 계시지요. 항상 깊이있는 댓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전 지금 중국 출장중입니다. 올해를 넘기고 내년초에는 귀국할것 같은데, 알라딘에 출장보고서를 쓰려고 하니 로그인이 되지 않네요.-,.-;

가시장미 2007-11-0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초에 귀국요? 출장을 그리 오랜시간?!!! 잉크님이 없는 한국은 누가 지켜욧! ㅠ_ㅠ

잉크냄새 2007-11-12 18:16   좋아요 0 | URL
장미님이 지켜주세요!!!
 

식당食堂에 딸린 방房 한 칸

김중식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마다
하루 열여섯 시간의 노동을 하는 어머니의 육체와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돌아온 내 피로의
끝을 보게 된다 돈 한푼 없어 대낮에 귀가할 때면
큰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이다

옐로우 하우스 33호 붉은 벽돌 건물이 바로 집 앞인데
거기보다도 우리집이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로 들어가는 사내들보다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사내들이
더 허기져 보이고 거기에 진열된 여자들보다 우리집의
여자들이 더 지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대신 내가 영계백숙 음식 배달을 나갔을 때
나 보고는 나보다도 수줍음 타는 아가씨는 명순씨氏
홍등紅燈 유리방房 속에 한복 입고 앉은 모습은 마네킹 같고
불란서 인형 같아서 내 색시 해도 괜찮겠다 싶더니만
반바지 입고 소풍 갈 때 보니까 이건 순 어린애에다
쌍꺼풀 수술 자국이 터진 만두 같은 명순씨氏가 지저귀며
유곽 골목을 나서는 발걸음을 보면 밖에 나가서 연애할 때
우린 식당食堂에 딸린 방房 한 칸에 사는 가난뱅이라고
경쾌하게 말 못 하는 내가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강원연탄 노조원들이다
내가 말을 걸어본 지 몇 년째 되는 우리 아버지에게
아버님이라 부르고 용돈 탈 때만 말을 거는 어머니에게
어머님이라 부르는 놈들은 나보다도 우리 가정에 대해
가계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 하루는 놈들이, 일부러
날 보고는 뒤돌아서서 내게 들리는 목소리로, 일부러
대학씩이나 나온 녀석이 놀구 먹구 있다고, 기생충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상처를 준 적이 있는, 잔인한 놈들
지네들 공장에서 날아오는 연탄 가루 때문에 우리집 빨래가
햇빛 한번 못 쬐고 방구석 선풍기 바람에 말려진다는 걸
모르고, 놀구 먹기 때문에 내 살이 바짝바짝 마른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내심 투덜거렸지만 할 말은
어떤 식으로든 다 하고 싸울 일은 투쟁해서 쟁취하는
그들에 비하면 그저 세상에 주눅들어 굽은 어깨
세상에 대한 욕을 독백으로 처리하는 내가 더 끝
절정은 아니고 없는 적敵을 만들어 창槍을 들고 달겨들어야만
긴장이 유지되는 내가 더 고단한 삶의 끝에 있다는 생각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쓰레기 하치장이어서 여자를
만나고 귀가하는 날이면 그 길이 여동생들의 연애를
얼마나 짜증나게 했는지, 집을 바래다주겠다는 연인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했는지, 그래서 그 친구와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눈물을 꾹 참으며
아버지와 오빠의 등뒤에서 스타킹을 걷어올려야 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여동생들을
생각하게 된다 보름 전쯤 식구들 가슴 위로 쥐가 돌아다녔고
모두 깨어 밤새도록 장롱을 들어내고 벽지를 찢어발기며
쥐를 잡을 때 밖에 나가서 울고 들어온 막내의 울분에 대해
울음으로써 세상을 견뎌내고야 마는 여자들의 인내에 대해
단칸방에 살면서 근친상간 한번 없는 안동김가安東金哥의 저력에 대해
아침녘 밥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제각기 직장으로
공원公園으로 술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탈출의 나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 혹 지인知人이라도 방문해 있으면
난 막다른 골목 담을 넘어 넘고넘어 멀리까지 귀양 떠난다

큰 도로로 나가면 철로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기차가
있다 가끔씩 그 철로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처연하게
걸어다니는데 철로의 양끝은 흙 속에서 묻혀 있다 길의
무덤을 나는 사랑한다 항구에서 창고까지만 이어진
짧은 길의 운명을 나는 사랑하며 화물 트럭과 맞부딪치면
여자처럼 드러눕는 기관차를 나는 사랑하는 것이며
뛰는 사람보다 더디게 걷는 기차를 나는 사랑한다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 철로의 무덤 너머엔 사랑하는 서해西海가 있고
더 멀리 가면 중국中國이 있고 더더 멀리 가면 인도印度와
유럽과 태평양과 속초가 있어 더더더 멀리 가면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의 끝에 있는 집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

홍등가
- 대학을 버스로 등하교한 내가 항상 지나가는 길이 홍등가 앞이었다.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것이 아니라 남자 두명이 어깨를 겹치고 걸어들어가야 하는 너비의 골목길이 비스듬히 바라보이는 곳에 버스가 정차하곤 했다. 번호판이 어깨동무하듯 겹치어 보이고 가끔 하얀 반바지 차림의 여자들이 바로 옆 약국으로 들락날락거리는 모습이 눈에 띌뿐 알수없던 묘한 붉은 기운을 품던 그곳은 늘 적막했다. 

강원 연탄
- 홍등가의 반대편에 위치한 강원 연탄, 화창한 날에도 늘 우중충한 기분이 들던 그곳은 강원도 태생인 내게 묘한 편안함을 주곤 했다. 타지 생활이 처음인 나에게 일종의 위안을 주었다고 할까. 늘 날아드는 검댕으로 차창을 꼭꼭 달아걸던 인천 사람들과 달리 난 늘 그 검댕의 냄새를 느끼곤 했다.

화물 철로
- 시인이 말한 큰 길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철로가 있었다. "땡~땡~" 경적을 울린다. 나처럼 홍등가의 여인들도 멍하니 그 화물기차를 바라보았을까. 언젠가 술이 취해 그 길을 걸어 집까지 돌아왔다. 새벽녘, 4시간의 기찻길 도보 여행.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 무엇인가를 시인처럼 나도 느꼈을까?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8-31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되게 슬프고 살풍경한 시네요. 그게 현실이긴 하지만요.

플레져 2007-08-3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없이 말없이 추천누르오리다...

겨울 2007-08-3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 보니 방 한 칸에 대한 기억이 은근히 많네요.
그리운 추억도 뭣도 아닌 쓰디 쓴.

파란잉크 퍼럴럭 여우 2007-08-3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당신의 저 거리에 41번, 6번, 3번, 10번, 27번 버스가 다녔지요.
탈색되어 허옇게 바탕색이 드러나는 로타리 작은 분수대 얘기는 왜 뺐어요?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뻗치는 날엔 그나마 개안(開眼)이 될 지경이었지요.
당신이 41번을 타고 다녔던 로타리 근방은 지금 대형갈비집이 성황중입니다.
갈비 맛있어요. 친절하고요. -모냐, 시 야그는 쏙 빼고 갈비타령만!-

가*동은 아파트 밀림으로 변했고, 용*동도 재개발로 싹 변했다우. 알긴 알우?

잉크냄새 2007-08-3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냥 / 그의 절망적인 서술이 학창시절 지나다니던 기억속의 로타리 근처 풍경을 너무나도 절절하게 그리고 있기에 몇자 적어 봤습니다.

플레져님 / 말하고 가세요. 플레져님이 올리시던 시집 리뷰들이 생각나네요.

우몽님 / 아, 저도 어린시절 재개발로 집이 철거되고 다음해 봄까지 임시가옥 단칸방에 살던 기억이 납니다. 님 말씀처럼 쓰디 쓴 것이 어디 고개를 내밀고...

여우님인걸 알아요 / 제가 4년동안 타고 다닌 버스가 41번이죠. 거북시장부터 독쟁이고개까지의 40여분 거리. 인천 시내를 휘돌아 다니던 버스를 탄 덕에 버스 창가에서 인천 시내 구석구석을 참 많이도 보았답니다.
로타리 분수대 이야기를 뺀 것은 홍등가 주변의 적막한 기운과는 달리 로타리 우측의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교회가 왠지 조화롭지 못하다는 기분이 들어서입니다.
아파트 밀림, 재개발...그 지역으로 가본지 10여년이 다 되어가는 지라 알리가 없지요.ㅎㅎ

라로 2007-08-31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네요,,,
제목은 참 아련하기까지,,,,

2007-09-01 0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비뫼 2007-09-01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시를 쓰는 이들이 참 부럽네요.
눈물겹습니다.

프레이야 2007-09-0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 동네에 쓰러져가는 홍등가 집들이 나란히 있는 골목길이 있었고
철로가 가로로 길게 뻗어 기차소리 덜커덩거리던 기억이 살아있어요.
철로엔 툭하면 사고로 사람이 죽기도 하고 홍등가를 지날때면 붉고 야사시한 불빛이
어른거렸어요. 그 앞에 의자를 내어놓고 앉아있는 여자의 붉은입술 드러난 허벅지..
기차길 옆 단칸방에 사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아이 집에 놀러가면... 기적소리
가까워지고 곧이어 집이 통째로 흔들거렸어요. 귀를 찢는 것 같은 소리에 귀가 먹먹
했지만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지요. 눈물나는 풍경들, 생활의 풍경입니다.
그친구는 지금 어디서 살고있는지..
잉크냄새님, 9월입니다. 바람이 시원해요^^

가시장미 2007-09-03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의 가혹함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에 어떤 상황에 처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쉽게 비난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 되었더라도, 나만큼은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자신하지 않은 것은 아니죠. 그래서 그들의 모습이 때로는 위안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내가 가진 짐이 작다고 해서, 누군가가 등 뒤에 더 큰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해서 그것이 나에게 위안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때로는 그들에게 연민이나 동정의 감정을 느껴왔다는 것. 생각해보니 조금 부끄럽네요. 제가 언제부터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인간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깊이 생각하면.. 모두 다.. 부끄러우니...이거 원..

한 주가 시작되었네요. 출근 잘 하셨죠? 주말에는 감수성이 막 풍부해지더니, 출근을 하니 다시 정신이 번쩍드네요. 으흐 좋은 한 주 되시길! ^-^

잉크냄새 2007-09-04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님 / 네, 저도 삶을 빙 둘러가는 시보다는 아프더라고 콕 찍어 이야기하는 시들이 좋더군요.

속삭님 / 외면은 눈을 돌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겁니다. 애틋한 가슴과 눈이 없는것이 외면이 아닌가 싶군요. 그들의 아픔과 눈물을 조심스럽게 헤아리는 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은비뫼님 / 그러게요. 이렇게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 가슴의 웅어리를 풀어내는 것도,,,시인의 눈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혜경님 / 눈물나고, 서글프고, 외면하고 싶던 풍경들,,,그러나 삶에서 한발짝 비켜나 바라볼수 없는, 그 속에 온전히 녹아들어야 보이는 삶의 풍경들인가 봅니다.

장미님 / 남의 슬픔에 기대어 눈물 한방울 찔끔 흘리는 카타르시스, 하지만 그 속에는 내 슬픔이 아니라는 약간의 안도감도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도 삶의 한 부분이지요. 다만 그 슬픔을 좀더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수 있는 가슴을 잃지 않는것, 그것이 우리의 최소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시장미 2007-09-0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 댓글이..... 너무 멋지삼! ㅠ_ㅠ

잉크냄새 2007-09-07 12:54   좋아요 0 | URL
장미님 / 댓글이...너무 띄우주삼!ㅠ_ㅠ
 

문득

-정호승-

문득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성산포 앞바다는 잘 있는지
그때처럼
수평선 위로
당신하고
걷고 싶었어요

--------------------------------------------------------------

기억을 실핏줄처럼 감싸고 돌던 전화번호가 잊혀지고
기억을 대신하던 손의 감각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은 문득 잊혀지는 것들 하나 살며시 추억해보는 것일수도...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8-29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7-08-29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혀진다는 거.. 어떤 사실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요. 요즘요...
그 감정과 기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을 때, 느끼는 그 허무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드래요.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간사하고, 내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데.. 문득 문득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바보라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깐요. ^-^;

잉크냄새 2007-08-29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더듬고 간 흔적과 향기로 오후내내 행복한 시간이 되었네요.

가시장미님 / 사람이 미치지 않고 살아갈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망각일 겁니다. 과거를 잊음으로써 미래로 나아갈수 있으니까요. 과거를 망각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미래를 망각하게 될겁니다. 그래도, 어느날 문득 슬며시 꺼내볼 추억 한자락 망각의 샘에서 건져올리는 것도 삶이겠지요.

2007-08-29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30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07-08-29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문득이란 말을 좋아해요,,,,그래서 가끔 문제일때가 있지만서도,,,

잉크냄새 2007-08-30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님 / 문득 떠오른다는건 기억 저편에 살아있다는 뜻일겁니다.

춤인생님 / "우리네 인생일까요" 라고 구태여 묻지 않으시더라도 쓰신 글속에 조금씩 한걸음씩 나아가는 님 삶의 모습이 보이네요. 그 어떤날의 말할수 없는 허전함, 또한 희미해지고 잊혀져가지요. 먼 훗날 문득 돌아보면 그저 쓴웃음 한번 지울수 있는 추억이면 족한거고요.

프레이야 2007-08-30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며칠 자꾸 추억을 곱씹어보게 되네요.
이게 다 가을바람 탓이에요^^

2007-08-30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7-08-3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은 어쩜.. 이리도 멋진 말만 골라서 하시나요? 댓글도 예술이시네요!!! +_+
너무 멋지신거 아니세요? 잉~~

잉크냄새 2007-08-31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 올 가을은 산뜻하게 다가오지 않나 봅니다. 이리 우중충한 날이 계속되니...

속삭님 / 음,,,용기...삶이든 사랑이든 가장 큰 미덕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어디 전화기 붙잡고 여기저기 흐르는데로 때려볼까요?ㅎㅎ

장미님 / 이런 과찬의 말씀을...ㅎㅎ 그냥 가끔 느끼는 일상의 말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