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 시오리코 씨와 기묘한 손님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1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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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오래된 책 몇 권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된 책과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오래된 책에는 내용뿐 아니라 책 자체에도 이야기가 존재한다. 나도 어떤 이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단, 하나 덧붙이자면 그 '이야기'가 반드시 아름다우리라는 법은 없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는 추한 내용도 있을지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13쪽

"전 오래된 책을 좋아해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꼭 안에 담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62쪽

"고서점에서 일하려면 책의 내용보다 시장 가치에 대한 지식을 갖춰야 해요. 책을 많이 읽으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읽지 않아도 배우면 돼요. 실제로 퇴근하면 책은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거든요. 저처럼 무슨 책이든 가리지 않고 읽는 게 드물지도 몰라요."-92쪽

"'도움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달짝지근하지만 가슴을 저미는 말 아니더냐? 가슴에 쌓인 게 있으면 뭐든 말해도 좋다.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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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3-06-2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노카와짱~

이매지 2013-06-26 11:09   좋아요 0 | URL
재미있어서 후딱 읽었어요. ㅎㅎ
오늘 2권 읽으려구요 ㅎㅎ
 
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구판절판


"다른 누군가가 너희들에게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해 주마. 전에 말했던 것처럼 문제는 너희가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거야. 너희는 사태가 어떻게 될 건지 듣긴 했지만, 아무도 진짜 분명하게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감히 말하건대 사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무척 만족하는 이들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 중 아무도 미국에 갈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그러니까 더이상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중략)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118~9쪽

우리는 온갖 사소한 문제를 두고 줄곧 싸워 댔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루스와 나는 특히 잠자리에 들기 직전 블랙 반의 다락에 있는 내 방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헤일셤의 공동 침실에서 소등 후 나누었던 그런 밀담의 후속타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낮 동안 아무리 사이가 툴어졌었다 해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루스와 나는 변함없이 내 매트리스에 나란히 앉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뜨거운 음료를 홀짝이며 새로운 생활에 대해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이런 밀담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런 때 서로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든 간에 상대가 그것을 깊이 배려하고 존중해 주리라는 믿음이었다. -178쪽

그리고 고독이라는 문제가 있다. 사람은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하는 것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간병사가 된다는 것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혼자 차를 몰고 이 센터에서 저 센터로,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먼 길을 다녀야 하고, 토막잠을 자야 하고, 누구에게도 걱정거리를 털어놓을 수 없고, 누구와도 소리 내어 웃을 수 없다. 이따금 옛날에 알던 학생, 지금은 간병사나 기증자가 된 사람을 만나지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충분한 기회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늘 시간에 쫓기든가 그렇지 않을 때는 극도로 지쳐서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긴 근무 시간과 여행, 수면 부족은 존재의 내면으로 슬며시 들어와 당신의 일부가 되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태도와 시선과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서 그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285~6쪽

"이상해. 그 모든 게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몸을 돌려 다시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래, 정말 이상해. 그 시절이 자나가 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아."
"정말 이상해. 이제 와선 그런 게 전혀 상관없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상관이 있는걸."
"무슨 말인지 알아."-291쪽

루스는 눈길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표정 같은 것이 지나갔다. 영화에서 보면 상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동안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실수로 싸움이 일어나 총이 상대에게 넘어간다. 그러면 조금 전에 자기를 위협하던 사람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빛에는 온갖 종류의 복수가 가능해진 지금의 행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 순간 나를 바라보는 루스의 눈길이 바로 그러했다. -317쪽

"혹시 그 소문이 진짜라 해도 당신은 이런 일, 그러니까 당신을 찾아와 사랑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커플들에 진력이 나셨을 겁니다. 저희가 정말로 확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와서 번거롭게 해 드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확신이라고?" 마담이 아주 한참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으므로 우리는 둘 다 깜짝 놀라서 조금 뒤로 물러섰다. "'확신한다'고 했지, 너희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말인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사랑이 그렇게 간단한 거라고 생각하나? 그러니까 너희는 사랑하고 있다는 거지,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이야. 요컨대 지금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빈정대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우리 각자에게 눈길을 주는 그녀의 눈에는 놀랍게도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너희는 그걸 믿는다는 거지? 너희가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그…… 집행 연기를 얻어 내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는 거지? 하지만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찾아온 거지?"-345~6쪽

네번째 기증이 끝나면 기술적으로는 목숨이 다했다 해도 의식이 어떤 식으로든 남아서 더 많은 기증이 이루어지리라는 사것을 본인이 안다. 그 경계 너머에서 여러 차례 기증이 이루어진다는 것, 더이상 회복 센터도 간병사도 친구도 없다는 것, 그들이 자기 몸에서 손을 뗄 때까지 기증이 연달아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은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흰 가운을 입은 이들도 그랬고 간병사들도 그랬다. 그리고 대개의 기증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토미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어떤 기증자가 그 문제를 화제에 올린다면 이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말을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림으로써 우리는 그 문제 전체에서 한발 물러선 셈이었다. -382쪽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속에서 두 사람은 온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부끄러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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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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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만들다 보면 정말 좋은 책인데 시기가 맞지 않아, 그 진가가 알려지지 않아 묻혀버리는 책이 있다. 하루에도 몇 십 권의 책이 출간되고, 그보다 더 많은 책들이 사람들의 관심이 닿지 않는 영역으로 옮겨간다. 몇 개월, 몇 년에 걸쳐 만든 책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은 한순간이라 한편으로는 쓸쓸해지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팔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지 하고 씁쓸해진다. 일본 서점에서 선정하는 '서점 대상'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 아닐까. 독자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비운의 걸작(걸작이라니 조금 표현이 과하다 싶지만), 독자들은 잘 모르지만(혹은 아직 진가를 몰라주지만) 내가 정말 아끼는 작품 등의 이유로 선정했을 '서점 대상' 수상작들은 정도의 차는 있지만 대개는 그 선택이 만족스러워 자주 찾아 읽는 편이었다. 이번엔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라니 더 기대가 됐다.

 

  300페이지 남짓의 그리 두껍지 않은 <배를 엮다>에는 <대도해>라는 한 권의 사전 편찬을 둘러싼 10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 만드는 데 시간과 공이 많이 듦에도 큰 매출을 기대할 수 없지만 일단 만들면 누군가 유용하게 사용하는 사전. 사전을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편집자 아라키가 정년을 앞두고 자신의 뒤를 이어 사전을 만들 사람을 찾다가 영업부 사원인 마지메를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어수룩하고 사회성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이름처럼 성실한 마지메는 눈앞의 일을 하나씩 하나씩 묵묵히 해나가며 '언어라는 거대한 바다'를 건넌다. 하지만 이 항해는 마지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일생을 사전과 함께해온 편집자 아라키와 감수자 마쓰모토, 겉보기에는 가벼워 사전과 잘 맞지 않는 듯한 니시오카, 패션지를 만들다 사전을 만들게 된 기시베, 마지메의 든든한 닻이 되어주는 가구야와 디자이너와 제지사까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긴 시간 함께 호흡을 맞춰 배를 저어나간다.


  사전 편집과 단행본 편집은 비슷한 면도 다른 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언어'가 중요하고, 묵묵히 나아갈 수밖에 없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배를 엮다> 속 인물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무리 잡고, 또 잡아도 마치 실체가 없는 것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가는 말을 묵묵히 다듬을 수밖에 없는 과정. 편집이 뭔지 뭣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편집이 단순히 오탈자와 띄어쓰기를 점검하는 과정이 아니라 원문의 의미(혹은 원저작자의 의미)를 최대한 적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돕는 과정이라는 것을, "글씨 크기며 서체며 행간의 여백은 이것으로 좋은가. 도판 위치는 적당한가. 숫자와 기호는 알기 쉬운가. 읽기 쉽고 보기 쉬운" 책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책이 하나의 유기체 같다 싶었는데, <배를 엮다>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자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배를 저어간다는 점에서 책을 만드는 일, 아니 우리 인생은 긴 항해와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나야 책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이라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에 더 몰입했지만, 사실 <배를 엮다>는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도 하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끝이라고 생각한 곳이 다시 시작점이 되어버리는 인생이지만 <배를 엮다>를 읽으며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을 봤을 때처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 그리고 위안을 다시 한 번 얻었다.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에만 집중했다면 지루했을지도 모르지만 외골수 같은 마지메가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 사회생활에 대한 고민을 하는 기시베의 고민 등이 잘 어우러져 '말'의 소중함을 아는, '삶'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뜻하게 읽을 수 있을 책이 된 것 같다. 잘 담근 차 한 잔을 마신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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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3-06-07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노사이드를 제치고 서점대상을 수상했군요. 제노사이드도 재미있었는데 말이죠. ^^
저도 서점대상 수상 책들은 대부분이 좋더라구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상 있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근데 서점이 모두 없어지고 있으니 힘들려나요?
이매지님 오랫만에 인사드리는데 잘 지내셨죠? ^^

이매지 2013-06-07 11:33   좋아요 0 | URL
전 아직 제노사이드를 못 읽었는데 평이 좋아서 조만간 읽어보려구요. ㅎㅎㅎ
저도 우리나라에도 이런 상이 있으면 좋겠다 싶긴 한데,
우리나라와 일본의 서점 문화가 좀 달라서 애매한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한국은 아무래도 남은 서점이 대부분 대형서점이라 서점 직원 개인의 취향이 상대적으로 덜 반영되는 듯해요.
인터넷 서점 MD들을 대상으로 하자니 수가 많지 않아서 뭔가 공인(?)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구요. ㅎㅎ
아무튼 바람돌이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니 반갑네요!
자주 와야지 하면서 바쁘고 게을러서 그만. 흑흑.
 
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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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편집 작접이 최종 국면을 맞이할 무렵에는 이미 전체 페이지 수가 정해져 있다. 조본(造本)이나 가격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페이지 수의 변경이 허락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사전 내용을 규정 페이지에 딱 맞게 앚힐 수 있을지, 편집자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재빨리 판단해야 한다. 때로는 울며 용례를 지우기도 하고, 때로는 뜻풀이 문장을 효율성 있게 줄이기도 해서 정연하게 페이지에 끼워 넣는다. 그야말로 남자가 지금 책장 앞에서 보인 퍼즐 맞추기 같은 센스를 요구한다. -20쪽

"전철에서 플랫폼에 내려서면 저는 일부러 천천히 걸어갑니다. 다른 승객들은 저를 추월해서 에컬레이터로 몰려가죠. 하지만 난투극이나 혼란 상황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처럼 두 줄로 서서 차례로 에스컬레이터를 타죠. 왼쪽은 서서 가는 줄, 오른쪽은 걸어서 올라가는 줄, 정확히 나눠져서. 아무리 러시아워여도 걱정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정경이랍니다."
(중략)
플랫폼에 넘쳐 나는 사람들이 빨려들듯이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줄을 서서 내려간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무수한 말이 분류되고 연관 지어지면서 질서 정연하게 사전의 페이지에 알맞게 들어가듯이. -34~5쪽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다. 그런 생각을 담아 아라키 씨와 내가 이름을 지었죠."-36쪽

마지메는 지금까지 줄곧 '특이한 녀석'이라는 부류에 있었다. 학교 생활에서도 회사 생활에서도 늘 따로 놀았다. 가끔 호기심과 호의로 말을 거는 살마이 있어도, 마지메의 응답이 너무 엉뚱한 탓인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바로 가 버린다. 마지메 본인은 진지하게 마음을 열고 응대한다고 하는데 도무지 잘되지 않았다.
그것이 고통스러워서 책을 읽게 되었다. 아무리 말을 못해도 상대가 책이라면 침착하게 깊고 조용히 대화할 수 있다. 또 하나, 학교 쉬는 시간에 책을 펴 놓고 있으면 친구들이 괜히 말을 걸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었다.
독서 덕분에 마지메의 성적은 쑥쑥 올랐다.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인 '말'에 흥미를 느껴 대학에서는 언어학을 전공했다.
아무리 지식으로서의 말을 모아 보아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다. 허무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지메는 자신이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포기와 함께 반쯤 받아들였지만, 사전편집부로 이동한 뒤로 욕심이 났다. -45~6쪽

【연애】특정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 고양된 기분으로 둘이서만 함께 있고 싶고, 정신적인 일체감을 나누고 싶어 하며, 가능하다면 육체적인 일체감도 얻길 바라면서,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워하거나 드물게는 이루어져서 환희하는 상태에 있는 것. -53쪽

하나의 말을 정의하고 설명하려면 반드시 다른 말을 써야 한다. 말이라는 것을 이미지화 할 때마다 마지메의 뇌리에는 목제 도쿄타워 같은 것이 떠오른다. 서로 보충하고 서로 지탱하며 절묘한 균형으로 선 흔들리기 쉬운 탑. 이미 존재하는 사전을 아무리 비교해도, 아무리 많은 자료를 조사해도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말은 마지메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위태롭게 무너져 실체를 무산시킨다. -80~1쪽

아무리 말을 모으고 뜻풀이를 하고 정의를 내려도 사전에 진정한 의미의 완성은 없다. 한 권의 사전으로 정리했다고 생각한 순간, 말은 다시 꿈틀거리며 빠져나가서 형태를 바꿔 버린다. 사전 만들기에 참여한 이들의 노력과 열정을 가볍게 비웃으며, 한 번 더 잡아 보시지 하고 도발하듯이.
마지메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끊임없이 운동하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방대한 열량이 한순간에 보여 주는 사물의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건져 내 문자로 옮기는 일이다. -92쪽

뭔가에 진심으로 마음을 기울인다면 기대치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랑하는 상대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181쪽

많은 말을 가능한 한 정확히 모으는 것은 일그러짐이 적은 거울을 손에 넣는 것이다. 일그러짐이 적으면 적을수록 거기에 마음을 비추어 상대에게 내밀 때, 기분이나 생각이 깊고 또렷하게 전해진다.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고 울고 화를 낼 수 있다.
사전을 만든다는 건 의외로 즐겁고 소중한 일일지도 모른다.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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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짓는 사람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5월
품절


사고가 발생했을 때 갖가지 '만약'의 수가 하나도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비극이 일어나는 법이다. -8쪽

사람은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는 줄 알지만 실은 무엇 하나 모르는 것 아닐까. 당신의 이웃이 니토와 같은 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정체를 알아낼 방법은 없다. 알았을 때는 이미 일이 터져 버린 뒤다. -12쪽

아주 큰 일이 계기가 아니라도 되잖아요. 혼노지의 변도 아케치 미쓰히데가 어째서 모반을 일으켰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잖아요. 남이 보기에는 '고작 그 정도의 일로?'라고 치부할 일이라도 당사자에게는 상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용서하지 못할 일도 있는 거죠. 작은 일이 쌓이고 쌓여서 니토 씨는 가지와라 씨를 용서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몰라요. -149쪽

동기는 통상적인 감각으로는 밝혀낼 수 없다. 하지만 니토는 이미 책을 둘 곳을 마련하려고 아내와 딸을 죽였다고 고백한 인간이다.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인물이라면 가지와라에게도 이상한 동기로 살의를 느끼고 있던 것은 아닐까. (중략)
세상에는 살인이라는 금기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결여된 인간도 있다. 그러한 인간에게 살인은 사태를 해결하는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하다. 죄악감이라는 억제 장치가 없으면 인간은 얼마든지 쉽게 결단을 내리는 법이다. -154쪽

속단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기억조차 상황에 유리하도록 바꾸는 법이다. 그럴 가능성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나카자토 씨의 증언은 신뢰가 갔다. -173쪽

"선생님을 책망할 생각은 없어요. 선생님이 아니라 세상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를 원하죠. 이해하지 못하면 찜찜하거든요."
"누구든 그렇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살해당한다니 무섭잖아."
"그렇게 말씀하셔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325~6쪽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잖아요. 살인귀는 물론 가까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실은 모른다고요.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남편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요? 부모는요? 자식은요? 연인이나 친구의 생각을 백 퍼센트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초능력자죠. 누군가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왜 살인범의 심리만은 이해하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걸까요?"-326쪽

상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남을 본다. 어떤 사람은 니토를 선한 사람으로 보았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살인귀로 보았다. 나는 니토를 이해하지 못할 가치관의 소유자로 보았다. (중략) 전부 나라는 필터를 거친 허상이다. 허상은 허상일 뿐 진실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니토뿐만이 아니라고 쇼코는 지적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해한 척하며 살고 있다. 자신들이 이해한 척한다는 사실조차 보통은 잊고 있다. 안심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바로 불안해지니까. 그 눈속임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니토라는 존재에 우리는 이상한 흥미를 보였다. 전부 자신의 불안을 억누르고 싶기 때문이었다.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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