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의 쐐기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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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셜록 홈스를 만난 이후부터 내 삶에서 미스터리는 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주변에 책, 더군다나 장르소설을 읽는 사람은 없었기에 누구의 소개나 추천을 받아서라기보다는 대개 엉겁결에 이런저런 작품들을 만났다. 세월이 흘러 인터넷서점에 둥지를 틀면서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책에 해박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다. 그들에게 많은 작가를 추천받았고, 많은 탐정 또한 소개받았다. 그렇게 알게 된 작가 중에 한 명이 바로 에드 맥베인이다. '87분서 시리즈'에 대한 찬양을 꾸준히 들어왔고, 경찰소설도 좋아하지만 이상하게도 에드 맥베인은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경관혐오자>를 읽은 뒤에 '87분서 시리즈'에 열광하게 되도 그 욕구를 채울 다른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의의 쐐기>의 출간 소식을 듣고는 이제는 최소한 <경관혐오자>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테니까 하는 생각에 드디어 첫 발을 내뎠다. 오랫동안 미뤄온 만남이었기에 더 반갑고 즐거웠던 에드 멕베인, 그리고 87분서 형사들과의 첫만남.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오후, 87분서 형사실에 "마치 병상에서 막 걸어 나온 것처럼 창백해 보"이는, "검은 외투에 검은 구두를 신"고 "커다란 검은 가방을" 든 여자가 찾아온다. 여자는 스티브 카렐라 형사를 찾지만, 카렐라는 마침 개인적인 볼일과 순찰업무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황. 여자는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다며 38구경과 니트로글리세린이 담긴 병을 무기로 87분서 형사들을 인질로 잡고 카렐라 형사를 기다린다.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카렐라를 기다리며 87분서 형사들은 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각각 궁리하기 시작한다. 한편, 동료 형사들이 인질로 잡힌 것도 모른 채 카렐라는 한 부호의 자살을 조사하러 출동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살처럼 보이지만 살해동기와 적대감이 분명한 상황이라 타살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인질극과 밀실극. 교차되는 두 이야기가 87분서 형사들의 캐릭터와 함께 어우러져 긴장감을 늦출 새 없이 빠르게 전개된다. 


  얼마 전 읽었던 <빅 클락>과 마찬가지로 <살의의 쐐기>도 분량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래서 더 매력이 빛난다. 에드 맥베인은 일단 독자를 바로 87분서 형사실로 데리고 가서 '인질극'의 목격자(또는 관찰자)로 만든다. 땅, 하고 총성이 울리면 결승점까지 쉴새없이 달리는 백 미터 달리기처럼 87분서에서 벌어지는 인질극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진행된다. 하지만 아무리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라도 독자를 너무 몰아세우면 숨이 가빠지게 마련. 영리하게도 에드 맥베인은 여기에 '밀실살인'이라는 중거리 코스를 하나 추가한다. 형사실과 현장의 긴장감의 대비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인물의 대비였다. 카렐라 때문에 남편을 잃었다고 폭주하는 버지니아 도지와 아내의 임신 소식을 갓 듣고 기쁨에 찬 카렐라, 니트로글리세린이 진짜일까 의문을 품기에 선뜻 나서지는 못하지만 자기 나름의 타개책을 찾는 87분서 형사들, 그런 동료 형사들의 괴로움도 모른 채 유유자적하게 복귀하는 카렐라의 모습 등이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을 꽉 채운다.


  <살의의 쐐기>로 에드 맥베인을 처음 만나면서 물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에도 매력을 느꼈지만, 일반적으로 경찰소설에 기대하는 동료 경찰 간의 의리나 갈등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나 태도가 눈에 들어왔다.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도" "그와 똑같은 기쁨으로 즐거워했고, 그가 겪어본 적도 없는 불행으로 고통받고 있었"다거나 그들이 모두 "사랑과 존경을 원했고, 공동주택의 벽이 동물 우리의 철창과 같지 않다"는 식, 또는 "범죄는 범죄였고, 범죄의 악을 합리화하려는 87분서 형사들은 아무도 없었다"는 식의 서술이 눈에 들어왔다. 이 외에도 중간중간 용기, 참을성, 공정성 등 인간의 내면에 대해 살짝 짚고 넘어갈 때마다 통찰력이 보통이 아닌데 싶다가도 중간중간 던지는 유머에 낄낄거리면서 에드 맥베인을 더 알고 싶어졌다. 다행스럽게도 기존에 출간된 <경관혐오자>는 물론이고 <10 플러스 1>도 어찌저찌 구할 수 있고, 설을 전후해 다른 출판사에서 <아이스>도 출간될 예정인 듯하니 기다림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을 듯하다. 50권이 넘는 87분서 시리즈의 모든 작품이 소개되는 것까지는 무리일지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꾸준히 만날 수만 있다면 그걸로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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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1-30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에 대한 글이 부쩍 올라와서 늘 궁금했는데요 [87분서]가 뭐에요? 경찰서 이름이 87분서에요?

이매지 2013-01-30 10:52   좋아요 0 | URL
한국으로 치면 강남경찰서 시리즈, 수서경찰서 시리즈랑 같은 맥락이예요.
이 시리즈에서 다루는 관할지역이 '87분서'예요~


가넷 2013-01-31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구입했습니다. 오늘 도착하는데... 언제 볼지는 모르겠네요. ㅋㅋ

이매지 2013-01-31 14:25   좋아요 0 | URL
한번 잡으면 금방 읽으실 텐데 말이죠. ㅎㅎ

가넷 2013-02-10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끝내주네요...ㅠㅠ 읽는 내내 긴장감이란...

이매지 2013-02-13 09:44   좋아요 0 | URL
그쵸그쵸그쵸? ㅎㅎㅎ
 
로맨틱 교토, 판타스틱 호루모
마키메 마나부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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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떻게 좀 잘 설명드릴 수 없겠냐?"
"설명? 어떻게? 호루모 규칙이라도 조목조목 친절하게 해설해드리랴? '양 팀에서 귀신을 천 마리씩 끌고 나와서 교토 시내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거예요. 교토대학 청룡회, 리쓰 메이칸대학 백호대, 교토산업대학 현무파, 류코쿠대학 피닉스에서 각각 500대 회원들이 겨루죠.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경기지만 귀신이 전멸해 버리면 조금 곤란한 일이 벌어져요.' 이렇게? 아서라, 얘기해봐야 공연히 불안감만 부채질하지. 애당초 보통 사람들 눈에는 귀신이 보이지도 않잖아. 인간은 결국 제 눈으로 본 것만 믿게 돼 있어. 네가 호루모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해봐. 내가 너한테 '동아리에서 이런 걸 합니다' 하면서 불쑥 호루모를 설명하면, 너라면 믿겠냐?"-14~5쪽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쯤 모짱은 내 하숙방에 불쑥 찾아왔다. 모짱 같은 개성 넘치는 친구가 왜 나처럼 사교성 없고 문학이나 음악도 모르는 재미없는 인간을 만나러 오는지 이해되지 않아서 한번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모짱은 냉큼 대답했다.
"아베는 강하거든."
이어서 맥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약해."
"강해? 내가? 어디가?"
"아베는 빈말로라도 얼굴이 잘생겼다고 할 수 없지. 애인도 없고 돈도 없고 머리도 그저 그렇고. 어딜 보나 나처럼 모자란 것뿐이지만 늘 낙천적이거든. 나는 그런 점을 정말 존경해."-153쪽

모짱은 산조, 시조, 가와라마치 외곽 지리에 이상할 만큼 밝았다. 모짱이 열렬한 '골목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종횡무진으로 얽히고설킨 갈림길들을 지나다가 낯선 골목을 발견하면 모짱은 망설이지 않고 발을 들여놓았다. 내가 잘 따라오는지 살피지도 않고 "이쪽이야, 이쪽" 하며 등을 구부리고 정신없이 걸어갔다. 이렇게 골목을 지날 때 전혀 모르는 동네가 나오지는 않을까, 상상하는 순간이 못 견디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실제로 좁은 골목 끝에 난데없이 음식점 문살문이 나타나거나 더 안쪽으로 골목이 또 이어지거나 지장보살 사당이 조용히 서서 기다리는 둥 교토의 골목은 신비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 때 나는 모짱이 품는 기대와는 정반대로 이대로 계속 가다가 원래 장소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더 컸다. 아마 그런 불안마저도 모짱에게는 흥분의 소재일 것이다. 모짱은 '여기에는 없는 분위기'나 '여기에는 없는 느낌' 같은 것을 아주 좋아했다. 평소 익히 보던 것이 전혀 다른 무언가로 느껴지는 순간을 그 좁은 눈으로 열심히 찾았다. -162~3쪽

모짱이 여성의 얼굴 가운데 '이마'에 꽂히듯 실은 나에게도 나도 모르게 주목하고 마는 얼굴 부위가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불가항력이고 인간의 이성과 역사를 초월하는 숙명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습성이다, 라고 하면 너무 요란할까? 여하튼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그 존재가 놀랍게도 책 차례에 한 글자의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167쪽

물론 녀석의 애인 이야기는 딱 질색이었다. 질투니 뭐니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애인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는 모순된 마음은 한구석에는 있었다. 방심해서 애인 이야기를 꺼낸 그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이런 이상한 기분, 이건 또 뭘까?-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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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의 쐐기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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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있어 용기나 영웅적인 삶은 현실적인 게 아니었다. 그는 이 방에 있는 형사 모두가 숱한 현장에서 용기 있고 영웅적인 행동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기라는 것은 순간적인 필요에 따라 생기는 것이다. 확실한 죽음과 직면하여 이 친구들이 불가능한 도박을 기꺼이 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목숨과 카렐라의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카렐라의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이기적이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비인간적이라고? 아마도. 그러나 목숨이라는 것은 다 썼거나 닳았다고 해서 잡화점에 가서 다시 하나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목숨은 끈질기게 고수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카렐라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말은 번스 같은 사람이 하기 힘든 말이지만) 카렐라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번스 역시 자신과 카렐라의 목숨을 놓고 '선택'이라는 물음에 쉽게 답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두려웠다. -45~6쪽

참을성이란 보답이 따르는 미덕일지도 모른다.
참을성은 관용과 일맥상통한다. 참을성이 강한 사람은 느긋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분노는 반드시 어딘가로 분출시켜야만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육체가 그것을 분출시키는 방법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리라. -70~1쪽

그에게 87분서는 낯선 구역이었고, 낯선 수사반이었다. 87분서로 전근을 오게 되었을 때, 그는 이곳에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빈민가와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있었고, 이 형사실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있었다. 그들을 만나기도 전에 환멸만 주는 냉소적인 사람들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는 그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매우 빨리 알게 되었다.
빈민가에서 사는 사람들도 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와 똑같은 기쁨으로 즐거워했고, 그가 겪어본 적도 없는 불행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은 사랑과 존경을 원했고, 공동주택의 벽이 동물 우리의 철창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87분서 수사반 형사들에게서 이런 것들을 배웠다. 모든 형사들과 형사 개개인의 행동을 통해서 배웠다.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 장밋빛 환상을 품지 않았고, 범죄 발생률 역시 낮았다. 형사들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도둑을 때려눕히고 나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범죄는 범죄였고, 범죄의 악을 합리화하려는 87분서 형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124~5쪽

호스는 87분서 형사들이 법을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데 있어서 제한을 두지 않는 어떤 개념을 고수하는 것에 놀랐다. 그 어떤 개념은 공정성이었다. 이러한 개념 안에서 형사들은 폭력을 쓸 때와 쓰지 않을 때를 알았다. 그들은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을 자동적으로 범죄자와 동일시하지 않았다. 도둑은 도둑이었으나 사람은 또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공정성이었다. 폭력과 갑작스러운 죽음을 매일 맞닥뜨려야 하는 이들에게 그러한 사고방식을 갖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도 이해했다. -125쪽

도시는 여자다. 밤의 쾌락을 위하여 치장을 시작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새틴 옷에 연붉은빛 띠를 두르고, 머리에는 별처럼 빛나는 보석을 두른다. 밤을 지새우는 직사각형의 사무실이 스카이라인 너머 대기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처럼 어둠에 저항하듯 눈을 깜빡인다.-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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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클락
케네스 피어링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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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출판그룹인 재노스 엔터프라이즈의 총수 얼 재노스는 우발적으로 애인 폴린 델로스를 살해한다. 워낙에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살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지만, 폴린의 집 앞에서 그녀와 헤어지던 남자가 혹시 자기를 보지 않았을까 마음에 걸린다. 당황한 그는 기업의 파트너이자 브레인인 스티브 헤이건에게 달려가 이 사태에 대해 의논하고, 사내의 월간지 <크라임웨이>의 편집주간인 조지 스트라우드에게 다른 이유를 붙여 그 남자를 찾아내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조지는 이 같은 지시가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 의문의 목격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업무 지시에 따라 자기 자신을 쫓을 수밖에 없게 된 조지. 회사와 경찰. 양쪽에서 각각 진행되는 조사는 점점 조지를 조여들기 시작한다. 


  3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얇은 분량이지만 <빅 클락>은 긴장감이 넘친다. 아니, 오히려 분량이 적기 때문에 불필요한 요소를 과감하게 쳐냈고,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최대한의 긴장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신을 추적해야만 하는 조지. "이런 말을 해 봐야 우는 소리밖에는 안 되겠지만, 나는 지구상에서 자신의 모든 인생이 갈기갈기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무언의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이 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정말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뛰어들었다가 지고 만 커다란 도박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란 분명 거짓말이거나 신화일 뿐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처럼 그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조지 외에도 조지의 부인 조젯, 조지를 잡으려는 얼과 스티브 등의 관점에서도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이 사건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조망하고 각 이해관계자가 어떤 심리를 가지고 있는지 읽어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자기 자신을 쫓는 컨셉 외에 또 하나 관심을 끈 것은 제목이기도 한 '빅 클락'의 존재다. 책 속에서는 빅 클락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이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빅 클락이 무엇인지 정의내리지는 않는다. 빅 클락은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운명일 수도 있고, '빅 브라더'처럼 사회의 감시자일 수도 있으며, <모던 타임즈>의 시계 같이 시스템의 부속이 된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빅 클락은 어디에서든 작동한다. 빅 클락은 아무도 간과하지 않고, 아무도 빠뜨리지 않고,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말을 더하고 싶었지만, 그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빅 클락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이나 "질서를 잡고 혼동 속에서 패턴을 만들어 내는 이 거대한 시계는 이제껏 아무것도 바꾼 적이 없었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며,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언급되는 빅 클락. 한 사람의 개인(조지)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는 이 시스템 안에서 벗어날 수 없고, 빅 클락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빅 클락을 그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던지 간에 말이다. 


  아무튼 최소한의 투자를 통해 최대한의 만족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성비 좋은 고전 스릴러. 케네스 피어링의 소설은 처음이었는데 어떤 기대치가 설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책을 읽어서인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영화 <노 웨이 아웃>의 원작이라고도 하던데, 영화정보를 찾아보니 배경부터 세부적인 설정이 다른 것 같아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각색했을지 궁금해졌다. 자극적인 맛은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어떤지 '필립 말로' 같은 하드보일드 탐정의 그림자도 엿보이는 꽤 괜찮은 심리 스릴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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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클락
케네스 피어링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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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라.
시간은 생쥐처럼 달려 빅 클락의 낡고 천천히 움직이는 추 위로 오른다. 커다란 시곗바늘을 건너 종종걸음 치다가, 옆길로 새어 안으로 들어가 복잡한 톱니바퀴와 기계장치 속 천칭과 용수철을 누비고 다닌다. 진짜 출구와 진정한 보상을 찾아, 가짜 출구와 막다른 골목, 경사가 가파른 길로 구성된 거미줄이 쳐진 미로 사이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24쪽

물론 빅 클락은 시대를 구분해 낼 줄 알았고, 이 때문에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었다. 조지아가 숨쉬는 공기, 조젯의 기력, 내 몸 속 계기판의 눈금이 떨리는 모습 등등. 질서를 잡고 혼돈 속에서 패턴을 만들어 내는 이 거대한 시계는 이제껏 아무 것도 바꾼 적이 없었고,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며, 바뀌지도 않을 것이다. -24쪽

우리들이 이 방에서 결정하는 기사는 앞으로 석 달 후에 시민들이 읽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이 읽은 내용을 최종 결론으로 받아들일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러리라는 사실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르고, 심지어 우리가 내릴 결정에 짧게 이의를 제기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제시한 추론을 따르고, 기사 속의 구절과 권위를 갖춘 논조를 기억하며, 종국에는 우리가 제시한 대로 확고하게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 자신의 논리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는 물론 다른 문제였다. 거대한 시계가 대중을 향하게 되면, 그들은 단순히 충동적으로 그 시계를 보고 기준이 되는 시간을 맞출 뿐이었다.
그 거대한 시계가 수없이 많은 인생을 형성하고, 인도하는 척도가 된다는 사실은 때때로 우리에게 이상한 망상을 선사했다. -39~40쪽

월요일 아침에 느끼는 끔찍함은 만국의 공통분모이다. 백만장자에서부터 막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더이상 최악의 상황은 없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었다. -113쪽

나 역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에는 수많은 영토가 존재했다. 국가 안에 또 국가가 있는 셈이었다. 만일 내가 이 일에 알맞은 부하들을 선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지점에서 조사 결과를 왜곡하며, 그래야 하는 지점에서 훼방을 놓고, 안전한 지점에서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그들이 조지 스트라우드를 발견하기까지는 아주,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몰랐다. -123쪽

회사와 경찰, 이렇게 양쪽에서 각각 진행되고 있는 조사는 펜치의 양쪽 턱처럼 착실하게 한곳으로 조여들고 있었다. 양쪽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회사든 경찰이든 거대 조직은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고 그런 조직은 장님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러나 나는 그 치명적인 무게와 힘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미친 짓이었다. 그런 거대 조직에는 저항할 수 없다. 양쪽 모두 빙하와도 같은 냉정한 비인간성으로 창조와 말살을 수행한다. 돈을 세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계량하며, 나무의 성장과 모기의 수명을 한 기준에 놓고 비교하며, 도덕 역시 시간의 흐름에 결부시켜 파악하는 것이다. 빅 클락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시간을, 정확한 하루하루를 새겨 나간다. 빅 클락이 한 인간을 옳다고 판정하면 그 인간은 옳은 것이고, 그가 옳지 않다고 선언하면 항소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그의 인생은 끝나 버린다. 빅 클락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들리지도 않는 것이다. -200~1쪽

이런 말을 해 봐야 우는 소리밖에는 안 되겠지만, 나는 지구상에서 자신의 모든 인생이 갈기갈기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무언의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이 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정말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뛰어들었다가 지고 만 커다란 도박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란 분명 거짓말이거나 신화일 뿐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26쪽

빅 클락은 어디에서든 작동한다. 빅 클락은 아무도 간과하지 않고, 아무도 빠뜨리지 않고,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라는 말을 더하고 싶었지만, 그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빅 클락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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