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36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구판절판


비밀 하나 털어놓으리다. 좋은 공연에 대한 작은 비밀이라오. 한 사람의 프로가 또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오. 아주 간단한 거요.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그 음악을 들을 청중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오.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다만 마음속에서 전날 만났던 청중과 현재의 청중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오. 당신이 밀워키에서 연주를 한다고 해봅시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하오. 밀워키의 청중은 무엇이 다른가, 어떤 점에서 특별한가? 메디슨의 청중과 밀워키의 청중은 어떻게 다른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생각날 때까지 붙잡고 있어야 한다오. 밀워키, 밀워키라고 말이오. (중략)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소? 그렇게 되면 그 청중은 당신이 아는 누군가, 당신이 제대로 된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특별한 대상이 되는 거요. 이게 바로 나의 비결이라오. 한 사람의 프로가 또 한 ㅅ람에게 해주는 말이오.-26~7쪽

우리 어머니는 종종 슬픔에 빠지곤 하셨지요. 지금 당신처럼 말입니다. 누군가를 만난 다음 어머니는 그 사실에 무척 행복해하시면서 그 사람이 새 아빠가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몇 번은 어머니의 말씀을 믿었지요. 그후에는 사태가 그렇게 잘되어 가지 않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오늘 밤의 당신처럼 의기소침해지실 때마다, 어떻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어머니는 당신 레코드를 전축에 올려놓고 노래를 따라 불렀답니다. 긴 겨울 동안 그 비좁은 아파트에서 어머니는 무릎에 턱을 올려놓고 손에는 뭔가가 담긴 잔을 들고 나지막하게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중략) 가드너 씨, 당신의 음악이 제 어머니가 그 시기를 견디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식으로 당신은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 음악은 당신 자신에게도 틀림없이 도움이 될 겁니다.-34쪽

아까 말한 대로 나는 린디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소. 하지만 당시 그녀도 나를 사랑했을까? 사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런 질문이 떠올랐는지조차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소. 나는 스타였고 그녀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으니 말이오. 나는 그녀가 꿈꾸던 존재였소. 그녀가 그 작은 식당에서 쟁취하려고 계획했던 대상이었던 거요. 나에게 사랑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소. 하지만 27년간의 결혼생활은 재미있는 결과를 낳는다오. 많은 커플들이 처음에는 상대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피곤해져서 상대를 증오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오. 하지만 때때로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 여러 해가 걸리긴 했지만 린디는 점차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소. 처음엔 나는 감히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소. 앉았던 테이블에서 일어날 때 내 어깨를 살짝 건드리는 손길, 웃을 이유가 없는데 방 저편에서 보내는 가벼운 미소, 엉뚱하고 바보스러운 행동들 같은 것으로 미루어 말이오. 장담하건대 이 일에 놀란 건 누구보다도 린디 자신이었소.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 거요. 5~6년 후 우리는 아주 편안해졌소. -40쪽

나는 그해 봄을 런던에서 보냈다. 그리고 계획했던 것을 모두 성취하지는 못했다 해도 그 시기는 전체적으로 보아 흥미진진한 막간인 셈이었다. -103쪽

브래들리의 말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옳다. 나는 이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뮤지션들보다 두 배는 더 재능이 있다. 하지만 요즘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닌 것 같다. 이미지, 마케팅 능력, 잡지에 기사가 실린다거나 텔레비전 쇼에 출연한다거나 파티에 참석하는 것, 누구와 점심을 먹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염증이 난다. 나는 뮤지션이다. 어째서 이런 게임에 동조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아는 최고의 방식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부족하단 말인가? 내 골방에서만 연주하는데도 내 음악은 점점 나아지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는 순수한 음악 애호가들이 내 노래를 즐기고 내 방식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성형수술 따위로 얻는 것이 뭐란 말인가? -149~150쪽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적절한 연애, 적절한 결혼, 적절한 이혼 같은 뻔한 방식을 통해서가 아닌가. 이 모든 것이 적절한 잡지 화보와 적절한 토크쇼로 이어진다. 최근 그녀는 이혼 후에 처음으로 하는 근사한 데이트에는 어떤 차림을 해야 하는가, 남편이 게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조언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프로그램의 제목은 잊어버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스타 자질'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 매력이란 것을 분석해 보면 텔레비전 출연과 패션 잡지의 표지 모델, 전설적인 인물들과 팔짱을 끼고 시사회나 파티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을 거듭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157쪽

이봐요, 스티브, 내 말 잘 들어요. 난 당신 아내가 돌아오기를 바라요. 정말로 그러면 좋겠어요.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해도 당신에게는 전망이 생길 거예요. 당신 아내는 멋진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삶이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끝내기에는 너무 크답니다. 당신은 이제 그 단계에 이르렀어요.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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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증명 증명 시리즈 3부작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 『인간의 증명』을 읽었을 때만 해도 이 책은 단순한 ‘퍼즐’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한 흑인의 죽음, 사회적으로 덕망 있는 한 가정, 아내가 실종된 남자.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른 퍼즐의 조각처럼 보였던 세 사건이 차곡차곡 맞춰서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었을 때의 즐거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통찰이 눈에 띄었던 책이었다. 이미 읽었던 이야기지만, 새로운 번역으로 접하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증명 삼부작’의 첫 권으로 『인간의 증명』을 시작했다.

 

  도쿄의 고급 레스토랑 엘리베이터에서 한 흑인이 칼에 찔려 죽은 채 발견된다. 피해자의 신분은 금방 밝혀졌지만 범행현장도 동기도 모든 것이 제대로 된 실마리 없이 막막하기만 하다. 간신히 범행현장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낡은 밀짚모자를 발견하지만 이 가느다란 실마리를 붙잡고 무네스에는 보이지 않는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여기에 두 개의 사건축이 교차한다. 남편의 병 때문에 생계를 위해 화류계에 뛰어든 아내가 다른 남자가 생긴 낌새가 느껴져 수상히 여기던 차에 아내가 연락도 없이 사라지자 아내의 행적을 쫓는 오야마다의 이야기와 정치가인 아버지와 가정문제 평론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철부지처럼 살아가다 범죄까지 저지르는 교헤이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세 개의 이야기축은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아귀가 맞으면서 하나의 큰 그림이 완성된다.   

 

  한 번 읽었던 작품이기 때문에 대강의 얼개는 알고 있었지만, 다시 읽는 『인간의 증명』은 새로웠다. 원래 이 작품이 이렇게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지닌 작품이었나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돈은 그야말로 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사람 사이를 오가고, 인간은 무기물로 변한다. 오로지 돈만이 존재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인간보다 물질을 믿게 된다”라는 식으로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 대해 짚기도 하고, “애초에 요즘 엄마들은 조기교육이다 뭐다 해서 너무 조급하게 굴어. 아이의 재능은 언제 어디서 싹을 틔울지 모르는 일이야. 어릴 적부터 억지로 등을 떠밀어도 부모 마음대로 되라는 법은 없지. 대부분 부모의 허영과 이기심으로 아이를 경쟁시키는 거 아니겠니. 내가 보기에 치원, 국민학교 때부터 등수로 아이들을 줄 세우며 우쭐해하는 부모는 키우는 동물이 재롱떠는 걸 가지고 내가 잘났네, 네가 잘났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라는 식으로 어린 시절부터 무한경쟁사회로 내몰리는 아이들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자신의 실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개인주의나 도덕적 해이, 희박해지는 인간미 등에 대해 곳곳에서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 작품이 쓰여진 시기가 1970년대임을 감안할 때 사회를 바라보는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혜안에 탄복할 뿐이다.


  사건 자체를 따라가다보면 사건의 해결이 너무 우연에 기댄 감도 있고, 미국으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감정적인 면도 있어서 조금 아쉬웠지만, 이런 다소간의 아쉬움을 각각의 캐릭터가 완전히 상쇄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미군에게 짓밟혀 죽음에 이른 뒤 인간을 미워해 인간에 대한 반발감에 형사가 된 무네스에부터 아이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는 야스기 쿄코, 결국은 응석을 부리고 있을 뿐인 철없는 도련님 교헤이, 실종된 아내를 찾기 위해 아내의 내연남과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 오야마다, 할렘 출신의 형사 켄 등 각각의 인물은 저마다의 욕망과 가치관이 확고하다. 때로는 "인간이란 동물은 누구나 파헤쳐보면 '추악'이란 원소로 환원된다. 아무리 고매한 도덕가, 성숙하고 덕망 있는 성인의 가면을 쓰고 우정이나 자기희생을 역설하는 자라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기 보신의 주판을 튕기고 있다"는 무네스에의 생각처럼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이 책 속에서 '추악'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제각각 추구하는 바는 다를지 몰라도 저마다 자신의 주판을 튕겨 자신의 욕망을 좇는 사람들의 모습은 1970년대나 2010년대나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세월의 흐름에 묻히지 않고 『인간의 증명』은 지금까지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에 너무 감정에 호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방식 또한 작가 나름의 '인간의 증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그 '인간의 증명' 때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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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증명 증명 시리즈 3부작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2년 10월
품절


무네스에 고이치로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미워한다. 인간이란 동물은 누구나 파헤쳐보면 '추악'이란 원소로 환원된다. 아무리 고매한 도덕가, 성숙하고 덕망 있는 성인의 가면을 쓰고 우정이나 자기희생을 역설하는 자라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기 보신의 주판을 튕기고 있다. -37쪽

뉴욕에는 가지각색의 '세계제일'이 가득하다. 고층 빌딩, 월스트리트, 저널리즘, 교육 시설, 복합 기업, 문학, 미술, 음악, 연극, 패션, 요리, 다양한 오락……. 세계 제일의 상품이 몰려들어 더더욱 그 한도를 높여가는 것과 비례해, 악도 지하 깊숙이 그 흉측한 촉수를 뻗고 있었다. 살인, 방화, 절도, 강간, 매춘, 마약을 대표로 셀 수도 없는 갖가지 범죄가 판을 치고 있다. 이제 뉴욕의 상층과 하층은 너무나도 격차가 벌어져서 그 모순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거대한 뉴욕에서 자신을 잃고 초조해하며 자신의 바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몸부림치고 있다. 뉴욕의 아름다움의 밑바탕은 모두 추악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136~7쪽

한 마리 늑대처럼 외따로 움직이는 형사는 가공의 세계에나 등장한다. 수사가 완전히 조직화된 현재 경찰 조직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현대의 형사들은 조직과 형사소송법이라는 촘촘한 그물망 속에서 흉악범을 쫓고 있다. -257쪽

"요즘 경쟁이 심한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인생은 다 살아봐야 아는 거야. 막 인생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유치원생이나 국민학생들한테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겟니. 애초에 요즘 엄마들은 조기교육이다 뭐다 해서 너무 조급하게 굴어. 아이의 재능은 언제 어디서 싹을 틔울지 모르는 일이야. 어릴 적부터 억지로 등을 떠밀어도 부모 마음대로 되라는 법은 없지. 대부분 부모의 허영과 이기심으로 아이를 경쟁시키는 거 아니겠니. 내가 보기에 유치원, 국민학교 때부터 등수로 아이들을 줄 세우며 우쭐해하는 부모는 키우는 동물이 재롱떠는 걸 가지고 내가 잘났네, 네가 잘났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302쪽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듯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인종이 모자이크처럼 한데 모인 복합 국가이다. 국민 모두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놈'이다.
이런 국가에서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지기 쉽다. 사람들은 인간보다 물질은 믿게 된다. 세상에서 자동판매기가 가장 발달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음식물, 잡지, 승차권부터 대부분의 생활필수품을 자동판매기에서 살 수 있다.
외롭고 쓸쓸할 때, 곤란할 때, 실연당했을 때도 동전을 넣으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테이프 레코더로 인생의 고민에 다정하게 대답해준다.
거룩한 신의 가르침부터 독신자를 위한 전화 섹스 상대까지 동전 한 닢만 넣으면 주크박스의 선곡 버튼을 누르듯 원터치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322~3쪽

사람들은 그 간편함과 편리함, 확실성(어디서든 같은 물건을 살 수 있다)에 빠져 별 생각 없이 자동판매기를 이용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물신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스템이다.
절약으로 인건비를 아끼려 하지만, 그 전에 오직 돈이 인간을 잇는 매개체가 된다. 자동판매기만큼은 아니지만 역, 구장, 극장, 은행, 호텔, 모텔, 레스토랑, 주차장 등 사람과 돈이 모이는 곳에서 인간은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고 돈을 주고받는다. 처음부터 손만 보이도록 만들어놓은 곳도 있다. 돈은 그야말로 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사람 사이를 오가고, 인간은 무기물로 변한다. 오로지 돈만이 존재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323~4쪽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자네도 생각이 바뀔 게야."
"아내를 얻어 자식이 생겨도 인간이 모두 혼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평생 함께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헤어져야겠지만, 그래도 가족이 있으면 대부분의 인생을 함께 걷게 되지 않나."
"단순히 함께 걷는 것뿐이지 고독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족이나 친구들은 편대를 짜서 함께 날아가는 비행기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비행기?"
"네. 어떤 비행기가 고장 나거나 조종사가 부상을 입어 비행이 불가능해도 동료가 대신 조종해줄 수는 없죠. 옆으로 다가가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게 고작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실질적으로 아무 도움도 되지 않죠. 아무리 격려하고 응원해도 고장 난 기체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고 조종사가 회복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비행기를 날게 하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거 참 삭막한 사람이구먼."
"인생은 홀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설령 기체가 고장 나도 남의 비행기에 옮겨 탈 수는 없고, 대신 조종해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350~1쪽

남녀 사이에 우정이란 존재할 수 없다. 특히 둘 중 한쪽이 상대에 호감을 가지고 있을 경우, 친구로 지낸다는 것은 무시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이성인데도 상대는 친구라는 이름의 중성의 존재로 대한다. -456쪽

남녀 사이란 처음 계기를 놓치면 좀처럼 진전이 없는 법이다. 어제까지 '좋은 친구'로 지내다 갑자기 사랑 고백을 하기란 쉽지 않다. 성별 구분이 없는 담백한 친구 사이에서 남녀 관계로 발전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4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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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 (반양장)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호빗> 개봉에 맞춰서 <반지의 제왕>이나 다시 한 번 연달아 볼까 하다가 그냥 <호빗>에만 집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라기보다는 영화 세 편을 연달아 볼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없어서) 원작부터 읽기 시작했다. 작은 판형에 400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분량이라 처음에는 우습게 봤는데 이 안에 실로 많은 모험이 그려져 있어서 일주일 넘게 붙잡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지의 제왕』 은 이 정도 분량의 책이 영화 한 편이었다면 『호빗』은 이걸 영화 세 편으로 쪼갰으니 말이다. 『반지의 제왕』 이전의 이야기라지만 그 또한 본 지가 하도 오래되서 기억이 가물가물했고 골룸과 간달프 정도만 '아, 반갑네' 하면서 거의 백지 상태로 읽었지만 어느샌가 나도 호빗과 함께 '뜻밖의 여정'을 시작했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언덕에서 평온한 생활을 해온 골목쟁이네 빌보. 여느 날처럼, 모험이라고는 거리가 먼 아침을 맞이한 빌보 앞에 간달프가 나타난다. 간달프는 빌보에게 모험 어쩌고 하는 말을 꺼냈지만 모험보다는 가능하면 하루에 저녁 식사를 두 번 하고, 가끔 이웃들과 함께 파티를 하며 웃고 떠들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즐기기 좋아하는 평범한 호빗인 빌보는 황급히 그 자리를 뜬다. 하지만 기껏 간달프를 쫓아냈나 싶었더니 그날 저녁식사 시간에 빌보의 집에 난쟁이들이 찾아온다. 영문도 모른 채 손님을 맞이한 빌보. 엉겁결에 그들에게 저녁을 대접하면서 빌보는 난쟁이들이 자신들의 땅과 보물을 차지하고 있는 스마우그를 찾아 떠나는 길임을 알게 된다. 그러다 간달프가 자신을 이 모험대의 일원으로 지목했음을 알게 되고, 등 떠밀리듯 난쟁이들과 함께 외로운산을 향해 떠난다. 자신의 마을을 벗어나본 적도 없는 빌보가 상상도 못했던 모험과 만남이 이렇게 시작되는데……


  따지고 보면 스마우그의 보물을 되찾기 위한 단순한 모험담인 『호빗』은 이후 『반지의 제왕』의 주요 소재인 '절대반지'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사실 절대반지가 아니더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호빗: 뜻밖의 모험>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결국 스마우그의 보물을 손에 넣은 뒤 변해가는 난쟁이들의 모습은 절대반지를 잃고 분노하는 골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물질적인 부에 비교적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 빌보다. 어쩌면 이 부분이 간달프가 빌보(그리고 이후에 프로도)를 선택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보석 같은 물질적인 부보다는 자신이 가진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소박한 마음씨 말이다. 아무튼 『반지의 제왕』보다 등장인물도 작고 서사의 구조도 훨씬 소소한 모험담인 『호빗』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투는 없었지만, 중간중간 대사나 상황 때문에 빵빵 터지는 구석이 있어서 영화와 다른 의미에서 재미있었다. 이야기 초반에 화자는 "이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골목쟁이 집안의 한 호빗이 모험을 하게 되었고 예상치 못한 행동과 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가 이웃의 존경을 잃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얻기도 했다. 글쎄, 그가 결국 무엇을 얻었는지 어떤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라고 운을 띄우는데, 그의 말처럼 책을 다 읽자 빌보가 결국 얻은 것은 돈이나 타인의 존경(혹은 명예)이 아닌, 소박한 일상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싶어졌다.


  원작을 다 읽고 내친 김에 영화까지 봤는데, 원작과 영화는 닮은 점도 있었지만 몇몇 설정이 달라서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원작에서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운명의 이끌림에 따라 모험을 시작했던 빌보가 영화에서는 스스로의 결심으로 모험을 시작한다는 설정이나, 원작에서는 비중이 미미했던 참나무방패 소린의 비중이 늘어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난쟁이들의 전투력이 원작보다 향상되었다는 점 등이 눈에 띄었다. (원작에서는 허구한 날 도망다니기 바쁘던 난쟁이들이 영화에서는 결과야 어떻든 간에 이만하면 그래도 '용사'가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 원작에 각색을 더하고, 『호빗』 외에 번외 이야기까지 살을 붙여 영화는 (다소 드문 경우지만) 원작보다 더 보는 재미가 있었다. 3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이 끝날 때쯤에는 어여 연말이 와서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간만에 영화도 원작도 재미있는 작품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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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 (반양장)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절판


이 호빗은 아주 유복했고 이름은 골목쟁이네 빌보였다. 골목쟁이 집안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언덕에 살았고, 이웃들은 그들을 매우 점잖은 집안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부유할 뿐만 아니라, 모험이나 예상 밖의 일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목쟁이 집안의 호빗이 어떤 문제에 대해 뭐라고 대답할지는 괜히 귀찮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골목쟁이 집안의 한 호빗이 모험을 하게 되었고 예상치 못한 행동과 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가 이웃의 존경을 잃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얻기도 했다. 글쎄, 그가 결국 무엇을 얻었는지 어떤지는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14쪽

오늘날에는 호빗에 대해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호빗은 매우 희귀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큰사람이라고 부르는 우리에 대해 매우 부끄러움을 타고 숨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키가 우리 절반쯤 되고, 턱수염이 있는 난쟁이들보다 작은 인간이다. 호빗들은 턱수염이 나지 않는다. 그들은 마술을 거의, 아니 전혀 부릴 줄 모른다. 여러분이나 나같이 크고 어리석은 족속이 코끼리같이 쿵쿵대며 어슬렁거리면 1, 2킬로미터 밖에서도 그 소리를 듣고 조용히 재빠르게 사라지는 평범한 재주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배가 불룩 나오는 경향이 있으며, 보통 초록색이나 노란색 같은 밝은 색 옷을 입는다. 신발은 신지 않는다. 발바닥이 천연 가죽처럼 질기고, 머리카락과 똑같은 굵고 곱슬거리는 갈색 털이 발을 따뜻하게 감싸주기 때문이다. 재주 많은 갈색의 긴 손가락, 선량한 얼굴, 깊고 풍부한 웃음 소리……. 가능하면 하루에 저녁 식사를 두 번 하고, 먹고 나서는 특히 큰 소리롤 웃는다. -14~5쪽

"나도 용사를 한 명쯤 찾아보려 했지만 용사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로 싸우느라 바쁘고 이 근처엔 영웅이 귀하다네. 아니, 아예 찾을 수도 없지. 이 근방에서는 칼은 거의 무뎌졌고 도끼는 나무를 베는 데나 쓰이고 방패는 요람이나 접시 덮개로나 쓰이지. 다행히 용은 멀리 있으니까 전설적인 존재나 다름없게 되었지. 그게 내가 좀도둑 행각을 택한 이유라네. 특히 비밀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 다음부터 말일세. 그래서 우리의 작은 좀도둑 골목쟁이 빌보가 선택되고 선발되었지."-43쪽

참 이상하지만, 갖고 싶던 좋은 것들과 지내기에 쾌적하고 좋은 날들은 얘기할 것도 들을 것도 별로 없어서, 금방 이야기를 다 해 버리게 된다. 반면, 불안하고 가슴 두근거리고 심지어 무시무시한 것들은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어 어떻게든 길게 얘기하게 된다. -84쪽

소린이 난쟁이들에게 말했듯이, 무언가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눈으로 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법이다. 직접 눈으로 보면 대개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찾으려 했던 게 아닐 수도 있다. 이번에 바로 그런 경우였다. -93쪽

여기 깊은 땅 속 검은 물가에 작고 끈적거리는 동물, 늙은 골룸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나도 모른다. 마른 얼굴에 희미하게 빛나는 두 눈을 빼면 칠흑처럼 새까만 그가 바로 골룸이다. 그에게는 작은 보트가 있었는데 그 보트를 타고 아주 조용히 호수 위를 저어 다녔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호수였다. 호수는 넓고 깊고 몸서리쳐지게 차가웠다. 그는 양쪽으로 커다란 발을 늘어뜨리고 배를 저었지만 한 번도 잔물결을 일으키지 않았다. 절대로 말이다. 그는 창백한 등불처럼 생긴 눈으로 눈먼 물고기를 찾아다녔고 번개처럼 빠르게 긴 손가락으로 움켜쥐었다. 그는 살코기 역시 좋아했다. 잡을 수 있었을 때는 고블린도 맛있다고 생각했다.-112쪽

밤새 그는 자기 집 꿈을 꾸었고, 꿈에서 여러 방들을 모두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끝내 찾을 수 없었고, 그게 뭐였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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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3-01-0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빗을 읽은지도 벌써 (거의)10년이 지났네요. ㅠㅠ 저도 씨앗판을 읽었는데, 나중에 대구 올라가면 책을 찾아봐야겠네요. ^^

이매지 2013-01-09 14:12   좋아요 0 | URL
영화 보기 전에 보려고 읽고 있는데 생각보다 재미지네요. ㅎㅎ
<반지의 제왕> 읽는 것보다 부담스럽지도 않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