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구판절판


"다른 누군가가 너희들에게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해 주마. 전에 말했던 것처럼 문제는 너희가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거야. 너희는 사태가 어떻게 될 건지 듣긴 했지만, 아무도 진짜 분명하게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감히 말하건대 사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무척 만족하는 이들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 중 아무도 미국에 갈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그러니까 더이상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중략)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118~9쪽

우리는 온갖 사소한 문제를 두고 줄곧 싸워 댔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루스와 나는 특히 잠자리에 들기 직전 블랙 반의 다락에 있는 내 방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은 헤일셤의 공동 침실에서 소등 후 나누었던 그런 밀담의 후속타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낮 동안 아무리 사이가 툴어졌었다 해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루스와 나는 변함없이 내 매트리스에 나란히 앉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뜨거운 음료를 홀짝이며 새로운 생활에 대해 속내를 털어놓곤 했다.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이런 밀담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런 때 서로 어떤 이야기를 털어놓든 간에 상대가 그것을 깊이 배려하고 존중해 주리라는 믿음이었다. -178쪽

그리고 고독이라는 문제가 있다. 사람은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하는 것이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간병사가 된다는 것은 혼자가 되는 것이다. 혼자 차를 몰고 이 센터에서 저 센터로,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먼 길을 다녀야 하고, 토막잠을 자야 하고, 누구에게도 걱정거리를 털어놓을 수 없고, 누구와도 소리 내어 웃을 수 없다. 이따금 옛날에 알던 학생, 지금은 간병사나 기증자가 된 사람을 만나지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충분한 기회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늘 시간에 쫓기든가 그렇지 않을 때는 극도로 지쳐서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긴 근무 시간과 여행, 수면 부족은 존재의 내면으로 슬며시 들어와 당신의 일부가 되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태도와 시선과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서 그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285~6쪽

"이상해. 그 모든 게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몸을 돌려 다시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래, 정말 이상해. 그 시절이 자나가 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아."
"정말 이상해. 이제 와선 그런 게 전혀 상관없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상관이 있는걸."
"무슨 말인지 알아."-291쪽

루스는 눈길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표정 같은 것이 지나갔다. 영화에서 보면 상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동안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실수로 싸움이 일어나 총이 상대에게 넘어간다. 그러면 조금 전에 자기를 위협하던 사람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빛에는 온갖 종류의 복수가 가능해진 지금의 행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 순간 나를 바라보는 루스의 눈길이 바로 그러했다. -317쪽

"혹시 그 소문이 진짜라 해도 당신은 이런 일, 그러니까 당신을 찾아와 사랑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커플들에 진력이 나셨을 겁니다. 저희가 정말로 확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와서 번거롭게 해 드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확신이라고?" 마담이 아주 한참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으므로 우리는 둘 다 깜짝 놀라서 조금 뒤로 물러섰다. "'확신한다'고 했지, 너희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말인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지? 사랑이 그렇게 간단한 거라고 생각하나? 그러니까 너희는 사랑하고 있다는 거지,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이야. 요컨대 지금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빈정대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우리 각자에게 눈길을 주는 그녀의 눈에는 놀랍게도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너희는 그걸 믿는다는 거지? 너희가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그…… 집행 연기를 얻어 내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는 거지? 하지만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찾아온 거지?"-345~6쪽

네번째 기증이 끝나면 기술적으로는 목숨이 다했다 해도 의식이 어떤 식으로든 남아서 더 많은 기증이 이루어지리라는 사것을 본인이 안다. 그 경계 너머에서 여러 차례 기증이 이루어진다는 것, 더이상 회복 센터도 간병사도 친구도 없다는 것, 그들이 자기 몸에서 손을 뗄 때까지 기증이 연달아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은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흰 가운을 입은 이들도 그랬고 간병사들도 그랬다. 그리고 대개의 기증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토미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어떤 기증자가 그 문제를 화제에 올린다면 이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말을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림으로써 우리는 그 문제 전체에서 한발 물러선 셈이었다. -382쪽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속에서 두 사람은 온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부끄러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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