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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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편집 작접이 최종 국면을 맞이할 무렵에는 이미 전체 페이지 수가 정해져 있다. 조본(造本)이나 가격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페이지 수의 변경이 허락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사전 내용을 규정 페이지에 딱 맞게 앚힐 수 있을지, 편집자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재빨리 판단해야 한다. 때로는 울며 용례를 지우기도 하고, 때로는 뜻풀이 문장을 효율성 있게 줄이기도 해서 정연하게 페이지에 끼워 넣는다. 그야말로 남자가 지금 책장 앞에서 보인 퍼즐 맞추기 같은 센스를 요구한다. -20쪽

"전철에서 플랫폼에 내려서면 저는 일부러 천천히 걸어갑니다. 다른 승객들은 저를 추월해서 에컬레이터로 몰려가죠. 하지만 난투극이나 혼란 상황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처럼 두 줄로 서서 차례로 에스컬레이터를 타죠. 왼쪽은 서서 가는 줄, 오른쪽은 걸어서 올라가는 줄, 정확히 나눠져서. 아무리 러시아워여도 걱정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정경이랍니다."
(중략)
플랫폼에 넘쳐 나는 사람들이 빨려들듯이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줄을 서서 내려간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무수한 말이 분류되고 연관 지어지면서 질서 정연하게 사전의 페이지에 알맞게 들어가듯이. -34~5쪽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바다를 건너는 데 어울리는 배를 엮다. 그런 생각을 담아 아라키 씨와 내가 이름을 지었죠."-36쪽

마지메는 지금까지 줄곧 '특이한 녀석'이라는 부류에 있었다. 학교 생활에서도 회사 생활에서도 늘 따로 놀았다. 가끔 호기심과 호의로 말을 거는 살마이 있어도, 마지메의 응답이 너무 엉뚱한 탓인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바로 가 버린다. 마지메 본인은 진지하게 마음을 열고 응대한다고 하는데 도무지 잘되지 않았다.
그것이 고통스러워서 책을 읽게 되었다. 아무리 말을 못해도 상대가 책이라면 침착하게 깊고 조용히 대화할 수 있다. 또 하나, 학교 쉬는 시간에 책을 펴 놓고 있으면 친구들이 괜히 말을 걸지 않는다는 이점도 있었다.
독서 덕분에 마지메의 성적은 쑥쑥 올랐다.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인 '말'에 흥미를 느껴 대학에서는 언어학을 전공했다.
아무리 지식으로서의 말을 모아 보아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다. 허무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지메는 자신이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포기와 함께 반쯤 받아들였지만, 사전편집부로 이동한 뒤로 욕심이 났다. -45~6쪽

【연애】특정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 고양된 기분으로 둘이서만 함께 있고 싶고, 정신적인 일체감을 나누고 싶어 하며, 가능하다면 육체적인 일체감도 얻길 바라면서,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워하거나 드물게는 이루어져서 환희하는 상태에 있는 것. -53쪽

하나의 말을 정의하고 설명하려면 반드시 다른 말을 써야 한다. 말이라는 것을 이미지화 할 때마다 마지메의 뇌리에는 목제 도쿄타워 같은 것이 떠오른다. 서로 보충하고 서로 지탱하며 절묘한 균형으로 선 흔들리기 쉬운 탑. 이미 존재하는 사전을 아무리 비교해도, 아무리 많은 자료를 조사해도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말은 마지메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위태롭게 무너져 실체를 무산시킨다. -80~1쪽

아무리 말을 모으고 뜻풀이를 하고 정의를 내려도 사전에 진정한 의미의 완성은 없다. 한 권의 사전으로 정리했다고 생각한 순간, 말은 다시 꿈틀거리며 빠져나가서 형태를 바꿔 버린다. 사전 만들기에 참여한 이들의 노력과 열정을 가볍게 비웃으며, 한 번 더 잡아 보시지 하고 도발하듯이.
마지메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끊임없이 운동하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방대한 열량이 한순간에 보여 주는 사물의 모습을 보다 정확하게 건져 내 문자로 옮기는 일이다. -92쪽

뭔가에 진심으로 마음을 기울인다면 기대치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랑하는 상대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181쪽

많은 말을 가능한 한 정확히 모으는 것은 일그러짐이 적은 거울을 손에 넣는 것이다. 일그러짐이 적으면 적을수록 거기에 마음을 비추어 상대에게 내밀 때, 기분이나 생각이 깊고 또렷하게 전해진다.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고 울고 화를 낼 수 있다.
사전을 만든다는 건 의외로 즐겁고 소중한 일일지도 모른다.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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