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모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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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고전 미스터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바로 엘러리 퀸이다. 대학 시절 한창 미스터리에 빠져 있을 때 작정하고 엘러리 퀸 전집 독파에 나선 적이 있었다. 비극 시리즈야 더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재미있었지만 라이츠빌 시리즈와 국명 시리즈는 작품 간에 다소 편차가 있어 아쉽기도 했다. 그렇게 엘러리 퀸과 나는 한 시절을 함께했다. 이상한 건 그 다음부터였다. 다른 미스터리 작품 속에서 수없이 엘러리 퀸의 그림자를 마주했다. 가는 데 마다 나타나는 엘러리 퀸의 환영 때문에 그의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싶었지만 이미 시그마북스는 절판된 지 오래. 고전 미스터리가 하나둘 소개될 때 어디선가 '제대로' 된 엘러리 퀸 전집이 다시 안 나오나, 하고 마냥 애타게 기다렸는데 드디어 엘러리 퀸이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


  브로드웨이의 로마 극장에서는 <건플레이>라는 연극이 궂은 날씨도 개의치 않고 인기몰이중이다. <건플레이>의 2막이 끝나갈 무렵, 한 남자가 죽은 채 발견된다. 피해자는 악명 높은 변호사 몬테 필드. 만석인 극장에서 이상하게도 그를 둘러싼 좌석은 비어 있었고,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그가 쓰고 있었을 실크 모자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 원한을 사고 다녔던 터라 죽을 이유도, 그를 죽일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던 몬테 필드. 그는 왜, 그리고 어떻게 살해된 것일까? 리처드 퀸 경감과 그의 아들 엘러리 퀸. 두 사람은 '사라진 모자'를 찾아, 그리고 몬테 필드 살해범을 찾아 미스터리한 무대 위로 올라간다.


  기본적으로 엘러리 퀸의 작품은 '미스터리'지만 미스터리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엘러리 퀸 시리즈를 이끌어 가는 것은 리처드 퀸 경감과 엘러리 퀸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인내심이 필요한 사건에서는 단연 독보적"인 사람, "세세한 것까지 찾아내는 관찰력과, 복잡한 동기나 수법을 잊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 그리고 벽에 부딪쳤을 때 발휘되는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인 리처드 퀸 경감. 그런 퀸 경감보다 "직관력과 타고난 상상력"이 더 뛰어난 소설가인 아들 엘러리 퀸.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그들의 수준 높은 지적 능력이 제 힘이 발휘하지 못했지만, 일단 머리를 합치면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책 속의 언급처럼 자신도 능력이 되면서 많은 부분을 아들에게 의지하는 리처드 퀸과 그런 아버지의 투정을 가볍게 넘길 줄 아는 엘러리 퀸, 이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졌다. 부자(父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성격은 다르지만 만담을 하듯이 경쾌하게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사건의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어느샌가 느슨하게 사건을 관망하게 된다. 그렇게 방심하게 해놓고 턱 하니 '독자에의 도전'을 선포하는 모습이라니. 일전에 엘러리 퀸을 만난 적이 있기에 곧 도전장이 날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범인의 정체를 눈치채기 전에 한 방 맞았다.


  '독자에의 도전'을 할 정도로 엘러리 퀸 시리즈는 공정성을 중시한다. 독자는 모르는, 책 속의 인물만 아는 제3의 사실 같은 것은 없다. 드러난 정보만을 가지고 독자와 탐정이 공정한 출발선상에서 대결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엘러리 퀸의 가장 큰 매력이다. 범인의 정체가 드러난 뒤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어이없는 상황은 연출되지 않고, 그 대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퀸 부자의 활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회색 뇌세포를 운운하며 거들먹거리는 포와로나 입만 열었다 하면 청산유수인 파일로 밴스 같은 고전 추리소설 속 탐정에 비하면 퀸 부자의 캐릭터는 평범하기 짝이 없다. 어딘가 홈스와 왓슨을 연상케하지만, 홈스처럼 개성 강한 인물이 아닌 평범한 인물이라 친근하게 느껴졌다. 국명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이자 엘러리 퀸의 데뷔작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 비극 시리즈에 비하면야 내용이나 트릭은 영 아쉽지만 미스터리계의 한 획을 긋게 될 거장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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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12-01-09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스터리 소설을 자주 읽진 않지만 읽을 때마다 공정한 진행인지가 상당히 신경쓰여요. 어쩌면 비록 형식적일지라도 독자도 등장인물도 모르게 진행된다는 그 규칙 위에 지어진 작품이 더 성의있고 치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이매지 2012-01-09 00:36   좋아요 0 | URL
엘러리 퀸은 공정성을 앞세우고 있어서 확실히 자극적인 맛은 덜한 것 같아요. 사건 자체보다는 캐릭터에 집중되는 듯해요. 치밀한 작품은 그 나름의 맛이 있지만 때론 이런 나이브한 작품도 한번 읽어보셔요. ㅎㅎ

재는재로 2012-01-09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러리퀸은 사건을 논리적으로 풀어가죠 절대 사건을 완벽히 풀지않으면 절대 자신의 추리를 이야기하지 않죠
뭐니해도 최고는 y의 비극이죠 x,y,z 비극시리즈

이매지 2012-01-09 09:28   좋아요 0 | URL
Y의 비극이 엘러리 퀸의 최고봉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네요. ^^
자꾸 트릭을 까먹는 제게도 Y의 비극의 결말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

라로 2012-01-0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 보고 싶어요. 엘러리 퀸의 작품은 읽은게 하나도 없다는,,,^^;; 저도 이제 미스터리의 세께로 빠져 볼까봐요,,ㅎㅎㅎ

이매지 2012-01-09 17:41   좋아요 0 | URL
엘러리 퀸은 위의 재는재로님이 말씀하셨듯이 이 최고죠. ^^
국명 시리즈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역시 그쪽이 확 빠져들기에는 제격. ㅎㅎ

가넷 2012-01-10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의 비극은 어렸을적에 읽었는데, 내용은 거의 생각이 안나는데 딱 생각나는 건 세가지네요. 청산가리, 분홍색이 들어가 있는 책의 표지, 그리고 재미있었다는 감정만 남아 있네요. 로마모자 미스터리,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는 구입해 뒀는데 아직 안 읽고 있는데 조만간 읽어야 겠습니다.ㅎㅎ

이매지 2012-01-10 09:11   좋아요 0 | URL
Y의 비극에 대해서는 쉿. ㅎㅎ
저는 일단 나오는 족족 사고는 있어요. 부지런히 좀 읽어야 할 텐데... ㅠㅠㅠ

재는재로 2012-01-11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러리퀸의 책 제목이 잘붙인것도 있고 이해가 가지않는 제목도 있지 로마모자,그리스관등
 


日新又日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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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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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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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12-01-10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가 주제로군요..로마인이야기는 읽었을 듯 하고..
몇가지 더 있었던 듯 한데 막상 추천하려니 생각이 안납니다.
엘러리 퀸 이군요.ㅎㅎㅎ
리뷰는 제목만 봤습니다. 선입견 생기면 안되니깐^^

이매지 2012-01-11 09:04   좋아요 0 | URL
로마 모자 미스터리는 약간 사기(?)지만 그냥 로마가 갖다붙은 경우예요. ㅎㅎㅎ
배경은 미국 브로드웨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 읽었다고 올려놓은 두 권의 책 모두 로마와 관련이 있군요. ㅎㅎ
 
난반사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3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품절


옛날 영국의 한 유명한 미스터리 작가는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범인인 소설을 썼다. 아이의 '불운한' 죽음과 비슷한 사건을 딴 데서 찾으라면 그 미스터리 소설밖에 없을 것이다. 그랬다. 언뜻 불운한 사고로만 보이는 아이의 죽음은 사실 살인이었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합세해서 죄 없는 아이를 죽인, 더할 수 없이 이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죽음의 특이성을 알아채는 이 없이, 현장에는 누가 두었는지 알 길 없는 꽃만 놓여 있다. 범인들은 오늘도 자신들이 죽음으로 내몬 아이 따위는 깨끗이 잊은 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5~6쪽

딱 한 번이야, 딱 한 번. 가야마는 속으로 되풀이했다. 상습적으로 휴게소에 쓰레기를 버리는 비상식적인 사람과는 분명 죄의 무게가 다를 거야.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 이번 한 번만 봐주시길. 누구한테 그러는지, 가야마는 속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11쪽

고조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고조는 가족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핏줄만 이어져 있다고 다 가족은 아니다. 정신적인 유대관계가 있어야 진짜 가족이라 할 수 있지 않나. 그렇다면 고조에게는 가족이 없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충분한 애정을 쏟지 못한 고조는 당연한 응보로 지금 고독을 맛보고 있다. -22쪽

겨우 목이 아프다고 응급실을 찾다니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 했다. 그래서 일부러 증세가 심한 척했지만, 이렇게 한가하니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싶기도 했다.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야간진료라는 기발한 생각을 해낸 사람의 특권이라고 자신에게 변명했다. -39쪽

딱히 시청이나 이 직원에게 유감은 없지만, 가즈요는 공무원한테는 아무리 불만을 퍼부어도 괜찮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공무원은 편하게 돈 버는 직업의 대명사나 마찬가지니 이렇게 채찍질을 해주는 것도 시민의 의무라고 마음대로 판단했다. -78쪽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었다. 인간의 운명은 아주 사소한 일 하나로 갈린다는 사실이다. (중략) 운명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손으로 만지듯 생생하게 실감했다.
어떻게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시청사를 나와 정처 없이 걸으며 가야마는 여전히 생각했다. 사소한 일로 운명이 좌우된다면, 그만큼 어딘가에서 톱니가 잘못 맞물렸더라면 겐타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생각해도 소용없는 줄 알지만 역행하는 사고를 멈출 수가 없었다. -382~3쪽

한 사람 한 사람이 대는 '사정'은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이렇게까지 서로 이어지면 총체적인 죄의 크기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은 작은 게 사실이지만 결코 제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랐다. -425쪽

난 세상 사람들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다. 마침내 그런 결론을 내렸다. 비판 메일의 내용처럼 가야마가 규탄한 '사소한 이기주의'는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가 우연히 한 사람의 죽음으로 연결되었기에 특별하게 보일 뿐, 몇백만 몇천만의 사람들은 날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리라. 그것을 가리켜 '죄악'이라 규탄한 가야마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린 것인지도 몰랐다. 넌 뭐가 그리 잘났어, 하는 반발심이 비판 메일의 등 뒤에 비치는 것 같았다.
가야마의 의욕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회,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 건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주장만 하면 어느 시점에 파탄이 난다는 것은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도 알 수 있지 않나.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부러 상상력을 죽이고서 아무것도 못 본 척하는 것인가. 손안에 있는 코딱지만한 권리가 그토록 사랑스럽단 말인가. -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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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1-02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2012년 흑룡의 해,좋은일만 계시길 바라며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그리고 신년 새해 용꿈 꾸시라고 용 한마리 선물로 보냅니다
\▲▲/
( ^^ )
<(..)>
<(▶◀)>
<( = )>
<( = )>

━┛┗━

이매지 2012-01-03 08:59   좋아요 0 | URL
하핫,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좋은 책 많이 만나는 한 해 되시길!

2012-01-04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5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5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5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2-01-05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제가 한발 늦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이젠 베테랑 편집자 되셨지요?
전 참 님이 부럽네요
님이 대학교 다닐때부터 서재에서 뵈었는데 공부하고 어떤 일을 할 까 고민하시고 그러다가 만난 일
정말 근사하고 부러워요.
덕분에 저도 좋은 책 많이 소개도 받고 선물도 받았었지요.
갚지도 못하는 은혜
늘 마음에 담고 잊지 ㅇ낳고 고마워만 하네요

이매지 2012-01-05 17:56   좋아요 0 | URL
베테랑은 아니고 그냥 연차만 들었습니다. 하핫.
정말 하늘바람님과는 대학 시절부터 왕래했었군요. ^^
그때는 없었던 태은이도 태어나고 뭔가 신기하네요.
하늘바람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올해는 정말 좋은 일이 가득하셨으면...^^
 
난반사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3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사소한 이기주의'가 어떻게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 사회를 병들게 하는지 보여주는 수작. 누가 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뒷맛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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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12-27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완전 궁금하네요. 장바구니로 슝 넣어야겠어요.

이매지 2011-12-27 17:53   좋아요 0 | URL
와, 댓글 완전 실시간! ㅎㅎㅎ

... 2011-12-27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반사, 강추!

이매지 2011-12-27 18:00   좋아요 0 | URL
읽으면서 너무 서글퍼졌어요... 힝. 저도 강추!

다락방 2011-12-27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댓글도 실시간! ㅎㅎ

이매지 2011-12-28 13:00   좋아요 0 | URL
아, 실시간 놀이 끝나서 아쉬워요. ㅎㅎ
 
덧니가 보고 싶어 tam, 난다의 탐나는 이야기 1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를 '읽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은 모르는, 글이라고는 시덥잖은 리뷰 정도만 남기는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풀어가는 사람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작가가 나와 나이차가 별로 나지 않을 때면 더 그랬다. '얜 대체 뭘 읽고 컸지' 하는 생각에 슬쩍 질투가 나는 것이다. 동갑내기인 <덧니가 보고 싶어>의 작가 정세랑도 그랬다. 재화와 용기의 희한한 러브스토리에 낄낄거리다가도 괜시리 질투가 났던 책, <덧니가 보고 싶어>다.

 

  <덧니가 보고 싶어>는 장르소설가인 재화와 그의 전 남자친구인 용기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재화에게 용기는 "평생을 함께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지만 지구가 멸망한다면 마지막 하루를 함께하고 싶은 남자"였다. 용기에게 재화는 "불법 선팅 차량처럼" "막이 하나 씌워져 있는 것 같"은, "웃을 때 살짝 드러나는 덧니만이 이 세계에 속하는 것"같은 여자였다. 작가와 경비업체 직원이라는 직업상의 이미지만큼 갭이 큰 두 사람. 중간에 연결된 인물이 있지만 다시는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희한하게도 '텍스트'로 연결이 된다. 자신의 소설 속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용기를 모델로 한 남자 주인공을 아홉 번 죽인 재화. 단행본 작업차 재화가 작품을 퇴고를 시작하자 뜬금없이 용기의 몸에 그가 소설 속에서 죽은 방식이 문신처럼 새겨진다. 어긋난 좌표를 가진 두 사람은 재화의 소설이라는 보이지 않는 매개체를 통해 다시 조금씩 좌표가 수정된다. 이 두 사람의 좌표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런지. 

 

  <덧니가 보고 싶어>는 다층 구성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마릴린 먼로를 닮은 소녀 로봇도 나오고 처녀 공물을 요구하는 용도 나오고, 양치기를 사랑하는 알파카 양도 나오고, 워프를 못 하게 된 우주 항해사도 나오고, 얼음에 갇힌 여왕도 나온다. 판형도 아담하고 250페이지 남짓한 가벼운 장편소설인 <덧니가 보고 싶어> 속에는 크게 열 편(아홉 편의 삽화와 용기와 재화의 이야기)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신기하게도 전혀 산만하지 않다. 오히려 각각의 이야기와 큰 줄기의 이야기를 '농담처럼' 웃어 넘길 수 있어서 신선하기까지 했다. 


  소설을 읽으며 가끔 '누가 현실에서 이런 대사를 쳐'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문체가 책을 읽는 독자와 이야기 속의 인물을 투명한 막으로 막아놓는 것이 아닌가 싶어질 때가 있다. 이야기를 통해 감정의 변화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리얼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외국소설에 더 몰입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외국소설은 어차피 '내 주변의 이야기'라는 가정을 내려놓고 시작할 수 있으니...) 그런데 <덧니를 보고 싶어>를 읽으며 한국소설에도 이렇게 생생한 목소리로 발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줄 아는(그것도 지루하지 않게!) 작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문학이니 장르문학이니 하는 경계를 지을 필요도 없이, 이 책은 어쨌거나 사랑스럽다. 용기와 재화 두 주인공은 물론이거니와 터프한 선이 언니도, 서슴없이 직구를 던지는 용기의 여자친구도, 재화의 지원군인 편집자 조선배도, 심지어는 재화의 소설 속 주인공들도 매력적이다. 이야기 속에 있지만 마치 독자 곁에 있는 것 같이 살아서 숨쉬는 등장인물들. 활어처럼 펄떡펄떡 뛰는 소설은 정말 오랜만이지 싶었다. 첫 작가의 말에서 앞으로의 포부를 "농담이 되고 싶습니다. 간절히 농담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밝힌 정세랑. 그의 말처럼 앞으로의 행보가 세기를 뛰어넘는 '농담'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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