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초 : 한 남자 사랑의 기초
알랭 드 보통 지음, 우달임 옮김 / 톨 / 2012년 5월
구판절판


사랑은 간절한 바람,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 어떤 열병과도 같은 것, 끊임없는 성적 판타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유일무이하게 타당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느낌을 뜻했다. 헬렌 빌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감정은 더욱 특별하고 강렬해졌다. 그것은 연필로 그어진 몇 개의 선들만 가지고도 별 어려움 없이 어떤 얼굴을 떠올릴 수 있고, 단 몇 줄의 문장만으로 소설 속 등장인물의 성격을 그럴듯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과 흡사했다. 함께 휴가를 떠나 그리스 섬들을 돌아보고, 파티가 끝날 무렵 은밀한 미소를 주고받고, 기차에서 사랑을 나누고, 남은 생을 함께할 어떤 사람의 초상을 그려내는 데는 그녀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도 충분했다. -14~5쪽

이렇게 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특유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게 전념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관심한 사람을, 미지의 운명 혹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힘겨움을.
그리고 직시하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연인들의 첫번째 기대가 실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랑은 최대의 시련과 맞닥뜨린다는 사실을. -19쪽

에로티시즘이란 결국 벌거벗은 몸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는 심리적 기대감에서 비롯되는데, 어쩌면 스키복과 모자로 꽁꽁 싸매고 나란히 리프트에 앉아 산기슭을 오르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22쪽

현대의 바람직한 결혼생활을 통해 경험하리라고 기대되는 감정들 가운데 새삼스러울 만한 것은 전혀 없다. 그것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각종 예술과 문학작품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현대의 결혼에 담긴 야망이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결혼이 그러한 감정들을 평생에 걸쳐 반드시 '단 한 사람'에게만 품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28쪽

부르주아의 이상이 결코 허왕된 꿈은 아니다. 로맨스와 에로스, 그리고 가족이라는 세 가지 황금요소를 완벽하게 융화시킨 궁극의 결혼도 당연히 있다. 종종 냉소주의자들은 행복한 결혼은 신화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치부하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긴 해도, 궁극의 결혼은 분명 존재한다. 결혼이 우리의 소망에 부응하지 말아야 할 형이상학적 이유 같은 건 없다. 다만 상황이 우리에게 몹시 불리할 뿐이다. -34~5쪽

사회적 관계의 모순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훨씬 더 잘해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말만 많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직장 동료들은 하루 종일 성심성의껏 대하다가, 저녁에 집에 와선 잔소리를 평소보다 조금 심하게 했다거나 열쇠꾸러미 챙기는 걸 깜빡했다는 이유로 솜씨 좋고 상냥한 아내를 매몰차게 면박 주는 남자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마도 그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매우 진지한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고, 어쩌면 이런 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작정하고 싸우려면 먼저 그에게 아주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상대에게 욕을 하고 그 사람의 물건을 창밖으로 던져버릴 마음을 먹으려면 먼저 깊고 유별한, 진정한 애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42~3쪽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권리긴 하지만, 인류 대다수에게, 특히 우리가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라면 가급적 그런 끔찍한 특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충고가 늘 따라붙는다. -71쪽

창녀와 나쁜 남자는 소유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우리의 상처받기 쉬운 내면과 이상한 습벽들을 환기하는 영원한 목격자로 행세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섹스는 잘 아는 사람과 하기엔 지나치게 사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110쪽

우리를 둘러싼 현대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험천만한 기대를 주입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에 실망하지도 않고, 우리 또한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초자연적인 묘기는 경우에 따라서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133쪽

우리의 문화는 사랑도 믿고 일도 믿지만, 사랑을 위한 일의 가치는 믿지 않는다. 아직도 낭만적 충동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숙명적으로 끌린다. 연습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며, 만일 열습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헌신에 대한 약속이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라고 믿는다. -156쪽

한때 그는 용기를 다르게 생각했다. 어렸을 적 그는 용을 잡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행군을 그렸었다. 지금 그는 새로운 그림을 가졌다. 진정한 용기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상대의 약한 모습에 좌절하여 상처주지 않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이 상처받은 사람들로 보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죄에 오염되었다고 아이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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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2-05-1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안녕? 저 간만에 서재 기웃기웃하는데, 이매지님은 여전히 부지런부지런하시군요. 부럽고 부끄러워요.

이매지 2012-05-13 22:42   좋아요 0 | URL
엇. 생일주간인 네꼬님이다! ㅎㅎ
저 4월에 완전 태업하다가 몇 개 올렸는데 네꼬님이 부지런하다고 하시니 어쩐지 부끄럽구요. ㅎㅎ
 
신참자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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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소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내에 가장 많이 소개된 작가 중에 한 명인 히가시노 게이고. 워낙 다작을 하는 편이기도 하고(그래서 작품의 퀄리티가 들쑥날쑥하지만), 영상화해도 좋겠다 싶은 작품도 많다보니 그의 작품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든 경우가 꽤 많다. 더이상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용의자 X의 헌신>부터 <백야행>, <명탐정의 저주>, <유성의 인연>, <갈릴레오>, <비밀> 등 히가시노 게이고는 단순히 '미스터리'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로 다양한 독자(혹은 관객)을 만나왔다. 그렇게 많은 영상물 중에서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이 <신참자>였다. 가가 형사 시리즈야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적이 있었기에 가가 형사와는 구면이었지만 책으로 만나는 가가 형사와 아베 히로시의 모습으로 만나는 가가 형사는 사뭇 달랐다. 일본에서 드라마로 꽤 인기를 끌었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도 선정된 작품이라 금방 번역되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조금 시간이 걸려 출간된 <신참자>.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더 반갑게 읽기 시작했다. 

  혼자 살아가던 40대 이혼 여성 미쓰이 미네코가 도쿄 니혼바시의 한 아파트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혼자 살던 미쓰이 미네코. 왜 그녀가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인지, 대체 누가 그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인지 좀처럼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니혼바시 경찰서에 갓 부임한 형사 가가 교이치로는 관할서 형사로서 미쓰이 미네코 주변의 탐문수사를 시작하고, 닌교초 거리에서 그녀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센베이 가게, 민속 공예품점, 시곗방, 요정 등 아직 옛 풍경이 남아 있는 닌교초 거리.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히 고인 물처럼 무사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하지만 "이 거리에는 몇 개의 비밀과 거짓말이 잠들어 있다." 닌교초 사람들이 각자 품고 있는 소소한 거짓말 혹은 비밀. 이 거리의 '신참자'인 가가 형사는 조금씩 어느샌가 이 거리의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크게는 미쓰이 미네코란 여성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지만, 생전의 그녀의 모습을 되짚는 과정에서 가가 형사가 만나는 닌교초 사람들에 더 눈이 간다. 그들이 감추고 있는 사소한 비밀들. 그 비밀을 알아챈 가가 형사가 당사자들을 배려하면서 움직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앙금 또는 오해를 풀어주는 과정을 읽노라면 어딘가 너무 한가해보여서, 왜 잡으라는 범인은 안 잡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고 다니나 싶어지기도 한다. 이런 독자의 반응을 예상했던 것일까. 가가 형사는 이런 의문에 이렇게 답한다.

 

 "형사는 수사만 하는 게 아닙니다. 사건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또한 피해잡니다. 그 피해자를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이거 뭐 작가 스스로 <신참자>의 감상을 한 줄로 요약한 것 같다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피해자까지 신경 써주는 가가 형사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어쩐지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전에 출간된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도 그렇지만 가가 형사라는 캐릭터 자체가 배려심 있고 따뜻한 형사라는 점 외에는 사실 큰 개성이 없어서 아쉽기도 하고, 전체적인 전개가 사람에 맞춰져 있다보니 본격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한번쯤 닌교초 거리를 거닐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쯤 이 가슴 따뜻한 형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살인사건이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 두 사람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같은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얽히고설킨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드라마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라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으면 두 배로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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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5-1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의 가가 형사 좋더군요 아베 히로시의 드라마도 좋고 이번에 영화를 기대하고 있어요

이매지 2012-05-21 19:25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 기대하고 있어요.
아베 히로시와 가가 형사 은근히 참 잘 어울려요. ㅎㅎ

유부만두 2012-06-10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는 sp 까지 챙겨봤어요. 그런데, 범인이 누구였더라, 기억이 안나네요;;;

이매지 2012-06-11 13:28   좋아요 0 | URL
범인은 바로!!!! ㅎㅎㅎ
책으로 만나보셔요. ㅎㅎ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짧은 봄밤에 필스너 한 잔 하며 읽기 좋은 책. 심야식당의 일상추리소설 버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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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5-08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 그림이 좋군요.
근데 필스너란 음료가 있었나요? 그건 어떤 맛이기에...?^^

이매지 2012-05-08 12:01   좋아요 0 | URL
필스너는 맥주 브랜드입니다. ㅎ
책 표지는 커버랑 안이랑 조금 다른데, 둘 다 책의 내용을 담고 있지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품절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11쪽

내 학창시절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결코 그때가 그립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 학교였기 때문에,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제는 일화가 된 몇몇 사건과, 시간이 변모해가면서 확신으로 굳어진 덕분에 꽤 사실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게 된 몇몇 기억들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실제 사건들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질 순 없어도, 최소한 그런 일들이 남긴 인상에 대해서만은 정직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12~3쪽

인생에 문학 같은 결말은 없다는 것. 우리는 그것 또한 두려워했다. 우리 부모들을 보라. 그들이 문학의 소재가 된 적이 있었나? 기껏해야 진짜의, 진실된, 중요한 것들의 사회적 배경막의 일부로서 등장하는 구경꾼이나 방관자 정도라면 모르겠다. 그 중요한 것들이 무어냐고? 문학이 아우르는 모든 것이다. 사랑, 섹스, 윤리, 우정, 행복, 고통, 배반, 분륜, 선과 악, 영웅과 악당, 죄악과 순수, 야심, 권력, 정의, 혁명, 전쟁,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사회에 맞서는 개인, 성공과 실패, 살인, 자살, 죽음, 신 같은 것들. 아, 외양간올빼미도 있군. 물론 다른 종류의 문학도 있다. 연극적이고, 자기반영적이고, 눈물을 자아내는 자전적인 문학. 하지만 그런 건 지루한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가는 것이니까.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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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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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정정당당한 운동경기와 달라서, 패널티를 받아 퇴장하면 자기 대신 뛸 교체선수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규칙 자체가 바뀌어서 포지션이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8쪽

오 년이라. 혼마는 생각했다. 인생이 극에서 극으로 격변하기에 충분한 세월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가즈야의 입으로 들은 세키네 쇼코의 인상과 본인이 근무했던 이마이 사무기기의 분위기로 짐작건대 그녀는 좋은 쪽으로 변한 게 틀림없었다. -60쪽

"이 여자는 내가 아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닙니다. 만난 적도 없어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세키네 쇼코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얘기를 했어요."-77쪽

"피곤할 때는 설탕을 넣는 게 좋아요. 난 아내에게도 늘 그렇게 말하죠. 다이어트한다고 설탕은 안 넣으면서 피곤하다고 드링크제를 마신다니까요. 그러면서 항상 예민하게 곤두서 있어요.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일도 없을 겁니다. 누가 뭐래도 피곤할 때는 설탕이 최고예요."-94쪽

"화차여, 오늘은 내 집 앞을 스쳐 지나, 또 어느 가여운 곳으로 가려 하느냐." -145쪽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소비자신용은 젊은 층 이용자 개척에 힘을 쏟고 있으니까요. 어느 업계나 마찬가지겠지만, 기업은 고객에게 달콤한 말밖에 안 합니다. 이쪽이 현명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현 상태에서는 그 부분이 뻥 뚫려 있는 겁니다. 대형 도시은행에서 학생용 신용카드를 발행한 지 올해로 딱 이십 년째인데, 그 이십 년 동안 어느 대학교가, 고등학교가, 중학교가 이 신용사회에서의 올바른 카드 사용법을 지도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죠. 도립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을 모아 메이크업 강습을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멋을 부릴 여유가 있으면 신용사회로 나가는 데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강습도 같이 해야 옳은 거 아닙니까?"-160쪽

밝은 꽃무늬 벽지 한 장을 뜯어내면 그 안에는 철근으로 지탱되는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감춰져 있다. 누구도 쉽게 돌파할 수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는 굳건한 벽이. -189쪽

뭐든 꿀꺽 삼켜서 곧바로 동화시켜버리는 도쿄라는 도시에 들어와도, 간사이 사람만은 신기하게 타고난 제 빛깔을 잃지 않는다. 간사이 사투리에도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말끝이 이른바 '표준어'로 바뀌어도 억양만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금세 간사이 출신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혼마는 그런 면에 일말의 동경을 품기도 했다. 자기는 도쿄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완전한 도쿄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출신의 근거로 삼을 만큼 강렬한 '고향'의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7쪽

그나저나 공공장소에서 휴대전화로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왜 하나같이 목소리가 크고 멍청해 보일까. -213쪽

정상적으로 원만하게 달리는 기관차를 서서히 위험한 언덕길로, 썩은 다리가 걸려 있는 벼랑 끝으로 유도하는 조그만 선로 전환기. 하나, 또 하나가 소리도 없이 변환되면서 진로를 바꿔나간다.
채무를 끌어안은 본인도 자기를 움직인 그 전환기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어디에 있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216쪽

이건 역시 일회용 소비 같은 사회 분위기 탓이 아닐까 저는 생각해요. 분에 넘치는 소비 행태 말이에요. 사람들 생활은 모두 풍요로워졌는데, 돈의 사용에 관한 교육은 이뤄지고 있지 않잖아요. -219쪽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모쓰는 은근히 흐뭇해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렇지. 엄청나게 노력했잖아. 그렇지만 노력해서 좋아졌다는 건 역시 재능이 있다는 뜻이야. 안 되는 사람은 제아무리 좋아해도 안 돼. 다모짱은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게 있었고, 좋아하는 일에 재능이 있었고, 게다가 그 길로 나아가는 데 방해도 없었잖아. 그게 가장 큰 행복 아닐까?" -247쪽

언뜻 반대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알리바이를 더 중요시하는 것은 일반인이 아니라 형사 쪽이다. 제아무리 수상쩍어도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다면 수사하는 측에서는 용의선상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다른 곳에서 진범을 찾아낼 궁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은 의외로 고집이 세서, 한번 '이 녀석이 수상하다'고 믿어버리면 "알리바이가 있어도 보나마나 날조했을 거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무고한 죄를 뒤집어쓴 사람이 재수사나 재심에서 무죄가 입증되어도 지역 주민이나 친척들한테는 여전히 범인 취급을 받고 백안시당하는 까닭도 이런 심리 때문일 것이다. 과학수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형사는 혈액형의 미세한 차이에도 영향을 받아 수사 대상을 바꾸지만, 일반인은 '그런 걸 어떻게 믿느냐'며 일축해버리곤 한다. -267쪽

그러나 풍경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만 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앉아 있어도 혼마는 신조 교코가 본 오사카 거리를 볼 수 없었다. 그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317쪽

그렇다면 나는 왜 신조 교코를 찾는 걸까?
단순한 습관일까. 어차피 시작한 일이지만, 가즈야에 대한 동정 때문일까. 호기심일까.
그렇다…… 굳이 따지자면 마지막 이유일지도 모른다. 호기심이다.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신조 교코라는 인간을. 그리고 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대체 왜 이런 일을 했는지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을. -329~330쪽

"저기, 뱀이 탈피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탈피?"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혼마보다 앞서 다모쓰가 대답했다. "성장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후미에가 웃었다. "아니에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다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뱀은 뱀이니까. 그냥 뱀이니까. 후미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뱀은 생각해요. 다리가 있는 게 좋다, 다리가 있는 게 행복하다고. 거기까지가 우리 남편의 학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내 학설인데,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3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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