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노스케 이야기 오늘의 일본문학 7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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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다 슈이치에 대해서는 딱히 열광적으로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마땅히 꺼리지도 않는 어정쩡한 상태. 하지만 오랫만에 접하는 그의 청춘소설이기도 하거니와, 번역서로는 독특하게도 한일 양국에서 같은 시기에 발행된 책이라는 점에 관심이 갔다. 게다가 나온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9점이 넘는 꽤 괜찮은 평점이라는 사실에 낚여 주섬주섬 <요노스케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 책은 '요노스케'의 이야기다. 쭉 시골에서 살다가 대학 진학을 계기로 마침내 도쿄로 올라와 홀로 살게 된 요노스케, 그의 풋풋한 도쿄에서의 일 년이 매달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난다. 4월의 어느 날, 고등학교 졸업 앨범과 낡아빠진 학교 체육복, 늘 사용하던 대리석 받침대의 탁상시계 등이 든 묵직한 가방을 메고 비틀비틀 신주쿠에 등장하는 것에서부터 입학식, 삼바 동호회 가입, 야간 호텔 아르바이트, 풋풋한 데이트 등으로 요노스케는 바쁘게 살아간다. 딱히 아는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자신만의 색깔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그의 모습은 지금은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명료하지만, 10년 쯤 지났을 때 어떤 형상을 만들기 위한 과정처럼 그려진다. 

  어리바리하고 별다른 걱정이나 계획도 없어 보이는 요노스케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이 술술 잘 읽힌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 없는 부잣집 아가씨 쇼코와의 긴가민가 갸웃갸웃한 연애도, 야간 아르바이트와 학교 생활을 병행하는 빡빡한 신입생 시절도 어쩐지 '아, 나도 저렇게 멋 모르고 순수한 때가 있었지'라는 아련한 추억에 잠기게 했다. 요노스케의 낙천적인 면모와 풋풋함은 왠지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띤 채 책을 읽어가게 만들었다.

  요노스케의 도쿄에서의 1년을 다룬 이 책은 제법 두께가 있지만, 요시다 슈이치의 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딱히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인생이라는 것은 한순간의 경험으로 바뀔 수 있다는 기본적인 메시지 외에는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요노스케와 친구들의 왁자지껄하고 약간은 맹한 에피소드에 어쩐지 키득거리기도 했지만, 책을 내려놓고 나니 크게 인상 깊은 부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앞전에 접한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이 <악인>이라 더 비교가 된 듯한데, 역자도 후기에서 밝혔듯이 <악인>의 경우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심리, 선악 판단과 같은 문제제기와 심오한 의미에 압도'되었다면 <요노스케 이야기>는 '가볍고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쪽이다. 역자는 '소설 구조의 묘미와 소설 쓰기의 전범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이 책을 평했는데, 사실 구조 면에 있어서도 어쩐지 끼어맞추기 식으로 진행된 것 같아 썩 흥미롭지 않았다.

  책 속에서도 요노스케의 매력으로 어중간함을 꼽는데, 이 책의 매력도 요노스케의 매력과 같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 들고 마음을 터놓게도 하지만, 어딘가 못 미덥기도 한, 요노스케라는 인물에 걸맞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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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계곡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0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0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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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딱 한 가지만은 나도 알 것 같다. 그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진실은 우리를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는 것. 내 귀로 듣거나 내 입으로 수없이 말했던 진실과는 달리, 나는 작은 방이나 감방에 앉아 남루한 사람들에게 지은 죄를 빨리 자백하라고 다그쳤다. 나는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그들을 속였다. 진실은 당신을 구원하거나 온전하게 되돌려주지 않는다. 거짓과 비밀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지도 않으며 가슴의 상처를 치유해 주지도 않는다. 내가 본 진실들은 쇠사슬처럼 나를 묶어 캄캄한 방으로 끌어내리고, 유령들이 사는 그 지하세계에서는 희생자들이 뱀처럼 내 주위를 기어 다닌다. 그곳에서 진실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곳에는 사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 사악한 것이 당신의 입과 콧속으로 독기를 뿜어 넣어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진실이다. -10쪽

우리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거나 나사가 빠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또 자신이 영원한 아웃사이더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렇지만 아이의 순진무구함은 우리를 제자리로 돌려주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나는 늦게야 이걸 깨달았지만 너무 늦진 않았다. 너무 늦는 법은 없으니까. 매디가 이 세상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선택했던 길과 내가 알게 된 것들로 인해 나는 오염된 느낌이다. 그런 것들 중 단 한 가지도 매디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없다. 나는 매디가 오히려 나를 가르쳐주길 원했다.
그래서 나는 매디에게 "그래, 버거 킹과 데어리 퀸은 아주 행복하단다. 함께 멋진 삶을 살고 있지"라고 대답해 주었다. 딸아이가 아직 그런 동화들을 믿을 수 있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제 곧 그런 것들을 빼앗길 때가 닥쳐올 것임을 알고 있기에.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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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1-19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도 당근 마이클 코넬리를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이매지 2010-01-19 10:20   좋아요 0 | URL
저도 당근 코넬리 좋아합니다 ㅎㅎㅎㅎ
근데 이거 읽으면 남은 코넬리 작품이 달랑 두 권이라는 게 아쉽 ㅠ
원서라도 읽어야 하나 싶어지네요 ㅎㅎ
 
<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 - 공정무역 따라 돌아본 13개 나라 공정한 사람들과의 4년간의 기록
박창순 외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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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부터 공정무역에 대해서 너무 개략적인 정보로만 알고 있어서 한 번쯤 제대로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공정무역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거래>의 뒷 이야기라 할 수 있을 이 책은 세계 각국에서 공정무역을 취재하면서, 과연 공정무역이란 무엇인지, 현재 공정무역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공정무역의 소비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서부터 시작해, 공정무역으로 면화를 수출하고 있는 인도, 아름다운가게에서 판매중인 '히말라야의 선물'의 원산지인 네팔, 공정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영국, 국제공정무역연합 사무국이 위치한 네덜란드, 공정무역으로 설탕을 거래하는 필리핀, 국민 한 사람당 공정무역 제품을 가장 많이 구입하는 스위스 등 이 책을 다양한 나라를 취재하면서 그곳에서 보고 느낀 공정무역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동안 막연히 공정무역이라고 하면 값이 조금 더 비싸지만 생산자의 이익을 위한 거래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공정무역으로 생산이 이뤄지고 있는 곳의 모습을 접해보니 제품에 대해서도 믿음이 생겼고, 공정무역이 단순히 그들에게 수익을 가져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것 같아 가슴 한 켠이 따뜻해졌다.

  저자는 세계 곳곳에서 공정무역사업가들과 만나면서 공정무역이 때묻지 않은 무역만은 아님을 느낀다. 공정무역사업가 중에서도 잇속을 따지는 이도 있었고, 대량생산으로 이뤄지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과정에 대해 자문하고, 공정무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이 책에서 기대했던 것은 공정무역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A to Z였는데, 공정무역이 현지에서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줘서 기대에는 못 미쳤던 것 같다. 또, 삽화가 제법 많이 수록되어 있었지만 크기가 작고 톤이 어두운 편이라 명확히 볼 수 없었던 점도 서운했다. 하지만 현재 공정무역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으며, 앞으로 한국의 공정무역이 나아갈 길에 대해 궁금하다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고 나니 조만간 아름다운가게에 들러 커피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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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1-18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가게에서 커피도 팔아요???와아

이매지 2010-01-18 09:47   좋아요 0 | URL
히말라야의 선물, 안데스의 선물.
이렇게 두 가지 커피를 판매하고 있어요~
알라딘에도 입점해 있으니 나중에 책 사실 때 같이 구매해보세요~

하늘바람 2010-01-18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도 서평단이시군요.

이매지 2010-01-18 09:48   좋아요 0 | URL
올해는 인문책 좀 읽어볼까하고 신청했어요 ㅎㅎ
 
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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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의 무엇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일까? 뛰어난 그림 솜씨 때문일까? 가슴 뭉클하게 하는 사연 때문일까? 아니면 청조 문사들의 제영題詠 때문일까? 물론 어느 하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한도>에 서문이 없다면 이처럼 감동이 밀려오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고, <세한도>에 청조 문사들의 제영이 없었다면 이처럼 자랑스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한도>에 인장 하나 제목 하나라도 지금처럼 붙어 있지 않았다면, 이런 찬사가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한도>가 탄생하고 지금껏 전해지기까지 가슴 뭉클한 사연이 없었다면 이렇게 열광적인 찬사를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한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세한도>가 탄생하고 유전流轉된 과정은 그 자체가 19세기 조선 학예의 총화이다. 단순히 그림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그림이기 이전에 한 시대 학술과 문화의 결정체이다. <세한도>에 대한 연구가 미술사 연구자들만의 전유물일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7쪽

추사 김정희는 연행과 북학의 시대, 19세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 서, 화에서부터 감상, 금석학, 경학, 고증학에 이르기까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자신만의 경지를 구축함으로써 일찍부터 역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역관들과 교유하며 그들의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주기도 했다. 한편, 역관들은 훗날 청조 문사들과의 교유에 있어 추사의 중요한 정보원이 되었고, 지식의 공급원이 되었다. -18쪽

나와 이재와 추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석교石交이다. 서로 만나면 정치적 득실과 인물의 시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영리榮利와 재물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고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화를 품평할 뿐이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문득 슬퍼하며 실성한 듯하였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근심과 질병을 제외하고도 오르막과 내리막, 슬픈 일과 즐거운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하루라도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하루라도 만나지 않는 날이 없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도장은 그 사람의 성명과 자호字號가 모두 그곳에 있으니 마치 그 사람을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옛 그림 하나를 구하면 오른쪽 왼쪽 여백에 모두 두 사람의 도장을 찍어 얼굴을 대신하는 자료로 여겼다. 그러면 만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77쪽

아! 나는 형벌을 받을 때도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는데, 이제 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놀라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마음을 진정할 수 없으니 이 무슨 까닭인가요. 아! 모든 사람이 다 죽게 마련이지만 부인만은 죽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죽어서는 안 되는데 죽었으니 죽어서도 지극한 슬픔을 머금고 기막힌 원한을 품어서 뿜어내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되어 족히 지아비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것이 형벌보다도 유배보다도 더욱더 심했던 게 아니겠습니까. 아! 삼십 년 동안 그 효행과 그 덕망은 종당宗黨에서 칭찬했을 뿐만이 아니라, 친구와 외인外人들마저도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도리상 당연한 일이라 하며 부인은 그 칭찬을 즐겨 받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나는 장난 삼아 "부인이 죽는다면 내가 먼저 죽는 게 낫지 않겠소?"라고 했더니, 부인은 이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크게 놀라 곧장 귀를 가리고 멀리 달아나서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91~2쪽

이상적은 추사가 유배를 떠나기 전 이미 5차례에 걸친 연행을 했었다. 그는 연행할 때마다 추사를 위해 청나라 학계의 최신 정보를 전해주었고, 진귀한 서적들을 구해다주었다. 평소에 교분이 있던 사람들도 바다 밖 멀리 유배된 자신을 위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유배 가기 전이나 유배 간 뒤나 언제나 똑같이 자신을 대하고 있는 우선의 행동을 보면서 추사는 문득 『논어』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자한」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는 구절이었다. 공자가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듯이, 사람도 어려운 지경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는 우선이야말로 공자가 인정했던 송백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선에게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었지만 바다 멀리 유배객 신세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적의 뒤를 봐줄 수도 없었고, 그에게 돈을 줄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붓을 든 추사는 자신의 처지와 우선의 절개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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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겨레] 은행원이 ‘세한도 비밀’ 매듭 풀었다
    from 毘盧峰 想像頭에서 2010-01-16 21:29 
    은행원이 ‘세한도 비밀’ 매듭 풀었다 한겨레 | 입력 2010.01.12 14:40 | 수정 2010.01.12 15:31 | #EXTENSIBLE_WRAP {position:relative;z-index:4000;height:250px;} #EXTENSIBLE_BANNER_WRAP {} #EXTENSIBLE_BANNER {position:relative;width:250px;height:0px;z-index:4000
 
 
 
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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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2009년의 마지막 책이라 생각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해를 넘겨 1년 만에 끝냈다. 워낙 두꺼운 책에 겁을 먹었지만 오래 전부터 '꼭 한 번은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던 책이기에 나름 굳게 마음을 먹고 읽기 시작. 같은 책을 페이지가 암만 두꺼워도 어지간해서 삼 일 내로 끝냈던 내게 근 보름이 넘도록 붙잡고 있게 한 톨스토이와의 첫 만남은 역시 예상처럼 녹록치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성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던 것은 나도 모르게 이 작품에 빠져 들었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100페이지가 넘도록 도무지 주인공 안나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1권 중반이 되서야 오랜 기다림 끝에 안나는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려 위기에 처한 오빠를 구해줄 사랑스러운 여동생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오빠를 위해 달려온 모스크바에서 안나는 브론스키라는 젊은 귀족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애초에 애정이 없는 결혼을 했던 안나와 결혼이라는 매개로 한 여자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브론스키의 불꽃 같은 사랑. 하지만 톨스토이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을 마냥 행복한 것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남편도, 아이도 버리고 결국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선택하는 안나는 자신의 부정한 행동으로 인해 사교계에서 배제 당하고, 기존에 알고 지냈던 이들과의 관계도 무너진다. 누구보다 매력이 넘쳤지만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씩 잃은 안나에게 남은 것은 브론스키뿐. 이에 안나는 끝없이 브론스키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의 사랑을 확인받고자 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조금씩 파먹기 시작한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안나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자유로운 삶이 아닌 끊임없이 변덕을 부리고, 브론스키의 사랑을 확인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자기 자신과 브론스키에게 얽매인 삶을 살아간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아름다웠던 안나가 조금씩 사랑에 집착하고 삶이 자신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아 정신적, 육체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새삼 '사랑이란 얼마나 파괴적인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외줄 위를 홀로 걸어가는 안나. 그 끝에는 행복이, 그리고 사랑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안나는 불안한 발걸음을 내딛지만, 결국 그녀는 그 끝에 이르지 못한다. 
 
  사실 처음에는 대체 '안나 카레니나'가 어떤 여자길래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정작 책을 읽으면서는 안나보다 레빈에 더 관심이 갔다. 19세기 러시아에 대해서는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백퍼센트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톨스토이가 독자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레빈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만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에 그것을 두려워하는 모습, 무신론자에 가까운 그가 신의 존재에 대해 번뇌하는 모습, 열심히 일하지만 그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농민들을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찾는 모습 등 레빈의 삶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것은 당시 러시아는 물론이고 현대에까지 그 생명력을 가진 인간 보편의 문제였다. 부의 재분배, 종교적 갈등, 사랑, 죽음, 탄생 등 레빈을 통해 톨스토이도, 독자도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번뇌하게 만들었다. 책을 읽는 속도가 느려졌던 것은 순전히 레빈 때문이었지만, 책을 읽고 나서도 자꾸만 이 책이 생각나게 만드는 것도 안나가 아닌 바로 레빈이었다.(물론 안나도 매력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으지만)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어 이성 혹은 감성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두 인물의 캐릭터 자체가 상반돼 더욱 균형 잡힌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 안나가 반짝 타오르는 불꽃 같은 존재라면, 화로 속 불씨처럼 겉으로 보기엔 잘 보이지 않아도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씨를 가진 레빈의 대비는 이야기의 또 하나의 재미였다. 안나의 삶은 처참하게 끝나지만 레빈의 삶이 계속되는 까닭도 그의 사유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레빈의 끝없는 고민은 어쨌거나 그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자양분이 된다. 그저 탁상공론으로 그칠 '사고'가 아닌 직접 풀베기에 동참하는 것 같은 '행동'이 있었기에 레빈의 삶은 좀더 현실적이고, 온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만약 <안나 카레니나>라는 제목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안나의 이야기만을 담았다면 나는 그저 사랑의 포로가 된 안나를 그저 불쌍히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빈의 이야기와 안나의 이야기를 함께 접함으로 오히려 안나를 그저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버렸지만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여자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과 한 여자로서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한 여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책의 중심축이 안나와 레빈에 있기에 자연스레 그들에게 관심이 집중됐지만, 주변 인물들도 결코 가벼이 넘겨볼 수 없었다. 애정과 관계 없이 살아가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렇지 않은 척하며 살아가는 안나의 남편 카레닌이나 아직은 엄마가 그리운, 하지만 엄마를 마음껏 그리워할 수 없는 가엾은 세료쥐아, 한때는 브론스키에게 반한 적이 있지만 결국 레빈의 진실한 사랑을 느끼게 된 키티와 같이 레빈과 키티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이들 외에도 레빈이 만나는 일꾼들까지 누구 하나 쉽게 넘겨볼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등장은 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3권 모두 합치면 천 페이지가 넘는 무지막지한 분량에 곳곳에 철학적인 면이 담겨 있어 녹록치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한 번 읽고 나니 다시 한 번 이 고통을 되풀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나 발레 공연 등 지금도 끝없이 변주되고 있는 <안나 카레니나>. 이전에 <톨스토이 단편선>이 유행했을 때에도 안 읽었던 톨스토이를 이제사 읽어보니 '이것이 톨스토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가 톨스토이 100주기라고 전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행사도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 데, 겸사겸사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도 한 번 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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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15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에는 안나 카레니나를 꼭 읽어보겠어요. 불끈!!

이매지 2010-01-15 09:0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다락방님 지금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보시겠다고 불끈하시고는,
추천도 한 방 안 해주시고 가신거죠? ㅎㅎㅎ

다락방 2010-01-15 11:41   좋아요 0 | URL
그래서 지금 다시 돌아와서 추천 했어요. ㅎㅎ

이매지 2010-01-15 11:4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역시!

카스피 2010-01-15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무지막지하게 깁니다.저는 러시아에서 제작된 영화 안나카레리나를 봤는데 처음 눈이 내리는 벌판에 마차기 클로즈업 되는 장면만 30분이라 기겁을 한적이 있지요(이영화 8시간짜리더군요) ㅜ.ㅜ

이매지 2010-01-15 11:46   좋아요 0 | URL
헉. 8시간짜리 영화라니!
하기사 안나 카레니나의 이야기를 모두 담아내기엔 8시간도 부족할 것 같네요ㅎ

... 2010-01-1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성으로 읽으신 안나 카레니나를 리뷰까지 근성있게 쓰셨군요. 저도 추천!
읽을 때도 좋지만 좀 지나고 나면, 와아아아~~ 정말 대단한 책이었잖아? 하게 되지 않던가요?

이매지 2010-01-16 00:31   좋아요 0 | URL
리뷰도 근성으로 ㅎㅎㅎ
읽을 때는 좋았다가 시무룩했다가 왔다갔다 했는데,
좀 지나고 나니까 확실히 와아아아~가 되더군요 :)

순오기 2010-01-1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니 존경스러워요~ 학창시절 도전했다 나가 떨어졌던 책이라, 아직도 잡을 생각 못해요.ㅜㅜ

이매지 2010-01-17 23:20   좋아요 0 | URL
이 참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보심은 ㅎㅎㅎ
확실히 어떤 책들은 나이가 좀 들어서 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