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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부모는 아이를 느리게 키운다
신의진 지음 / 걷는나무 / 2010년 6월
평점 :
요몇일 꾸는 꿈들이 수상하다. 의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무의식중에 들러붙어 껄끄럽게 하는 뭔가가 있었나보다. 요즘 우리 큰아이 꿈을 잘 꾼다. 육아와 교육에 있어 '불안'이 크다는 점의 반영이 다름 아닐 것이다.
어그제 꿈은 우리 큰애가 고3이 되어 있었다. 마치 타임머신 타고 미리 가본 것처럼, 고3 우리 아이의 진학 예정 상황에 대해, 평소 일면식 없는 제3의 인물에게 브리핑을 받고 있었다. 아이는 난곡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꿈속에서 들은 이 학교 정보는 명문고교는 아니고, 학생수가 엄청 많은 큰 규모 학교였다.
아이가 웬만한(‘원하는’이 아니고) 대학에 들어갈 성적이 안 되어서 담임 선생님이 힘써 주시느라, 아이를 반장을 시켰단다. 담임의 노고에 치하해야 한다는 듯.
최근 내 의식을 통해서 나는 이 꿈 한 토막을 잘게 분석할 수 있다.
먼저 아이가 고3으로 나온 것은, 이 아이가 십몇 년 후에는 어떻게 자라 있을까? 나의 무의식에서는 가시밭은 가지도 않고, 저 멀리 결승점 언저리에서의 상황이 어떨지 그런 걸 몹시 궁금해하고 있었나보다. 아이는 내가 만드는 프로젝트가 아니기에 푸쉬한다고 해서, 그 길로만 가는 게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다. 역으로 여러 책들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아이를 믿거라 해두고, 기다린다고 해서 내 아이가 잘 자랄거다 라는 저자의 의견들에 100% 확신을 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아이의 운명이란 부모의 활시위를 떠나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 될 거라고.
그리고 난곡고등학교는 실제로 있나 모르겠다. (없다) 다만, 퇴근 버스를 타면, 난곡이 경유지이다. 회사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남서울중학교 정류장에서 내려 갈아타는데, 그때 인근 성보고등학교 남학생들을 많이 본다. 그 친구들을 보면서 십년 후면 우리애가 딱 저 나이인데, 학교 근처에 집이 있지 않고, 버스를 타고 가야 얼마를 가야 집이 나오나 보다. 그런 생각도 하고, 같은 구이기는 하지만, 꽤 거리가 있는데, 혹시 우리아이도 이 학교에 진학할지도 모르는 걸까 하는 생각도 했던 듯. 그러니까 난곡고등학교의 배경은 성보고등학교가 되겠다. 근데, 이 학교가 학생수가 많은 학교로 등장한 것, 이것은 일단 지금 보내고 있는 초등학교의 학급 정원은 20명 내외이고, 한 학년이 세 반으로 이루어진 소규모학교이다 보니, 큰학교는 어떻게 학사 일정이 꾸려질까? 그런 생각에서 나왔을까? 아니면, 일단 학생수가 많으면, 잘하든 못하든 큰물이기 때문에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물론 초등학교의 경우, 학급당 인원이 적고 학급수도 적은 것이 좋은 점이 더 많다는 판단이다. 아이가 분교를 연상시키는 흡사 마을 같은 작은 공동체 안에서 나름 소박하고 즐겁게 보호받으며, 초등생활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세 번째, 아이가 '원하는'은 고사하고 '웬만한' 학교 들어갈 성적이 안 됩니다. 라는 말을 들을 당시 꿈속에서지만, 굉징히 서글픈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쿨하지 못하다는 거 안다.
또한 이것은 쓰면서 드는 생각인데, 난 정말 아이를 진심으로 믿어주지 못한다. 내가 앞에서 끌고 뒤로 가서 밀고 하지 않으면, 뭐 하나 제대로 못할 것이라는 아이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태부족에서 나온 생각 아닐까?
성적으로 안 되는 웬만한 대학 들어가기 프로젝트의 트리키한 비책이 학급임원이라는 것은 또 어디서 나왔나 보니, 아이를 국제중에 넣는데 유리할까 해서, 6학년 2학기 전교회장 선거에 내보내서 당선시킨 엄마가 내 측근에 있었다. 마지막 담임 선생님이 힘써 주셨다는 부분도 그렇다. 얼마전 아이의 공개수업에 참여했다가 예민한 내 촉수가 받은 느낌이 있다. 선생님도 선생님이기 이전에 온정에 좌우되기 쉬운 사람인 것이었다. 고만고만한 1학년 녀석들 중에서 선생님이 호명하여 발표를 하거나 대답을 하는 아이들은 정해져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엄마가 몇번이라도 더 교실 청소하러 나왔던 분, 녹색 활동 교통지도 할 때, 결원이 생기면 달려가서 대신 지도를 했던 분의 자녀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나의 편견일까나...
아이 하나하나에 공명정대하게 대하셔야지 어찌 선생님이 그럴 수 있어 라고 말하고 싶은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럴 수 있겠다 라고도 생각해 보는 것이다. ㅎ 꿈 속에서 나는 다 큰 고3 아들 학급 봉사를 엄청 하고 있었나 보다.
꿈 한 편을 꿔도 이렇게 현실 기저에 깔린 맥락이 실타래로구나! 놀랍다....
신의진 교수의 이 책을 말하는데, 사설이 또 A4 한바닥이다. 신의진 저자의 책은 꽤나 읽었는데, 그때마다 잘 읽혔으나, 사실 그 책이 그 책 같다. 제목만으로도 변별이 안될 지경이다. 이번에 잡은 책도 내가 이책을 전에 읽지 않았던가 하는 데자뷰를 즐기면서(?) 읽었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과거에 읽었던 느낌 혹은 생각과 지금 읽으면서 느끼는 견해가 많이 다를 것 같다. 바꿔 말하면, 육아서는 서로 다른 저자의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을 종류를 다양하게 해서 읽는 것과, 좋은 육아서 한 권을 두고 틈틈이 거듭 읽어 보는 것과
본질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일례로 아이를 위하여 숙제를 대신해 주라, 라는 소쳅터가 그렇다.
전에 이 부분은 아이가 취학연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심히 지나갔다. 되려 저자와 반대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숙제는 아이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학습인데, 싫은 것도 참고 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 아니던가? 일테면 아이를 학교에 보낸 엄마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 아이 방학 숙제 엄마 숙제 경쟁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그게 아이에게 의미있는 일일까?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했었다. 웬걸.
큰아이 여름방학 개학 전날 한 시 넘어서 까지 아이 그림 일기 바탕색 칠하고 있었던 위인이 되버렸던 것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것 보다 넘치게 숙제로 무언가를 잘 제출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것도 제출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도와줬다고 하면, 단순히 '숙제를 대신해줬다'는 것과 별반 의미 차이가 없겠지만.....
겪고 나니, 같은 부분도 다르게 읽히는 것이다. 엄마가 숙제를 대신해줬던 아이는 최소한 하기 싫은 숙제로 인해 학습에 흥미를 잃는 결과를 막을 수 있었다는 말의 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