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아테네인들은 수준 높은 그리스 비극을 비롯하여 풍부한 문화생활을 누렸다. 그리고 아테네의 통치자인 페리클레스는 정치의 중심을 문화예술의 육성에 두었다. 페리클레스는 문화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국민이 없도록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는 공연을 관람한 이들이 관람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관람료를 받을 정도였다. 공연을 관람하느라 일하지 못한 것에 대한 벌충이었다. 아테네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아테네인들은 풍부한 문화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돈을 벌었다. 아테네는 그런 문화적인 힘을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우리는 한 해에 세금을 300조 원 내고 있습니다. 정말 천문학적인 금액을 국가에 바치고 있죠. 그런데 정작 국민들은 좋은 뮤지컬이나 미술작품 한번 구경하러 가기가 어렵습니다. 엄청난 물질적 부를 바치면서도 국민의 삶의 질은 그만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무엇인가 잘못된 거죠.”


품격 높은 문화생활을 저렴하게 누리는 방법!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얼어 죽을 문화생활이냐’는 말이 관용어처럼 쓰이는 세상이다. 하지만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남는 시간을 활용해서 문화생활을 누리는 최고의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고전을 읽는 것입니다. 저는 한 번에 책을 20, 30권씩 주문해서 읽습니다. 밤새워 가며 읽어요. 그런데 서른 권 중에 ‘정말 이 책 잘 만났다’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 한 권이라도 있으면 아주 행복한 독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전은 천 권의 책을 구입해도 만나기 어려운 책이에요. 천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고전 한 권을 읽으면 비용도 절약될뿐더러, 훨씬 더 위대한 효용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경제적인 선택인가요.”

 

수천만 원의 가치를 능가하는 고전. 이러한 고전 강독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이제는 많은 이들이 고전 읽기를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영상이나 가벼운 취미 서적 읽기에 길들어 있는 현대인에게 고전은 여전히 낯설다. 마음먹고 구입해도 조금 읽다가 책장의 진열품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조급함을 버리세요. 고전에 담긴 지혜를 인간이 알기까지 천 년의 세월이 걸렸어요. 천 년의 세월이 걸려서 확보한 정신적인 알갱이를 어떻게 하루에 다 소화해낼 수 있겠어요. 이 지혜의 정수를 욕심내지 말고 꾸준하게 매일 한 페이지씩만 읽어나가세요. 그렇게 6개월, 1년이 지나면 어느덧 고전 한 권을 다 통독하게 될 거예요. 고전 읽는 방법은 다른 게 없습니다. 고전은 머리가 좋아서 읽는 게 아니에요. 인내력, 즉 엉덩이가 좋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힘들어도 습관이 들면 어렵지 않아요.”

 

“경제학과를 나온 사람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지 않고,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지 않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컨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원서를 완독한 경제학도가 전 세계적으로 많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제가 한번 도전해봤습니다. 영어로 천 페이지가량 되는데, 절반 이후가 무척 쉽더군요. 앞의 대목이 산이면 중간 이후는 평지였어요. 그런데 산을 넘지 못하고 포기한 이가 많았던 거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유익한 역사 상식들이 풍부하게 담긴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정말 대단한 민족이었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문화적인 수준과 밀도가 주변국 중에서 가장 높았어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서당이 있었죠. 논어, 중용, 대학 같은 어려운 책들을 읽었고, 선비들은 한시로 대화를 나눴어요. 그리고 한글이라는 위대한 문자도 가지게 되었죠. 그 이후로 문맹률이 급격히 감소했어요.”

 

 

출처 : http://ch.yes24.com/Article/View/19289?pid=1304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아이러니 세계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오늘은 내가 좀 쌀쌀맞았나? 반납대 동료분이 '오늘 좀 차갑네요'라고 하셨다. 사정인즉슨, 어떤 연구원 분이 와서 책을 빌리다가 대뜸 핸드폰을 내밀면서 이게 지금 멈춘 거 같다고 좀 봐달라고 하셨다. 근데 내가 아무리 피처폰 유저지만 남의 폰이 왜 멈췄는지 알 게 무엇이며, 또 해결해줘야 할 의무는 무엇인가. 갑작스러워서 '이걸 제가 어떻게..' 라고 하니까 젊은 사람들 잘 만지지 않냐며 도리어 되물으심. 대출데스크는 아무거나 다 해주는 곳이 아닙니다ㅋㅋ 거기다 도서관에서 이미 크고 작은 분란 일으켜 예의주시하던 어떤 사람 와서 신분증 없이 대출 가능하냐고 물었다. 책 하루 이틀 빌려본 것도 아닌데 아마추어 같이 왜 이런 질문을..... 당연히 단칼에 안된다고 했다. 확실히 좀 예민했나 보다.

 

2.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분이 와서 요새 좋은 일 있냐고 물어보셨다. 피부가 좋아진 것 같다며. 어제 드라마 보고 오늘 8시간 넘게 푹 잤더니 피부가 좋아보이는 착시(!) 효과가 일어났나 보다. 아니면 잡티를 화장으로 가려서 그런 건지도.... 어제는 기초화장만 하고 알바 5시간을 앉아 있었는지 내 몰골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헉.

 

3. 늦은 아점으로 3종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 비주얼은 그냥 그랬는데 제법 맛있다. 편의점의 훌륭함을 가르는 척도를 '삼각김밥'으로 두고 있는 내게, 그동안 중도 매점은 형편없는 가게였는데 오늘 이 샌드위치로 조금 평가가 나아질 것 같다. 근데 진짜 밥 종류는 다 별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4쪽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대학은 놀라울 정도로 균질적이다. 일류건 이류건, 서울이건 지방이건, 인문학이건, 자연과학이건, 모든 대학, 모든 학문이 동일한 욕망과 비슷한 능력의 주체들을 생산해낸다. 이들은 전통적인 인텔리들과는 전혀 다른 집단이다. 기존의 인텔리들이 자본과 권력에 '봉사'해왔다면, 이들 신종 지식인들은 '자본, 권력, 지식'의 혼연일체를 구현한다.


33쪽

즉, 노동과 여가, 정치 활동과 가정생활 등 삶의 모든 것이 공부가 되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그것에 필요한 관습이나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을 모조리 학교에 맡겨" 버린다. 결정적으로, 그럼으로써 공부에 대한 모든 생각을 '학교식으로' 재편한다.


39쪽

또 하나는 취미나 레저로서의 공부가 있다. 이건 적당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라 패션이나 인테리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싫증이 나면 금방 걷어치우게 마련이고, 또 실제로 소일거리 이상의 큰 의미도 없다. 결국 자격증을 따기 위해 돌진하거나 아니면 하릴없이 지적 유행에 영합하거나ㅡ우리 시대의 평생교육이란 이 두 개의 잘못된 욕망을 교묘하게 부추김으로써 돈을 긁어모으는 제도적 장치인 셈이다.


49쪽

서로 다른 연령대의 에너지와 지혜를 주고받을 때 비로소 집합적 기운의 분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울릴 수 있는 건 단연코 공부밖에 없다.


55쪽

학교식 공부법은 애초부터 독서는 그저 개인적 취미나 교양의 영역이고, 공부는 그것과 달리 구체적이고 실용적 지식을 배우는 것이라는 이분법을 유포시켜왓다.


58쪽

그들에게 지식이란 책을 통해 탐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터넷에 떠다니는 검색 다발일 뿐이다. (중략) 실제로 지금 대학생들은 도무지 질문을 할 줄 모른다. (중략) 질문을 하려면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와 마주쳐야 하는 바, 독서를 하지 않고는 그런 마주침 자체가 불가능하다. 질문이 없으니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니 질문이 없고.


67쪽

코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100쪽

책이나 영화, 기타 다른 자료를 접한 다음, 그걸 재현해보라고 하면, 그 학생의 지적 수준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말하기를 훈련하면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식이란 근원적으로 서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요즘 학생들은 어떤 대상의 맥락을 짚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다. 대개 즉흥적이고 파편적인 단어와 구절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


102쪽

요컨대, 삶에 대한 통찰 혹은 애정이 있어야만 이야기를 엮는 능력이 생기고, 거꾸로 이야기의 맛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과 인생에 대한 깊은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중략) 즉, 책을 읽은 다음 독후감이나 감상문을 쓰게 하는 것보다 먼저 그것을 자기식 어법으로 재현해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113쪽

독서 없는 연애는 앙고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다. (중략) 사랑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가장 활발한 생명 작용에 해당한다. 그리고 생명은 안과 밖의 소통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삶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이 내 몸의 내공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사랑의 패턴은 삶의 패턴과 나란히 함께 간다. 사는 건 엉망인데, 사랑은 멋지게 되는 경우는 없다. 절대! 따라서 삶에 대한 통찰력이 없이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사랑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이상형을 만나도 소용없다. 왜? 사랑은 내 존재의 깊은 곳이 울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니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35쪽

돌이켜 보면, 내가 그 '살벌한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나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무조건 배우고 또 배웠다. (중략) 중요한 건 지식의 양이 아니다. 자신을 진정 비울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배움에 있어 가장 불리한 조건은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 혹은 이미 획득한 지식에 갇혀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성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양이 많건 적건 '비움'은 배움의 필수적 조건이다. 끊임없이 비울 수 있어야 더 큰 앎이 흘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139쪽

생각의 지도를 변경하고 삶의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글쓰기의 지평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참으로 놀랍게도 문체는 그 사람과 닮아 있다. 아니, 문체는 얼굴이요 몸이다. (중략) 그러므로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거꾸로, 문체를 바꾸고 싶으면 모름지기 표정을, 몸을, 삶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145쪽

학생들에게 장래 포부가 뭐냐고 물으면 기껏해야 의사, 변호사, 연예인 등 직업을 나열한다. 어떤 수준의 품성을 갖고 싶다거나, 삶의 어떤 의미를 깨우치겠다거나, 혹은 생사의 비밀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하는 식의 발상은 전혀 없다. (중략) 적어도 공부라고 하면 존재 자체가 특별한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153쪽

어떤 이유도, 최소한의 합리성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퍼부어대는 악성댓글을 볼 때마다 나는 늘 궁금했다. 저건 일종의 자해가 아닌가.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내뱉을 때 그 몸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 것인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지만, 그건 사실 고스란히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저런 식의 댓글을 달려면 최소한 하루의 반은 투자해야 할 텐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자기의 일상을 낭비할 수 있을까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로 간단한 건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누군가와 교신하고 싶은데, 세상에 자신을 알리고 싶은데, 그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고립감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외부에 대한 적개심을 낳는다. 이 적개심은 한 번 발동하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자신을 증식해간다. 이보다 더 심각한 자폐 증세가 있을까?


166쪽

에피쿠로스는 쾌락의 철학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에게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의 연습은 동일하다"고.


177쪽

공부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부모들이 앞장서서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들은 공부를 접었으면서 자식들한테만 공부를 강조하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자식들이 정말 공부를 통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부모도 자식과 함께 공부를 해야 한다. 오직 학벌을 위해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게 되면, 그 지식은 결코 지식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부모가 공부를 좋아하면, 자식들은 그걸 닮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열정이 일단 자식에게 전달되기만 하면, 설령 당장 성적이 처지고 대학에 못 가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스스로 공부의 길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193쪽

공부하면 이 다음에 훌륭한 사람이 되고, 뭔가를 얻게 될 거라고 말해선 안 된다. 공부하는 그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있다는 것 그것이 공부의 목적이자 이유여야 한다. 고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ㅡ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195쪽

요컨대, 공부란 특정한 시공간에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변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의 변이를 통해 세상의 질서와 배치를 바꾸는 것, 거기가 바로 공부가 혁명과 조우하는 지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쓰고 2012-04-02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이 책 읽고있는 도중에는 공부에대한 열정이 부글부글거렸는데, 일상으로 돌아오니 과제에 치이고 치이고 치이고 ㅠㅠ제대로 못하고 있을때 좌절하고ㅠㅠ
 

 

 

1. 대출화면도 확인하지 않고 자기가 이 책 대출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르면서 나가놓고는 삐삐삐 경보음 울리니까 도리어 화내는 대학원생님. 패기 甲이시네요. 맘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설명해주려고 했더니 발표 때문에 바쁘다며 빨리 처리해달라고 신경질까지. 요즘 본 최악의 진상임. 그때는 나갈 때 경보음이 안 울렸다고 했었나? 대출기록도 안 나와있는데 네 말을 어떻게 믿음? 경보음 울렸는데 무시하고 갔을 수도 있죠. 워낙 그런 인간들이 많으니까. 거참 성질 더러운 여자사람이구만. 암튼 거친 소리 들어서 기분이 꽁기꽁기했음. 아 인생사 뭐 있나요.

 

2. 나만 저런 진상 안 되면 되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