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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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비교적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덜하고 살아간다고 착각하던 때가 있었다. 여전히 그 착각은 계속되고 있다. 정도가 덜해졌을 뿐이지. 그런데 『불편해도 괜찮아』는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2.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과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그 책은 그나마, 당사자로서 불편과 고통을 자주 겪어봤던 경험이나 있지 이번엔 생전 느껴보지 못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성 소수자, 청소년, 장애인, 노동자, 양심적 벙역 거부자 등등. 나머지는 평소에도 약자로 생각했었는데 청소년은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아마 나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어른'이 많을 줄 미리 알고, 저자가 가장 첫 꼭지로 마련한 모양이다. 초중고 시절 임원을 자주 맡았고, 중학생 때는 학생회와 선도부를 겸하며 산 범생이였어서 그런지 청소년이 '억압받고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는 대상'이라고 생각지 않았었다. 불만은 있었지만 사소한 것이라고만 여겼다. 머리를 좀 더 기르고 싶은 마음, 염색해 보고 싶은 마음, 노래방과 오락실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 등등. 하지만 그게 내 인생을 심각하게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규격화된 틀 안에서 안정된 삶을 살았다. 각자의 개성과 자유가 더 중시되는 요즘 '깨인' 아이들은 청소년의 삶을 어른들이 멋대로 규정한 것이 '잘못'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불만의 목소리도 커지게 된 것이겠지. 어쩌면 나는 무지했기 때문에 평온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기 부모를 욕으로 대신해 부르고 부모를 '찌질하다'고 부모 앞에서 서슴없이 말하는 모습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꼰대 기질이 있는 건가.

 

3. 또한 교복을 맞춤해서 잘 입고 다니는 애들이라고 해서 스스로 사고할 힘이 없다거나, 부당한 것에 반항하지 않는 멍청한 아이는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좀 더 마음에 드는 스타일로 꾸미고 싶은 욕구가 있었으나, 절대적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학교 규칙을 잘 따르는 아이들을 전부 찌질이인 양 몰아가는 건 석연치 않다.

 

4. TV프로그램에 비해 영화를 찾는 빈도도 관심도 적고, 거기다 여간해선 외화를 보지 않는 독특한 습성 때문에 책장을 넘기면서 맞게 되는 영화들은 대부분 생소했다. 정말 잘 알려진 <빌리 엘리어트> 정도 되어야 아, 했을 정도니. 반면 드라마나 한국 영화에는 강했다. 왠지 모를 이질감과 불편함을 느꼈던 지점을 저자가 짚어주었을 땐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반가웠다. 비슷한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은 대개 편안함을 가져다 주지만 '같은 곳에서 불편'을 느끼니 어쩐지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애청했던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무참히 까였는데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 역시 그 부분이 극단적이라고 생각해 잘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 특히나 드라마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는 '데이트 폭력'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며, 한국 드라마의 괴이한 문법을 지적할 때는 내 속이 다 시원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은 어째서, 남주인공이 자기 감정을 이기지 못해 퍼붓는 키스의 폭력성을 감지하지 못한단 말인가. 어째서 그걸 사랑이란 이름으로 감싸안는가. 이건 작가들도 각성해야 할 부분이다.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보는 시청자도 문제고.

 

5. <300>을 장애인 영화로, <밀양>을 기독교 영화로, <빌리 엘리어트>를 노동자 영화로 바라보는 시선이 자못 신선했다. 아마 내가 이 영화를 모두 안 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미리 접했더라면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연애의 목적>이 발칙한 연애담이면서 교단에서의 권력관계나 '문란한' 여선생의 사회적 위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영화란 것은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6. 저자가 쓰면서 가장 불편했던 꼭지가 성 소수자 꼭지였던 듯했다. 격정적인 성관계 묘사나, 남남커플에 대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나 역시 그것들을 속 편히 보는 사람은 아니지만, 알음알음 습득한 사전지식 때문에 그리 생소하지는 않다. 그런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콘텐츠들로 '성 소수자'를 접하면, 지나치게 정형화된 이미지가 생기므로 주의해야 한다. 꽤 오랫동안 게이 커플이나 레즈비언 커플들이 이성처럼 각각 남녀역할을 한다고 믿어왔다. 그게 얼마나 편견이 깃든 사고였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7. 제노싸이드 부분은 진저리쳐지는 내용이라 글자 하나하나가 아프게 읽혔다. 대량학살이 상부에 있는 나쁜놈 한둘의 무시무시한 야망과 악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권력구조에서 취약한 평범한 다수의 개인들이 '윗사람의 명령'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데서 나온다는 것.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의 표현은 적확했다.

 

8. 책을 읽으며 영화, 드라마에 관심이 생긴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편견을 많이 누그러뜨리고 올바른 다른 지식으로 채울 수 있어 뿌듯했다. 이를테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단순히 병역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대체복무 인정을 바라고 있다는 점은 충격적이었다. 흔히 군대 한 번 빠져보겠다고 꼼수 부리는 이들로 낙인 찍힌 그들이 실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며 얻은 것이 수감생활과 전과자라는 낙인이라니.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없다. 자명한 일인데도 이렇듯 스스로 느껴보지 않고는 모른다. 모르면서 아는 척은 하지 말아야지. 비록 드러내지 않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9. 이 책을 읽고 나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만든 책은 믿을 만하다는 확신이 굳어졌다. 인권위가 꼭 모자란 짓만을 자행하는 곳은 아니다.

 

10.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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