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 젊은 세대를 위한 단 한권의 과학사 이야기
레슬리 앨런 호비츠 지음, 박영준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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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4월 21일은 과학(science)의 날이었다. 사물의 대한 이해를 규명하는 과학의 특성상 다른 학문과는 달리 우리의 생활과 많은 부분에서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따라서 과학은 개인의 주관성보다는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객관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 알고자하는 것은 사물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활 속에 과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은 곧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에 과학은 미래지향적인 학문이다.

 그러나 미래는 글자와는 다르게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에게는 창조적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진리의 주관성인가 아니면 객관성인가, 라는 경계선에서 그들은 신념과 고뇌를 반복하다가 끝내는 통찰력을 가지고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된다. 위대한 과학자란 바로 이러한 위대한 발견을 통해서 인류의 지적인 혁명을 가져왔다. 따라서 위대한 발견의 역사를 되새겨 보는 것은 단순한 과거로의 여행이 아니다. 그 보다는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유레카』라는 책은 제목만 보면 이러한 위대한 과학자들의 발견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위대한 발견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그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제공하는데 그 순간이 우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과학자들에게 있어 우연성이 말 그대로 우연성인지 아니면 우연성을 넘어선 우연성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데 그는 먼저 과학자들의 일상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과학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에 대한 문외한이라도 쉽게 읽을 수 있으며 그 내용 또한 딱딱하지 않고 물렁물렁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유쾌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대한 발견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과학자들은 위대한 발견에 앞서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그 순간이 전혀 뜻밖이라는 데 있다. 즉 우연스럽다는 것이다.

 뉴턴의 사과나 케큘러의 꿈에서 보듯 과학자들은 고민했던 방향에서 벗어나 아주 우연하게도 다른 방향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이는 저자 말대로 어느 날 갑자기 섬광처럼 왔기 때문에 더욱 우연스러울 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로 위대한 발견이 우연의 결과라고 한다면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인 호기심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 문제다. 즉 그들의 창조성을 너무 가볍게 하지는 않나, 혹 상처를 입히지 않을지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논리적인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저자는 이를 경계하며 과학사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거부한다. 이는 우연스러운 사실을 더욱 우연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신에 좀 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파스퇴르가 “행운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라고 말했음을 주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준비된 모든 사람에게 행운이 다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준비된 단 한사람을 선택하기 때문에 그들의 창조성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비록 위대한 발견에 있어 우연의 일치가 사실일지라도 타당성에 있어서는 다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위대한 과학자들의 우연한 발견을 경험했다. 이러한 우연성을 통해서 우리는 숨겨진 두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연성이 곧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과학자들의 창조성의 연장선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창조성은 고정된 방향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더욱 우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우연성 때문에 풀리지 않을 듯 한 과학의 수수께끼들이 풀린다는 것이다. 이는 약방에 감초와 같다. 만약 과학자들에게 우연성마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과학은 여전히 복잡할 것이다. 결국 과학자들에게 우연성은 사소한 것 같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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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고전인 삼국지를 통해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마음의 수양을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우리가 아는 청소년들이란 우리가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로써 누구나 마음 속에 희망과 고통을 맛보았으리라.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어디 쉬운가.  청소년들은 자나깨나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인하여 마음이 흐려진지 오래다.

 나는 그 혼란한 마음을 삼국지에서 영웅들이 말하는 혹은 난세를 지혜롭게 이겨내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고자 한다. 그들의 인생관은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 더욱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에 되살리는 것 또한 평범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다 마음을 다스리는 심리학을 보태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나마 유익한 즐거움을 주고 싶다. 나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  나는 누군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나 .

 삼국지형 인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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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을 점령하라 사계절 중학년문고 4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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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기가 어느새 8개월입니다. 아빠가 된 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참 빠릅니다. 방바닥에 온종일 누워있던 아기가 서서히 옹알이도 하고 이제는 혼자서 몸을 뒤집습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기어가려고 몸부림치는데 안쓰러운데도 무척이나 귀엽습니다. 그 모습에 그만 나도 모르게 웃고 마는데 더욱 재밌는 일은 아기가 덩달아 웃는 것입니다. 요즈음 나는 아기가 재롱부리는 맛에 산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닙니다. 또 하나 있다면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좋은 아빠…….

그런 면에서 황선미가 지은 <과수원을 점령하라>는 책은 여러모로 아주 유쾌했습니다. 사실 동화라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겉은 멀쩡해도 속이 썩은 과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맛있는 과일을 먹은 듯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아주 좋은 생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행복을 나뿐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읽어도 좋을 듯합니다. 특히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방바닥에서 꼼지락거리는 내 아기에게도 훗날 자라면 꼭 읽어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오랜 만에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지금의 세상이 사시사철 겨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사는 게 춥습니다. 봄이 와도 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설령 어렵게 피었다 하더라도 향기가 없어 더욱 을씨년스럽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껏 우리만 생각하며 살아온 탓입니다.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산을 헐어 버렸고 논밭에는 공장과 아파트를 세워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과수원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습니다. 언제 굴삭기가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과수원이 없어지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무엇보다도 하루아침에 땅을 잃어버린 동식물들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들이 떠난 빈자리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으르렁거립니다.

그래서 작가는 진실로 과수원을 점령하라고 말합니다. 과수원에서 마음 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점령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희망이라는 과일이 주렁주렁 열릴 것이라는 메시지도 매달고 있습니다. 도심 속에서 과수원은 매우 초라해 보일 수 있으며 큰 돈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들 떠나버린다면 과수원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수원의 주인이 사람만이라고 하는 것은 더더욱 잘못입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생명들이 자기 땅을 점령하면서 소란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이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살아가는 것들의 소리입니다. 점령한다고 해서 혹,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닌지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이 책에서 보듯 텃새인 까치와 철새인 찌르레기는 서로가 옳다고 다툼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서로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서로가 마음을 열면 모두가 괜찮습니다. 그들이 과수원을 점령하는 것이 꼭 먹이 때문만은 아닙니다. 과수원은 고향입니다. 삶의 터전입니다.

이 책을 다 읽는데 다른 어느 때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기 때문이었습니다. 밥을 달라고 울고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울고 같이 놀아달라고 울고…. 아기와 한바탕 전쟁을 하고 나면 온 몸이 나른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아기가 전혀 밉지 않았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오히려 힘이 또 생겨났습니다. 내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든 아기, 돌이켜 보면 그렇게 나는 아이에게 점령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좋은 아빠란 아기에게 점령당하는 즐거움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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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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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을 만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 책의 분량이 두꺼운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네 정치인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심스러워서 더욱 그랬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는 국민을 밭으로 삼을 뿐 국민에게 다가서는 정치 및 경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모두가 자기들 밥그릇에만 관심 있을 뿐이어서 마음이 허허로운 게 사실이었다. 어쩌면 우리시대에 정약용 같은 사람이 없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혹,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서학(西學)에 물들었다고 어느 누군가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정약용이 누구인가? 그는 성리학으로 피폐해진 사회 속에서 참다운 학문의 길을 찾은 위대한 사상가이며 개혁가이다. 그의 위대한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그의 핵심 키워드는 위인(爲仁)이었다. 기존의 학자들이 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체 사람은 모름지기 어질어야 한다고 혀만 내두를 뿐이다. 하지만 당장 하루 세끼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들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밥이 되지 않는 정치나 학문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래서 정약용은 위인을 말한다. 인은 그 자체로는 옳고 그름이 없는데 사람이 인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해 비록 논밭을 일구는 농부는 아니었지만 농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는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위인이란 바로 농부가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전근대적인 모순을 탈피하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는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의 선비정신은 오롯하다. 만약에 그가 죄인이라는 사슬에 얽매여 자포자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가 말한 대로 아침 이슬처럼 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며 못난 사람들을 깨우치고 있으니 절망 앞에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더구나 그가 남긴 500권에 이르는 저서들을 보더라도 세상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스스로 '세상을 구하는 책을 읽어라'고 당부했듯이 그의 책들은 그야말로 세상을 구하는 책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의 책들이 먼지 속에 쌓인 체 외면 당하고 있으니 우리가 다름 아닌 죄인들이다. 그런데도 역사에 대해 무관심한 우리들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E.H.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를 아는 것은 단순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즉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 정약용을 만나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제 그가 말하는 세상을 구하는 길을 배워야 한다. 가령,「기증가도설」(起重架圖設)을 요약해보면 성을 쌓는 돌을 어린아이 한 팔의 힘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는 기구를 만드는 일은 절대로 평범한 사고 방식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분명 특별하지만 단순히 근대적이라는 획일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 된다. 그 보다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현실 속에서 실용적이면서도 실리를 추구하고 있는 인간 정약용을 만나야 한다.

앞으로는 더 이상 말로만 하는 혹은, 책상에서 머리만 굴리는 껍데기 같은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 저자가 어렵게 유배지에서 정약용을 만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그의 학문을 세상에 알려서 부끄러운 현실을 벗어나려는 진실된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안다. 특히 요즈음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쓴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유쾌한 책이었으면 한다. 그래서 국민을 밭으로 생각하는 대역죄인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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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
최성현 지음, 이우만 그림 / 도솔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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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현이 지은『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를 읽으니 어릴 적 마음껏 뛰놀던 고향에 있는 뒷산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뒷산에는 밤나무도 있었고 칡도 있었고 그리고 토끼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구쟁이 같은 우리들의 웃음이 산속에서 메아리쳤다. 어쩌면 그때의 동심이란 산이 마냥 우리들의 놀이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서른 해를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가깝던 산은 멀어져 갔다. 사는데 바쁘다는 핑계 때문에 우리는 산이 아닌 빌딩 숲에서 살고 있다. 도시를 꽉 메우고 있는 빌딩은 나무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화려하며 그 높이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하지만 보기에는 좋은데 왠지 정(情)이 가지 않는다. 나무는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으며 우리에게 마음의 휴식을 주는데 반하여 빌딩은 언제나 무뚝뚝하다. 또 빌딩은 사람을 너무나 초라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사람이 산을 지배하더니 오늘날에는 빌딩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무섭게 하는 것이 따지고 보면 이 모두가 바보 같은 짓이다.

저자는 그래서 몸소 산에서 밥 먹고 산다. 세속적인 욕망을 벗어던지고 자연인이 된 그는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생활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어쩌다 한 번 쉬었다가는 산이 그에게는 집이며 밭이다. 그래서 나무 하나 풀 한포기라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사람만이 생명이다는 오만은 이곳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산에서는 너와 나의 경계가 없이 서로가 한 몸이다. 나라고 해서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너라고 해서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에 사는 생명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기 때문에 문제다. 이와는 달리『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 나오는 소년은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서로 대화하지 않는가? 또한 그 나무가 사람의 탐욕 때문에 잘려나간다고 하자 몸살을 앓는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가끔씩 나는 등산을 하지만 산에 있으면 마음이 포근하다. 삶이라는 굴레에서 멍든 가슴을 안고 산에 들어가면 산은 언제나 다정다감하다. 계곡의 흐르는 물에 얼굴을 씻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제 우리는 산의 아름다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모두가 더불어 살자고 한다. 그러자면 우리도 저자처럼 산(山)사람이 되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적게 먹고 적게 쓰면 되는데 아직도 우리는 산(訕)사람으로 살고 있다. 서로가 경쟁을 하다보니 산이 마구 훼손되어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도 모자라 저자가 산에서 숨죽여 책 읽는 것도 실례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산을 시끄럽게 하고 있으니 정말로 어리석은 셈이다. 산에 대한 예의는 곧 사람에 대한 예의다.

누군가 나에게 전기도 없고 사람도 드문 산속에서 생활하라고 한다면 한참을 망설일 것이다.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산(山)사람이 되는 것을 하루라도 게을리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벌거숭이 산처럼 흙먼지만 날릴 것이다. 바야흐로 산(訕)사람이 산(山)사람으로 되어야 이 세상은 희망이 있다. 만약에 이 세상이 나무 하나없이 사람으로만 우글거린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산을 사랑하자. 그래서 인지 요즘 식물도감을 보는 일이 재밌다. 더불어 머지않아 곤충도감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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