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을 만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 책의 분량이 두꺼운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네 정치인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심스러워서 더욱 그랬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는 국민을 밭으로 삼을 뿐 국민에게 다가서는 정치 및 경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모두가 자기들 밥그릇에만 관심 있을 뿐이어서 마음이 허허로운 게 사실이었다. 어쩌면 우리시대에 정약용 같은 사람이 없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혹,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서학(西學)에 물들었다고 어느 누군가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정약용이 누구인가? 그는 성리학으로 피폐해진 사회 속에서 참다운 학문의 길을 찾은 위대한 사상가이며 개혁가이다. 그의 위대한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그의 핵심 키워드는 위인(爲仁)이었다. 기존의 학자들이 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체 사람은 모름지기 어질어야 한다고 혀만 내두를 뿐이다. 하지만 당장 하루 세끼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들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밥이 되지 않는 정치나 학문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래서 정약용은 위인을 말한다. 인은 그 자체로는 옳고 그름이 없는데 사람이 인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해 비록 논밭을 일구는 농부는 아니었지만 농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는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위인이란 바로 농부가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전근대적인 모순을 탈피하려는 행동이었다.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는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의 선비정신은 오롯하다. 만약에 그가 죄인이라는 사슬에 얽매여 자포자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가 말한 대로 아침 이슬처럼 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며 못난 사람들을 깨우치고 있으니 절망 앞에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더구나 그가 남긴 500권에 이르는 저서들을 보더라도 세상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스스로 '세상을 구하는 책을 읽어라'고 당부했듯이 그의 책들은 그야말로 세상을 구하는 책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의 책들이 먼지 속에 쌓인 체 외면 당하고 있으니 우리가 다름 아닌 죄인들이다. 그런데도 역사에 대해 무관심한 우리들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E.H.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를 아는 것은 단순한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즉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 정약용을 만나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우리는 이제 그가 말하는 세상을 구하는 길을 배워야 한다. 가령,「기증가도설」(起重架圖設)을 요약해보면 성을 쌓는 돌을 어린아이 한 팔의 힘으로도 들어 올릴 수 있는 기구를 만드는 일은 절대로 평범한 사고 방식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분명 특별하지만 단순히 근대적이라는 획일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 된다. 그 보다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현실 속에서 실용적이면서도 실리를 추구하고 있는 인간 정약용을 만나야 한다.앞으로는 더 이상 말로만 하는 혹은, 책상에서 머리만 굴리는 껍데기 같은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 저자가 어렵게 유배지에서 정약용을 만난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그의 학문을 세상에 알려서 부끄러운 현실을 벗어나려는 진실된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안다. 특히 요즈음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쓴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유쾌한 책이었으면 한다. 그래서 국민을 밭으로 생각하는 대역죄인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