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을 점령하라 사계절 중학년문고 4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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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기가 어느새 8개월입니다. 아빠가 된 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참 빠릅니다. 방바닥에 온종일 누워있던 아기가 서서히 옹알이도 하고 이제는 혼자서 몸을 뒤집습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기어가려고 몸부림치는데 안쓰러운데도 무척이나 귀엽습니다. 그 모습에 그만 나도 모르게 웃고 마는데 더욱 재밌는 일은 아기가 덩달아 웃는 것입니다. 요즈음 나는 아기가 재롱부리는 맛에 산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닙니다. 또 하나 있다면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좋은 아빠…….

그런 면에서 황선미가 지은 <과수원을 점령하라>는 책은 여러모로 아주 유쾌했습니다. 사실 동화라고 해서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겉은 멀쩡해도 속이 썩은 과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맛있는 과일을 먹은 듯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아주 좋은 생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행복을 나뿐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읽어도 좋을 듯합니다. 특히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방바닥에서 꼼지락거리는 내 아기에게도 훗날 자라면 꼭 읽어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오랜 만에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지금의 세상이 사시사철 겨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사는 게 춥습니다. 봄이 와도 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설령 어렵게 피었다 하더라도 향기가 없어 더욱 을씨년스럽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껏 우리만 생각하며 살아온 탓입니다.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산을 헐어 버렸고 논밭에는 공장과 아파트를 세워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과수원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습니다. 언제 굴삭기가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과수원이 없어지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무엇보다도 하루아침에 땅을 잃어버린 동식물들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들이 떠난 빈자리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으르렁거립니다.

그래서 작가는 진실로 과수원을 점령하라고 말합니다. 과수원에서 마음 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점령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희망이라는 과일이 주렁주렁 열릴 것이라는 메시지도 매달고 있습니다. 도심 속에서 과수원은 매우 초라해 보일 수 있으며 큰 돈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들 떠나버린다면 과수원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수원의 주인이 사람만이라고 하는 것은 더더욱 잘못입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생명들이 자기 땅을 점령하면서 소란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이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살아가는 것들의 소리입니다. 점령한다고 해서 혹,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닌지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이 책에서 보듯 텃새인 까치와 철새인 찌르레기는 서로가 옳다고 다툼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서로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서로가 마음을 열면 모두가 괜찮습니다. 그들이 과수원을 점령하는 것이 꼭 먹이 때문만은 아닙니다. 과수원은 고향입니다. 삶의 터전입니다.

이 책을 다 읽는데 다른 어느 때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기 때문이었습니다. 밥을 달라고 울고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울고 같이 놀아달라고 울고…. 아기와 한바탕 전쟁을 하고 나면 온 몸이 나른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아기가 전혀 밉지 않았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오히려 힘이 또 생겨났습니다. 내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든 아기, 돌이켜 보면 그렇게 나는 아이에게 점령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좋은 아빠란 아기에게 점령당하는 즐거움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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