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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헤르타 뮐러의 소설은 ‘언어의 향연’이 안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조어법(造語法)을 빌리자면 ‘언어안개’라고 할 수 있다. 언어안개 속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말해 줄 사람은 없으리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불안한 길을 오직 ‘나’만이 언어들을 주섬주섬 챙겨야 한다. 작가에게 루마니아의 독재 상황은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 속에서 주고받은 말들은 간결하면서도 어둡게 부서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특한 은유(隱喩)라는 간절함이 삶의 메마름을 적셨다. 이번『마음짐승』도 마찬가지다. ‘마음’과 ‘짐승’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언어를 가지고 작가는 ‘마음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도 정작 그녀의 언어는 시적이며 은유적이라 우리는 남몰래 가슴에 새길 수밖에 없다.
『마음짐승』을 찬찬히 펼치면 루마니아 독채 치하에서 대학생 롤라의 죽음이 있고 죽음을 전후로 작중화자인 ‘나’와 에드가, 쿠르트, 게오르크라는 세 남자와의 얽히고설킨 굵직하게 아픈 시간들이 있다. 얼굴에 빈곤한 지방을 가졌던 롤라는 자신이 살던 메마른(굶주림) 고향을 떠나 도시로 왔다. 메마름이 모든 것을 먹어치웠지만 롤라는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곧 ‘내 사랑’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맹목적인 증오가 있었다. 맹목적인 증오란 구내식당에서 접시 위의 고기를 먹는데 숟가락만 먹는 것이다. 나이프와 포크를 쓸 수 있으면 그녀가 굳이 짐승처럼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짐승처럼 먹어야 했다.
만약 롤라가 ‘내 사랑’을 하고자 했다면 어땠을까? 자살했을까? 아마도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4년 뒤에 내 사랑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사랑은 한 밤중에 전차를 타는 남자와 달랐다. 내 사랑은 하얀 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남자다. 반면에 한 밤중에 전차를 타는 남자는 옷 속에 그림자만 들어 있다. 그러나 독재 치하에서 그녀의 맹목적인 증오는 더 이상 숨 쉴 구멍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빨간 수첩을 가진 당원에도 불구하고 당은 그녀를 경멸했고 국가적 수치로 여겼다. 이유인즉 그녀가 자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은 자살로 끝나지 않고 침묵을 남겼다. 그녀의 친구 에드가의 말대로 ‘침묵하면 불편했지만’ 오히려 침묵으로도 많은 것을 짓밟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침묵…그럴 것이다. 삶의 소중한 것을 침묵으로 무겁게 지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이 소설에서 보듯 ‘마음짐승’을 쉬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 소설을 읽으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짐승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먼저 ‘생쥐’일 수 있다. 털을 벗어놓고 무(無)로 사라지는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여자의 남편을 빼앗는다.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 노래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얻는다. 그녀가 그를 갖고자 하므로 그가 아닌, 그의 들판을. 그리고 그녀는 그를 소유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는 그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인간’일 수도 있다.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당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문득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나무인간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무인간처럼 지루한 삶을 버티며 살 수 있을까? 나무인간이 독재자들이 만든 하나의 허영이라고 한다면 사는 동안 우리는 흉측한 짐승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짐승과 달리 묘지를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묘지는 독재자들이 가장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나오는 청춘들은 묘지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자 한다. 단지 이 세상에서 ‘걷고, 먹고, 자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해서 묘지를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는 독재자의 오류보다도 더 가장 큰 오류였다. 이 소설에서 ‘나’는 어떤 죽음이든 자루와 같다고 했다. 그 자루에는 허리띠, 창문, 호두와 노끈이 들어 있다. 자루에 든 네 가지는 곧 맹목적인 눈물과 같다.
이중에서 호두와 관련된 테레자의 죽음은 남다르다. 사람들은 벼락출세한 자, 자기를 기만한 자, 양심불량자를 ‘자두 처먹은 놈’일고 불렀다. 또한 독재자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테레자의 겨드랑이 아래에 죽음의 덩어리인 호두가 있었다. ‘나’에게 그녀의 호두가 문제인 것은 ‘호두는 우리에게 대항했으며 모든 사랑에 대항해 자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든 걸 누설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우리의 우정을 갉아 먹었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증오인지 불분명했으나 사랑이 풀과 지푸라기처럼 섞여 자라나길 바랐다.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가장 어리석은 식물이 되고 말았다.
『마음짐승』을 쓴 헤르타 뮐러는「문학이 증인이 될 수 있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꽃잎과 나뭇잎을 먹었다. 그들과 내 혀가 친척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비슷해질 수 있도록. 왜냐하면 그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아니었다.’ 그들(식물)은 사랑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사랑을 모르는 것일까? 우리 사는 곳이 지옥이며 더욱 더 지옥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부조리한 권력의 생리 때문일까? 부패한 권력 앞에서 사랑은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좀 더 불안하게, 좀 더 하찮게… 작가에 따르면 하찮음은 상실이 이미 습관이 되었을 때의 정거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2010년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한 둘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욕망의 바벨탑이 허물어지고 세워지기를 계속하고 있다. 일찍이 역사학자인 부르크하르트는『세계사적 고찰』에서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어느 한 순간 영리해지기 보다는 영원히 지혜로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09년 노벨문학상 작가인 헤르타 뮐러를 통해 우리는 루마니아의 참다한 역사를 새로운 서사구조로 눈여겨보게 되었다. 작가와 루마니아의 역사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 차우셰스쿠 정권하에서 하루하루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작가는 생의 의지를 깨달았다. 작가가 말하는 생의 의지는『마음짐승』에서는 에밀 시오랑이 말한 ‘이유 없는 불안’이었다. 다시 말하면 독재하의 이유 없는 불안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실존의 물음부터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마음짐승』은 불행하다. 겉보기에는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내면에는 타살의 흔적들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자살, 타살보다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피부’다. 폴 발레리는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마음짐승』에서 빈곤한 지방을 가진 얼굴이며 이발사와 손톱가위는 피부를 억압한다. 그러보면 이 세상에서 자신의 피부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스럽게 일깨워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인간이 된다면 피부는 부서지기 쉬우며 감정의 호르몬은 더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