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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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관문(關門)을 마주하게 된다. 일반적인 선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문(門)을 통과해야만(關) 한다. 가령,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놓아야 하는지, 마는지 절박한 현실을 헤쳐 나가야만 한다. 만약에 손을 놓는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렇게 사는 것보다 죽음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안간힘으로 절벽에 매달려 있으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렇게 어렵사리 관문을 통과하게 되면 박수를 받게 될 것이다. 관문은 우리가 ‘큰 일’을 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뜬금없이 들리게 될 지도 모른다. 즉,

 

석상 화상이 말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어떻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겠는가!” 또 옛날 큰 스님은 말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록 어떤 경지에 들어간 것은 맞지만 아직 제대로 된 것은 아니다.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반드시 한 걸음 나아가야, 시방 세계가 자신의 전체 모습을 비로소 드러내게 될 것이다.”

『무문관』 46칙, ‘간두진보(竿頭進步)’

 

무문관. 글자 그대로 ‘문이 없는 관문’이다. 관문이 미로(迷路)하고 한다면 문이 없으니 관문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문이 없다고 한다면 굳이 문을 찾을 까닭이 없으니 쉽게 통과하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이 없는 관문을 통과하기가 용이한 것은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오히려 문이 있는 게 쉽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의 상식으로 한 번 무문관에 다가섰다가는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이 될 것이다. 무무관을 우리의 상식으로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유인즉, 무문관은 거대한 화두(話頭)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화두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스님들이다. 즉, 화두는 스님들이 부처가 되기 위한 불교적 관문이다.

 

강신주는『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에서 통찰력이 돋보이는 질문을 하고 있다. 저자는 대학 강단이 아닌 거리에서 동서양을 넘나드는 철학적 지식인이다. 이 책은 저자가 『무문관』을 새롭게 해석하여 엮은 것이다. 아마도 저자의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무문관』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한 평생을 업(業)으로 살았을 것이다.『무문관』은 1228년 무문 스님이 가장 압축적인 화두를 48개 선별해서 해설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무문관』이라는 화두집을 풀어 쓰며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러면 이 책 또한 『무문관』처럼 성불(成佛)하기 가르침일까?

 

흔히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조주 스님은 ‘개(犬)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당혹스러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 개가 중생이라고 하면 앞뒤가 맞지 않다. 그러나 개에게는 ‘업식성(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당혹감이 일체 사라지고 만다. 업식성은 일종의 ‘알라야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업식성이란 집착과 번뇌로 괴로워하는 평범한 중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면 업식성은 불성과 반대가 된다. 우리가 불성이 있다, 혹은 없다는 맥락에서 접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업식성을 고민해보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자유를 찾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부처가 되었다고 관문을 통과한 것은 아니다. 이제야말로 무문관을 통과해야 한다. 즉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여라!’라는 임제 스님의 사자후를 통과해야 한다. 임제 스님의 화두는 자기가 부처(싯다르타)가 되었다고 한다면 싯다르타의 페르소나에 불과하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싯다르타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 즉, 단독자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단독자를 남의 마음이라기보다는 나만의 마음, 단독적인 마음이라고 본다.

 

강신주가 풀어 쓴 이 책의 48개 화두는 과거를 지향하지 않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무문 스님이 말한 ‘무(無)’라는 글자를 뚫어야만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무문 스님이 말한 무는 부정을 위한 부정도 부정을 위한 긍정도 아니었다. 무는 곧 긍정을 위한 부정이었다. 이로 인해 무라는 말이 얼마나 거대한 화두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상식파괴자여서 그런 것은 아니라 사자의 위엄과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아울러 가진 단독자를 비로소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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